범람주의(汎濫注意)
하나.
파랑을 처음 만난 건 걔가 일곱, 내가 아홉이던 해였다. 아침부터 동네가 떠들썩한 게, 마을에 재밌는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얼른 대문 밖을 나갔다가 랑을 만났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붉은 앞볼, 뾰족한 귀에 짧은 단발. 늘어난 목에 때 낀 손톱. 멍청하고 사랑스러웠던 아이. 단번에 다가가 말을 붙였다. 이름이 뭐야, 물으니 네 입이 열렸다. 랑, 파랑. 가지런한 치아 사이 콕 숨은 송곳니가 잠깐 보였다 사라졌다. 성은? 한발 천천히 다가가 재차 물으니 그땐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입을 열어줬다. …단. 또 다. 다시 드러난 송곳니에 손가락 끝을 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무슨 마음이었을까. 일곱이 사랑을 알았을까. 그건 분명 다른 마음일 리 없는데. 뾰족한 송곳니에 찔려보고 싶다는 마음 같은 거 말야. 네 이름을 계속해서 되뇌던 나를 기억한다. 단파랑. 석 자를 연이어 뱉어보다가 랑, 랑. 끝 자만 붙여 불러보기도 했다. 혓바닥 끝이 입천장을 간지럽게 쓸었다가 대차게 윗니를 끊어먹는 발음이 좋았다. 입을 열고 혀만 움직이면 네 이름이 불려지는 것도. 그맘때의 나는 자주 입안 여린 볼살을 씹어먹을 때라. 너를 만난 이후론 수시로 네 이름을 허공에 불렀다. 그러면 찢어진 볼이 순식간에 아무는 것 같다고 느껴지곤 했다.
둘.
너는 어느 순간부터 내게 다시 말을 높였다. 언니, 내일 약속 있어요? 부드럽고 단정한 말씨. 그땐 그게 어쩐지 서운했었다. 십 년이 넘도록 보고 살았는데 갑자기 거리감이라도 느끼나 싶어서. 물론 머지않아 그런 마음은 빠르게 자취를 감췄다. 네 볼의 홍조가 내 앞에서만 열띠게 색을 올린다는 걸 눈치채서 그랬다. 네가 더 좋아진 건 당연했다. 너는 좋아하는 사람을 경애하고 싶다고 내게 말한 적 있었으니. 너와의 나이 차가 두 살이 난 덕에 네게 이름을 불려보진 못했지만, 또 그 덕에 네게 항상 언니일 수 있어 좋았다. 나를 부를 때마다 너는 틀림없이 작게나마 혀를 씹었을 테니까. 내가 입천장에 네 이름을 줄곧 올려뒀던 것처럼.
셋.
사강. 괜찮아. 사람을 죽이는 건 칼이야.
나는 네게 언니라고 불리는 걸 좋아했으니까. 네게 호명된 순간 대부분을 기억했으니까, 그때가 정말로 유일했을 것이다. 네가 나를 이름으로 불렀던 날이. 어쩌다 그 말을 들었더라. …아, 생각났다.
*
천구백이십팔 년 구 월 이십오 일. 파랑은 정말로 그날을 잊지 못했다. 몸에 칼을 대지 않으면 사정하지 못하는 변태성욕자 남진이 드디어 사고사하게 된 날이었니. 언제나처럼 진득하게 술에 취해 걷다가 미끌려 넘어졌다고. 때마침 넘어진 자리에 발 디딜 곳이 없어 언덕 아래로 떨어졌다고. 안타깝게도 그 자리에서 곧장 숨이 끊어졌다고. 제게 소식을 전하러 온 복덕방 김 씨 아재가 아이고 하는 곡소리로 말을 시작해 쉴 틈 없이 앓아대는 덕에 정신이 없었지만, 파랑은 의연하게 슬픈 연기를 잘 해냈다. 자신에 까다롭게 굴기론 알아주는 파랑이 스스로 대견하다 생각할 정도였으니, 객관적으로도 분명 지아비의 죽음에 슬퍼하는 계집 행세를 잘해 낸 게 분명했다. 어서 병원으로 가자는 김 씨 아재의 손을 뿌리치고 파랑은 곧장 강에게로 향했다. 가서 얼른 말해줄 셈이었다. 언니, 드디어요. 드디어, 드디어 그렇게 됐대요. 파랑은 제가 내보일 수 있는 가장 환한 미소를 지은 다음 강의 손을 붙잡고 그렇게 말할 심산이었다. 앞뒤 없이 잘라 먹는 활자들을 강이라면 분명 다 알아들을 테니, 덧붙일 말은 없지만 굳이 있다면. 행운에 행운이, 그 위로 더 거대한 행운이 올라탔었대요. 파랑은 강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축하해. 다행이야, 정말. 그리고 아마도 강에게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더라면 틀림없이 그렇게 이어질 이야기였다. 파랑이 예측하지 못한 건 딱 하나였다. 행운에는 절댓값이 있다는 것. 행운이 파도처럼 밀려오면 그 빈자리엔 결국 불행이 들어찬다는 것. 파랑과 강은 연인이고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사랑이고 결국 하나의 몸이라, 파랑이 행복하면 강은 불행에 빠진다는 것. 그건 이를테면 피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았다.
강의 집 앞마당으로, 강의 방으로, 강의 앞으로 천천히 다가가며 파랑은 결국 눈을 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땅은 꾸준하게 너무했다. 강의 집 대문 밖에서부터 느껴지던 이상한 기시감을 참고 건너온 길 끝이 언제나처럼 또 피바다였다. 강의 발치에 쓰러진 남자는 종로에서 유명한 호색한이었고, 조선 계집을 잡아 죽이기론 소문난 제국군이었다. 특히 여성들이 혼자 있는 시간대를 노려 집에 침입해 겁탈을 일삼기로 자자한 자였으니, 파랑은 강이 홀로 겪었을 일련의 사정을 단박에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파랑은 제국군의 가슴 언저리에 박힌 강의 단도를 한 번에 뽑아 들었다. 살덩이를 가르고 다시 세상 빛을 본 예리한 칼날의 끝이 검게 그을려 있었다. 찬기가 서린 다다미방 끝에서 뒹구는 촛대와 낙인이라도 되는 양 강의 목선에 그려진 글자 하나. 어깻죽지가 찢어진 저고리까지 함께 끌어안은 파랑은 그 낙인 위로 연이어 입 맞췄다. 粉 위로 쪽. 紅 위로 쪽. 女 위로 쪽. 사강, 괜찮아. 사람을 죽이는 건 칼이야. 이딴 건 아무것도 아니야. 천구백이십팔 년 구 월 이십오 일. 파랑은 정말로 그날을 잊지 못했다.
*
하나.
파랑은 바다가 있는 곳에서 왔다고 했다. 그리고 그 머나먼 곳에서 자기는 잠녀였다고 덧붙였다. 마을의 최연소 잠녀로 특히 사랑만 받았다고. 한아름 품에 전복을 따서 뭍으로 올라오면 아짐들이 그렇게 제 머리를 쓰담아주었다고. 물결 파에 물결 랑. 제 이름은 오로지 바다만을 위한다고. 그러니, 나는 바닷사람이고 파도 그 자체이기 때문에 조선 여자로는 살 필요도 없고 그렇게 살지도 않을 것이라고. 시집가던 날 새벽녘에 나눈 그 대화에는 어떤 의지가 깃들었을지언정, 파랑의 혼인을 물리게 하지는 못했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되뇌었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 우리를 해칠 수 있는 건 오로지 우리뿐이야. 동이 트고 닭이 울면 파랑은 혼례복을 입고 머리를 올릴 테지만, 우리는 알았다. 말에는 힘이 있다는 걸. 의심하지 않고 주저하지 않고 끊임없이 믿으면, 결국 우리는 우리로 살 수 있다는 걸. 서로의 손끝을 마주 잡고 서로의 이마에 제 이마를 대고, 입김이 닿는 거리에 의지를 불어넣고 중얼거린 그 말이 결국 우리를 구원해 줄 거라는 걸. 파랑은 믿었다. 나는 그런 너를 믿었다. 꼭, 꼭 믿었다. 믿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람들처럼.
둘.
파랑이 맞는 날이 늘어날수록 파랑을 찾는 일을 줄였다. 걔는 제 예쁜 모습만을 제게 보여주고 싶어 했으니까. 얼굴에 푸른 멍, 덜렁거리는 어깨, 붉어진 목덜미. 죽음을 위협받고 인간의 대접을 받지 못하고 사는 꼴을 들키고 싶어 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보지 못하면 숨통이 막히니 어쩔 수 없었다. 파랑의 집 뒷마당에 큰 돌 하나를 깔고 담 위에 턱을 올리기 시작한 건 파랑이 다리 병신이 됐다는 말을 전해 들은 뒤였다. 박 씨한테 시집갔다던 걔 다리를 절더라고. 아주 박살이 났는지 나뭇가지를 지팡이 삼아 달팽이처럼 걷더라고. 다들 그 꼴을 봤느냐고. 네 이야기는 한순간에 온마을의 찬거리가 됐고 사람들의 모난 입에서 잘게 쪼개졌다. 얼마나 살림을 못 살았으면 그러냐고, 알고 보니 애를 못 낳는 몸이었더라고. 사람들은 잘도 너를 조각냈다. 아주 질겅질겅. 질겅, 질겅. 우습고 우스운. 전당포 앞을 지나가던 여학생의 귀를 이로 잡아 뜯은 정 씨 이야기는 다들 쉬쉬하면서. 꺼끌거리는 담장 위에 치켜올린 턱을 간신히 받치고 네가 잠들었을 방을 아침 해가 뜨도록 들여다봤다. 한참을. 또 한참을. 그리곤 조용히 상상했다. 최연소 잠녀였다는 너를. 사랑도 많이 받았다던 너를. 바다면서 파도 그 자체로, 그냥 너로 살았다던 일곱의 단파랑을.
셋.
넌 왜 그렇게 참고 살아?
…그냥요. 버릇이에요.
거지 같은 걸 배웠네.
언니도 마찬가지잖아요.
…그러니까 거지 같다고.
바보.
……응. ばか.
*
방파제의 푸른 이끼, 풍림호의 따개비, 바람의 소금기, 모래의 조개 껍질, 파도의 윤슬. 그러니까, 갈쿠리와 호미와 망시리와 빗창과 태왁. 강은 그런 이야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계속 이야기했다. 바다가 얼마나 깊은지.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생물이 사는지. 그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험하게 벗겨진 옷가지를 주워 강의 팔에 다시 꿰 입히며, 얼굴에 튄 핏물을 닦아주며, 낙인 위로 연이어 입을 맞추며. 파랑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언니, 바다에는 수십이 넘는 조개가 있구요, 수백이 넘는 물고기가 살구요, 걔들은 다 이름이 있어요. 제가 제일 좋아했던 건 해파리인데요. 걔는 심장이 없이도 살아요. 바다 밑에서 아가미도, 폐도 없이 숨 쉬면서 오래오래 살아요. 아무리 쉴 틈 없이 바다 이야기를 해도 강은 미동이 없었지만 파랑은 멈추지 않았다. 믿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람들의 특성이란 그런 거였다. 멈추지 않는 것. 끝없이 소망하는 것. 그리하여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는 한이 있더래도, 할 수 있는 거라도 하는 것.
넋을 잃은 강을 옆구리에 붙들고 밖으로 나갔다. 언니, 바다에 갈까요. 강은 답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파랑의 손길에 몸을 맡겼고, 파랑은 강의 대답을 듣지 못했지만 여전히 강의 손을 놓지 않은 채였다. 바람은 영글었고 하늘은 쪽빛이었고 땅은 단단했으니, 자연스럽게 그날이 떠올랐다. 팔려 가던 날 아침. 손을 붙잡고 이마를 맞댄 채 숨결을 나눴던 시간. 닭이 세 번을 연속으로 울어대니 손을 놓지 않을 수가 없던 순간. 그때 받았던 비녀. 고운 장미 그림이 새겨진 옥비녀를 손안에 쥐여주며 강이 했던 말. 결혼하는 거야, 너랑 나랑. 강이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버틸 수 없었을 거라고. 파랑은 언제고 강에게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또 언제든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살면서 한 번도 다정하지 않았던 땅에서 나고 자라면서 그 한마디 정도는 그래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이렇게 될 줄도 모르고. 얄미워 죽겠어. 파랑은 속으로 말을 삼켰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다 소용없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그냥 강이 좋아하는 이야기를 했다. 바다에 가요. 그곳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내가 보여줄게요. 단도를 뽑아내느라 피로 젖은 소매 끝이 무거웠다. 탁빛이 서린 강의 눈이 금방이라도 잠길까 무서웠다. 정처를 정해두지 않은 발걸음이 둔했다. 그래도, 파랑은 걸었다. 강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것만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
하나.
언니. 해파리가 되세요. 심장 따위 뭍에 버려두고 죽은 채로 바다를 유영하세요.
둘.
바보.
셋.
응, 맞아요. ばか.
/
여러분 안녕하세요! 진짜 밝게 인사하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너어무 미안해서 어떤 말을 덧붙여야 할 지 고민이 됩니다...
원래 마감 날보다 아주 늦고 늦은 오늘에서야 글을 올리네요.
인생의 풍파는 한 순간에, 또 한 번에 온다는 말이 갑자기 떠오르네요...하...
그래도 이런 말을 웃으면서 하고 있는 중이니, 너무 걱정은 말아요!
다행스럽게도 좋은 변호사를 찾았고 금방은 아니더라도 사기 당한 대부분의 금액을 돌려받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그게 며칠 전인데, 사실 그 전까진 계속 마무리를 못 짖고 있었거든요?
근데 누가 괜찮다고 이제 해결될 것 같다고 해주는 순간부터!!! 결말이 마구!!! 떠오르는 것 아닙니까!!!
사람이 참 어렵고도 쉬워요, 그쵸.
그런 의미에서 소설 이야기 좀만 더 해보자면요.
이번엔 진짜 아름다운 소설을 쓰고 싶었는데 또 파멸로 끝을 맺었네요...
사강X단파랑 두 인물을 빌드하면서 쌓아뒀던 소재랑 특성들이 있었는데 소설 안에 다 담지 못해서 정말 아쉬워요.
이번에 고집했던 건 사실 분위기 형성!! 미장센 범벅!!! 이라서... 소소한 이야기들은 다 빼버렸네요.
기회가 된다면 그래서 요 아이들이 어떻게 됐는지도 쓸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맘때의 경성과 종로에선 동반자살을 하는 동성애자 커플이 많았다고 해요.
서로의 몸에 붉은 실을 휘감고 백화점 옥상에서, 절벽 위에서 많이들 뛰어 내렸다고.
근데 저는 두 사람이 죽게 내버려두진 않을 생각이라, 파랑의 고향에 정착한 이야기를 써보고 싶네요.
물론 제국군을 죽였으니 계속해서 쫓기는 삶이겠지만,
사람 죽이고 도망다니는 경성의 레즈비언 커플이라면 좀 멋있지 않을까요.
주절대니 너무 이야기가 길어졌네요.
암튼 걱정해주신 여러분께 정말정말 고마웠다고, 그리고 기다려줘서 너무너무 감사했다고, 덕분에 지금 완전완전 괜찮다고!
말하고 싶어요. 다들 아주아주 사랑합니다!
마무리로 강파랑 커플 이야기 빌드하면서 써뒀던 짧은 문단이 있는데, 소설 속에서 쓰긴 애매해서 냅둔 문장 밑에 놓고 갈게용.
그냥 재미로 읽어주심 좋을 것 같아요! 그럼 다들 안녕!! 사랑해!!!
여름을 예찬하세요. 바다를 찬미하면 더욱 좋습니다. 그것이야말로 빼앗긴 땅에선 태어난 여성들의 생업이 아니겠습니까. 여자를 사랑하는 여자입니다. 우리와 같은 치들을 부디 신여성이라 불러주세요.
첫댓글 쉽지 않은 조건 속에서도 끝까지 올려준 민서 아주 장하다 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