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장 보물선의 구슬
황약사는 쪽배를 타고 응취봉 밑에 이르렀다. 사방을 둘러보니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백사장에는 쓰레기들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고 나루터에는 배 한 척도 보이지 않았다.
황약사는 쪽배를 나루터의 말뚝에 매어 놓고 봉우리 아래 판잣집 옆에서 필소해가 말하던 그 밧줄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밧줄은 보이지 않았다. 전번에 여기에 왔을 때는 바로 이 절벽 밑에서 밧줄을 발견했고 그 밧줄을 타고 기어오르다가 독수리를 만나 그만 평강부까지 채여 가지 않았던가.
그런데 참으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암만 찾아도 밧줄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으며 어쩌면 장소를 잘못 찾아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생소했다.
'필소해란 놈이 거짓말을 했을까? 아니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이곳엔 밧줄 사다리가 있었어. 그런데 그게 어디로 사라진거지?'
황약사는 틀림없이 이 봉우리 위에 구두신취 학영감이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아무리 궁리해 봐도 봉우리 위에 올라갈 수 있는 묘안이 떠오르질 않았다.
응취봉은 태호 일흔두 개의 봉우리 중에서 제일 높고 아름다운 봉우리였다. 봉우리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면 태호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파도가 출렁이는 태호.라 옹기종기 솟아 있는 봉우리들은 마치 산수화마냥 수려했다.
이 응취봉 꼭대기에는 집채만한 큰 바위가 있고 이 바위 앞에는 빗물받이용 돌절구통이 열두 개나 줄지어 놓여 있다. 큰 바위 옆에는 커다란 동굴이 하나 둘려 있는데 동굴 안에 들어서면 돌계단이 속으로 뻗어 있다. 이 돌계단을 따라 들어가면 커다란 석실이 나타난다. 이 동굴 앞에 한 아가씨가 앉아 있는데 이 아가씨가 바로 아형이었다.
아형은 자기가 어떻게 여기까지 붙잡혀 왔는지 잘 몰랐다. 그날 학 영감은 횐 천으로 그녀를 칭칭 휘감으며 말했다.
"임자는 이제 하늘 위에 올라가게 됐어. 거기 올라가기만 하면 위로는 신선들과 친구가 되어 한담을 할 수 있고 아래로는 속세와 인연을 끊어 누구도 임자를 찾을 수 없게 되지."
말을 마친 학 영감은 제풀에 좋아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윽고 큰 독수리 두 마리가 날아오더니 아형의 몸을 동여맨 밧줄을 억센 발톱으로 확 틀어잡았다. 독수리들은 날개를 퍼득이면서 하늘로 솟구치더니 태호 위를 한참 동안 날다가 응취봉 위에 내려섰다.
응취봉은 다른 산봉우리들과는 달랐다. 산꼭대기는 거대한 바위들로 이루어졌는데 마치 누가 일부러 깎아 놓기라도 한 듯 평평했다.
아형은 자기가 태호방 총타주 학 영감에게 끌려온 이상 어느 방 안에 갇혀서 학 영감으로부터 끊임없는 시달림을 받을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이렇게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산꼭대기 위에 내던져지자 오히려 더 불안했다.
아형은 물이 담겨져 있는 열두 개의 돌절구통을 발견했다. 그녀는 대뜸 그것이 빗물을 받기 위한 것임을 알아챘다.
이때 독수리들이 칼날 같은 부리로 아형의 몸을 휘감은 천을 쭉쭉 째기 시작했다.
행동거지가 자유로워진 아형은 재빨리 산봉우리의 가장자리께로 걸어가 보았다. 봉우리 아래로 통하는 길을 찾아 호심장으로 돌아 가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정작 낭떠러지에 이르러 사방을 살펴보니 어디나 칼로 깎은 듯한 천길 절벽이어서 설사 날개가 돋혔다 해도 날아 내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얼빠진 사람처럼 그 자리에 못박인 듯 굳어 버렸다. 아형은 너무나 기가 질려 눈앞
이 캄캄해졌다. 그녀는 울고 또 울었다. 실컷 울고 난 그녀는 비로소 마음을 가다듬고 주위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빗물을 받으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게 분명한 돌절구통 열두 개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순간 그녀는 암담하던 마음이 환하게 밝아옴을 느꼈다.
'여긴 꼭 사람이 살거야. 만일 사람이 살지 않는다면 이런 물건이 있을 리가 없어 .
이렇게 생각한 아형은 다시 한 번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보아도 움푹 패인 커다란 바위 외에는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도 그녀는 낙심하지 않고 계속 돌아다니다가 큰 바위 옆에 뚫린 동굴 입구를 발견하게 되었다. 아형은 다가가서 굴 속에 대고 큰소리로 외쳤다.
"여기 누가 있나요?"
그러나 그녀의 음성은 웅웅거리며 메아리가 되어 돌아올 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형은 몸을 움츠리고 동굴 속으로 한걸음 한걸음 걸어 들어갔다. 한참 들어가니 석실이 나타났다. 석실 복판에는 사람 하나가 앉아 있었는데 다름아닌 태호방의 총타주 학 영감이었다.
"어서 오게."
아형은 가까스로 정신을 다잡았다. 결국은 그를 여기서 만나고야 마는구나 싶었다.
학 영감은 아형에게 다가서며 말을 이었다.
"낭잔 날 맘에 안 들어하지? 하지만 이 응취봉 꼭대기에 사람이라고는 낭자와 나 둘 뿐이야. 나와 성혼하지 않고서는 여기서 내려 갈 생각은 하지도 말아. 내 말 알아듣겠나?"
아형은 눈살이 꼿꼿해지면서 쌀쌀하게 대꾸했다.
"천만에요. 당신 같은 늙은이한테 시집을 가느니 차라리 돌절구통한테 가겠어요."
학 영감은 화를 누르며 아무렇지 않은 듯 대꾸했다.
"난 임자를 내 사람으로 만들자는 생각뿐이지 임자를 괴롭히자는 생각은 없어. 이 응취봉 위에서는 내 말을 따르는 길밖엔 없어. 내 말을 거역하면 고초만 당하게 될거야. 결국엔 내 말을 들을 걸 가지고 왜 이렇게 생고집을 부리는 거야!"
아형은 여전히 쌀쌀하게 대답했다.
"모든 건 내 마음에 달렸어요. 당신이 암만 무어라 해도 내 맘은 변하지 않아요."
아형과 학 영감은 봉우리 꼭대기에서 함께 하루를 보냈다. 아형에게 있어서 이 하루는 마치 10년은 되는 듯 길고 지리했다. 때때로 독수리 두 마리가 물고기나 산토끼를 잡아다가 아형과 학 영감 앞에 던져 주를 했다. 학 영감은 서슴없이 펄떡거리는 물고기를 쥐고는 발기발기 찢어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살점들을 입 안에 넣고 쩝쩝 씹어 댔다.
"참 맛있구나, 참 맛있어!"
학 영감은 먹으면서 연신 중얼거리더니 물고기 등살을 쭉 찢어서 아형에게도 던져 주었다.
굶은 야수처럼 날생선을 씹어 먹는 학 영감을 이따금 건너다보면서 아형은 말없이 앉아 있었다.
"임자도 요기를 하지 그래?"
학영감이 한마디 던졌다. 아형은 아무런 반응도 나타내지 않았다.
두 마디 톡톡 쏘던 아형이 별안간 침묵을 지키자 학 영감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슬금슬금 아형에게로 다가앉았다. 아형은 냉큼 몸을 돌려 그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그래도 그가 계속해서 다가들자 아형은 아예 돌절구통 옆으로 가 피해 앉았다.
학 영감은 냉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형이, 이 돌절구통 열두 개에 물이 가득 차 있으니 첫번째 것은 세수와 양치질에 쓰고, 두 번째 것은 손 씻는 데 쓰고, 세 번째 것은 목욕하는 데 쓰라구. 그렇게 한 달을 써도 다 쓰진 못할 거야."
아형이 돌절구통을 보며 물었다.
"이 돌절구통 열두 개의 물을 다 쓰면 이 산꼭대기에서 내려갈 수 있나요?"
그녀의 물음에 학 영감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정말로 천진한 생각이로구나. 이 돌절구통 열두 개에 담겨 있는 물을 다 쓰기도 전에 하늘에선 또 비가 내릴 테고 그러면 물이 가득 채워질 텐데, 다 쓰긴 어느 세월에 다 쓴단 말이냐? 여기서 내려가자면 나하고 성혼을 해야만 한다지 않았느냐?"
아형은 학 영감을 쳐다보면서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그와 더 얘기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형이 잠자코 있자 학영감이 계속 말을 이었다.
"아형이, 임자가 나처럼 이 독수리들을 타고 다닐 수만 있다면 나도 임자가 여기서 내려가는 걸 말리지 않겠어. 이 독수리들이 임자를 등에 태우려 하겠는지, 한 번 타볼 생각이 있나?"
학영감이 휘파람을 휘익 불자 하늘에서 빙빙 날던 독수리 두 마리가 급히 봉우리를 향해 날아오더니 몇 바퀴 선회하다가 두 사람 곁에 내려앉았다.
"어떤가? 이 독수리들이 임자가 등에 타도록 가만히 있으면 난 임잘 여기서 떠나게 하겠어."
학 영감은 이렇게 말하더니 독수리의 등에 올라앉아 두 손으로 독수리의 목을 부둥켜안았다. 그가 또 휘파람을 휘익 불자 독수리는 날개를 퍼덕이면서 날기 시작했다. 독수리는 봉우리 아래까지 내리꽂히기도 하고 하늘 높이 치솟기도 하면서 자유롭게 날다가 다시 응취봉 꼭대기에 내려섰다.
독수리 등에서 내린 학영감이 다시 말했다.
"원한다면 독수리를 타는 법을 알려 주겠다. 그럼 여기서 내려갈 수 있지 않느냐?"
아형은 학 영감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웅취봉 아래를 굽어보았다. 콩알만큼 작게 보이는 집 몇 채와 백사장, 그리고 태호의 푸른 물이 내려다보였다.
'그래, 네 놈이 끝까지 나를 괴롭힌다면 이곳에서 뛰어내리면 그만이다.'
아형은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
학 영감은 갑자기 애원하듯 간절하게 말했다.
"아형이, 난 솔직히 아형일 괴롭힐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어. 하지만 아형이 이처럼 끝까지 매정하게 굴면 내 참을성에도 한도가 있는 거야."
"영감님이 무슨 말씀을 하셔도 난 영감님과 성혼할 생각이 없어요. 난 정말로 싫어요. 그러니 더는 저를 괴롭히지 마세요. 계속 이렇게 괴롭히신다면 난 여기서 뛰어내리고 말겠어요."
아형이 이렇게 잘라 말하자 학 영감으로서도 할말이 없었다. 그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정 뜻이 그렇다면 나도 말리진 않겠어. 하지만 잘 생각해 보라구."
그는 더는 말하지 않고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독수리 등에 올라 앉아 봉우리 아래로 내려갔다.
한편 병묘는 태호의 작은 나무숲에 있는 커다란 거북이 껍질 안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사불과 악귀가 소인과 맺은 약속에 따라 병묘는 거북이 껍질 안에서 열흘 동안 앉아 있어야 했다. 하지만 아흐레가 지나자 그는 더는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몸에 밴 독을 전부 몰아내자면 내력을 모아 두 손바닥을 한 쌍의 겁독주에 대고 있어야 하는데 자꾸만 아형의 모습이 떠올라 정신을
집중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병묘의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소인이 말했다.
"자네가 잡생각을 하면서 정신을 모으지 못하면 독은 혈맥 안에 가라앉게 되어 다시는 그 독을 몰아내지 못하게 되네, 만일 독이 그냥 피 속에 남아 있으면 술을 한 번 먹거나 몸에 약간의 상처만 나도 독이 퍼져 목숨이 위태로워져."
그의 말에 병묘가 물었다.
"그럼 선생께서 보시기에 제가 몇 살까지 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자네를 보니 이승에서는 60년의 수명을 가지고 있네. 하지만 피 속에 독이 있으면 자네가 아무리 이승과 인연이 깊다고 해도 쉰을 넘기기 어려울 거야."
소인의 말에 병묘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나 같은 신세에 쉰 살만 살면 족합니다. 더 살아 봤자 무슨 좋은 일이 있겠습니까?"
병묘는 이렇게 말하면서 몸을 날려 원수구퇴에서 튀어나와 나무 위에 앉은 소인을 향해 읍을 했다.
"목숨을 살려 주신 선생의 은혜에 깊이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한데 지금 저의 한 친구가 사경에 처해 있으므로 계속 지체하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저의 처지를 이해해 주시리라 믿고 이쯤에서 작별 인사를 올리고자 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병묘는 인사를 마치고는 곧장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몇 발자국이나 걸었을까. 갑자기 뒤에서 휙 소리가 나면서 사등(蛇藤)이 병묘의 목에 척 감겨들었다. 그 힘이 어찌나 대단한지 병묘의 몸뚱이는 가볍게 쉽게 올라 다시금 소인 앞으로 끌려갔다.
소인은 여전히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말했다.
"자네가 가겠다니 말리지는 않겠네. 하지만 세상 인심이란 험한 줄 알아야 돼, 자네는 이렇게 일편단심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그 여자가 자넬 어떻게 대할지는 생각해 봤나?"
소인의 이 말에 병묘는 잠깐 침묵을 지키며 속으로 생각했다.
'아형인 날 친혈육처럼 대했었다. 한 번도 입 밖에 내어 말한 적은 없지만 마음속엔 나를 두고 있었을 거야. 난 호심장에서 마치 아형과 한 식구처럼 지냈었어. 아형은 애사에 날 도왔고 일일이 날 보살펴 주었어. 내가 가서 아형일 구하지 않으면 누가 그녀를 구한단 말인가.'
병묘는 다시금 결연히 말했다.
"선생님, 전 꼭 가야 합니다."
"그럼 좋아!"
소인은 말을 끝내자마자 손을 한 번 힘껏 펼쳤다. 그러자 네 개의 나뭇가지가 날아와 병묘의 몸에 꽂혔다.
병묘는 깜짝 놀라 제 몸을 살펴보았다. 두 가지는 몸에 꽂혔고 다른 두 가지는 어깨에 꽂혔는데 수소음심경맥(手少陰心經脈)의 극천혈과 수태양장경맥(手太煬腸經脈)의 양로혈(養老穴)에 꽂혔다. 병묘는 자신이 죽는 것은 두렵지 않았으나 소인이 자기를 가지 못하게 막는 것 같아 불안했다. 그러나 소인은 전혀 뜻밖의 말을 했다.
"자네 피 속에 남아 있던 독은 이미 몰아냈네. 하지만 수소음심경맥과 수태양장경맥에 있는 독은 아직 채 몰아내지 못했어. 자네 몸에 내가 나뭇가지 네 개를 꽂아 놓은 데는 다른 목적은 없네. 다만 나뭇가지가 꽂힌 자리는 네 대혈이라는 것만 기억해 두게, 자넨 적에게 손을 쓰기 전에는 절대 그 나뭇가지들을 뽑아서는 안 되지만 손을 쓸 때에는 반드시 뽑아 내야 하네. 그래야만 자네 뜻
대로 몸을 움직일 수 있을 게야. 아무튼 최선을 다해 친구를 구하도록 하게나."
병묘는 소인의 말을 명심했다. 그는 소인을 향해 읍을 하면서 감사의 뜻을 표하고는 다시 몸을 돌렸다.
그는 곧장 호숫가로 향했다. 그러나 호숫가에 다다른 그는 낙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막상 이곳을 떠나려 하니 배 한 척도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호수 주변을 빙빙 맴돌았다.
"배가 없어 곤란하게 됐군. 내가 도와줄까?"
그의 귓전에 소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한창 조바심이 나 있던 병묘는 반가운 마음에 큰소리로 말했다.
"부탁입니다. 친구를 구하는 게 무척 시급한 일이니 선생께서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자넨 복이 있는 사람이야. 친구를 위하는 그 마음이 갸륵해서 나도 도와줄 마음이 생기네. 원수구퇴에 다시 돌아가서 분수주자(分水珠子) 한 쌍을 가져다 쓰도록 하게 다 쓴 뒤엔 반드시 돌려 주어야 해."
병묘는 몹시 기뻐하며 거듭 인사를 했다. 원수구퇴에 꼬박 아흐레나 앉아 있었는지라 그는 그 구슬의 위력을 다소나마 알고 있었다.
겁독주 옆에 붙은 한 쌍의 구슬은 야명주였다. 조용한 밤이면 이 진주들은 반짝반짝 빛을 뿌렸는데, 그 때문에 태호에 사는 물새와 모기, 파리 같은 벌레들은 그 불빛을 찾아 수없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이런 새들과 벌레들은 멀리서 날아다닐 뿐 감히 다가들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이 독을 쫓는 신령스러운 구슬과 다섯 번째 줄에 있는 사악한 것을 쫓는 구슬은 모두 보배들이었기 때문이다.
병묘는 사악한 것을 쫓는 구사주(驅邪珠) 옆에 붙은 구슬 한 쌍은 두 눈을 보호해 주고 정기를 돌게 해준다는 것을 알았다. 원수구퇴에 앉아서 독을 뽑는 동안에 그는 이러한 구슬들의 기묘한 용도를 알게 되었다. 야광주로는 어둠을 밝힐 수 있고, 구독주(驅毒珠)로는 독을 물리칠 수 있고, 벽화주로는 불을 끌 수 있고, 구사주로는 사악한 무리가 범접하지 못하게 막을 수 있고, 명목주로는
눈을 보호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이 밖에도 양심주는 염통을 보호하고, 정안주는 사람의 얼굴을 늙지 않게 할 수 있었다. 모주라는 것은 더욱 신기했다. 매일 동틀 무렵이면 이 모주 아래에는 반짝반짝 빛을 뿌리는 태호의 진주들이 가득 쌓이곤 했다. 태호의 갯바닥에서 살던 진주조개들이 밤이면 이 모주의 빛을 보고 원수구퇴에까지 기어와서 자기 뱃속에 품고 있던 진주를 살며
시 토해 놓고 물러가곤 했던 것이다. 만일 누군가 매일 새벽마다 이런 진주들을 거두어 간다면 며칠 새에 백만장자가 될 것이다.
하지만 병묘는 소인이 말한 분수주자는 어디에 쓰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는 원수구퇴 옆에 다가가서 네 번째 줄을 더듬어 볼록하게 돋아난 구슬 한 쌍을 만져 냈다.
소인은 병묘를 등지고 앉은 채 말했다.
"자네가 두 손바닥을 그 거북이 껍질에 붙이고 손바닥 복판에 있는 노궁혈(勞宮穴)로 내력을 내보내어 바짝 힘을 주면 거북이 껍질은 저절로 깨지면서 진주를 토해낼 걸세. 그러나 십분 조심해야 돼. 진주가 굴러 나오는 속도가 번개처럼 빠르니깐. 자네가 만일 붙잡지 못하면 태호에 굴러 들어가 찾을래야 찾을 수 없게 되니 말이야."
병묘는 소인의 말대로 두 손바닥을 거북이 껍질에 붙이고 온몸의 내력을 기울였다. 이윽고 병묘의 손바닥이 뜨거워지더니 '팡!' 하는 소리와 함께 진주 한 쌍이 번개같이 튀어나왔다. 병묘는 잽싸게 손을 뻗쳐 그것을 받아 쥐었다.
병묘가 소인에게 읍을 하자 소인이 다시금 다짐을 했다.
"자네가 나의 이 진주 한 쌍을 가져가면 이 원수구퇴는 물 속에 들어가기 어려워. 그러니 다 쓰고는 꼭 나한테 돌려줘야 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내 손에 죽는 줄만 알아."
"제가 죽지만 않으면 꼭 돌려드리겠습니다."
병묘는 굳게 맹세를 하고는 호숫가로 달려갔다.
병묘는 소인의 말대로 그 진주 한 쌍을 주머니에 넣고는 곧장 호수를 향해 걸어 나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의 몸이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호숫물이 양쪽으로 확확 갈라지는 게 아닌가. 병묘는 마치 땅 위를 걷기라도 하듯이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 두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아 철판봉 밑에 이르렀다.
호수 기슭에 올라서서 보니 그의 몸에는 물 한 방을 묻어 있지 않았다. 기슭에 오른 그는 철관봉의 철판교를 나는 듯이 건너서 사방을 두리번거려 보았다.
그는 다시 태호를 바라보다가 문득 큰 배 한 척이 파도를 가르며 달려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사불과 악귀의 은호 보선이었다. 그는 그들과 마주치고 싶지 않아 잽싸게 철판봉의 바위 뒤에 몸을 숨겼다.
태호 보선은 이내 호수 기슭에 닿아 멈춰 섰다. 병묘는 숨을 죽이고 배의 동태를 살폈다.
뱃머리에 사람 하나가 서 있었는데 그는 다름아닌 악귀였다. 악귀는 닻을 들어올려 서는 힘껏 물 속에 내던졌다. 닻은 모래바닥에 깊숙이 박혀 들어갔고 닻줄은 삽시에 팽팽해졌다. 닻을 내린 악귀는 고개를 돌려 선실을 향해 뭐라고 고함을 지르더니 닻줄을 타고 호수 기슭에 미끄러져 내렸다.
악귀가 기슭에 내려서는 순간 몸매가 호리호리한 처녀가 뱃머리에 나타났다. 처녀는 뱃머리에 선 채 철판봉 위를 올려다보았다. 처녀의 눈길이 병묘가 몸을 숨긴 바위 쪽으로 들려지자 병묘의 가슴은 후드득 뛰기 시작했다. 그녀가 자기를 발견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처녀는 무심히 흩날리는 머리칼을 쓰다듬더니 천천히 배에서 내려왔다.
뭍에 내려선 그녀는 악귀와 함께 큰 바위 위로 기어 올라갔다. 둘은 각기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악귀는 왼쪽에, 처녀는 오른쪽에 앉았다. 처녀는 널찍한 소매 안에서 무슨 물건을 꺼내더니 앞에 던졌다. 그것은 모두 네 개로 악귀가 손을 한 번 칠 때마다 불꽃이 튕기면서 방금 던진 네 개의 물건에 차례로 불이 붙었다.
대낮이어서 그 불빛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으나 괴상야릇한 느낌을 주었다. 물건들에 전부 불이 붙자 둘은 각자 팔짱을 지르고는 꼼짝도 하지 않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제야 병묘는 이 두 사람이 자기를 찾으러 온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들의 거동을 보아서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아니나다를까 조금 후에 호수의 수면 위로 검은 점이 나타났다. 그것은 빠른 속도로 두 사람이 앉아 있는 곳을 향해 이동해 왔는데 뜻밖에도 독수리였다. 독수리는 잠깐 사이에 철판봉을 몇 번 맴돌더니 백사장에 내려앉았다. 독수리가 날개를 접기가 무섭게 독수리 등에서 웬 사람 하나가 성급하게 뛰어내리더니 곧장 사불과 악귀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바로 학 영감이었다.
악귀는 학 영감을 쏘아보면 서 물었다.
"학 영감, 자네의 태호방이 우리를 이렇게 푸대접할 수가 있나? 그래 자넨 사불님과 악귀님께 공물을 바쳐야 한다는 걸 다 까먹었단 말인가?"
학 영감은 연신 허리를 굽신거리며 대꾸했다.
"저희들이 두 분을 잊을 리가 있겠습니까? 불행하게도 저희 태호방은 풍비박산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고 상한데다가 태반이 흩어져 버렸습지요. 이런 판에도 사불님께서는 여전히 공물을 바치라고만 하시고 악귀님께선 치성을 드리라고만 하시니 정말 야속하십니다. 두 분께서는 이렇게 각박하게 구실 것이 아니라 의당 저를 도와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사불은 대뜸 눈살이 꼿꼿해졌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건가? 자네의 태호방은 이곳 항주부에서 제일 가는 무리가 아니던가? 그런 태호방이 공물을 바치지 않으면 누가 이 사불과 악귀에게 공물을 바친단 말인가?"
학 영감은 별안간 앙천대소를 했다. 그 소리는 비분에 넘쳐 있었다.
"형편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사불님과 악귀 님께서는 저를 도와 태호방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이렇게만 해주시면 전 태호방에서 모아 둔 재물을 몽땅 공물로 드리겠습니다. 저를 도와 동해 도화도에서 건너온 황약사와 도박에 미친 병묘와 미화란 놈만 없애 주십시오. 그럼 전 두 분의 분부라면 무슨 일이든 따르겠습니다."
병묘는 비로소 사불과 악귀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원래 두 연놈은 태호방의 도적떼와는 한패 였구나. 그러기에 태호 보선이 아무데나 마음놓고 다니고 태호방과 모든 강호의 인물들을 두려워하지 않았지. 사불과 악귀는 도적 무리들 속에서는 위풍이 당당하구나. 그런데 학영감이 황약사와 나를 없애 달라는데 사불이 과연 그를 도울까? '
사불이 대답했다.
"학 영감, 걱정 말게. 나와 악귀가 그만한 일도 해내지 못하고서야 어떻게 이 태호에서 발을 붙일 수 있겠나? 그 황약사란 놈은 어디 있나? 먼저 그 놈부터 요절낼 테야. 그 다음엔 미화란 놈을 잡아죽이고 마지막으로 그 병묘란 놈을 찾아보자구. 그럼 되겠나?"
학 영감은 아주 마음이 흡족했다. 원래 그의 수하에는 태호방 방주 필소해와 일흔두 봉의 두령들이 있었는데 불과 며칠 사이에 연달아 죽고, 상하고, 도망치고 하여 네댓밖에 남지 않았다. 이처럼 풍비박산이 난 태호방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는 게 어찌 간단한 일이겠는가? 그런 와중에 사불과 악귀가 도와주겠다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태호방이 거의 망할 지경에 이른 것은 죄다 한 아가씨 때문입니다. 황약사란 놈이 우리 태호방을 한사코 쳐 없애려 한 것도 역시 그 아가씨 때문이었지요. 두 분께서 저와 함께 응취봉 꼭대기에 올라가서 기다리시면 그 놈이 꼭 찾아올 것입니다."
사불과 악귀는 말없이 서로 눈길을 주고받더니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세 사람은 곧장 그곳을 떠나 배를 타고 응취봉으로 향했다. 배는 기우뚱거리면서 태호 일흔두 봉우리 중에서 제일 높은 응취봉을 향하여 미끄러지듯 달렸다.
이를 본 병묘는 그들의 뒤를 밟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네 놈들이 나를 죽여 버리겠다구? 그게 그리 쉽지는 않을걸? 네 놈들이 황약사란 사람을 죽이겠다구 장담을 하는데 어디 구경이나 해보자. 나로선 아형이 거기에 있다니 그녀를 구해 내는 게 무엇보다도 급선무야.'
오래지 않아 배를 쫓아간 병묘는 응취봉 기슭에 닿았다. 배가 호숫가에 멎자 셋은 일제히 기슭에 내려섰다. 독수리 두 마리도 배에서 날아 내려 학 영감의 뒤를 쫓았다. 병묘는 냉큼 빈 태호 보선에 뛰어올라 몸을 숨기고 셋이 하는 양을 지켜 보았다.
학 영감은 독수리의 몸뚱이를 낮추게 하고는 독수리 등에 뛰어 올라탔다가 다시 뛰어내리더니 악귀더러 자기처럼 독수리 등에 올라타라고 눈짓했다. 악귀는 호기심이 동해 얼른 올라타고는 좋아라고 웃어댔다. 학 영감은 독수리의 대가리를 슬슬 어루만져 주면서 날으라고 했다. 이윽고 독수리는 날개를 퍼덕이면서 하늘로 날아올랐다. 독수리 두 마리는 이렇게 번갈아 세 사람을 태우고 응취
봉을 향해 날아올랐다.
셋이 모두 응취봉 꼭대기에 오르자 병모는 몹시 조급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응취봉에 오를 방도가 떠오르질 않았던 것이다. 생각다 못한 그는 선실로 들어가 배 안의 물건들을 들춰 보기 시작했다. 보물들을 넣은 궤짝을 들춘다가 그는 비수 두 자루를 발견했다. 그는 대뜸 이 비수들이 보통 비수가 아님을 알아보았다.
그는 양손에 비수 한 자루씩을 쥐고 두 손에 동시에 힘을 주어 칼날을 서로 찍어 보았다. '쨍!'하는 야무진 소리가 나면서 비수 날들이 진동했지만 날이 부러지기는커녕 이 하나 빠지지 않았다. 병묘는 과연 훌륭한 비수라고 생각하면서 기쁨을 금치 못했다. 병묘는 수중에 아무런 병장기도 지니지 않은 터라 이 비수 두 자루를 품속에 찌르고 응취봉을 향해 출발했다.
응취봉에 다다른 그는 비수를 번갈아 암벽에 박으면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응취봉 꼭대기에서 아형은 돌절구통 앞에 앉아 물고기를 씻고 있었다. 그러나 반나절이나 씻어도 여전히 비린내가 코를 찔러 먹을 수가 없었다.
이때였다. 학 영감과 사불 그리고 악귀가 아형 앞에 나타났다. 아형은 악귀를 보고 소스라쳐 놀랐다. 그녀는 학영감이 자기의 시중을 들게 하려고 악귀를 붙잡아 온 줄로만 생각했다. 이윽고 사불이 나타나자 아형은 속으로 생각했다.
'아주 곱게 생긴 아가씬데? 저 죽일 놈의 늙다리가 어디서 이런 고운 처녀를 붙잡아 왔을까? 저 아가씨를 마누라로 삼을 작정인가 보지? '
사불이 아형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아가씨가 태호 호심장에 사는 아형 낭잔가?"
아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불이 아형의 머리칼과 얼굴을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모두들 아가씨를 선녀같이 아름답다고들 하던데 어찌하여 이처럼 봉두난발이 되고 얼굴도 물고기 껍질처럼 되었지? 아가씨가 도대체 뭐 볼 게 있다구 항주부의 세 공자가 아가씨한테 미쳐 날뛰었다는 게야? 아가씬 누굴 좋아하나? 누구한테 시집갈 생각이야? 내가 도와줄 테니 솔직히 털어놔 봐, "
아형은 그녀를 바라보며 심지가 바르지 않은 여자라고 생각되어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사불이 계속 말을 이었다.
"치음 공자 그 사람은 이미 죽었어. 낭자가 미화를 좋아한다면 난 그 사람을 죽이지 않고 두 사람이 성혼할 수 있도록 도와줄 테야. 그런데 그 병모란 사람을 좋아한다면 난 그 사람을 죽여 버리겠어. 그래, 아가씨와 그 사람이 함께 죽게 하겠어. 하지만 아가씨가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럴 필요가 없지. 난 그 사람의 생명의 은인이야. 그 사람이 독에 중독된 걸 내가 구해 주었지."
아형은 사불의 말이 믿기질 않았다. 암만 봐도 이 여인한테 그런 재주가 있을 성싶지 않았다.
사불은 아형이 자기 말을 믿는 것 같지 않자 장력을 써서 돌절구를 들이쳤다. 돌절구는 당장 요란한 소리를 내며 두 쪽으로 갈라졌다. 돌절구의 물이 쏟아지자 두 마리의 물고기가 땅바닥에서 고통스레 퍼덕였다.
아형은 말없이 허리를 굽혀 물고기를 집어 옆에 놓인 다른 돌절구에 넣어 주었다. 물고기들이 물 속에서 헤엄치는 것을 보자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피어 올랐다. 그 미소는 누구라도 반하게 만들 것 같은 참으로 사랑스러운 것이었다.
그녀를 바라보던 사불은 내심 얄미운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학 영감을 향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당신의 독수리를 시켜 저 년을 쫓아 버리게 해요. 당장요!"
학 영감은 사불의 말에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그녀의 미움을 사고 싶지 않아 시키는 대로 했다. 학 영감의 명령에 독수리는 무섭게 아형에게로 달려들었다. 아형은 잠깐 사이에 독수리에 쪼여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아형의 처절한 비명 소리가 태호에 메아리쳤다.
사불과 악귀는 손뼉을 치며 재미있다는 듯 웃어댔다.
"사불은 사(邪)하고 악귀는 악(惡)하다만 사악한 짓을 많이 하는 건 어쨌든 좋은 일은 아니야."
갑자기 낯선 사내의 음성이 들려 왔다.
세 사람은 깜짝 놀라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벼랑께로 꺼먼 그림자 하나가 천천히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