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 운현궁 –
초례청 차린 마당 한 우물 마시면서
왜 그리 손톱 세워 원수가 되었을까?
나라가 승냥이 떼에 먹히는 줄 모르고
배달9208/개천5909/단기4344/서기2011/09/24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덧붙임)
운현궁의 가을
고종황제 -
한때 무능하고 나약한
임금으로 알고 있었던 그가
열강의 야욕에 맞서
처절히 항거한 수 많은 증거가
발굴되고 있다.
선조 -
우리는 대부분
겁많고 무능하고 우유부단한
임금으로 알고 있지만
그의 높은 경륜과
적절한 인재 기용이 있었기에
전대미문의 병란을
극복하고 조선을 지킬 수 있었슴이 증명되고 있다.
민비 -
여우사냥으로 희생된 그녀가
시아버지인 대원이 대감에
맞서지 말고 合心했다면
대한제국이 일본제국보다도 훨씬
빨리 근대화되고 자주국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포악한 승냥이들이 조선에 몰려들었을지라도
일국의 국모를 감히
건드릴 수는 없지 않았겠느냐고
곰곰 생각해 본다.
어쨌든
왕권을 지키려 맞서 싸웠던 민비는
아이러니하게도 정치적 적수인
시아버지 대원군에 의해 간택되어
한동안 한 울타리에서 기거하면서
왕가의 윤리를 학습받고
혼례식을 치뤘던 운현궁.
봄, 가을 두 번에 걸쳐
그 혼례 재현 행사가
해마다 펼쳐진다 한다.
아내 동행
노락당, 노안당, 이로당 ....
차례로 둘러보다.
운현궁의 봄이 아닌 가을이었다.
배달9208/개천5909/단기4344/서기2011/09/24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 운현궁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 있는 사적 257호인 운현궁(雲峴宮)은
파란만장한 기울어져 가는 조선말기에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고종의 아버지 흥선 대원군 이하응이 살았던 역사적인 곳이다.
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작은 사가였던 이곳은
고종이 왕위에 오르고 난 이후 사가를 증축하여 제법 규모가 컸었는데
일부가 덕성여자대학교 건물로 쓰이고 있고 전 동양방송에도 일부가 팔려나가
지금은 사랑채인 노안당(老安堂), 안채인 이노당(二老堂), 노락당(老樂堂)
등만 남아 있어 규모가 많이 축소되어 있는 것이 안타깝다.
내정(內庭)에는 아직도 고종이 오르던 노송이 있어
정2품 금관자(金貫子)를 달아주고 대부송이라 불리우고 있다.
경복궁이 중건되기 전 창덕궁에 거처가 있던 시기에는
고종의 전용 출입문인 경근문(敬勤門)과
대원군의 전용 출입문인 공근문(恭勤門)이 있었고
아재당(我在堂) 등이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철거되고 다른 건물들이 들어서 있고 규모가 작아
운현궁을 찾는데도 쉽지가 않게 되어있는데 나중에 예산이 허용하면
주변 건물을 매입하여 모두 복원해서 역사의 현장을 살려야 하고
장기적으로 서울의 관광명소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고종이 나이가 어려 섭정(1863~1874년)의 지위에 오른 이후에는
기울어져 가는 조선의 운명을 되돌리기 위해 고뇌의 삶을 살았던 풍운아 대원군!
세계 제국주의 열강이 동양을 침탈해오던(西勢東占) 조선 말기,
쇄국정책으로 나라의 발전을 크게 지체시켰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힘이 빠져가는 청나라 상황를 면밀히 분석하며
비록 약소국이었지만 청나라와 대등한 관계를 가지려는 치열한 자주정신,
북경의 자금성에 80%가 넘는 우람한(?) 규모로 중건한 경복궁 공사
(당시 주변 속국들은 자금성 규모의 70%가 넘는 궁궐건축은
불허되었다 한다.)등을 추진하였으며
안동김씨를 비롯한 몇몇 권세가문의 세도정치에 맞서
당시 전국적으로 서원에서 공부하던 양반들에 의한 폐해가 심각하자
대부분의 서원을 철폐한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정책을 추진한 한 대원군은
안동김씨의 세도속에서 불운한 젊은시절을 보냈다.
1933년에 김동인님이 발표한 '운현궁의 봄'이라는 장편소설은
흥선 대원군의 일생과 조선 말기의 복잡한 내외정세와
당시 세도정치를 하던 안동김씨를 비롯한 권세가의 폐해를 적시하면서
민족의식을 가지고 씌여졌다.
여기에는 지배계급이었던 양반들과 벼슬아치들의 억압과
착취로 고통받는 민중에 대한 연민과 그럼에도
그들을 도울 방법이 없음에 대한 좌절,
밑바닥 인생을 살았던 경험과 장부의 기개가 살아있던
이하응이 호령을 하면 누구도 도전하지 못했던 대장부 흥선대원군의 기개 등
그의 인간적인 모습들을 담백한 문장으로 구체적으로 잘 표현하였는데
최근 10년을 전후한 대원군이나 고종 또는 명성왕후를 소재로 한 TV드라마나 영화는
이 '운현궁의 봄'에서 많은 영감을 얻거나 작품내용을 참고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 본다.
1820년에 태어나 12세때 어머니를 여의고
17세때엔 아버지 남연군마저 여의고 종친의 양자로 들어간 이하응은
돈도 없고 권세도 없는 왕의 종친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울뿐이었는지를 뼈져리게 깨달으면서
허허롭게 세상을 관조하였고
추사 김정희선생으로 부터 배운 난(蘭)과 그림을 팔아
생계를 연명하였으나 너무 많은 같은 그림을 팔아
시중에 가격이 떨어져 춥고 배고푼 생활을 하면서 젊은 날을 견디어 냈다.
그러면서도 그의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양반사회의 문제점을 낱낱이 깨닫게 되고
안동김씨의 주목을 피하기 위해 주변의 건달 또는 파락호들과 어울려 놀다가
양반들에게 따귀를 맞거나 음식을 얻으러 갔다가
그 집 하인에게 얻어 맞은 사건도 발생하게 되는 등
그의 젊은 날은 파란만장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 젊은 날의 다양한 경험 덕분에 왕의 섭정자리에 올라서는
세상을 낮은 곳에서 부터 높은 곳까지 통찰하면서
당시 시대정신에 맞는 정채글 펼쳐 시민들의 박수를 받은 정치가이자 혁명가였다.
하지만 고종의 성장과 자기가 직접 간택하여 믿었던 명성왕후와 명성왕후 외척인 민씨일가,
청나라에 빌붙는 사대주의에 발목이 잡힌 조정 대신들의 면종복배로 인해 퇴위하게 되었고
1898년 운현궁의 별장인 아소당에서 78세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였으나
아직도 풍운아 대원군의 이름은 인기리에 인구에 회자되고 있으니...
김동인의 운현궁의 봄 줄거리
이 작품은 전 25장으로 된 장편 소설이다.
1장에서는 흥선 대원군 이하응이 집권하기 전으로
이하응의 권력 지향과 영웅성이 긍정적으로 나타나며,
2장에서는 명종 때부터 철종에 이르는 300년 간의 조선조 정치사가 요약되었고,
3장에서는 해가 바뀐 신유년의 사건으로 전개된다.
4장에서는 흥선이 조 대비와의 만남으로 인해 장래의 발판을 마련하고 있고,
5장은 김병기로부터의 수모,
6장은 민숭호의의 인연 구축,
7장은 영의정 김좌근의 애첩 양씨의 권력 행패,
8장은 동궁 책립에 대한 조 대비의 의향 타진,
9장은 김병국 일파로부터의 망신과 조롱,
10장은 양씨로 인한 백성들의 원성에 대해 기술되어 있다.
12장은 김문 일파의 음모로 터진 이하전 역모 사건,
13장은 흥선과 심복들이 투전에서 포교와의 금전거래,
14∼20장까지는 현 제도의 모순과 위정자들의 타락상이 표출되며,
25장에서는 계해년이 지나 갑자년 정월에
26대 조선 국왕이 즉위하는 것으로 대미를 장식한다.
<등장 인물의 성격>
▷이하응 - 흥선 대원군. 야인으로 추락하여 갖은 천대을 견디어 대권을 잡는 인물.
▷조성하 - 조 대비의 조카. 승후관.
▷김병국 - 안동 김씨 세도 김문근의 일족으로서 이하응에게 호의적인 인물.
<핵심 사항>
▷시점 :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
▷배경 : 조선 왕조 말기 철종 등극 직후부터 대원군이 정권을 잡기까지의 격변기.
▷주제 : 격변기의 민족 현실과 민족 정신.
<감상의 길잡이>
<1>
<운현궁의 봄>은 1933년 4월 26일에서 다음해 2월 15일까지
<조선일보>에 연재한 역사소설이다.
이 작품의 특징은, '상승적 구조'를 보인다는 것과 남의 천대에 대한 분노,
즉 인격적 모독에 대한 반발의 원리 등이 역사적 도정의 과정을 통하여 응축되어 있는 데 있다.
또한 대원군이란 인물을 긍정하는 데서 오는 역사적인 사실 인식도 주목할 만하다.
이 작품을 통해서 우리는 일제 치하의 상황을 민족의 역사 의식으로 발전시킴으로써
민족적 울분을 부추기고 공동화(共同化)된 의식을 되찾으려고 노력한 작가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일제 하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현실성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작가는 역사 소설을 선택했으며,
이는 민족적인 의식을 심화시켰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의를 지니는 작품이다.
다시 말해, 1930년대의 역사적 소재를 통한 민족의식 함양과
국민 문학파의 소설적 성과를 보여 주는 작품이라 하겠다.
특히, 이 작품은 <붉은 산>, <태형> 등과 함께 그의 민족주의적 작가 의식을 보여 주고 있다.
<2>
김동인의 대표작인 운현궁의 봄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쇄국정책의 상징적 인물이며
정치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유일한 대원군인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안동김씨의 감시권 안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건달 노릇을 하던 시절부터
조대비와 연합해서 자신의 둘째아들(나중에 고종)을 왕위에 올리고
자신은 섭정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사실적(내가 보기엔 사실적이 아닌 사실 같다.)으로 쓴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는 한국사에서 대표적인 권력쟁탈전
(태종 이방원 : 다른 왕자들,
세조 : 단종(의 추종세력들 장희빈(을 위시한 그녀의 추종세력들) :
인현왕후(을 추종하는 세력들), 광해군(을 위시한 추종세력들:
영창대군(을 위시한 그의 추종세력들), 등)의 하나인 흥선대원군 :
안동김씨에 대해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또다른 권력 쟁탈전인 흥선대원군 :
민비의 시작인 흥선대원군과 민비의 첫 만남
(이때에는 민비가 아닌 민치록의 딸)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온갖 사회적 부조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타락한 흥선을 통해
안동김씨의 왕족에 대한 심한 견제을 통해 당시의 외척과 왕족의 갈등을 보여준다.·
소설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짧은 에피소드와
세간 청지기와의 대화를 통해서 당시에 성행하던 매관매직과 관료들의 부패를 고발하고
있을 뿐만아니라 나아가 당쟁의 폐해와 외척의 세도 정치의 극심한 폐해를 보여준다.·
흥선대원군의 오른팔로 나오는 조성하와
한 늙은 선비의 대화를 통해서 당시의 서원의 부패를 보여준다.·
사이사이에 등장하는 고위관리들의 행차 모습과 흥선대원군이 조성하에게 대전통편을
보여주는 대목에서 조선시대의 허례허식과 부패의 원인을 보여준다.·
김좌근의 첩 양씨의 시반선에서 던지는 밥을 줍기 위해 몰려드는 군중에 대한 이야기와
민란 이야기를 통해 그 당시의 피폐한 민중 생활을 보여준다.
또한 소설의 등장인물들과 에피소드를 통해 우리가 잘 모르는 조선시대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흥선대원군이 골패점을 치는 장면을 통해
당시에는 화투가 아닌 골패가 유행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세조시대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서 조선전기에는 무인들이 득세하였으나
후기에는 문인들이 득세하였음을 보여준다.·
흥선대원군이 둘째 아들을 교육시키는 장면을 통해서
당시 궁궐에서 궁안에서만 쓰이는 궁화라는 특수어가 존재하였음을 보여준다.·
안동김씨와 김대비의 결탁과 흥선대원군과 조대비의 결탁을 통해서
왕의 후계자 결정권리를 왕 뿐만아니라 대비가 쥘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흥선대원군의 집에 있는 사당과 왕족 이하전의 집에 있는 사당을 통해
당시 조상에 대한 생각을 보여준다.·
조대비와 헌종의 에피소드와 철종을 통해서 왕족의 생활의 부자유성을 보여준다.·
김병기가 읽던 금병매를 통해 그 당시의 양반들에게도
지금의 베스트셀러처럼 유행하는 연애소설책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종,민비 혼례식을 보고 느낀점 몇 마디...
김만중 | 조회 30 |추천 0 | 2001.04.25. 19:53
지난 토요일 퇴근길에 안국역을 향해 운현궁 앞을 지나가는데...
평소 인적이 없던 곳인데 사람들이 와글와글 하다.
나도 공짜구경은 누구 못지않게 좋아하는지라 안에 들어가 보았다.
운현궁 마당무대에서 고종과 민비의 혼례식을 재현하는 행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마당에 넘쳐나는 관중들 틈에서 까치발을 딛고서니 무대가 눈에 들어왔다.
혼례의 절차와 복식은 철저하게 기록과 고증 따랐다고 하며
해설자가 관중의 이해를 돕기 위해 설명을 하는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혼례식의 화사한 색채가 운현궁의 우중충한 건물과 대조를 이룬다.
이 혼례식의 Super Star는 단연 민비이고
조연은 고종과 이 운현궁의 주인인 대원군이다.
주욱 지켜보니 아무리 왕실의 혼례식이라지만 너무 절차가 복잡하고 까다롭다.
대원군 부인이 대궐로 떠나는 민비에게 "부디 법도를 지키시며.." 하면서
덕담을 나누는 장면까지 세세하게 재현하고 있다.
이 때 고종이 15세, 민비가 16세이고 지금부터 130년 전이라고 한다.
특히 일반혼인과 다른점은 신랑신부 맞절 시 신랑인 왕은 절을 하지않는다.
해설자의 말 인즉 왕은 지존이므로 어느누구에게도 절을하지 않는다고 한다.
혼례식의 High Light는 민비가 모든 신하들과 상궁 등 궁녀들로 부터
국모로서의 예로 절을 받는 장면이다.
여주에 살던 조실부모한 소녀가 국모 즉 무한권력의 중전이 되는 순간이다.
행사를 주최하는 팀에서 꼼곰하게 준비를 한 것 같다.
대원군,신하들,상궁,궁녀,민비,고종 등의 인물은
당시의 나이에 맞는 세대를 선정했고,분장도 전혀 어설프지 않다.
복식과 동원된 각종 깃발도 사실감이 느껴졌다.
Performance를 하는 사람들도 진지하게 행동했다.
혼례식장 경비를 하는 포졸들도 깃발든채
끝까지 근엄한표정을 유지하면서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사전에 교육을 철저히 받았나 보다.
꼬마들이 옷을 잡아당기며
동물원 원숭이 쳐다보듯 하는데 이게 어디 쉬운 일인가.
결혼이란 인륜지대사라는데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부모나 당사자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닌 것은
예날에도 그랬으며 왕실도 역시 마찬가지 이다.
당시 대원군은 왕실의 외척 안동김씨 세도에 치를 떨었던터라
부인(대원군 부인도 민씨)이 천거한 민비가 부모가 없는 것을
더욱 며느리로서 호조건으로 생각 했을 것이다.
궁궐을 두고 사저인 운현궁에서 왕의 혼례식을 치르게 한것도
자기의 위상을 드 높일려는 책략이 아니겠는가.
권력에는 피도 눈물도 없다.
민비시해 시 일본공사가 대원군의 암묵적인 허락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면 그뒤 민비는 어떠했나.
나라의 안위 보다는 민씨일파의 권력유지에 더 신경을 썻고
시아버지인 대원군이 청나라 볼모로 잡혀갔을 때
영원히 귀국 못하도록 청나라에 청원도 넣었다.
성격이 표독스러워 고종이 다른 궁녀와 가까이 지내는 걸 알면 그 궁녀를 요절을 냈다.
왕은 여러 여자를 취할 수있는 특귄이 있었지만 이를 인정 안했다.
임오군란,갑신정변,아관파천등의 사건 배후에는 대원군과 민비가 있었다.
그러면 고종은 어떠했나.
민비와 결혼 당시 이미 장씨 성을 가진 궁녀를 좋아하고 있었다고 한다.
민비에게는 괸심을 두지않아 민비가 대부분의 세월을 독수공방으로 보내게했다.
아버지 대원군과 여장부 민비 사이에서 소신없이 우유부단하게 행동했다.
민비가 죽고나니 자기도 죽을까 두려워
궁궐을 버리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가서(우리는 역사시간에 이를 아관파천이라고 배웠다)
사는 모습을 어디 체통있는국왕이라고 할 수 있는가.
관중들의 감탄속에서 혼례식의 재현은 끝났다.
그러나 이 화려한 혼례식의 주인공 세 사람은 뒤에 권력다툼을 일삼고
우유부단하게 처신하여 결국 나라를 망하게 하는 원인이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니
한편으로 씁슬한 기분을 느끼면서 궁을 나와 안국역으로 향했다. 끝
‘합성사진’ 속 여자가 왕비요, 마고자 차림 남자가 대원군이라는데…
[박종인 기자의 ‘흔적’] 왕비 민씨와 흥선대원군… 그 사진들의 진실
조선일보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4.05.11. 03:00
고종비 민씨는 문제적 인물이다. 그녀를 명성황후라고 부르면 민족적이라고 하고 민비라고 부르면 친
일적이라고 한다. 왕비 민씨는 존경을 받기고 했고 증오의 대상이기도 했다. 1882년 임오군란을 일으
킨 왕십리 하급 군인들은 “한 사람만 골라 처치하고 나머지 민씨들을 다 죽인다(區處一人盡殺諸閔·
구처일인 진살제민)”고 선언했다.(박주대, ‘나암수록(羅巖隨錄)’ 3책, 162. 선혜청 분요) 이 ‘한
사람(一人)’이 왕비 민씨다.
열강들을 이용해 일본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다. 왕비는 1895년 일본인들에
게 암살됐다. 지금 그녀는 반일 민족주의를 상징하는 인물이 됐다. 뮤지컬 ‘명성황후’(1995)에서
“나는 조선의 국모다!”라고 외치는 모습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 임오군란 군인들이 저런 말을 한 장소는 흥선대원군이 사는 운현궁이다. 대원군은 1873년 고
종이 친정을 선언하며 자기 집에 유폐된 상태였다. 대원군을 만난 군인들이 이렇게 덧붙인다. “대감
은 전혀 걱정마소서. 새 세상을 만들어 대감과 함께 태평을 누리겠나이다(大監勿慮勿慮 作新世上然後
與大監共太平).” 대원군은 이들을 격려했고, 군인들은 궁궐과 한성에 사는 민씨들을 죽이고 집에 불
을 질렀다.
<사진②> 국사 교과서에 실렸다가 빠진 왕비 민씨 사진.
사진의 진실을 찾아서
자, 이제 사진 이야기다. 몇년 전까지 위 <사진②>가 왕비 민씨 사진이라며 국사교과서에 실려 있었
다. 비녀를 꽂은 형식과 복식이 왕실 여성이 맞다는 고증이 나오면서 이 사진은 한 동안 왕비 민씨
사진으로 확정됐다. 하지만 왕비일 가능성이 없다는 주장이 힘을 얻으면서 이 사진은 교과서에서 삭
제됐다. 그런데 아직도 시중에는 이 사진이 ‘명성황후 사진’이라며 유통되는 중이다. 한번 사실이
라고 굳어지면 깨뜨리기가 쉽지 않다. 또 한 동안 <사진⑤>가 왕비 민씨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
다.
그런데 이같은 주장은 격렬한 학계 논쟁 끝에 왕비가 아니라는 쪽으로 결론이 나면서 종적을 감췄다.
하지만 일반대중 상당수는 여전히 이들 사진을 ‘명성황후 사진’으로 받아들인다.
첫번째 사진, 합성사진이 왕비 사진?
이탈리아 외교관 카를로 로제티가 쓴 ‘꼬레아 꼬레아니’(1904)라는 책이 있다. 번역본도 나와 있
다. 이 번역본 272페이지에 <사진③>이 실려 있다. 사진 설명은 ‘궁중 복색을 갖춘 궁궐여인’이다.
<사진③> '꼬레아 꼬레아니'에 실려 있는 '궁녀 사진'.
그런데 277페이지에는 ‘기생의 의복 한 벌’이라는 설명과 함께 <사진①>이 실려 있다. 이 <사진①>
과 <사진②>을 합성하면 왕비 민씨 사진이라는 <사진③>이 나온다.
<사진①> '꼬레아 꼬레아니' 실린 '기생의 의복 한 벌' 사진
<사진②> 속 돗자리 앞쪽에 있는 발이 어색하게 허공에 떠 있다. 배경은 오른쪽 커튼, 왼쪽 색동 장
옷, 뒤쪽 책가도 배치는 <사진①>과 동일하다. ‘명성황후 사진인데 일본인들이 화려한 배경을 지워
상궁처럼 보이게 했다’고 주장하며 이 사진을 일본인의 대표적인 왜곡사례로 꼽는 사람들도 있다.
억지다.
1900년 조선정부가 대표단을 파견한 파리만국박람회에 주한프랑스공사관이 ‘서울의 기념품(Souvenir
de Seoul)’이라는 소책자를 출품했다. 여기에 배경이 없는 <사진②>가 실려 있다. 제목은 ‘궁궐의
여자(Dame du Palais)’다. 모델이 왕비라면 고종이 ‘궁궐의 여자(궁녀)’라는 설명을 허용했을 리
가 없다.
1900년 파리박람회 책자에 실린 '궁녀' 사진.
이 배경 없는 사진이 ‘조선의 왕비’ 혹은 ‘궁녀’라는 엇갈린 설명과 함께 서구 매체에 실려나갔
다. 조선에 대한 관심이 폭증하는 시점에 조선에 관한 기사를 쓰면서 ‘상업적으로 유통되던 사진’
을 기사 맥락에 맞게 삽입한 것이다.
두번째 사진, ‘시스루’가 왕비?
이후 <사진⑤>가 젊을 적 명성황후 사진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마고자를 입은 흥선대원군 사진’
<사진④>과 배경이 동일하니까 대원군과 왕비 민씨를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촬영했다는 주장이다.
<사진⑤> 미국 스미스소니언 보고서에 실린 궁녀 사진. /스미스소니언박물관
<사진④> 왕비 민씨(추정) 사진과 배경이 동일한 대원군 사진. /미 하버드대박물관
1882년 군란을 일으킨 군인들은 “왕비를 죽이고 대원군과 태평을 누리겠다”고 주장했다. 군란 이후
대원군은 궁궐로 들어가 왕비 민씨를 죽었다고 공식 발표하고 권력을 휘둘렀다. 그러다 두 달이 채
못돼 충청도 장호원에 숨어 있던 왕비가 환궁했고 대원군은 청나라 군사에 의해 청나라로 납치됐다.
이후 대원군과 왕비 민씨는 사사건건 정적으로 대립했다. 그런 두 사람이 동일 공간에서 동시에 기념
사진을 찍었다는 주장은 말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이 여자 사진은 치마가 ‘시스루’다. 치마 안 속바지가 들여다보인다. 당시 왕실 사진은 외
교 수단으로 사용되곤 했다. 100% 성복(盛服) 차림으로 촬영했다. 격식을 갖추지 않은 복장은 허용되
지 않았다. 따라서 왕비 민씨 사진이라고 유통되고 있는 사진은 모두 일반인을 모델로 촬영한 사진들
이다. 현존하는 왕비 민씨 사진은 ‘없다’가 정답이다.
촬영자는 스미스소니언 학자
‘마고자를 입은 대원군’과 ‘시스루를 입은 여자’ 촬영자는 피에르 루이 조이(Pierre Louis Jouy)
라는 미국인이다. 임오군란 1년 뒤인 1883년 5월 초대 주한미국공사 푸트와 함께 조선에 왔다. 조이
는 미국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소속 조류학자다. 조선에서 인류학적 연구와 표본 수집을 위해 입국했
다.(Peter Juhl, ‘조선에 온 최초의 스미스소니언, 피에르 루이 조이의 생과 작업(The Life and
Work of Pierre Louis Jouy, The Smithsonian’s First Man in Korea)’, 왕립아시아학회한국지부 학
회지 95집, 2021)
1891년도 스미스소니언 연례보고서에 조이의 연구 성과가 실려 있다. 429페이지에서 488페이지까지
그가 촬영했거나 수집한 사진, 수집한 기물 사진과 설명이 삽입돼 있다. 434페이지와 435페이지 사이
에 인물사진들이 실려 있다. 여기에 위 <사진⑤>가 실려 있다. ‘도판10(Plate X)’ 번호가 붙은 이
사진 설명은 이렇다. ‘조선의 궁녀(Korean Serving Woman in The Palace): 여름 복장. 머리는 궁중
여성 특유의 장식이 있다. 웃옷은 언제나 흰색이고 치마는 파란색이다. 오직 왕족만 붉은 옷을 입을
수 있다.’ 그리고 사진 출처는 ‘피에르 루이 조이 촬영(From a photograph by Jouy)’. 이 보고서
에 실린 사진 가운데 여덟 장에 ‘조이 촬영’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그런데 이 <사진⑤>와 청나라식 마고자를 입은 대원군 사진<사진④>는 배경과 조명이 동일하다. 이
또한 촬영자가 조이라는 뜻이다. 이 대원군 사진은 미국 하버드대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청나라’
복식을 한 이 사진은 조선 민속학 보고서인 스미스소니언 보고서에는 빠져 있다.
대원군? 정체불명의 사내!
대원군은 1882년 8월 27일 청나라군에 의해 천진으로 납치됐다. 1885년 10월 5일 귀국한 대원군은 즉
시 고종에 의해 운현궁에 유폐돼 외부인 접촉이 금지됐다. 조이는 1883년 5월 조선에 왔다. 그해 11
월 부산으로 가서 세관에서 일하며 경상도지역 식물과 조류를 연구했다. 1886년 여름 원산으로 떠난
표본 채집 답사를 제외하고는 경상도를 떠난 적이 없다. 그해 11월 조이는 미국으로 귀국하고 돌아오
지 않았다.
대원군 중국 체류 시기와 조이의 활동 시기를 비교하면 조이와 대원군이 만날 기회는 없었다. 따라서
대원군 촬영은 불가능했다. 1900년 한국학 연구조직인 ‘왕립아시아학회’가 서울에 설립됐다. 포크,
베르나두, 로웰처럼 조이와 동시대에 조선을 찾았던 사람들과 달리 조이는 94차례 발행된 이 학회 학
회지에 한번도 등장하지 않았다.(이상, Juhl, 앞 논문) 대원군처럼 ‘언급 가치가 높은 인물’을 조
이가 만나고 촬영했다면 어떤 형식으로든 이 학회지에 기록돼 있어야 정상이다.
<사진⑥> 1882년 청나라에서 촬영한 대원군. /서울역사박물관
1882년 9월 청나라 천진에서 촬영한 대원군 사진<사진⑥>과 비교하면 명확하다. 대원군 유폐를 결정
한 직후 청 정부가 기록 차원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날짜와 장소까지 확정된 ‘진짜 대원군’ 사진이
다. 두꺼운 아랫입술을 제외하면 눈매와 콧대, 귀 위치, 귀 생김새가 다 다르다. 1880년 여름 제작한
61세 기념 초상화<사진⑦>와 천진 사진은 이 요소들이 유사한 반면 마고자를 입은 남자와 초상화 속
대원군은 동일인물로 보기 어렵다.
<사진⑦> 대원군 61세 기념 초상화(1880년). /서울역사박물관
게다가 마고자를 입은 사내 사진은 일본 업체들이 사진엽서로 만들어 판매했는데 제목은 ‘대원군’
이 아니라 ‘조선 풍속, 조선인 복장(CUSTOMS OF KOREAN)’이다.<사진⑧> 영어 단어 스펠이 틀린 건
흔한 일이었다. 이런 모든 부정적인 맥락과 무관하게 조이가 마고자를 입은 대원군을 촬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역사적 정황을 보면 아닐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사진⑧> 마고자를 입은 사내 사진으로 일본 업체가 제작한 사진 엽서. '조선 풍속, 조선인 복장'이
라고 돼 있다. /이돈수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