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조사위원
3·1 운동은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뒤 일어난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이다. 무참히 짓밟혔어도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보재 이상설 선생(1870~1917).<국가보훈처>
입헌군주제에서 공화정으로
이상설(李相卨, 1870~1917)은 한국 독립운동 초기에 중심 역할을 한 독립운동사의 거목이다. 대한제국 관료 출신으로 독립운동가로 변신한 그는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의 주역으로 활동한 뒤 샌프란시스코와 덴버, 상하이, 북간도 용정,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롭스크 등 폭넓은 지역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펼쳤다. 그는 초기 독립운동 방향을 제시하고 독립운동 실천의 지도적 역할을 담당했으나 1917년 연해주 우수리스크에서 47세의 길지 않은 생을 마감했다.
이상설은 고종의 총애를 받던 대한제국의 관료 출신이었기에 처음 왕정복고의 복벽주의로 출발했다. 1910년대 이회영과 함께 고종 황제를 외국으로 망명시켜 망명정부를 구상하기도 했다. 그가 염두에 둔 것은 입헌군주제였다. 그러나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넘어가는 분기점이 되는 ‘대동단결선언’이 발표된 1917년께에는 그 또한 근왕주의에서 공화주의로 넘어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17년에 사망하는 바람에 그의 행보는 거기서 끝나고 말았지만, 그와 비슷한 조건과 위치에서 출발해 함께 여러 일을 도모했던 이회영이 후에 아나키스트로 사상적 변모를 이룬 것을 생각하면 그의 변모 또한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최초 민족교육기관 서전서숙 설립
1870년 충북 진천에서 경주 이씨 이행우의 아들로 태어난 이상설은 7세 때 이용우의 양자로 입적하며 한양으로 옮겼다. 그의 생부는 가난했으나 양부는 고위 관료를 지내며 상당한 재산을 소유한 지주였다. 그는 고향 진천에 많은 토지를 가진 부재지주가 됐다. 그는 재산을 1906년 북간도 용정으로 망명해 서전서숙을 세울 때 독립운동자금으로 사용했다. 이상설이 독립운동자금을 위해 진천 땅들을 팔았기 때문에 진천의 경주 이씨 사람들은 그에 대해 그다지 좋지 않게 생각했다고 한다.
이상설은 이회영·이시영 형제를 비롯해 이동녕 등 개화청년들과 교류하면서 수학·물리·화학·경제학·국제법 등 신학문을 공부했다. 미국인 선교사였던 헐버트와도 친교를 맺어 영어·프랑스어 등을 익혔다. 1894년 문과에 급제한 그는 율곡 이이의 뒤를 이을 대학자가 될 것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특출한 면모를 보였다. 이상설은 성균관 교수 겸 관장, 탁지부 재무관 등을 지내고 궁내부 특진관으로 승진해 고종이 가장 총애하는 관료가 됐다.
1904년 6월 이상설은 박승봉과 연명으로 일본인의 전국 황무지 개척권 요구를 배척하라는 상소를 올려 철회하게 만들었다. 이상설은 1905년 대신회의의 실무 책임자인 의정부참찬에 발탁됐으나 일본의 제지로 회의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11월 이완용·박제순 등 을사 5적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상설은 고종에게 사직을 위해 죽을 결심으로 늑약을 파기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이상설은 11월 말 민영환의 자결소식을 듣고 종로에 운집한 시민을 향해 울면서 항쟁을 촉구하는 연설을 한 뒤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상설은 1906년 봄 이동녕·정순만 등과 함께 북간도 용정으로 망명했다. 그해 8월 항일민족운동 교육기관인 서전서숙을 설립해 숙장이 됐다. 이곳에서 그는 이동녕 등과 함께 역사·지리·국제법·정치학 등의 신학문과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그러나 충북 진천의 땅을 팔아 설립하고 운영자금을 댔던 숙장 이상설이 이듬해 헤이그 밀사로 파견된 뒤 서전서숙은 자금난과 일제의 감시·압력 등으로 1년 만에 폐교되고 말았다. 최초의 민족독립운동가 양성 교육기관이었던 이 학교의 교육방침과 정신, 교사 등은 명동학교·은진학교 등의 민족학교로 이어졌다.
헤이그 밀사 사건과 미주지역 활동
1907년 이상설은 이회영과 함께 헤이그 밀사 사건을 준비·기획하고 직접 헤이그에 파견됐다. 정사는 전 의정부참찬 이상설, 부사는 전 평리원검사 이준과 주러시아 한국공사관 참서관 이위종(주러시아 공사 이범진의 아들)이었다. 용정과 서울에서 각각 출발한 이상설과 이준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났고, 같은해 6월 중순께 시베리아 철도 편으로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해 이위종과 합류했다. 세 특사는 6월25일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해 활동을 시작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회의장에는 들어가지도 못했다.
일제의 침략과 조선 독립의 필요성을 알리며 활동하던 중 이준 열사는 헤이그에서 병사했고 이상설·이위종은 고종의 또 다른 특사인 헐버트 일행과 함께 영국·프랑스·독일·미국·러시아 등지를 순방하면서 일제의 침략상을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이 동양 평화의 관건임을 알리는 활동을 폈다. 이상설은 1908년 2월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갔고, 이듬해 4월까지 샌프란시스코·덴버 등지를 돌며 한인 동포들을 위한 활동을 했다. 특히 그는 1908년 8월 콜로라도주 덴버 시에서 개최된 애국동지대표자회의를 주도해 미주지역 한인 사회에서 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1909년 2월 국민회를 조직해 미주 한인 사회뿐만 아니라 국외 한인 사회 전체를 하나의 단체로 통합해 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고자 했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에 영향 미쳐
이상설은 1909년 4월 국민회 총회장에 당선된 정재관을 대동하고 극동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추진하는 책임을 맡고 미국을 떠나 연해주로 갔다. 그해 7월14일 연해주에 도착한 이상설이 가장 먼저 독립운동기지를 개척하는 일에 착수했다. 대한제국 말기부터 조선인들이 국경 근처에 마을을 이루고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상설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항카호수 남쪽 봉밀산 부근에 땅을 산 뒤 국경지대에 살고 있던 100여 가구의 한인들을 이주시켜 한흥동 마을을 건설했다. 한흥동은 연해주 최초의 독립운동기지라 할 수 있었다.
1910년 6월 이상설은 항일투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고자 유인석·이범윤 등과 함께 연해주 방면 의병을 규합해 13도 의군을 편성했으며, 7월에는 유인석·이회영 등과 함께 고종의 러시아 망명을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이상설이 고종 황제의 망명정부를 세우려 했던 것은 아직 공화정에 다가가지 못했음을 말해 준다. 1911년 중국의 신해혁명이 민국을 표방한 이래 한국 독립운동 진영에도 공화주의가 점차 확산됐고 1917년을 분기로 공화정이 대세로 자리 잡게 되는데 이상설도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1910년 10월26일 안중근 의사가 중국 만주 하얼빈 역에서 일본의 침략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는 의거를 감행했다. 그동안 안중근의 거사에 자금을 지원하고 정신적으로 영향을 미친 인물로 최재형과 유인석이 주로 거론됐다. 하지만 최근 연구에 의하면 일제는 최재형과 더불어 이상설을 유력한 안중근의 배후로 지목했는데 특히 이상설이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정립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안중근이 일제의 조사 과정에서 이상설을 “세계 대세에 통하고 동양의 시국을 간파해 동양평화주의를 지닌 대표적 인물로 극찬”하면서 큰 영향을 받은 사실을 증언했다는 것이다.
러시아 연해주 한인 사회 통합 노력
1910년 이상설이 연해주와 간도의 한인들을 규합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성명회’를 조직하고 한일합병 반대운동을 전개하자 일제의 압력을 받은 러시아 경찰이 이상설 등을 체포해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의 옛 이름)로 추방했다. 이듬해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 이상설은 1911년 12월 이종호·최재형·홍범도 등과 ‘권업회’를 조직하고 <권업신문>을 발행해 동포들의 권익과 의식향상에 힘썼다.
1911년 6월 이상설의 오른팔로 친형제 같았던 정순만이 연해주 동포사회의 갈등으로 인해 피살되는 비극적 사건이 권업회를 현실화하는 데 중요한 동인으로 작용했다. 일제는 정순만 피살 사건 후 한인 사회가 ‘대분쟁’에 빠질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이상설 등을 중심으로 연해주 한인들은 대동단결 방안을 모색했고, 그러한 통합 노력의 결과로 전체 한인을 대상으로 한 권업회가 탄생하게 됐다. 피해자였던 이상설의 통 큰 화해 노력이 주효했던 것이다.
이상설은 1914년 이동휘·이동녕·정재관 등과 함께 한인들을 모아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워 최고지도자인 정통령이 됐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일본과 동맹관계가 된 제정러시아가 한인들의 정치 활동을 엄금하는 바람에 대한광복군정부와 권업회가 해체되고 말았다.
연해주 우수리스크 수이펀 강변의 유허비
제정러시아의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간 이상설은 1915년 상하이에서 박은식·신규식·조성환·이동휘 등과 함께 신한혁명당을 조직해 본부장이 됐다. 신한혁명당은 1919년 3·1 운동 발발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될 때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나 이상설은 그때까지 살아 있지 못했다. 연해주와 중국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펼치던 이상설은 1917년 4월1일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망국의 한을 품은 채 병사했다.
임영태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조사위원
이상설은 죽기 전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했으니, 몸과 유품은 불태우고 제사도 지내지 마라”는 유언을 남겼다. 유족들은 유언에 따라 유해를 화장하고 문고도 모두 불태웠으며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 1945년 해방 후에야 처음으로 제사를 지냈으나 그의 직계 유족이 한국 전쟁 중에 실종·사망하는 바람에 이후에는 제사도 지내지 못하게 됐다.
이상설이 일찍 서거하지 않았더라면 “1919년 3·1 운동 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워졌을 때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평가받을 정도로 그는 초기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거물이었다. 이상설의 유언에 따라 유골이 뿌려진 수이푼 강가에 2001년 10월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이 러시아의 협조를 얻어 유허비를 세웠다. 지금도 이국땅의 유허비는 쓸쓸하게 동포들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다.
임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