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칭별칭광주, 서석유형지명/행정시대현대성격광역시위치전라남도 중북부인구147만 2199명(2015년 현재)면적501.18㎢행정구역5구 95행정동(202법정동)도·시·군청소재지광주광역시 서구 내방로 111 , 광주광역시 서구 치평동 1200꽃철쭉나무은행나무새비둘기
정의
전라남도 중북부에 위치한 광역시.
개관
동쪽은 담양군, 서쪽은 함평군, 남쪽은 나주시, 화순군, 북쪽은 장성군과 접하고 있다. 위치는 동경 126°38'∼127°00'34', 북위 35°03'∼35°15'이다. 면적은 501.18㎢이고, 인구는 147만 2199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5개 구, 95개 행정동(202개 법정동)이 있다. 시청은 광주광역시 서구 치평동에 있다.
자연환경
동쪽의 산간부와 서쪽 평야부의 경계지역에 위치하며, 동쪽에 진산인 무등산(無等山)이 그 지맥과 지봉인 장원봉(壯元峰)·양림산(楊林山)·성거산(聖巨山) 등과 함께 시가지를 둘러싸고, 그 가운데에 광주분지를 형성한다. 서쪽은 비교적 낮은 구릉에 의해 비옥한 전남평야와 연접하고 있다.
무등산 골짜기에서 발원해 시가를 관류하는 광주천은 서북쪽으로 흐르다가 서부경계지대에서 극락강과 합류하고, 장성군에서 흘러내리는 황룡강과 만나 다시 영산강으로 흘러든다. 그밖에도 동계천(東溪川)·서방천(瑞坊川)·용봉천(龍鳳川)·석곡천(石谷川) 등이 무등산에서 발원하여 시역을 흐른다.
화순과의 경계에는 너릿재·육판재·장불재 등 고개가 많다. 무등산은 대부분의 지역이 백악기의 중성화산암류로 이루어져 있고, 무등산 정상부는 안산반암에 속해 수직절리와 수평절리의 발달이 현저하다.
기반암은 화강암·분암(玢岩) 및 분암질응회암(玢岩質凝灰岩)의 충적층으로 되어 있다. 화강암은 북서쪽 극락강 유역의 본촌동에 널리 노출되어 높이 100m 내외의 구릉이 연속되어 있는데, 일반적으로 풍화가 잘 되어 토양층이 깊고 경사가 완만하다. 분암 및 분암질응회암은 무등산을 중심으로 남쪽에 분포하고, 급경사의 산지를 이루며 토양이 척박하다.
황룡강과 극락강 유역의 낮은 지대에 비옥한 충적층이 나타나는데, 이는 신생대 제4기 충적세(沖積世)에 퇴적된 것으로 주로 홍수 때 범람해 퇴적했으며, 그 퇴적층은 그다지 두텁지 않다.
기후는 한반도의 남서부에 위치하므로 비교적 한서의 차가 작아 온화하다. 1971∼2000년 연평균기온은 13.5℃, 연평균 최고기온 18.8℃, 연평균 최저기온 9.1℃1로 이 기간 동안 연평균기온의 편차가 크게 나타났다. 1월 평균기온 0.4℃, 8월 평균기온 26.0℃이며, 연강수량은 1368.0mm이고 습도는 72%이다. 1980~2004년의 균쾌청일수 73.2일, 강수일 124.6일, 강설일수 29일로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린다.
역사
이 지역의 구석기시기 문화는 뗀석기로 대표된다. 이 뗀석기는 인간이 자연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인지활동과 자유로이 손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결과의 산물이다. 이 뗀석기가 광주 상무지구의 치평동, 첨단지구의 산월동, 광주철도 이설 구간인 매월동 등의 구릉상에서 발견되었다. 신석기시대 유물은 광주지역에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의 유물·유적으로는 광산구 원산동에서 주거지가, 송암동과 운암동에서 주거지가, 우치동 용강마을 및 송암동 임정마을, 신용동과 용두동 등에서는 간돌칼·돌화살·그물추 등이 발견되었다.
고인돌군이 광산구 서창동·풍암동·압촌동·지석동·삼거동·와룡동과 충효동·효덕동·송하동 등지에서 발견되고, 광산구 신창동에서는 옹관묘군 및 돌도끼·돌화살촉이 발견되었다. 대체로 광주의 서북부지역인 극락강 주변에 선사유적이 널리 분포해 있다.
광주를 비롯한 영산강 유역의 마한세력은 철기문화의 보급에 따라 지석묘사회 이래 발전시켜 온 농업생산력과 인구를 기반으로 하여 점차로 정치적 결집력을 키워 마침내 지역적인 정치적 연맹체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마한의 54국 중 신미국(新彌國)을 중심으로 하여 광주를 비롯한 영산강 유역의 마한연맹왕국을 형성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삼국시대에는 근초고왕대 이후 백제의 영역에 포함되었으며, 웅진으로 천도한 다음부터 직접적인 지배를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에는 무진주(武珍州) 혹은 노지(奴只)라 불렀다고 하는데, 498년(백제 동성왕 20)탐라 정벌 때 이곳까지 왕이 행차한 기록이 보인다.
신라의 영역에 편입된 뒤 686년(신문왕 6)에 무진주라 했고, 757년(경덕왕 16)에 무주(武州)로 고쳐 현 전라남도지역의 중심치소로 삼았다. 892년(진성여왕 6)에 견훤(甄萱)이 이곳을 근거로 스스로 왕을 칭하다가 전주로 옮겨가서 후백제를 세웠다.
940년(태조 23)에 광주로 이름을 고쳤고, 994년(성종 14)에 10도를 설치하고 정도사를 파견하는 지방제도의 개편이 이루어져 광주는 해양도에 속하였다. 해양도에는 14주 62현이 소속되었는데 광주는 지명이 해양으로 바뀌었는데 이는 992년(성종 11)에 주·부·군·현의 명칭을 변경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는데 이때 바뀌었을 가능성이 있다. 광주에 지방관으로 자사(刺史)가 파견되었는데 자사 파견은 1005년(목종 8)에 폐지되고 절도사에서 안무사로 지방관이 바뀌는 과정을 겪으면서 현종대에 현령이 파견되기에 이른다. 1259년(고종 46)에는 권신 김인준(金仁俊)의 외향이라 하여 익주(翼州)가 되기까지 광주의 행정구조는 변화 없이 지속되었다. 이후 무진주로 고쳤다가 1310년(충선왕 2)화평부(化平府)로 변하였으며, 1362년(공민왕 11)에는 고려 제2대 혜종의 이름 무(武)를 피해 무진부(茂珍府)로 고쳐졌다가, 1373년(공민왕 22)에 광주목으로 바뀌는 등 숱한 변천을 겪었다. 몽고의 침입 때는 무등산에 몽고군이 주둔한 적이 있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 빈번할 때는 6차에 걸쳐 침구를 당했으며, 이때 정지(鄭地)가 왜구의 격퇴에 큰 공을 세웠다.
1430년(세종 12)에 이곳 사람 노흥준(盧興俊)이 목사 신보안(辛保安)을 때린 일로 무진군(茂珍郡)으로 강등되었다가 1451년(문종 1)에 광주목으로 복구된 일이 있다. 1481년(성종 12)에 판관 우윤공(禹允功)이 유시(流矢)에 맞은 사건으로 광산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501년(연산군 7)에 복구되었다.
1624년(인조 2)에 현으로 되었다가 1634년에 복구되었다. 또한 1701년(숙종 27)에 강등되었다가 1707년에 복구되고, 1869년(고종 6)에 강등되었다가 1871년에 복구되는 등 행정체계상의 변화를 겪었으나, 군현의 영역 등은 별다른 변화 없이 조선 말까지 유지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고경명(高敬命)·김덕령(金德齡) 등의 의병장들이 이 지방 의병을 이끌고 크게 활약하였다. 임진왜란 중의 사실을 기록한 노인(魯認)의 『금계일기(錦溪日記)』는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또한 정묘·병자호란 때는 이 고장 출신 전상의(全尙毅)의 순국과 정반(鄭槃)·고일립(高日立)·유박(柳璞) 등의 의병활동이 두드러진다.
1862년(철종 13)에는 수천 명의 민중이 지방관아를 습격하는 민란을 일으켰고, 1894년의 동학운동 때는 동학의 핵심인물 3인 중의 한 사람인 손화중(孫華仲)이 광주에서 봉기해 박성동(朴成東) 등 4000여 명이 참여하는 등 한말의 저항운동이 아주 활발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8도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23부로 나누었을 때 나주부에 속했다. 이듬해 다시 13도제를 실시하면서 1등군이 되어 전라남도의 도청이 설치되고 나주를 대신해 현재와 같은 전라남도의 중심지로 등장하게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성내면·공수방·기례방·부동방을 광주면이라 칭했다. 1931년에 이를 광주읍으로 개칭하고 다시 1935년에 광주부로 개칭하면서 나머지 지역은 광산군이라 칭하게 되어 광주와 광산군이 분리되었다.
일제의 침입에 대항한 항일운동으로는 1906년 김원국(金元國), 1908년양진여(梁鎭汝)·양상기(梁相基) 부자와 김태원(金泰元)·심남일(沈南一)·신덕균(申德均) 등의 항쟁을 들 수 있다.
1919년의 3·1운동 때는 김철(金鐵)·최흥종(崔興琮)·남궁혁(南宮爀) 등이 주동해 대규모 시위를 전개하였다. 1929년 11월 3일에는 광주고등보통학교를 중심으로 광주학생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 전국으로 파급되어 민족독립운동의 중요한 몫을 담당하였다. 한편, 1922년 7월에는 광주∼송정리간의 철도가 개통되었다.
1949년에 광주부가 광주시로 승격되어 시의회를 구성하였다. 1955년에는 광산군의 서방면·효지면·극락면과 석곡면의 일부 지역이 편입되었다. 1957년에는 광산군의 대촌면·지산면·서창면, 그리고 석곡면지역으로 담양군의 남면에 편입되었던 지역들을 회복하였다. 1960년대촌면과 서창면은 다시 광산군에 환원되어 현재의 시역이 이때 갖추어졌다.
1973년부터 구제를 실시해 동·서·북구의 3구로 나누어 관할하였다. 1986년 11월 1일에 직할시로 승격되었다. 1988년전라남도 송정시와 광산군이 직할시에 편입되면서 광산구가 설치되었다. 1995년 1월 1일 직할시의 명칭이 광역시로 변경되었다. 같은 해 3월 1일에는 서구를 분구해 남구가 설치되면서 5개 구가 되었다.
유물·유적
광주광역시 지정문화재 현황은 국가지정 문화재가 15점으로 국보 1점, 보물 6점, 사적 2점, 천연기념물 1점, 중요무형문화재 2점, 중요 민속자료 3점 있고, 시지정 문화재는 총 79점 중 유형문화재 27점, 무형문화재 19점, 기념물 26점, 민속자료 7점이 있고 문화재 자료 26점, 등록 문화재 9점으로 총 129점의 문화재가 있다.
국보 제103호인 중흥산성쌍사자석등(국립광주박물관)은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간주대신 두 마리의 사자가 조각된 독특한 양식의 석등으로 지대석 위에 안상이 새겨진 8각의 하대석이 놓였고, 그 위에 8잎의 연꽃 연화석이 있다.
광산구의 광주신창동유적(사적 375호)을 비롯해 선사유적과 독무덤군, 신룡동의 조개무지와 이곳에서 출토된 민무늬토기·돌화살촉·반달돌칼 등이 있다. 남구 임암동에는 임암동·원산동선사주거지 및 석곽묘(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8호)가 있다. 그리고 명화동장고분(광주광역시 기념물 제22호), 월계동장고분(광주광역시 기념물 제20호), 동구의 운림동석실고분(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9호) 등이 있다.
고인돌은 광산구 삼거동고인돌(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9호), 북구 충효동·유촌동 등의 기반식 고인돌군을 비롯해 서구 서창동·용두동의 학동마을지석묘(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6호)·풍암동, 남구 칠석동·압촌동·지석동·송하동과 동구 산수동 등에 선사유적지와 고분이 분포되어 있다. 이곳에서 발굴된 간돌화살촉·돌도끼 등의 석기와 토기·세형동검 등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유물들이 있으며, 북구의 금곡동철제유적(광주광역시 기념물 제21호)도 있다.
산성으로는 북구 두암동의 무진고성지(武珍古城址,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4호), 광산구 송정동의 고내상성지(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0호)를 비롯해 백제 또는 신라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보이는 광주읍성지의 유적이 조금 남아 있다. 현존하는 사찰로는 증심사(證心寺,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호)·원효사(元曉寺)·약사암(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호) 등이 있다.
불교문화재로는 남구 구동에 광주서오층석탑(보물 제109호), 동구 지산동에 광주동오층석탑(보물 제110호), 운림동에 증심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131호)·증심사삼층석탑(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증심사오층석탑·증심사석조보살입상(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4호) 및 연화대좌·증심사칠층석탑·증심사오백전(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3호)가 있다.
또한 동구 운림동에 약사암의(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호)·약사암삼층석탑·광주약사암석조여래좌상(보물 제600호), 광산동의 재명석등(在銘石燈,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호), 서구 쌍촌동의 운천사마애여래좌상(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호), 유촌동석조여래좌상(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1호), 북구 금곡동에 원효사동부도(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7호)·원효사출토유물(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8호)이 있다.
임동에 있었던 십신사지석비(十信寺址石碑,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호)·십신사지석불(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호)은 광주광역시립민속박물관에 있다. 그밖에 광산구의 신룡리오층석탑(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2호)과 국립광주박물관에는 중흥산성쌍사자석등이 있고, 전남대학교박물관의 동종 등이 있다.
유교문화재로는 서구 구동의 광주향교(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9호)를 비롯해 광산구 월계동의 무양서원(武陽書院,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호), 동구 충효동에 충장사(忠壯祠), 북구 두암동에 장렬사(壯烈祠), 망월동에 경렬사(景烈祠), 서구 화정동의 화담사(花潭祠,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8호), 남구 원산동의 포충사(광주광역시 기념물 제7호)가 유명하다.
광산구 월계동의 무양서원(武陽書院), 왕동의 원당영각(元堂影閣)·용진정사(湧珍精舍,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7호), 송산동의 광산사(光山祠)·국재사, 대산동의 화암사(花巖祠), 서구 서창동의 학산사(鶴山祠), 벽진동의 의열사유허비, 광산구 금호동의 병천사(秉天祠,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1호) 이 있다. 남구 양과동에는 지산재(芝山齋,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0호), 광산구 명도동의 영사재, 광산동의 귀후재·두남재(斗南齋)가 있다.
정자는 북구 충효동의 풍암정(楓巖亭,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5호)·취가정(醉歌亭), 광산구 신창동의 풍영정(風詠亭,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4호), 남구 칠석동의 부용정(芙蓉亭)을 비롯해 관수정·양과동정(良笊洞亭)·칠송정·가학정, 광산구 본덕동의 호가정(浩歌亭)·만귀정(晩歸亭)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양송천묘역(梁松川 墓域,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8호), 북구 충효동의 환벽당(環碧堂,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호), 광산구 광산동에는 기대승의 문집이 보관되어 있는 빙월당(氷月堂,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9호)이 있다.
그밖의 유적으로는 동구 운림동의 허백련춘설원(광주광역시 기념물 제5호), 지산동에 오지호가옥(吳之湖家屋,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6호), 광산구 소촌동의 용아생가(龍兒生家,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3호), 남구 양림동의 우일선선교사사택(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5호)·이장우가옥(李章雨家屋, 광주광역시 민속자료 제1호)·최승효가옥(崔昇孝家屋, 광주광역시 민속자료 제2호), 압촌동의 광산고원희가옥(광주광역시 민속자료 제8호), 북구 매곡동의 김용학가옥(金容鶴家屋, 광주광역시 민속자료 제3호), 광산구 북산동의 이기손 생가, 송산동의 오성술(吳聖述) 생가, 남구 이장동의 고유후(高由厚) 고가 등이 있다.
동구 광산동의 전라남도청회의실(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6호), 광산구 박호동의 양씨삼강문(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1호), 압촌동의 고씨삼강문(高氏三綱門,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2호) 등이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무형문화재로 이 지방의 고싸움놀이는 중요무형문화재 제33호이며, 지방무형문화재로는 남도판소리(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호)·탱화장(幀畫匠,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제3호)·진다리붓(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제4호)·청자도공(靑磁陶工,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제5호)·남도판소리서편제(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제6호)·광산농악(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제8호)·완제시조창(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0호)·판소리고법(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1호)·악기장(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2호)·화류소목장(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3호)이 있다.
동구 충효동에 김덕령장군의복(중요민속자료 제111호), 광주광역시시립민속박물관에 장흥임씨의복(중요민속자료 제112호)·정지장군환삼(보물 제336호)·최희량임란첩보서목(崔希亮壬亂捷報書目, 보물 제660호), 동구 계림동에 『금계일기』(보물 제311호)·당포앞바다승첩지도 등이 있다.
그밖의 유형문화재로는 광산구 소촌동의 눌재집목판각(訥齋集木版刻,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6호)·사암집목판각(思庵集木版刻,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7호), 광산동의 고봉문집목판(高峰文集木版,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9호), 남구 원산동의 제봉문집목판(霽峰文集木版,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0호)·포충사소장고경명문적(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1호)·기대승종손가소장문적(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2호), 이장동의 양과동정고문서(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9호), 서구 풍암동의 회재유집목판(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3호), 도촌동의 취병조형유허비(翠屛趙珩遺墟碑,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8호) 등이 있다.
그밖에 임진왜란 때 의병장 범기생비, 한말 의병장 심남일순절비, 권율비 등과 북구 망월동에 정지장군예장석묘(광주광역시 기념물 제2호), 화암동에 전상의장군예장석묘(광주광역시 기념물 제3호)가 있고, 북구 금곡동에 도요지인 광주충효동도요지(사적 제141호)가 있다.
남구에는 칠석동은행나무(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0호), 북구의 충효동왕버들(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6호), 남구의 양림동호랑가시나무(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7호), 동구의 학동느티나무(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9호)가 있다.
교육·문화
예로부터 호남지방의 교육·문화·행정의 중심지였던 광주에는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으로 광주향교가 있었다. 서구 구동의 광주향교는 1398년(태조 7) 서석산(瑞石山) 장원봉 아래 창건된 이후 동문 밖으로 이전했다가 1488년(성종 19) 현재의 구동으로 다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향교의 교육기능이 약화되는 조선 중기 이후에는 운암서원(雲巖書院)과 무양서원(武陽書院) 등의 서원이 있었다. 운암서원은 1708년(숙종 34)에 건립되어 송재민(宋齊民)을 주벽으로 송타(宋柁)·권필·고경복·신필(申滭)·신한주(申漢柱)를 배향했으나, 1862년(철종 13)에 철폐되고 유허비만 남아 있다.
무양서원은 이자겸의 난을 평정한 최사전(崔思全)을 제향하기 위해 1925년 후손과 유림이 건립하였다. 그밖에 경렬사·장렬사·화담사·서강사(瑞岡祠)·지산사(芝山祠) 등이 설립되어 후진의 교화에 진력하였다.
근대교육의 발전은 1904년의 개신교 남장로교계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되어 1907년 정식으로 수피아여학교와 숭일학교(崇一學校)의 설립인가를 받았으나, 신사참배 거부사태로 1937년 폐교되는 비운을 맞기도 했다.
1906년에는 공립광주보통학교가 설립되었으며, 1910년에는 서문 밖의 사립측량학교 부지에 도립 광주농림학교가 [개설]되었다. 1920년에는 지방유지의 성금으로 광주고등보통학교가 설립되었다가 1925년에 도립으로 바뀌었다. 1922년에는 3년제 도립사범학교가 개교되었고, 1923년에는 광주여자보통학교가 설치되었다. 특히, 1929년에 발생한 광주항일학생운동은 민족운동의 정신적 자산으로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2015년 현재 초등학교 153개교, 중학교 89개교, 고등학교 67개교가 있다. 전문대학은 광주보건대학교·기독간호대학교·동강대학교·서영대학교·조선간호대학교·조선이공대학교 등 6개교가 있다.
4년제 대학은 광신대학교·광주교육대학교·광주대학교·광주여자대학교·남부대학교·송원대학교·전남대학교·조선대학교·호남대학교·호남신학대학교 등 10개교가 있다. 특수목적고등학교로서 과학고등학교·국악고등학교·체육고등학교·남도예술학교 등이 있으며, 그리고 특수학교 5개교 등이 있다.
공공도서관 12개소, 국립광주박물관을 비롯한 박물관 5개소, 공연장시설 21개소가 있다. 그리고 한국방송공사(KBS)·문화방송(MBC)·기독교방송(CBS)·광주방송(KBC)·불교방송·평화방송·교통방송 등의 방송사와 광주일보·전남일보·무등일보·전남매일·광주매일·광남일보·남도일보 등의 신문사가 있다. 한국문인협회 전남지부 등 각종 문예단체의 활동 또한 활발하다.
민속
이 지방에는 농악·씨름·윷놀이·그네뛰기·연날리기 등의 일반적인 민속놀이가 행해지는데, 이 가운데 농악은 가장 대표적이다.
일명 ‘매구’ 또는 ‘굿’이라고도 불리는 이 농악은 주로 정초·단오·백중·추석과 같은 명절날에 행해지며, 모내기·김매기와 같이 힘든 농사일을 할 때도 행해진다.
사용되는 악기는 꽹과리·징·장구·북·소고 등이고, 악곡으로는 행진악·무용악·답중악(畓中樂)·축악·신악 등이 있다. 가락은 주로 자진모리를 쓴다. 대원은 농악기를 치는 악사와 농기 및 ‘영(令)’자 기를 든 기수·무동·대포수·말뚝이 등 10여 명인데 많으면 20명을 넘기도 한다.
대원의 차림새를 보면, 상쇠는 털뭉치를 길게 늘어뜨린 전립을 쓰며, 소고수는 종이 댕기를 단 전립을 쓰고, 농기나 영기를 든 사람들은 종이꽃으로 장식한 종이 고깔을 쓰는 것이 특징이다. 이 밖에도 대촌동 칠석마을의 고싸움놀이도 유명하다.
당산제와 별신제가 행해지는데, 풍향동의 웅진마을과 청룡마을의 당산제가 대표적이다. 당산제는 마을의 중앙이나 앞에 위치한 신목을 대상으로 행하며, 마을의 유력한 남자 중에서 부정이 없는 사람을 골라 제관으로 삼고, 정성껏 제물을 준비한다.
제사 지내는 절차는 다른 지방과 같다. 그러나 제사가 끝난 뒤에 희생물 머리를 흰 종이에 싸서 땅 속에 묻는 것과, 제의가 정월 상순의 상술일(上戌日) 한밤중에 행해진다는 점이 다르다. 제사 후에는 참석자들이 음복한다.
별신제는 제사를 받지 못하는 여귀(厲鬼)를 위한 것으로 마을 근처의 정결한 장소를 골라서 행한다. 별신제는 본래 당산제를 지낸 3일 후에 당산제를 주관한 제관이 같은 방법으로 행했으나, 근래에는 당산제와 같은 날에 행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별신제의 제물은 음복하지 않고 모두 땅에 묻거나 물에 뿌리는 점이 당산제와 다르다. 이 밖에도 광주 사직공원에 있었던 사직단과 무등산 신사 및 무등산의 용추에서는 기우제가 행해지기도 했으며, 전염병이 유행할 때는 제액제도 지냈다고 한다.
설화·민요
이 지방에 전래되는 전설로 먼저 후백제를 세운 견훤의 탄생설화를 들 수 있다. 광주 북쪽 마을에 순실이라는 예쁘고 얌전한 처녀가 살고 있었는데, 밤이면 방안에 상서로운 기운이 감돌면서 푸른 옷을 입은 남자가 나타나 정을 통하고 사라지곤 했다.
이를 눈치 챈 순실의 부모는 명주실을 꿴 바늘을 그 남자의 옷깃에 꽂아놓게 하고, 그 이튿날 이 명주실을 따라가 보니, 담 밑 구멍에 커다란 지렁이 한 마리가 허리에 바늘이 꽂힌 채 죽어 있었다. 그 뒤 순실은 태기가 있어 옥동자를 낳았는데, 이 아이가 바로 견훤이라는 것이다.
지금은 없어져버린 경양지(景陽池)의 유래에 관한 전설은 다음과 같다. 어느 해 광주에 큰 흉년이 들어서 마을사람들이 모두 굶주리게 되었으나, 인색하기 짝이 없는 효천면 김부자는 창고에 곡식을 가득 쌓아두고도 모르는 척했다. 이에 효자 박경양은 홀어머니가 굶주리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김부자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으나 도리어 김부자에게 매를 맞아 죽고, 그 어머니 또한 울분을 안고 숨을 거두었다.
그뒤 김부자는 온갖 재앙을 당하게 되는데, 그 재앙에서 벗어나려면 가뭄을 막을 수 있는 큰 연못을 만들어야 한다는 박경양 어머니의 계시를 받는다. 이 때 만든 연못이 바로 경양지로, 박경양의 넋을 기려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신안동태봉산(胎峰山)의 유래에 관한 전설이 있다. 이괄(李适)의 난을 피해 공주로 몽진한 인조가 피난지에서 왕자를 얻고 그 태를 계룡산에 묻었다. 그러나 계룡산이 사악한 땅이었기 때문에 왕자의 건강이 좋지 않았다. 이에 그 액을 없애기 위해 계룡산 노승의 계시에 따라 그 태를 무등산 아래의 태봉산으로 옮겨 묻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밖에도 증심사의 연기설화, 김덕령에 얽힌 이야기, 무등산과 법사 원광(圓光)의 이야기, 개미의 허리가 잘록하게 된 내력, 옥답 석섬지기의 내력 등이 전해진다.
광주는 모든 분야에서 전라남도 발전의 중추적 구실을 해왔으므로 이 지방 나름의 토속적인 전통민요를 찾아보기는 매우 힘들다. 다만, 현재의 광주가 역사적으로 광산구와 밀접한 관계를 가져왔기 때문에 광산구의 민요와 같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 고장에 구전되고 있는 민요는 일반적으로 노동요·내방요·정련요(情戀謠)·타령·동요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노동요에는 남성의 노동요인 「농부가」와 「풍년가」가 있고, 여성의 노동요인 「물레노래」가 있다. 내방요는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 아녀자의 한을 노래한 「팔자노래」와 시집살이의 고단함을 노래한「시집살이노래」가 있다.
「팔자노래」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대추나무 반발통에/ 님의 빨래 담아 이고/ 청배나무 방망이에/ 은 또아래 받치오고/ 진주라 길가목에/ 앉기 좋은 청석돌에/ 어기동동 씻노라니/ 앉아 봐도 님이 가고/ 서서 봐도 님이 가네/ 둘러 가소 둘러 가소/ 님아 님아 둘러 가소/ 나 자는 방에/ 잠 한숨만 둘러 가소.”
정련요로는 임에 대한 짝사랑을 노래한「상사요」와 「치정요」·「주머니노래」·「정요 情謠」 등이 불렸다. 다음은「정요」의 일부이다. “원앙금침 잣물베개/샛별같은 놋요강을/발치 밑에 던져 놓고/다흥대던 한이불을/허리만치 걸쳐놓고/님도 눕고 나도 누워/저 불 끌 이 뉘 있는가/벽상 아래 지치파리/너나 가서 저 불 끄지.”
타령으로는 화초타령의 일종인「도라지타령」을 비롯해「신고산타령」·「노랫가락」·「육자배기」 등이 있다.「육자배기」의 가사 일부는 다음과 같다. “떠들어 온다네 떠들어 오네/ 강상배 일 척이 떠들어 온다/ 강상에 둥둥 떴는 배/ 서성정봉의 밴줄로만 알았드니/ 자룡이 군사싣고 가는 병선이로구나/ 임잃고 임생각하니/ 주야장천에 꿈몽자요/ 생각 사 탄식 탄하니/ 베개 넘어 눈물 누라/ 앉았으니 임이 오며/ 누웠으니 잠이 올까/ 임도 잠도 다 아니오고/ 요내 심장만 썩는구나/ 우리도 언제나/ 수궁에 걸린 저 달을 따라/ 임의 창전에 비칠까나/ 연 걸렸고나 연이 걸렸고나/ 오가피 상나무에 연 걸렸고나/ 삼척에 동자들아 연 날려라.”
동요에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다음은「바람요」이다. “바람이 부네 바람이 부네/ 준령태산에 바람 부네/ 바람아 바람아 불지 마라/ 불기 좋다고 불지 마라/ 우리 님이 놀기 좋다는/ 정자나무 잎이 다 떨어지네.”
산업·교통
호남지방의 행정·상업 및 교통의 중심지일 뿐 아니라 호남문화의 산실이기도 하다. 산업별 취업자 현황을 보면 농림어업이 2.8%, 광공업이 12.5%, 사회간접자본 및 서비스업이 84.8%이다(2007년). 농업은 농경지면적이 1만 1941㏊(2007년 현재)로 논과 밭의 비율이 3: 1이며, 농가는 1만 2798가구로 전 농가의 60.7%가 전업농이고, 농업인구는 3만 9949명이다. 경제활동인구 중 농업이 차지하는 비율이 약 4.3%로 그 비중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 지역의 농경지에는 평동저수지와 서창저수지 등이 관개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광복 전에는 주로 쌀·보리·콩·수수와 면화·대마 등이 생산되었으나, 광복 후 대도시로 성장함에 따라 도시생활에 필요한 각종 소채류를 생산하는 근교농업이 크게 발달하게 되었다.
광산구지역에서는 넓은 들에서 벼농사와 시설원예농업을 하는데 주로 고추·상추·쑥갓과 밭에서는 무·배추의 수확이 끝나면 수박·참외 등을 재배한다. 최근에는 화훼수요의 증가로 국화·백합 등을 재배해 대도시로 반출된다. 무등산에서는 수박과 춘설차도 생산된다.
공업은 시의 역사나 규모에 비해 발달하지 못했다. 조선시대에는 종이·가구·붓·먹·화살·활통·북 등 생활용품의 자료와 완제품들을 만들어내는 공장들이 있었다. 광주북·진다리붓·각궁(角弓) 등은 현재도 전통공업으로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근대공업의 발달은 인근 지역에서 생산되는 면화와 양잠을 원료로 하는 방직·제사업이 일어나면서 시작되었다. 광복 당시는 방직공업이 전체 공업의 3분의 2를 차지했는데, 이는 원료와 노동력을 착취하려는 일제의 식민지 공업정책의 결과였다.
1960년대를 지나면서 주업종이 기계·금속·섬유·화학공업 등으로 다양해졌다. 서구 광천동 일대에 1969년 43만 5000여 평 규모의 광주공업단지가 조성되었으나 현재는 시가지의 확대로 공장이 시 외곽지역으로 이전하고 자동차 관련업종만 남아 있다.
‘광주권생산도시화운동’이 본격화된 1978년 이후 지역 상공인들이 자력으로 조성한 최초의 공단인 송암·본촌공단이 준공되었다. 송암공단은 1975년광주시가 당시 도심에 산재해 있던 29개 연탄공장에서 생기는 공해를 없애고, 연탄 생산능력을 높여 수급의 안정을 기하기 위해 대단위 연탄공장을 설립함으로써 조성되었다. 1983년 12월에 준공된 송암공단은 11만 9,000평의 부지면적으로 조립금속·화학·금속·섬유 등 64개 업체 중 58개 업체가 가동 중이고 6개 업체는 휴업 중이다. 종업원수는 1,317명이다.
1983년 준공된 본촌공단은 28만 3,000평의 부지면적으로 식품, 조립금속, 섬유제품, 목재 및 나무제품, 화학제품, 비금속, 보관, 창고, 운송, 기타 제조업 등의 112개 입주업체가 있다. 1983년 5월 준공된 소촌공단은 5만 7,000평으로 음식료품, 섬유의복, 석유화학, 비금속광물, 1차금속, 조립금속, 보관, 창고, 운송 등 57개 업체가 입주해 있다. 1988년 12월 준공된 소촌농공단지는 9만 8,000평으로 음식료품, 섬유의복, 석유화학, 비금속광물, 1차금속, 조립금속, 보관, 창고, 운송 등의 43개 업체가 입주하고 있다.
하남공단은 지역산업의 구조조정을 위해 IBRD 차관을 도입하여 조성된 산업단지로 180만 4000평의 규모로 1983년에 1차단지가, 1989년에 2차단지가, 1991년에 3차단지의 조성공사가 완료되었다. 1차단지는 금속·화학·음식품 등 142개 업체가 있고, 2차단지는 조립금속·화학 등 231개 업체가 입주해 있다. 3차단지는 조립금속·식품·화학 등 304개 업체가 가동 중에 있다.
평동공단 1차단지는 48만 9000평에 1995년 조성공사를 완료해 음식물, 목재·종이, 석유·화학, 비금속, 1차금속, 조립금속, 전기전자 등 127개 업체에 분양되어 112개 업체가 가동 중이다. 평동외국인기업전용공단은 1995년 8월 37만 3,000평을 준공해 음식물, 석유·화학, 목재·종이, 비금속, 비금속, 기계, 전기전자, 운송장비 업종의 49업체가 분양 받아 38개 업체가 가동 중에 있다. 첨단산업단지는 총 용지면적 240만 평 중 산업용지는 51만 8000평으로 석유화학, 기계, 전기전자, 운송장비 등의 201개 업체가 입주하여 152개 업체가 가동 중에 있다.
광주의 경제활동인구는 48만 9000명으로 이 중 취업자수는 농림업 2만 7000명, 제조업 6만 9000명, 사회간접자본 및 서비스업 42만 3000명, 실업자수 1만 5000명으로 실업률은 2.8%이다. 수출 현황은 약 18억 5000만 달러로 전국구성비의 1.4%를 차지하고 있다.
주요 수출품으로 전기·전자, 철강·기계, 섬유·고무 제품이 약 97%를 차지하며, 지역별로는 아시아, 유럽, 대양주·중남미, 미국 순이다. 1995년 현재 수입액은 11억 9000만달러이다.
광주시의 상업기능은 간선인 호남선과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일제가 자원을 반출하기 위해 광주 대신 항구도시인 목포의 개발에 치중함에 따라 광복 전까지는 전라남도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하지 못했다.
광복 후 도청 소재지로서 행정과 상업기능을 회복하고, 특히 1952년상무동에 군 장교 교육기관인 상무대(尙武臺)가 자리 잡은 후 군인을 대상으로 한 소비경제가 늘어났었다. 상무대는 현재 장성군으로 이전하였고 그 터에 상무지구라는 대단위 주금융기관은 한국은행을 포함해 186개 지점이 있다. 현재도 제3차 산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약 79%로 소비도시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금남로를 중심으로 한 단핵의 도시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대도시보다 교통문제가 심각하다. 도로망은 관청·금융 등 중심업무기능을 담당하는 기관들이 집중된 금남로를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나 도시화가 진전되면서 도심 외곽지역으로 시가지가 확대되고 새로운 주택단지가 건설되면서 도로망이 도시 외곽으로 뻗어가고 있다.
도로는 총연장 1,604㎞로 고속도로가 17㎞, 일반국도가 93㎞, 시도가 1,494㎞를 차지하고, 이 도로 중 99.9%가 포장되어 있다. 제1순환도로가 개통되어 교통체증을 많이 해소시켰고, 외곽에 제2순환도로가 2007년에 개통되었다.
지하철 1호선 공사가 1996년 2월 28일에 기공식을 하여 2004년 4월 28일에 1호선 1구간 녹동역∼상무역이 개통되었고, 2008년 상무역에서 평동역까지 1호선 2구간이 개통되었다. 순환선인 2호선과 백운광장∼서방시장∼첨단지구로 연결되는 3호선 공사가 완공되면 광주시의 교통체계에서 지하철을 중심으로 한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이다. 또한 호남고속도로가 광주시를 통과해 남해고속도로, 광주대구고속도로와 연결된다. 그리고 광주를 기점으로 목포·순천·서울·대구 등지로 이어지는 국도와 광주의 주변지역으로 연결되는 지방도가 있다.
육상교통 중 도로교통은 도심에 분산되어 있던 고속버스터미널과 시외버스공용터미널을, 광천동의 광주공단이 주변공단으로 이전한 터에 광천동종합버스터미널로 통합·확장해 이용자들이 편리하게 되었다.
철도교통은 호남선 철도가 1914년에 개통되었고, 송정역에서 광주를 잇는 철도가 1922년에, 1934년에 광주∼여수간 철도가, 광주∼담양간 철도가 개통되었으나 일제강점기의 태평양전쟁 시기에 철거되어 현재는 곳곳에 노반만이 남아 있다.
호남선 중에서 대전에서 송정역까지는 복선화가 이뤄졌고, 송정리역에서 목포역까지 복선화 공사가 2003년 완공되어 전 구간이 복선화되었다. 도심의 발전에 많은 장애를 가져온 경전선의 도심 통과 부분 중 효천역에서 광주역까지 구간을 철거하고 경전선과 호남선을 연결하는 구간이 신설되었다. 경부고속철도가 2004년 4월 1일 개통되어 광주역에서도 KTX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광주역에서 신탄진의 경부고속철도 접속구간까지는 기존의 선로를 이용하지만 2006년부터 호남고속철도 사업이 시작되어 오송∼광주구간은 2015년, 목포까지는 2017년까지 건설될 것이다. 현재 광주의 여객열차의 운행은 광주역∼용산역 구간은 KTX 왕복 10회, 새마을호 왕복 3회, 무궁화호 왕복 4회, 광주역∼목포역 구간은 무궁화호 2회로 총 왕복 19회, 목포역∼송정리역∼용산역 구간은 KTX 왕복 8회, 새마을호 왕복 2회, 무궁화호 왕복 6회, 송정리역∼순천역 구간은 무궁화호 왕복 4회로 총 20회가 운행되고 있다.
현재 중흥동에 있는 광주역사는 1961년 1월에 도심의 대인동에 있던 구역사를 이전한 것으로 철도수송은 여객이 약 115만 명, 화물이 8098만 톤(2007년 현재) 정도이다. 항공교통은 광주공항을 통해 서울·제주와 연결되고 있다. 해외로는 광주·상해 노선 등이 정기·부정기적으로 운항되었으나, 2007년 무안국제공항이 신설됨에 따라, 국제선의 기능은 완전히 이전되었다. 광주공항이용 여객은 약 140만 명, 국제선은 12만 명, 화물은 2159만 톤(2007년)이다. 광주공항의 국내선 여객은 2004년 4월 1일 KTX의 개통으로 해마다 감소하는 추세이다.
관광
광주광역시는 예향의 본고장답게 ‘맛’과 ‘멋’이 어우러진 남도의 중심도시이다. 예로부터 광주는 문화예술의 도시로 불리우며 남도문화를 이끌어왔다. 맛깔스런 남도음식은 빼어난 맛과 넉넉한 인심을 보여주고 있으며,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중심지역이였던 충장로와 금남로는 도심관광의 중심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또한 광주는 무등산국립공원과 가사문화권을 비롯하여 다양한 자연적·사회문화적 관광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시의 동남쪽에 위치한 무등산은 불과 10㎞ 거리에 있는 천연관광지로서, 이 산에는 증심사·원효사·약사암·규봉암 등의 사찰이 있으며, 900여 종의 식물도 분포하고 있다. 또 증심사계곡·원효계곡 등은 물이 시원하고 수림이 울창해 광주시민이 즐겨 찾는 유원지이다.
특히 1990년 4월부터 출입이 개방된 무등산의 3대 절봉인 서석대·입석대와 규봉이 10여m 높이로 솟아 병풍처럼 장엄하게 둘러쳐져 장관을 이루고 있다. 광주시내에서 무등산장과 증심사 입구까지 시내버스가 운행되고, 인근에 숙박시설도 잘 되어 있으며, 음식으로는 영계백숙과 보리밥이 유명하다.
호남고속도로 서광주인터체인지 입구에 있는 중외공원문화벨트지역은 신안 앞바다에서 인양된 송·원대의 도자기 유물 등 남도의 각종 유물이 전시된 국립광주박물관, 어린이공원과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문화예술회관, 광주비엔날레 전시관이 있다.
광주의 축제는 5대축제와 구에서 주관하는 지역축제가 있다. 5대 축제는 광주비엔날레, 광주디자인비엔날레, 임방울국악제, 광주김치대축제, 광주국제영화제가 있고, 지역축제로 동구의 7080·충장로축제, 서구 만드리 풍년제, 남구 칠석동 고싸움놀이 대축제, 북구 자미축제가 있다. 광주의 대표적인 축제인 광주비엔날레는 1995년에 광복 50주년과 ‘미술의 해’를 기념하고 광주의 예술 전통과 5·18광주민중항쟁 이후 국제사회 속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광주 민주정신을 새로운 문화적 가치로 승화시키기 위하여 창설되어 중외공원문화벨트 일원에서 2년마다 개최되고 있다. 광주 비엔날레는 문화·민주도시 광주를 매개로 한국·아시아·세계가 동시대 문화와 미래 비전에 대한 교류의 장을 펼치는 국제적 미술문화 축제의 장으로 9월부터 11월에 걸쳐 개최되어 국내외의 많은 관람객이 방문하고 있다.
광주시의 주요한 관광자원의 하나는 예향이라는 도시의 문화적 유산이다. 무등산 산자락을 타고 꽃피운 찬란한 가사문학이 ‘예향’의 대표적 상징이다. 송강정철의 ‘성산별곡’으로 유명한 식영정과 면앙정, 환벽당, 조선시대 대표적 민간정원인 소쇄원 등이 가사문학권을 형성해 목적관광지로 인기가 높다. 10월 중순에 개최되는 광주김치대축제 등이 새로운 이벤트 관광으로 대두되고 있다. 그리고 5·18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됨으로써 전남도청 앞 분수대 등 5·18과 관련된 장소들이 관광지로 개발되고 있다.
우치공원은 사직공원에 있던 동물원을 이전·확장하고 패밀리랜드라는 놀이시설을 갖추고 있다. 기타 관광지로 포충사·충장사·광주향교, 1997년 11월 3일 새로 단장한 학생독립운동기념탑·광주공원·사직공원 등이 있다.
광주시는 아시아문화중심도시로 조성하기 위한 사업이 추진 중에 있다. 2004년 3월 대통령 소속 문화문심도시조성위원회가 발족하여 약 2조원의 사업비를 투여하여 2023년까지 사업이 진행될 것이다. 이 사업을 위한 핵심과제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을 구 전남도청 일대에 건립하여 문화를 통한 국가균형발전의 실현, 문화 발전을 통한 국가 발전 동력의 창의성의 실현, 아시아문화중심도시를 통한 국가 수준의 문화발전을 도모하고자 한다.
구(區)
1. 광산구(光山區)
시의 서부에 위치한 구. 면적 222.90㎢, 인구 40만 753명(2015년 현재). 구청 소재지는 송정동이다. 1931년광주면이 광주읍으로 개칭되었다가 1935년에 부로 승격됨에 따라 광주군을 광산군으로 부르게 되면서 오늘날의 광산군이 광주와 분리되었다. 1937년에는 송정면이 송정읍으로 승격되고, 1949년나주군 관할이던 평동면·삼도면·본량면의 3개 면을 편입하였다.
1955년에는 효지·석곡·극락·서방의 4개 면을 광주시로 이관하고, 1957년에는 지산·대촌·서창면을 광주로 이관시킴으로써 1읍 7면으로 크게 위축되었다. 1962년에 광주로 이관되었던 대촌면과 서창면이 다시 환원됨으로써, 1읍 9면의 행정구역을 가지게 되었다. 1986년송정읍이 시로 승격되고, 1988년 읍·면이 광주직할시 광산구로 편입되었다. 1993년에 하남출장소가 하남출장소와 월곡동으로 분동되고, 1995년에 서창출장소와 대촌출장소가 각각 광주직할시 서구와 남구에 편입되었다. 1997년에 비아출장소를 비아동과 신가동으로 분동하고 첨단지소를 설치하였고 1998년에 출장소를 동으로 전환하였다. 현재 19개 동이 있다.
서북부지역에는 용진산(349m)을 비롯해 망산(270m)과 석문산(227m)이 있고, 서남부에는 복룡산(227m)이 장성군·함평군과 경계하고 있으나, 대부분의 지역이 낮은 구릉지대와 평야지대이다. 특히, 동쪽지역은 영산강의 지류인 극락강이 흐르고 낮은 평야가 전개되며 높이 30∼50m의 구릉이 많다. 서쪽지역은 황룡강이 흐르고 연안에 비옥한 평야가 넓게 전개된다.
소촌공단, 하남공단, 평동공단, 첨단산업단지의 공업단지가 있어 광주의 생산도시적인 기능을 강화하고 있다. 1983년 5월 준공된 소촌공단은 5만 7,000평으로 57개 업체가 입주해 있다.
하남공단은 180만 4000평 규모로 1983년에 1차, 1989년에 2차, 1991년에 단지 조성공사가 완료되었다. 1차단지는 금속·화학·음식품 등 142개 업체가, 2차단지는 조립금속·화학 등 231개 업체가, 3차단지는 조립금속·식품·화학 등 304개 업체가 입주해 있다.
평동공단 1차단지 48만 9,000평이 1995년 조성되어 2006년 현재 127개 업체에 분양되어 112개 업체가 가동 중에 있다. 평동외국인기업전용공단은 1995년 8월에 37만 3000평이 준공되어 49개 업체가 분양받아 38개 업체가 가동 중이다. 첨단산업단지 총용지면적 240만 평 중 산업용지는 51만 8000평으로 201개 업체가 입주하여 152개 업체가 가동 중이다.
교통은 철도는 호남선이 구의 서쪽을 남북으로 달리며, 송정리에서 광주선이 분리되어 순천에 이른다. 도로는 호남고속도로가 구의 북부와 연결되고, 국도와 지방도를 통해 나주·영광·장성으로 이어진다. 광주공항을 통해 서울·제주와 연결되고 해외로는 부정기적으로 운항되고 있다.
문화유적은 신룡동에 오층석탑, 양림사지부도, 양송천의 묘역, 빙월당, 고씨삼강문, 월봉서원, 대치서원(大峙書院)이 있다.
광산구에는 19개의 행정동과 79개의 법정동이 있다 19개 행정동은 송정1동·송정2동·도산동·신흥동·어룡동·우산동·월곡1동·월곡2동·비아동·첨단1동·첨단2동·신가동·운남동·하남동·임곡동·동곡동·평동·삼도동·본량동이다. 법정동은 송정(松汀)·도산(道山)·황룡(黃龍)·신촌(新村)·도호(道湖)·선암(仙巖)·운수(雲水)·서봉(西峯)·박호(博湖)·소촌(素村)·우산(牛山)·월곡(月谷)·산정(山亭)·비아(飛鴉)·도천(道泉)·수완(水莞)·월계(月桂)·쌍암(雙巖)·월산(月山)·신창(新昌)·신가(新佳)·운남(雲南)·하남(河南)·진곡(眞谷)·오선(鰲仙)·장덕(長德)·흑석(黑石)·신룡(新龍)·두정(斗亭)·광산(光山)·오산(烏山)·사호(沙湖)·하산(下山)·유계(柳溪)·본덕(本德)·용봉(龍峰)·효기(堯基)·복룡(伏龍)·송대(松大)·옥(玉)·월전(月田)·장록(長錄)·송촌(松村)·지죽(芝竹)·용(龍)·용곡(龍谷)·지정(池亭)·명화(明花)·동산(東山)·연산(蓮山)·도덕(道德)·송산(松山)·지평(芝坪)·오운(五雲)·삼거(三巨)·양(良)·내산(內山)·대산(大山)·송학(松鶴)·신(新)·삼도(三道)·남산(南山)·송치(松峙)·산수(山水)·선(仙)·지산(池山)·왕
첫댓글 잘했네요.
내용이 좋긴 한데 너무 많다~^^
신문 만들 부분만 요약해서 올리면 더 좋을듯~^^
어질어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