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런 게 그때도 있었더라면 / 김주남
처음엔 뭐 요런 게 다 있을까 싶었다. 얄밉도록 귀여운 캐릭터가 앙증맞은 짓을 해댔다. 이모티콘이라 했다. 이마를 짓찧으며 감사를 표시하고 샐쭉 토라지고 떼굴떼굴 구르고 뚝뚝 눈물 흘린다. 발길질하고 머리에 김이 오르기도 하며 짐짓 화가 났음을 알린다. 가만히 등을 쓰다듬으며 위로하기도 한다. 고것들이 하는 양을 보고 있으면 섭섭했던 감정도 속상했던 마음도 어느새 스르륵 풀어지곤 한다. 그때도 요런 게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자꾸만 생긴다.
오래전에 한 경상도 여자가 경상도 남자와 맞선이란 걸 보았다. 남자가 말했다. “다음 주에 한 번 들르겠습니다.” 다음 주에 한 번 다녀간 후 남자는 그다음 주에는 두 번, 또 그다음 주에는 세 번, 그리고는 매일 기차를 타고 여자를 만나러 왔다. 나중에는 연락도 없이, 매일, 당연히. 기차가 닿는 시각이 약속 시각이었고 막차가 떠나는 시간이 헤어지는 시각이었다. 여자도 점점 거울 앞에 서는 시간이 길어졌다.
전산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던 때라 여자는 야근해야 할 일이 많았다. 동기회며 동문회며 모임도 많았고 갑자기 부서 회식이 잡히기도 했다. 휴대전화도 없던 시절, 몇 번을 거쳐야 통화가 되는 남자의 직장으로 오늘은 딴 약속이 있다고 전화를 하기도 쉽지 않았다. 일하다가 시계를 보면 이미 기차가 출발한 후이기 일쑤였다. 도심을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펼쳐진 방사형 도시는 사람들이 몰리는 장소가 좁았다. 몇 달이 지나자 “엊저녁 그 키 큰 남자는 누고?” 여기저기서 물어댔다. 남자를 만난다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인사철이 되었고 여자는 인사이동 대상이었다. 마지막 학년을 더 다녀야 했던 학교 가까운 곳으로 발령 신청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도 깊어졌다. 남자는 말이 없었다. 언제나 그랬듯 여자가 무슨 말인가를 할 때마다 곧잘 웃을 뿐이었다. 여자는 인사이동이 있기 전에 어느 쪽으로든 결정을 내려야 했다.
“자꾸 이래 오마, 내 델꼬 갈 낍니꺼? 아니면 그만 오든동!”
여자가 불퉁거리며 말했다.
“그라마!”
남자도 불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었다. 어른들을 다 같이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남자의 아버지가 대뜸 “청혼하지요!” 하자 여자의 아버지가 바로 “허혼하지요!” 대답했다. 당장에 날이 잡혔고, 예식장을 잡았고, 그리고 여자는 남자가 있는 B시로 발령이 났다.
정신없이 시간이 흐르고 여자는 아무래도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그렇게나 급하게 얼렁뚱땅, 일생일대 단 한 번 있는 가장 의미 있는 시간이 지나가 버렸다니. 그것도 “그라마!” 그 한마디에 기대어. 어찌 보면 참 모호한 그 한마디에 너무 관대한 해석을 내렸던 건 아니었을까? 황홀한 고백까진 아니라 해도 한번은, ‘사랑한다’ 그 흔한 한마디는 들었어야 했다는, 아니 지금이라도 들어야겠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래야 남은 시간을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쩐 일인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평소 웃음기 많고 조곤조곤 이야기를 잘한다는 평을 듣던 여자였지만 어쩔 수 없는 경상도 여자였다. 용기를 내자고 스스로 독려하며 여자가 어렵게 입을 뗐다.
“내가 밉나?”
일 초도 숙고 없이 남자가 대답했다.
“안 밉다!”
그뿐이었다. 그래도 어찌어찌 세 아이를 낳아 키우며 또 세월이 흘렀다.
꽃보다 예쁜 남자들이 나오는 드라마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매회 TV 앞을 지키게 하던 드라마가 환상적인 프러포즈를 끝으로 종영되었다. 마지막 장면을 황홀하게 바라보던 여자는 드라마와 ‘그라마’가 비교되지 않을 수 없었다. 더 늙기 전에 한 번만 더 물어보기로 했다. 어떻게 물어야 낯 간지럽지 않을까를 고민하던 여자가 딴엔 머리를 굴리다가 기습적으로 물었다.
“내가 좋나?”
“보마 모리나!”
남자는 이번에도 불퉁거리며 숫제 골을 내며 대답했다.
‘그라마’와 ‘보마 모리나. 어찌 보면 꼭 프랑스 말 같기도 한, 두 마디를 껴안고 여자는 어느새 노년의 문턱이라는 갱년기에 이르고 말았다. 여자는 이제 더는 묻지 않는다. 다시 묻는다 해도 여자가 듣고 싶은 말 한마디를 분위기 있게 해줄 위인이 아니기도 했지만, 여자도 이제는 그냥 그러려니 하게 되었다.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고 그냥 서로를 산다는 시 구절에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만, 방방 뛰고, 촐싹대고, 조아리고, 하트를 쏟아내는 저 곰살맞은 이모티콘이라는 것이 그때도 있었더라면 나도 남편도 감정표현이 조금은 쉬웠으려나 자꾸 아쉬운 생각이 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