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보(年譜) 쓰기 / 이호규
1) 며칠 전 지방에 있는 친구의 사무실을 방문했다. 낙동강 전승 유적지가 내려다보이는 나지막한 언덕 위에 있는 사무실은 전망이 좋았다. 새로 만든 사무실에 갤러리를 만들었는데 사진 D/P 상태를 한 번 봐달라고 했다. 아파트 3층 높이의 대형 창고 2동과 사무실 건물이 넓은 부지 위에 나란히 서 있었다. 전국을 무대로 토목 관련 사업을 하는 관계로 장비와 자재들이 창고를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창고 한쪽 공간에 일부를 복층으로 만들어 아담한 갤러리를 만들어 놓았다.
2) 갤러리는 ‘OO산업 연구소’를 겸하고 있었다. 약 50평 규모의 공간에 창문을 제외한 모든 벽면에 크고 작은 사진 액자가 촘촘하게 걸려있었다. 자세히 둘러보니 본인의 성장기부터 시작하여 여러 방면의 지인들과 함께 찍은 사진부터 그동안 시공했던 공사 현장의 사진이었다. 넓은 화이트보드에는 작은 글씨로 출력된 본인이 직접 시공한 1,000여 개의 공사계약 리스트도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또한, 벽 아래쪽 바닥에는 어릴 때 타던 스케이트부터 공사 현장에서 사용하는 자재 샘플 까지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3) 그는 예전에 사설 테니스코트를 운영했었다. 동호인들에게 코트도 빌려주며 레슨도 직접 했다. 언제부턴가 코트 대여에서 벗어나 코트를 만드는 시설 공사 사업에 진출했다. 지금은 전문건설업체로 성장했다. 건설 토목업을 함에도 원칙에 어긋나지 않고 신의와 성실로 일관되게 일해 왔다. 2000년 중반 히딩크 감독과의 특별한 인연으로 그의 사업은 날개를 달았는 듯하다. 그가 시공한 사업장을 둘러보고 여기저기서 문의가 들어왔고 까다롭다고 소문난 대기업과 관공서 체육 시설들을 꾸준하게 시공해왔다.
4) 아들이 가업 승계를 위해 귀향했다. 서울 유명대학 경영학부를 졸업한 아들이 군 제대 후 대기업 취업을 마다하고 부모가 하는 사업 현장에 뛰어들었다. 주로 토목공사가 많은 사업 현장 일이지만 아들은 미래를 보고 아버지의 사업을 돕겠다고 나섰다. 계약 등을 위해 거래처를 방문할 때면 담당자들이 모두 젊은 사람이라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던 그에게 천군만마가 되었다. 젊은이답게 복잡한 업무들을 IT와 연계하여 원활히 처리하는 민첩성도 보여주어 믿음직하였다. 친구는 사무실 일은 아들에게 맡기고 전국 사업 현장을 뛰어다니며 일꾼들과 함께 땀을 흘리고 있다.
5) 아내에게 대표이사 자리를 물려주었다. 가정주부이던 아내에게 수년 전부터 경력 관리를 위해 필요한 자격증을 취득하게 했다. 그동안 못다 한 학업도 계속하도록 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회사의 대표이사 자리를 아내 명의로 넘겼다. 주식 증여에 따른 세금까지 부담하면서 아내에게 성취감을 주기 위해 자리를 과감하게 넘겼다. 친구의 명함에는 ‘일꾼’이란 단 한 줄만 표시되어 있다. 사무실 한쪽에는 아내가 그동안 취득한 자격증과 졸업장, 수료증 등으로 가득 채운 목재 책장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6) 이 모든 것은 친구의 ‘연보 쓰기’였다. 연보 쓰기라는 것을 들어보지 못한 공사 현장의 책임자지만 수백 장의 사진으로 지금까지 본인 인생 전부를 체계적으로 잘 정리해 놓았다. IMF와 금융위기를 넘기면서 거래처의 연이은 부도로 큰 어려움을 겪었지만 부부가 합심하여 잘 극복하고 현재의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사업을 시작하면서 이윤에 집착하지 않고 성실히 시공해준 결과 전국에 걸쳐 많은 사업을 연속적으로 수주하게 된 것 같다. 벽면에 걸려있는 수많은 사업 현장 사진을 보면 그의 수십 년 세월이 그대로 녹아 있다.
7) 갤러리를 나오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그는 바쁜 사업 현장 속에서도 잊지 않고 연보 쓰기를 차근차근 준비한 것이다. 공사 현장 사진 촬영에 대해 여러 번 질문을 받은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꼼꼼하게 작업했는지 몰랐다. 이제는 자녀에게 사업체를 물려주기 위해 자신의 지나온 발자취를 조금씩 정리하고 싶었던 것 같다. 딸아이도 외국계 유명 기업의 공인회계사(CPA)로 근무하며 아버지의 사업에 직간접으로 도움을 주고 있다. 히딩크 재단과의 사업연결에 핵심 역할을 한, 영어 실력이 특출한 딸 아이가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8) 수필을 배우며 연보 쓰기의 중요성에 대해 수없이 들었다. 지나온 삶의 복잡한 겉옷을 벗어 던지고 발가벗은 참모습을 보여야 하건만 여전히 그 벽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좋아하는 사진 촬영도 연보를 적듯이 대상의 아름다움만 앵글에 담지 말고, 피사체 뒤에 숨어있는 내면의 가치를 찾기 위해 더 사유하고 발품을 팔아야겠다고 다짐해본다. 스스로 묘비명에 짧은 연보를 적는 심정으로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흔적들을 조금씩 정리해 보아야겠다. 친구의 멋진 연보를 보며 새로운 도전을 받게 되는 귀한 방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