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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흑전黑田 일본의 쿠로다くろだ A
| 김영재
1. 일본미술과 흑전청휘黑田淸輝003-004
05-1조선의흑전 일본의 구로다
2. 조선-대만-일본의 양화------011
05-1조선의흑전 일본의 구로다
3. 세 가지 향토색----------018
05-2조선의흑전 일본의 구로다
4. 한국미술과 흑전청휘黑田淸輝 ---------------025
05-2조선의흑전 일본의 구로다
5. 한국미술기록과 흑전청휘黑田淸輝-----------032
05-3조선의흑전 일본의 구로다
6.결어-----------037
05-3조선의흑전 일본의 구로다
7. 외래어 인명-모임-어휘 등 한글 음독 순
05-3조선의흑전 일본의 구로다-------------040
조선에서 양화洋畵라고 부르는 서구西歐의 미술은 인상주의印象主義였고 일본화한 프랑스 미술이었고 조선의 유일무이한 영향원이었다. 조선은 그 입맛에서 서구미술을 동경하고 추수했다. 그 변곡점變曲點에 흑전청휘黑田淸輝쿠로다 세이키くろだ せいき가 있었다...고 했다.
洋畵と日本畵-近代の美術2 高階秀爾 陰里鐵郞 田中日佐夫 編著 講談社 1992-0黑田淸輝 舞妓 1893
이 단순한 도식이 한국인의 머리에 자명한 진리로 각인된 데는 미술사나 미술 이론은커녕 체계화된 기초자료조차 불비不備한 미술판의 영향이 컸다. 부실한 자료와 선입견 또는 양반취향의 수필조와 주정적 논리진술이 용인될 수 있었던 사회상 역시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
조선의 양화가 태동했던 20세기 미술은 사진술-카메라의 발명에 따라 재현再現의 의의가 퇴색하자 현생인류의 텃세로 대두된 인상-표현-이지-무의식-초현실과 추상 등 기계가 할 수 없는 인간의 미술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기계에 빼앗긴 현생인류의 자존심 싸움이었다.
인상-표현을 거치면서 조선인은 일본미술이라는 산파産婆에 의해 억지로 길들여진 프랑스 표 분유粉乳의 맛에 식상하기 시작했다. 앵포르멜Informal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하여 추상표현이라는 애매한 사조에 한국의 입맛을 가미하면서 한국은 주입된 일본제 분유를 걷어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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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한국미술은 오브제Objet와 물질-행위와 설치 및 대지미술의 자기화를 거쳐 다시 표현과 표상으로 회귀하는 세계미술의 순환양상을 따라잡으면서 독자적 세계를 펼쳐나간다. 미술의 암흑시대를 지나면서 징검다리의 형식으로 세계미술과의 대위법적 직조織造를 꾀하고 있다.
1958 장리석張利錫 그늘의 노인 제7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대통령상 김영재 한국양화백년 1988
그러나 한국미술을 떠받칠 수 있는 이론적 구조적 취약성은 오랫동안 발목을 잡고 있었다. 파리화단-일본양화-한국양화라는 수직영향도식을 불문율처럼 만든 한국미술판의 중심에 흑전청휘黑田淸輝가 있었다. 그것은 일본이 만들고 한국인이 주물럭거린 자빠진 신상神像이었다.
일본에서 흑전청휘黑田淸輝는 신성불가침의 위계를 확보하고 판단중지까지 격상되고 있었다. 일본풍토에서나 있을 수 있는 그 기이한 현상을 한국의 일본미술사에서 왈가왈부하는 건 무의미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자빠진 신상에 걸려 넘어져야 되겠느냐는 각성은 없었다.
튼실한 기초자료가 필요했기 때문일 수 있었다. 종적으로 프랑스미술-일본미술에 영향을 준 프랑스 화가 혹은 일본인이 선택한 프랑스화가-일본미술 혹은 일본문화나 체재에 대한 이해가 선결문제였다. 횡적으로는 대만-만주 등 동시대 식민체재하에서의 동종 견해와 정보였다.
그렇게 조선에서 흡수하고 한국에서 뱉어낸 일본의 영향을 진단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것은 일본분유의 젖병을 밀칠 준비작업에 불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젖꼭지를 물고서는 거친 세파를 헤칠 수는 없다는 것이 자명하고 필수적인 과제라는 인식은 보편화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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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미술과 흑전청휘黑田淸輝
05-1조선의흑전 일본의 구로다
일본의 양화는 그 본류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 미술과는 방항과 성취에서 그 궤도가 달랐다. 서구미술의 일본화는 서구미술에 대항하기 위한 실용적인 접근에서 시작하여 일본식 아카데미즘Academism에 대한 전체주의적 기대를 기간基盤으로 하는 구화歐化おうか정책으로 이어진다.
일본양화는 애당초 그 교주고슬膠柱鼓瑟의 범주를 넘어 세계화를 논할 수 있는 체질과 풍토와는 거리가 멀었다. 일본에 유입된 해외미술은 곧 공예풍의 일본색에 녹아들어가고 깊이가 결여된 모더니즘Modernism이라고 자평하는 일본양화로 남아있었다.
그 일본풍 모더니즘Modernism은 16세기 중엽 도산桃山모모야먀ももやま 시대에서 시작된다. 일본근대회화사日本近代繪畫史에 의하면 일본의 근세양화사近世洋畵史는 18세기 강호江戸에도えど시대 중기의 풍경화의 원근법과 초상화의 음영법이 채용되면서 시작된다.
桃山江戶時代的日本繪畫- 雪花新聞j桃山江戶時代的日本繪畫1.jpg
洋畵と日本畵-近代の美術2 高階秀爾 陰里鐵郞 田中日佐夫 編著 講談社 1992-02黑田淸輝1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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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법謝里法ShaihLifa은 대만미술운동사臺灣美術運動史에서 객관적 시각으로 일본-대만-조선의 입장에서 일본미술을 조망한다. 일본에서 보는 일본미술사와 달리 1868년 명치유신明治維新메이지이신めいじいしん이후 대만과 연관의 입장에서 서구유학생이 기록된다.
미술방면으로는 1869년 국택신구랑國澤新九郞구니자와 신구로くにさわ しんくろう-유영留英: 영국유학-1870년 산구청웅山村淸雄야마무라 산손やまむら さんそん및 1878년 산본방취山本芳翠야마모토 호우쓰이やまもと ほうすい의 유법留法:프랑스 유학의 기록을 보인다.
이후 1890년 원전직차랑原田直次郞하라다 나오다로우はらだ なおたろう-흑전청휘黑田淸輝-등아삼藤雅三후지 마사소우ふじ まさぞう-구미계일랑久米桂一郞구메 케이이치로くめ-けいちろう-강창천심岡倉天心오카크라 덴신おかくら てんしんOkakura Tenshin등이 프랑스法國로 유학-서양근대미술의 씨앗이 된다.
YES24 原田直次郞 西洋畵は益益裝すべし 畵家
近代日本洋畵の200年1984-11久米桂一郞裸婦立像1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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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개인私人 화숙畵塾-화실을 열었다. 당시 일본의 미술교육이 상당한 규모였으며, 귀국 서양유학생 대부분이 망라되어 있다.
1869년 청향독화관聽香讀畵館ぞことくがかん-천상동애川上冬崖카와카미 도우가이かわかみとうがい-1873년 고교유일高橋由一 다까바시 유이치たかばし ゆいち의 천회루天繪樓텐카이로우てんかいろう-1875년 국택신구랑國澤新九郞의 창기당彰技堂しょぎど이 설립되었다.
TakahashiYuichたかはしゆいち新潮社1998-7高橋由一1877鮭さけ
1872년 천정충淺井忠아사이 츄우あさい ちゅう의 십일회十一會じゅういちかい-1888년 원전직차랑原田直次郞의 종미당鐘美堂かねびどう-1888년 산본방취山本芳翠의 생교관生巧館せいこうかん-1894년 흑전청휘黑田淸輝와 구미계일랑久米桂一郞의 합력개발 천진도장天眞道場텐진도우죠우てんしんどうじょう등이 기록된다.
사리법謝里法은 일본의 양화에 대한 인식과 기교가 일류수준에 도달하였으며, 국가정책적 총 노선을 서향화向西化-서구화에 힘쓴 결과, 서양회화가 일본본토에 번식繁殖할 수 있도록 조장했다고 썼다. 그러나 그것은 프랑스의 인상주의 혁명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향이었다.
1876년 명치明治9년 구화歐化정책의 일환으로 공부미술학교工部美術學校こうぶびじゅつがっこう가 개설된다. 공부미술학교工部美術學校의 예과豫科 화학과畵學科 조각과彫刻科 중에서 화학과 교수로 폰타네시Antonio Fontanesi가 초빙된다.
近代日本洋畵の200年1984-08明治の初期洋畵Fontanesi1876-78
1877년 명치明治 10년 고교유일高橋由一의 ‘련鮭=연어鰱魚サケ’는 예술로서의 양화로 평가된다. 본 것을 그대로 그린다는 사실주의적 태도로 대상에 접근한다. 그리하여 사물의 존재에 대한 반응이 그림에 반영되고 나타난다고 평가된다.
TakahashiYuichたかはしゆいち新潮社1998-7高橋由一1877鮭さ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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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원전직차랑原田直次郞의 종미당鐘美堂-1888년 산본방취山本芳翠의 생교관生巧館せいこうかん이후 1890년 원전직차랑原田直次郞-흑전청휘黑田淸輝-등아삼藤雅三후지 마사소우ふじ まさぞう-구미계일랑久米桂一郞-강창천심岡倉天心등이 프랑스法國로 유학-서양근대미술의 씨앗이 된다.
岡倉天心 絵画作品集
이들은 개인私人 화숙畵塾-화실을 열었다. 당시 일본의 미술교육이 상당한 규모였으며, 귀국 서양유학생 대부분이 망라되어 있다.
사리법謝里法은 대만미술운동사臺灣美術運動史에서 일거日擧=일정日政 시대 대만의 미술운동을 개관하고 있다. 1895년 청일전쟁淸日戰爭과 하관下關시모노세끼しものせき 조약條約=条約죠야쿠じょうやく으로 대만 할거割譲가 행해지고 근대화 동화정책이 추진되었다고 쓰고 있다.
사리법謝里法은 일본의 양화에 대한 인식과 기교가 일류수준에 도달하였으며, 국가정책적 총 노선을 서향화向西化-서구화에 힘쓴 결과, 서양회화가 일본본토에 번식繁殖할 수 있도록 조장했다고 썼다.
그러나 일본의 시각과 프랑스의 인상주의 혁명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일본의 양화는 막부의 공식 양화연구소인 번서조소蕃書調所-蛮書調所반쇼시라베쇼ばんしょしらべしょ에서 서양과 대항하기 위한 실용학문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
近代日本洋畵の200年1984-02평하원내 서양부인도제작년도미상
정식 서양미술교육은 명치明治 9년=1876 일본전통화법을 보완하고 단점보충을 보충하며 화풍교습을 위해 공부성공학료工部省工學寮고우부쇼우고가쿠료우こうぶしょうこうがくりょう가 공부대학 내에 창설되었다.
1889년 명치明治22년 일본최초의 양화미술단체인 명치미술회明治美術会めいじびしゅつかい가 탄생한다. 양화의 바탕으로서의 서양 정신구조를 포착하여 일본화하고 일본 유화를 창조하는 것이었다. 19세기 일본 양화의 총결산처럼 생각된다.
明治美術会 静岡県立美術館.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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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년 흑전청휘黑田淸輝가 라파엘 콜렝Raphael Collin의 고전적 묘법과 외광 아래 인물 등 초기 인상화풍을 절충한 아카데믹Academic한 구성과 온아한 분위기의 양명陽明한 화풍을 들여오면서 명치미술회明治美術会 계열은 음지로 밀려난다.
After the BathLouis Joseph Raphael Coiin Fine Art America
흑전청휘黑田淸輝의 천진도장天眞道場으로 대변되는 화사한 외광파 작품 경향은 세계미술을 일본화 혹은 향토화한다는 문화적 쇄국주의의 타성과 일본인의 기질에서 볼 때는 명치미술회의 경향 혹은 방향과 다른 흐름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흑전청휘黑田淸輝는 석고상모사塑像臨寫와 인체모사活人臨寫를 가르치면서 회화를 배우려면 천진天眞을 중시하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회화를 위한 회화로 뛰어들라는 이야기라 볼 수는 없었다. 명치미술회 등의 고질적 구속이나 속박을 벗어던지라는 이야기는 더욱 아니었다.
단지 기존의 일본화단에 염증을 느끼는 젊은 세대에게는 천진天眞조차도 명치明治20년대=1887년대를 풍미했던 낭만주의浪漫主義의 흐름과 함께 감성적 해방을 가져다주는 신선함으로 다가왔을 수는 있겠지만 역시 파리화단의 자유분방함과는 거리가 있었다.
About:Acceptance and Reinterpretation: Western Paintng in East Asia in the early 29th century Skim607.Omeka.net/Kuroda Seiki The Fields 1907
1912년 대정大正타이쇼たいしょう시대와 함께 일본 양화는 형식화된 명치明治 양화와 절연하고 화려하고 의욕적으로 시작된 것으로 기록된다. 그러나 전대의 성취나 왜곡에 대한 분석과 대응이 결여된 채 일본풍토에 녹아들어간 양화는 세계미술과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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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조선-대만-일본의 양화
05-1조선의흑전 일본의 구로다
일본은 먼저 수입한 양화를 일본 입맛에 맞게 주물럭거렸다. 아예 일본이 나아가야할 양화를 일본 규격화하고 불문율화한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리고 조선과 대만에 선심을 썼다. 그것을 세계미술로 당연히 믿고 따르리라 믿었다. 일본중심의 양화세계가 펼쳐질 것으로 착각했다.
조선이 서구-프랑스의 미술을 처음으로 접한 1910년대 명치明治43년에 창간한 백화白樺시라카바しらかば誌는 매호마다 미술관련 글과 세잔Paul Cezanne 고흐Vincent van Gogh 고갱Paul Gauguin 마티스Henri Matisse 등 작품을 도판으로 소개하고 있었다.
白樺 (雑誌) - Wikipedia
1910년 고촌광태랑高村光太郞타가무라 고타로たかむら こうたろう는 잡지雜誌 묘昴스바루つばる에 일본의 인상파 선언이라고도 일컬어지는 ‘녹색의 태양緑色の太陽마도리이루노 다이요우みどりいろのたいよう’이라는 글을 실어 청년작가들에게 개성존중과 표현의 자유를 고취했다.
緑色の太陽.jpg
당시 조선의 양화는 망국의 암울함보다 더 컴컴한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고희동高羲東의 술회는 그 어둠을 밝혀줄 작을 불씨라고 하기에도 민망했다. 육하원칙六何原則과는 무관한 노변잡담은 금과옥조로 모셔졌다. 기록은 기록만으로 신성불가침의 권위를 구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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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동高羲東은 2월 하순 단신 동경행-4월 초순 ‘다행히도’우에노上野 공원안에 있는 도오쿄오 미술학교 서양화 예비과에 들어가 앉게 되고 다행히도 6월 하순에 본과 편입시에도 떨어지지를 아니하고...그리저리하여 6개년이 되던 해 3월에 졸업이라는 한 고비를 지냈었다 라고 술회한다.
이경성李慶成은 고희동高羲東이 2월 하순 상야공원 안에 있는 동경미술학교 서양화예비과를 다니다가 5월 하순 본과 편입, 그럭저럭 6개년이 되던 3월에 졸업했다고 썼다. 그럭저럭이나 다행히도 라는 말이 회자膾炙될 때 사실이나 인과관계는 사랑방 퇴물에 불과했다.
이경성李慶成은 다시 고희동高羲東이 1909년 동경미술학교서양화과 입학 장원효태랑의 개인지도를 받으면서 구로다 기요대루하고 후지시마 다께지 등의 교수를 받았다 고 했다. 영향관계의 추론은 커녕 검색도 안 되는 이름과 구름잡는 방담으로 조선양화사는 시작되고 있었다.
장원효태랑長原孝太郞나가하라 코따로ながはら こうたろう-구로다 기요대루->흑전청휘黑田淸輝쿠로다 세이키くろだ せいき-후지시마 다께지->등도무이藤島武二후지시마 다께지ふじしま たけじ 등은 당시 강사진과는 별개의 혹은 간접적인 영향원으로 보인다.
洋畵と日本畵-近代の美術2 高階秀爾 陰里鐵郞 田中日佐夫 編著 講談社 1992-10 1908-09
FujishimaTakeji藤島武二ふじしま たけじ新潮社1998-08 黑扇1908-9
흑전청휘黑田淸輝는 강창천심岡倉天心과 페넬로사Ernest Fenellosa가 1889년 설립한 동경미술학교에 양화과洋畵科요카카ようかかyokaka가 신설되자 교육부 장관인 서원사 공망西園寺 公望사이몬지 긴모치さいおんじ きんもちSaionji Kinmochi에게 추천 받는다.
About:Acceptance and Reinterpretation: Western Paintng in East Asia in the early 29th century https://skim607.omeka.net/ab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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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 밝은 빛과 색의 인상주의와 아카데믹기법한 새 스타일을 소개, 1896 동경미술학교 개설 양화과洋畵科 신설 제반업무와 커리큘럼Curriculum작성에서 교수임용까지 관할했다. 그러나 전폭적인 분위기-스타일-누드나 자화상 등 장르 결정과 개인지도와는 다를 수 있었다.
더욱이 흑전청휘黑田淸輝는 1910년 양화가로서는 처음 제실기예원帝室技藝員-1916년 자작子爵 수여-1919년 귀족원의원貴族院議員에 당선-1921년 삼 구외森 鷗外모리 오우가이もり おうがい의 뒤를 이어 제국미술학원帝國美術學院 2대원장이 되었지만 다음해 1924년 병사했다.
고희동高羲東은 ‘화필생활 30년에’ 라는 회고담에서 2개월 목탄 데생을 배우고 다른 학생들의 커리큘럼에 합류했다고 했다. 흑전청휘黑田淸輝-콜랭Raphael Collins의 계보가 프랑스 인상파와 배치된다고 판단하기에도 무리한 시간이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김관호金觀鎬의 문전門展 입선작 석모夕暮를 흑전청휘黑田淸輝에 빗대는 것은 작품으로 보아 견강부회牽强附會랄 수 있었다. 더욱이 콜렝에게 사사받을 때 지도를 받았다는 샤반느Puvis de Chavanne의 작품과는 연결고리는 물론 설득력에서 문제가 적다 할 수 없었다.
1916김관호 金觀鎬석모 동경미술대학 소장 김영재 한국양화백년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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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반느Chavannes는 색채-기법-구성에서 인상파 화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시각에 따른 인상의 기록보다 서사적인 기록화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다. 석모夕暮의 범본이 되었다면 누드의 도입-허술한 고유색과 어눌한 해부학적 기법 및 고식적인 구성의 배경이었을 것이다.
Canvas Paintings - Wall Art/Young Girls on the Edge of the Sea By Pierre Puvis de Chavannes
흑전청휘는 일본에 길들여진 프랑스 미술로 일본-중국-조선-대만의 미술에 지대한 영향원이었겠지만 나라마다 수용의 양상은 달랐다. 조선의 경우 김관호 이후 흑전청휘의 범주나 영향보다는 민족적 기질 쪽이 더 많이 반영된 이를테면 반골로 치닫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만미술사臺灣美術史에 의하면 동경미술학교의 강사진은 그 당시 일본의 권위있는 화사畵師인 전변지田邊至다나베 이타루たなべ いたる-매원용삼랑梅原龍三郎우메하라 류자브로うめはら りゅうざぶろう-석정백정石井栢亭이시이 하쿠데이いしい はくてい-유도생마有島生馬아리시마 이쿠마ありしま いくま-길촌방송吉村芳松Yoshimura Yoshimatsuよしむら よしまつ 등이었다.
なんぼや 梅原 龍三郎(うめはら りゅうざぶろう)
洋畵と日本畵-近代の美術2 高階秀爾 陰里鐵郞 田中日佐夫 編著 講談社 1992-15有島生馬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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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법謝里法은 이 시기의 대만화가 다수가 동경미술학교 학원파의 기교를 훈련했고 회화적 기본관념은 시종 인상파-혹은 외광파와 야수파 사이였다고 쓰고 있다.
謝里法 臺灣美術運動史033 52 53 陳植棋
그러므로 조선 최초의 양화가가 그린 최초의 본격적인 양화가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의 고희동高羲東의 자화상 두 점이라 할 때 인상파-외광파-야수파의 영향권 아래서 제작되었다는 추론을 위해서는 조선 외의 자료를 뒤져야 한다는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再考 近代日本の繪畫2004고희동
이종우李鍾禹는 1915년 서울에 살던 고목배수高木背水たかぎ はいすい와 고가우웅高架祐雄고우카 쓰게오こうか すけお 및 석전부조石田富造이시다 토미조우いしだ とみぞう 등이 조선미술협회朝鮮美術協會를 조직하고 정동교육구락부에서 협회전을 가졌다고 회고한다.
1924在城畵家の相互扶助한국학진흥사업성과포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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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우李鍾禹는 고목배수高木背水의 사생에서 자극받고 1917년 약 1년간 *교오토京都의 *관서미술연구소에서 입학에 필요한 데상이며 기초공부를 했다고 1971년 8월 31자 기사 중앙일보의 남기고 싶은 이야기245 ‘양화초기’라는 기사에서 술회한다.
貴重 /[高木背水・波・6F]/黒田清輝の時代・佐賀市
이어 1918년 봄 기다리던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였는데 당시는 아직 외국인 취급을 받아 정식학생이 아니고 관비 장학금 등의 혜택을 받았다고 했다. 이러한 기술 역시 일본의 정책적 회유의 근거는 추측할 수 있으되 영향관계를 밝힐 수 있는 자료는 제공되지 아니한다.
이러한 배경에서 볼 때 대만미술운동사臺灣美術運動史에서의 기술에서처럼 석천흠일랑石川欽一郞이시가와 킨이치로いしかわ きんいちろう의 영향권에서 정형화된 대만미술의 이른바 향토색이 대만인의 대만풍토를 대만식으로 표출한다는 태도와는 다를 수 있었다.
謝里法 臺灣美術運動史013 石川欽一郞 風景
사리법謝里法은 일본의 문전門展분덴ぶんてん-문부성미술전람회文部省美術展覧会에서의 갈등에서 비롯된 바 소장파들이 결성한 이과회二科會니카카이にかかい 출현 이후의 입체파立體派 구성파構成派 미래파未來派 다다이즘Dadaism 등의 회화사조와 독립살롱獨立沙龍의 무심사전無審査展 등 자유로운 화풍이 대만미술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고 진단한다.
kousin242.sakura.ne.jp
大正期新興美術運動の槪容と硏究史 日本近代美術史サイ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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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견 일목요연한 영향관계를 보여주는 사리법謝里法의 진술에도 불구하고 대만미술이 얼마만큼 천착穿鑿되었는가를 가늠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옥상에서 떨어진 메주처럼 두루뭉수리로 까뭉갠 조선미술에서는 이만한 진술도 기대난이었다.
식민치하에서도 조선과 대만은 탈일본이라는 추동력은 동일했겠지만 그 양상은 다를 수 밖에 없었다. 대만에게 일본은 혜택을 주는 수혜국授惠國이었을 것이다. 조선은 은혜를 베풀었던 수혜受惠의 나라 일본에 지배를 받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국치國恥였을 것이다.
謝里法 臺灣美術運動史061 106 107
대만이 일본에 의해 촉발된 미술권역에서의 민족운동이었다면 조선은 절치부심切齒腐心의 민족투쟁이어야 했다. 묘사보다는 내면의 반영이요 투박하고 못생긴 그림이 체질과 생리에 더 가깝다고 느꼈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조선과 한국의 화가가 다듬어져왔을 수도 있었다.
1940구본웅具本雄 여인 국립현대미술관 한국근대미술걸작전2008
東京國立近代美術館 編 東京國立近代美術館所藏名品集 洋畵2004-31里見勝藏1924
1941김중현金重鉉 무녀도 유화 41x46cm 국립현대미술관
계속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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