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수수 수염
鄭惠玉
어린아이가 풀밭 위에서 놀고 있다. 엄마인 듯한 젊은 여자가 나무 밑에 있는 의자에 앉아 책을 보고 있다. 금빛 머리카락을 나부끼며 달려가는 아이와 독서를 하고 있던 엄마가 미소를 지으며 아들을 바라보는 모습이 참 보기 좋은 풍경이었다.
이곳은 뮌헨 가까이 있는 '상크드 오티리안' 수도원, 우리는 이 수도원에 닷새 째 머물고 있다. 매일 새벽 미사 시간과 저녁 성무일도 기도 시간에 참여하며 수도원의 의식에 동참하고 있다.
우리는 오늘 아침 장엄한 그레고리안 성가 미사에 다녀왔다. 인근에 있는 주민들도 깨끗한 옷을 입고 많이 참여하였다. 안식일인 주일, 수사들은 기도와 산책과 담소로 이날을 보내고 있다. 농장에서 일하는 농부 수사도, 인쇄소에서 일하는 제본공 수사도, 또 부엌에서 음식을 만드는 수사도 한가하게 수도원의 뜰을 거닐고 있다.
이 수도원에는 새로 입회한 젊은 수련자와 은퇴한 노 수사들이 대부분이고, 한창 활동력이 있는 장년의 수사들은 세계 곳곳에 흩어져 봉사 생활에 전념하고 있다.
우리는 내일이면 독일을 떠나 포르투갈로 간다. 리스본 가까이 있는 파티마 성지와 그곳에 있는 수도원을 방문하기 위해서다. 그 동안 우리는 성당 안에 있는 아름다운 중앙 제단과 박물관·작업실·농장 등을 구경하였다. 특히 중앙 제단에는 우리 나라 최초의 사제이며 순교자인 성 김대건 신부의 석상이 서 있다. 오늘은 수도원 근방에 있는 호수를 구경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깊고 푸른 호수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푸른 풀밭 위에서 어떤 모자(母子)를 만났다.
아이가 동양 사람은 처음 보았는지 우리를 보고 얼른 옆에 있는 옥수수밭 속으로 숨어 버린다. 다시 얼굴을 내밀다가 눈이 마주치면 또 몸을 감춘다. 나는 손자에게 하듯이 아이에게 방긋 웃어 주었다.
아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엄마가 "마틴, 마틴" 하고 이름을 부른다. 아이가 옥수수 밭에서 나온다. 이번에는 아이가 나를 보고 웃는다. 드디어 우리의 마음이 통한 것 같다.
아이가 손에 뭔가를 쥐고 있다. 밭에서 뜯어 온 옥수수 수염이었다. 아이는 그것을 손가락에 감기도 하고 금발 머리 위에 얹어 보기도 하고 또 수염처럼 얼굴에 대어 보기도 한다.
그때 수도원 쪽에서 긴 수단을 입은 노 수사 한 분이 걸어왔다. 박물관 앞에 언제나 앉아 있던 문지기 수사였다. 그분의 얼굴엔 희고 긴 수염이 달려 있다. 아이를 번쩍 들어올린다. 아이는 깔깔거리며 손에 쥐고 있던 옥수수 수염을 수사의 수염에 대었다가 또 자기 볼에 대었다가 한다.
아이가 그에게 무슨 말을 하자 "그래, 그래" 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함께 수도원 안으로 들어간다. 그분의 손에는 새로 뜯은 옥수수 수염 한 움큼이 쥐어져 있었다. 아이의 엄마는 그분을 이미 알고 있는 듯 가만히 보고 있다.
이윽고 그들이 수도원에서 나왔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아이의 얼굴에도 수염이 붙어 있다. 옥수수 수염이었다. 아마 아이의 요청에 따라 일부러 수도원에 들어가 옥수수 수염을 아이에게 붙여 준 것 같다. 그들은 손으로 수염을 쓸어 내리기도 하고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리기도 한다.
아이와 함께 놀고 있는 노 수사의 모습이 얼마나 평화로운지, 우리가 방금 만나고 온 깊고 푸른 호수의 잔잔한 수면을 보는 듯하다.
나는 아이와 노 수사의 연령의 차이를 짐작해 보았다. 아이는 다섯 살 정도이고 수사는 칠십이 훨씬 넘어 보인다. 그들 사이에는 두 세대도 넘는 간격이 벌어져 있다.
박물관 문지기인 이 수사는 지난날 아프리카에서 오랜 활동을 했다고 한다. 지구 저쪽, 검은 대륙에서 한평생을 보낸 그분은 이제 은퇴하여 박물관 문지기가 되어 있다. 아프리카의 뜨거운 열기며 그 땅에서 치러 낸 모든 노고의 흔적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고 긴 수염만을 나부끼고 있는 수사, 전 생애의 온전한 봉헌을 끝내고 이제는 거두는 자의 부르심을 기다리고 있는 수사, 다시 어린 아기로 되돌아간 듯 옥수수 수염놀이를 하고 있는 수사, 나는 어떤 생애의 시작과 그 끝을 바라보듯 어린아이와 노쇠한 그분의 모습을 번갈아 본다. 그들 모습에는 삶을 새로 시작하는 어린아이의 천진한 평화와 삶의 끝자락에 서 있는 노인의 충일한 평화가 서로 겹쳐 즐겁고 따뜻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노인과 아이, 그들은 진짜 수염과 가짜 수염을 얼굴에 매단 채 푸른 풀밭 위를 걸어간다. 그리고 노 수사의 큰 음성과 아이의 작은 소리가 함께 어우러져 옥수수 밭 속으로 사라진다.
이윽고 바람 한 자락이 지나가고 그들이 옥수수 밭에서 나왔다. 그들 얼굴에는 더 많은 옥수수 수염이 덮여 있다. 깊고 푸른 두 눈만이 옥수수 수염 속에서 빛나고 있다.
▲ 정혜옥(鄭惠玉)
수필문학가. 1935년생. 부산사범대학 미술과 졸업. 포항여중고·대구제일여중·김천여중고 미술 교사 역임. 1953년 개천예술제 시(詩) 장원으로 개천문학상 수상. 1966년부터 <석궁> <작은 꽃> <조각보> 등의 수필을 발표함으로 본격적 수필을 쓰게 됨. 수필집《대숲에는 바람소리가》《이 세상 한가운데 서 있는 나무》《우체국 앞을 지나며》《풍금소리》《돌미나리를 찾아서》가 있음.♥ 2002.3.30. essay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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