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심 수행
삼법인과 사성제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불교는 언제나 고통에 대해 강조한다. 고통에 대한 의식과 자각이 인식과 행위의 주체로 하여금 개인적이고 세속적인 가치를 쫓아가던 삶으로부터 공동체적이고 영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길에 들어서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만일 고통을 제거하는 보다 쉽고 효과적인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아무도 철학의 문을 두드리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무르띠의 지적처럼 불교는 고통을 제거하기 위한 어렵지만 확실한 길을 제시하기 위하여 고통을 부정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언제나 고통과 직면한다. 그 결과 오직 반야만이 고통의 뿌리를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기에 이른다. 특히 중관학파는 견해(dṛṣṭi)나 망상 분별(kalpanā, vikalpa)에 빠져 존재물에 집착하는 것이 고통의 근본 원인이라고 이해하여 실재를 덮고 있는 장애와 염오를 제거할 수 있는 공성의 지혜만이 고통을 완전히 뿌리 뽑을 수 있다고 파악한다. 그래서 샨띠데바도 BCA 9장 첫 게송에서 "고통의 소멸을 원한다면, 반야를 일으켜야만 한다."고 말하고, 그의 저작에서 '고통과의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게다가 BCA의「들어가는 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샨띠데바는 "끝없는 존재의 고통을 극복하기를 원하고, 유정의 괴로움을 제거하기를 원하고, 더없는 행복을 향수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언제나 보리심을 버려서는 안 된다."고 선언함으로써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지혜와 자비가 결합된 보리심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되며, 끊임없이 수행할 것을 강조한다. 결국 고통과의 전쟁은 종교적 수행과 보살도의 실천에 다름 아닌 것으로, 샨띠데바는 '6바라밀 수행'과 '공성의 수습'을 통해 이 전쟁을 시작한다.
1.보리심과 바라밀 수행
원보리심을 통해 보리심을 일으킨 보살은 '공의 주체적 실현'을 위하여 대승보살의 수행 근간을 이루는 6바라밀을 실천(=행보리심)해야만 한다. 공성은 지(知, buddhi)를 통하여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통하여 체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공성의 논리에 의해서는 공성으로 들어가는 직관을 얻을 수 없고, 공성에 대한 선정과 실천을 통해서만 공성에 대한 직관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공의 주체적 실현이란 공성의 지혜와 자비의 결합에 다름 아닌 것으로, 아직 초지에 이르지 못한 보살은 공의 주체적 실현을 위하여 수행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공성의 체득을 위한 바라밀의 실천은 전체적으로 볼 때, 세속에서 승의로 나아가는 향상적 방향성을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BCA의 각 장의 구조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리고 Śs의 게송에서 바라밀을 공성과 자비의 결합에 의한 행위라고 노래한 것으로부터 알 수 있듯이, 각 바라밀의 실천에는 이미 자비의 향하적 방향성도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공성과 자비가 어우러진 바라밀은 그것을 수행하는 행위 주체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힘을 지닌 '종교적 지식'으로서 보리심을 증장시키기 위하여 필수불가결한 수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샨띠데바는 BCA에서 대승불교의 일반적인 바라밀의 목록인 6바라밀에 기초하여 바라밀의 실천을 기술한다. 그런데 BCA에는 인욕에서 반야에 이르는 네 가지 바라밀에 대해서는 독립된 장(章, 6∼9장)에서 각 바라밀의 명칭을 제목으로 삼아 다루고 있는 반면, 보시와 지계에 해당하는 장은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다. 그렇지만 5장인 '정지의 수호'는 지계바라밀에 대한 정리된 기술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한역에서는 '호계품(護戒品)'으로 불리기도 하고, 게다가 보시바라밀의 정의에 대한 내용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물론 보시바라밀에 대해서는 하나의 장에 한정되지 않고 모든 장에 걸쳐서 폭넓게 다루어지고 있다. 그 이유는 보시바라밀의 정의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보시가 자신의 소유물(bhoga)과 신체(ātmabhāva), 그리고 자신이 쌓은 선(善, śubha)의 공덕(puņya)과 같은 무언가를 주는 것의 문제라기보다는 수행자의 기본적인 마음의 상태를 일컫는 것으로 보살도의 수행에서 기본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쁘라즈냐까라마띠는 "보시는 정각보리(saṃbuddha-bodhi)에 도달하기 위한 최초의 원인이다."라고 말한다. 게다가 10장의 회향에서 보듯이, 보시는 보리행의 결과로서 열매 맺어진 것이기도 하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6바라밀 사이의 관계 혹은 위계와 관련해서 반야바라밀은 나머지 바라밀보다 뛰어나다. 그래서 샨띠데바는 "붓다는 이 모든 보조수단(다섯 바라밀)을 반야를 목적으로 설하셨다."(9-1ab) 말한다. 쁘라즈냐까라마띠는 수행의 최종 목표인 반야바라밀의 성취를 위한 보조수단(parikara)으로서의 다섯 바라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보시는 정각보리에 도달하기 위한 최초의 원인이다. 왜냐하면 [보시는] 복덕의 자량 안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보시)은 지계로 장식되어, 즐거움을 향수하기 위한 수단(upakaraņa)을 구족한 선취의 상속(sugati-paraṃpara)을 일으키는 최상의 지혜를 증득하기 위한 원인이다. 인욕 역시 보시와 지계를 잘 실천하여 생긴 자량을 지니면서, 자신의 적대자로 존재하는 장애를 치료하기 위하여 선서의 과(果)를 증득하기 위해서 활동한다. 그리고 복덕의 자량이라 칭해지는 보시 등의 뛰어난 세 가지 자량은 정진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그것(정진)은 또한 두 가지[복덕과 지혜] 자량의 원인으로서 일체의 장애(āvaraņa)를 제거하기 위해서 생긴다. 그리고 정심(定心, samāhita-citta)으로부터 여실지(如實知, yathābhūta-parijñāna)가 생한다. 그러므로 선정바라밀도 역시 최상의 지혜를 위한 원인이라고 확인된다."
보시를 비롯한 다섯 바라밀은 어느 것 하나 예외 없이 최상의 지혜인 반야바라밀의 보조수단 혹은 전제조건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 역할을 잘 수행함에 따라 복덕과 지혜의 자량이 축적되고 마침내 최상의 지혜가 성취되는 것이다. 그런데 반야와 나머지 바라밀의 관계와 관련하여 쁘라즈냐까라마띠는 적대자의 의견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반야가 보시 등 가운데 수장이라면, 그것(반야)만이 완전한 깨달음을 위한 수단이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그 외의 보시 등에 의해서는 무엇이 [이루어지는가]."
이에 대해 쁘라즈냐까라마띠는 명쾌한 답변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 대신 그는 경전에 그렇게 설해져 있기 때문이라며, 반야라는 눈이 없으면 나머지 바라밀은 눈먼 소경과 같다는 『8천송반야경』의 내용을 인용하여 재차 반야바라밀의 우월성을 강조한다. 쁘라즈냐까라마띠는 다만 "[모니는] 반야를 목적으로 순서에 따라 보시 등의 보조수단을 언설하고 있다."고 말할 뿐이다. 순서에 따른다는 말은 보리심을 일으킨 보살이 보시로부터 시작하여 지계·인욕·정진·선정을 거쳐 반야의 완성에 이르는 과정을 가리킨다. 즉 원보리심의 생기로부터 행보리심의 과정을 거쳐 반야바라밀을 성취하는 것으로, 다얄(Dayal)은 이것을 전 단계의 바라밀을 실천하지 않고는 다음 바라밀의 실천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칸트(Kant)의 말을 빌려서 반야바라밀과 나머지 바라밀의 관계를 표현하자면, "반야 없는 다섯 바라밀은 맹목이고, 다섯 바라밀 없는 반야는 공허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6바라밀 모두는 완전한 깨달음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들이다. 비록 반야 홀로 완전한 깨달음을 위한 수단이라 할지라도, 다섯 바라밀이 없다면 깨달음의 완성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샨띠데바는 6바라밀 사이의 위계 혹은 단계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의미 있는 게송을 노래한다.
"보시바라밀 등은 [뒤의 것이] 더욱 더 뛰어나다. 다른 것을 위하여 뛰어난 것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반야바라밀에 대해서는 본 논문의 제4장에서 이미 상세하게 살펴보았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 외의 다섯 가지 바라밀에 대해서만 살펴보기로 한다.
<『입보리행론』의 보리심론 연구/ 이영석 동국대학교 대학원 인도철학과 박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