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찬 총재가 관심 있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래요? 몇 동이면 되겠소?”
“25개동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래? 그 정도라면 어렵지 않지.”
김총재가 쉽게 응낙했다. 나는 뛸 듯이 기뻤다. 그런데 김총재가 “그렇다면 갚는 문제가 생기는데 이것을 어떻게 하겠소”하고 물었다. 그렇지, 공짜는 아니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갑자기 난감해졌다. 어떻게 할까 궁리하고 있는데 김총재가 대안을 제시했다.
“10년 상환으로 해 줄 테니 공군본부의 결재를 받아 오시오.”
이는 엄청난 특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조건을 받아 본부에 보고하니 본부에서도 대환영이었다. 사실 그런 조건이라면 인플레가 심한 당시에는 공돈이나 다름없었다. 공군본부는 11전투비행단이 사업 주체가 돼야 한다는 조건으로 이를 결재했다.
공군본부에서 국방부로부터 예산을 확보해 분할 상환한다고 하니 사업 주체가 누가 되든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귀대해 비행단 살림을 맡고 있는 이연수 기지전대장에게 그의 이름으로 계약을 체결하라고 했더니 책임자는 조직의 장이 맡아야 한다고 뒤로 물러서 별 생각 없이 내가 사업 시행자가 돼 계약을 체결했다.
그런데 이것이 큰 문제가 됐다. 엄청난 음해와 모함에 말려들게 된 것이다. 이 문제는 국회로까지 비화돼 진상조사위원회가 구성됐다. 모 국회의원의 폭로로 내가 정부로부터 돈을 받아 가로챘다는 것이었다. 열심히 일하고 있는 사람에게 돈을 가로챘다고 누명을 씌우니 이건 정말 눈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나는 일의 순조로운 진행을 위해 내 이름을 빌려 준 것뿐 국방부로부터 관사 신축비 상환금이 정기적으로 산업은행 창구로 들어가고 있었다. 내 이름으로 돈이 들어오지만 나는 그 돈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모른 채 공군본부에서 산업은행 창구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모 국회의원은 내 이름으로 돈이 나간 것만 가지고 이런 몹쓸 짓을 하고 있었다.
국회 국방위원과 각군 참모총장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국방위원회에서 이 문제가 상정되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 앞의 명패를 집어 들고 발언하는 국회의원을 향해 “똑바로 알고 해!”하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여차하면 명패를 집어 던지고 한바탕 해 버릴 작정이었다. 그러자 국방장관이 나에게 달려들어 명패를 빼앗더니 “오해야, 오해. 참아, 참아!”하고 만류했다.
“못 참습니다.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하고는 못 참습니다!”
국회의원들이란 나중에 사실로 입증되건 말건 꼬투리만 있으면 터뜨리고 보는 사람들이다. 이 사건은 나와 감정이 있는 사람이 거짓 정보를 흘린 것이 발단이 됐다. 나와 인사상 라이벌 관계에 있던 사람이 정보부에 다니는 친인척을 시켜 음습한 장난을 하다가 국회의원에게 거짓 정보를 주며 인사상의 반사 이익을 얻어 보려는 책략을 쓴 것이었다.
나는 이 내용을 공사 교장 재직 시절 한 지인으로부터 전해 듣고 엄청난 자괴감에 빠진 적이 있다.나중에 그 국회의원은 나에게 정중히 사과했다.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국이 어수선하던 1959년 가을. 재일 교포 북송선이 니가타를 출발해 원산으로 향했다. 그런데 상부 명령이라며 북송선을 폭격하라는 명이 갑자기 떨어졌다. 경향 각지에서는 대대적인 재일 교포 북송 반대 시위가 벌어지고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불같이 치솟고 있었다. 나는 눈앞이 캄캄했다. 어쩌면 이것이 자칫 동해에서 3국 전쟁이 날 상황이 될지 모른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폭격 명령을 받은 나는 일단 초계 비행에 나서기로 했다. 재일 교포 북송선은 니가타 항을 출발해 동해를 횡단, 원산으로 가는데 목표 지점까지 폭탄과 로켓포를 적재하고 휘발유를 가득 싣고 갔다 돌아오기에는 거리상 무리가 따랐다. 물론 강행할 수도 있었지만 내키지 않는 일인지라 나는 이유를 찾고 싶었다. 무장 해제된 민간 선박을 격침하는 것은 엄청난 국제 문제를 야기할 수 있었다.
나는 김정렬 국방장관에게 초계 비행 결과를 조금은 과장해서 보고했다. “완전 무장, 격침하고 돌아오는 데는 거리상 큰 무리가 따릅니다. 가미카제(일본의 자살 폭격 항공대)처럼 한다면 몰라도….”
빨간 마후라 -70-전투기 조종중 산소마스크 고장 | | 나의 말을 듣고 있던 김정렬 장관도 사실은 내키지 않은 일로 생각했던지 보고를 받자마자 “알았다, 그만둬”하고 그 자리에서 없던 일로 처리했다. 만약 폭격이 감행됐다면 어떻게 됐을 것인가. 지금 생각해도 눈앞이 아찔해진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을 별다른 고민 없이 했던 것이 당시 풍조였다. 6·25전쟁 이후 남북 간의 대치 상황이 이처럼 쌍방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1959년 초겨울. 사격 훈련을 하기 위해 남한강 상류 쪽 사격장으로 향했다. 대지 공격을 위해 폭탄 2발, 로켓포 6발, 캘리버 기관총 6문을 발사하고 기체를 올려채려는데 갑자기 산소호흡기 작동이 멈춰버렸다. 순간 호흡이 가빠져 산소호흡기를 입에서 떼내고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도리 없이 편대에서 이탈, 맨호흡으로 김포 비행장으로 귀환 항로를 잡았다. 가슴에서 찢어찔 듯한 통증이 왔다. 억지로 참으며 컨트롤타워(관제탑)를 부르는데 산소호흡기에 부착된 마이크가 떨어져 나가 통신마저 두절되고 말았다. 아무리 이머전시(위급성)를 때려도 반응이 없었다. 이때의 절망감과 단절감. 숨이 막히고 연락할 길도 없으니 나는 끝났다는 비통함으로 머리가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정신을 잃어서는 안 된다며 굳게 조종간을 잡고 김포 비행장으로 내달렸다. 비행장에 이르러 비상 착륙하려는 데 이번에는 외국 국적 항공기 노스웨스트가 이륙하는 중이었다. 숨은 가빠지고 가슴은 찢어질 듯 통증이 오고, 그래서 낙하산 탈출을 생각했다. 그러나 낙하산을 사용하면 목숨을 건질 수 있지만 우리 실정에 값비싼 전투기 한 대의 손실이 불가피해진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김포 상공을 선회, 노스웨스트기가 이륙하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노스웨스트기가 지축을 박차고 이륙하자 나는 자세히 살필 것도 없이 랜딩 기어를 넣고는 곧바로 비상 착륙했다. 활주로 끝에 간신히 전투기를 세운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내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은 폐활량이 남보다 훨씬 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중학 시절 수영 선수로 뛰면서 다른 학생들보다 두 배나 되는 잠수 실력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냉정함이다. 조종사가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냉정한 판단력과 자신감이다.
60년 3·15 정·부통령 선거일이었다. 대통령은 야당 후보인 조병옥 박사가 서거해 이승만 대통령의 자동 당선이 이루어졌고, 문제는 부통령 후보에 여당인 이기붕 후보와 야당인 장면 박사의 대결이었다. 이승만 박사가 연로해 상대적으로 부통령의 권한이 막강하게 되므로 여야는 부통령 선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여당인 이기붕 후보 진영은 이후보의 당선을 위해 온갖 부정 행위를 저지르고 있었다.
당일 투표가 끝나자 예고도 없이 우리 부대에 주변 민간인의 투표함이 들어왔다. 민간인 투표함을 부대 무기고에서 개표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무기고라는 무시무시한 공포 분위기를 이용해 표 바꾸기 등 부정을 저지르겠다는 뜻이었다. 당시는 이처럼 눈 가리고 아웅 하는 편법과 반칙이 통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나는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무기고는 무기고지 개표장이 아니다.”
그러자 부하들도 들고일어났다.
“개표는 공개된 장소에서 하라.”
사실 공군은 군대 중에서도 지적 수준이 높은 집단이다. 이렇게 해서 개표장은 다른 곳으로 부랴부랴 옮겨 갔다. 이때 나를 음해하던 특무대와 보안사에서 잘만났다는 듯이 협박했으나 그럴수록 의연하게 대처했다. 물론 이는 충성스러운 부하들이 일치단결, 나를 지원해 준 힘이 컸다.
4·19 때도 학생 시위를 막도록 서울과 가장 가까이 있는 11전투비행단에 출동 명령이 떨어졌다. 나는 “11비행단은 전투부대다. 북한 인민군이 공격해 오면 몰라도 나서지 않겠다”며 거부했다. 나는 부당하게 압박하면 굴복하기보다 그에 더 당당히 맞서는 성격이다. 그래서 온갖 음해와 모함도 굴복하지 않고 맞서 이겨 냈다. |
빨간 마후라 -71-박정희 장군과 나 | | 1960년 4·19와 함께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당 정권이 들어섰다. 이때의 가장 큰 변화는 갑자기 자유가 넘쳐나 어딘가 불안하고 위태로웠다는 점이다. 또 시민·학생들의 군인에 대한 인식이 별로 좋지 않았다. 장군 별판이 부착된 지프에 돌을 던지는가 하면 군인을 향해 야유하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졌다.
별의별 시위가 일상처럼 벌어졌고 민주당 정권의 신구파 싸움으로 국방부장관이 2주일에 한 번씩 바뀔 정도도 정국은 혼미를 거듭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풍선처럼 사회가 암울하게 부풀려 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9월 정규 교육의 일환으로 국방대학원에 입교했다. 입교하자마자 국방대학원 학생회장인 오모 장군 등 장성 몇 명이 부정 선거 연루 혐의로 체포·구속됐다. 이래저래 군 사기는 뚝 떨어져 가고 있었다.
61년 5월16일. 학교에 가자 혁명이 났다며 교내가 크게 술렁이는 가운데 너나없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3권을 행사하는 국가재건최고회의가 발족하고 장도영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부의장 명의의 혁명 공약이 라디오를 타고 군가처럼 매시간 방송됐다.
나는 마음속으로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며 학교를 다니는데 5월22일 최고회의로부터 출두 명령이 떨어졌다. 최고회의 인적 구성원은 육군이 거의 장악했고 해군·공군은 참모총장이 위원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최고회의에 들어가서야 5·16의 핵심 인물이 박부의장인 것을 알았다. 장의장은 공식 행사에만 참석할 뿐 실질적인 권력 행사는 박부의장이 하고 있었다. 나는 박부의장 앞에 섰다. 실내는 별 장식이 없었지만 까무잡잡하고 단단히 생긴 박부의장이 야전잠바를 입고 실내를 서성거리는 모습에서 어떤 카리스마를 느꼈다. 그가 나를 보더니 선 채로 말했다.
“자네를 대한중석 사장으로 임명했어.”
나는 순간 옷을 벗기는가 하는 의구심과 함께 대한중석 사장이라는 직책이 전혀 생뚱맞아 “네?”하고 반문했다.
“가장 돈이 되는 회사가 적자 투성이란 말이야. 너도나도 빼 먹고 있으니 복마전이야. 그러니 자네가 가서 제대로 접수해.”
이렇게 말하고 박부의장은 화난 듯이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는 언제나 결의에 차면 입을 한 일(一)자로 다무는 습관이 있었다.
박부의장이 특별히 나를 대한중석 사장으로 보내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나는 그를 일본 육사 생도 시절 만났지만 만주군관학교 예과를 졸업하고 일본 육사로 선발돼 57기로 입교했으니 60기인 나와 마주칠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다. 두 번째 만남은 47년 경비대사관학교 생도 시절이다. 2중대원이었던 나는 1중대장을 맡고 있던 박정희 대위를 지근거리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때도 크게 서로를 의식하는 입장은 아니었다.
48년 일본 육사 2년 선배인 최복수(6·25 때 전사) 대위의 아들 생일 잔치에 초대됐을 때 미리 와 있던 박정희 대위를 만났다. 최대위는 육사 본과를 졸업한 뒤 나카노 학교, 즉 일본의 CIA 격인 정보학교를 나온 정보통이었다. 정예 졸업생 중 일부만 선발돼 입교하고, 특히 한국인은 거의 선발하지 않는 특수 학교인데 최대위는 이 학교를 나와 광복을 맞자 조국에 돌아와 김포비행장 근처에 정보학교를 창설, 교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날 생일 잔치에 초대된 사람은 김정렬·박정희·정래혁과 나를 비롯해 6~7명이었다. 일본 육사 선후배라는 인연이 있었지만 이때 박정희 대위는 나를 상당히 주의 깊게 보았던 것 같다. 그래서 김정렬 대령에게 “선배님, 저런 후배는 잘 길러야 합니다” 하고 당부의 말까지 했다.
나는 이런 인연을 생각하며 그 앞에 서 있지만 대한중석 사장은 아무래도 머리에 맞지 않는 관을 쓰는 것처럼 자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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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마후라 -72-복마전의 대한중석 | | 나는 박정희 장군에게 겸양으로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능력이 없다는 뜻으로 이렇게 말했다.
“선배님, 아시다시피 저는 비행기 타고 전쟁하는 조종사인데 중석회사는 땅속을 파는 일 아닙니까. 하늘을 날아다니는 사람이 땅속 생리를 알 수가 없지요. 적임자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봐, 쓸데없는 소리 마. 내가 혁명이 무엇인 줄 알고 했나. 나라 꼴이 이 모양이니까 나선 거야. 자네 역시 죽을 각오로 하면 돼.”
그제서야 나는 박장군의 뜻을 알고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대한중석이 우리나라에서 달러를 벌어들이는 좋은 회사라는 걸 알아 둬. 가서 확 판을 쓸고 제대로 해 봐. 어서 가 봐!”
나는 최고회의를 나오면서 가슴이 부풀었다. 그러나 미지의 세계를 어떻게 개척할까 생각하니 불안한 구석도 없지 않았다. 그때 내 나이 37세, 박장군은 44세였다. 그야말로 물불 안 가리는 나이였다. 박장군은 이런 젊은 혈기를 무기로 죽을 각오로 나서라고 하지 않았는가. 추상적이기는 하지만 결사항전의 자세로 나가면 막힌 길도 뚫고 전문성도 길러지고 회사를 정상화하리라는 뜻이리라.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박장군이 나를 대한중석 사장으로 발탁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혁명은 했는데 사람이 부족해서 나를 차출한 것인가, 일본 육사 출신 중 현역에 있는 사람이 20명(1기부터 61기까지 총 인원은 114명)도 안되고, 그중 내가 젊기 때문에(60기) 의욕이 넘칠 것으로 보고 발탁한 것인가. 그러나 그것도 주변적 요인은 될 수 있어도 정답이 아닌 것 같았다.
그때 얼핏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상공부장관에 정래혁 선배가 있었다. 일본 육사 2년 선배에다 광주서중 선배이기도 했다. 그래서 앞일도 답답한 데다 발탁 배경이 궁금해 그를 찾았더니 과묵한 정선배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중요한 자리에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해 나를 천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한중석 사장으로 부임하자 회사는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었다. 그동안 관심이 없어 신문 보도도 훑어보지 않았지만 ‘동식 사건’이라고 해 어마어마한 부정 사건이 저질러져 있었다.
일본의 동경식품주식회사에 우리 중석을 수출했는데 100만 달러어치를 팔고도 70만 달러어치를 팔았다고 속이고 나머지를 회사 간부들이 착복한 사건이었다. 당시 우리 국민 소득이 100달러 미만이었으니 30만 달러라면 어마어마한 돈이었다.
대한중석 채석장이 있는 강원도 상동광산 창고에 가 보니 자동차 체인을 10년분이나 야적해 놓고 있었다. 그 외에 불필요한 자재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나는 공군 창고 관리 요원 10명을 차출해 물품 점검을 했다. 그리고 예편한 부하 10여 명도 데려왔다. 그들은 미 공군에서 보급·회계·감리 시스템을 습득하고 돌아온 대단히 유능한 사람들이었다.
부하들을 통해 조사한 결과 온갖 부정한 물품 구입과 직원의 과대 채용이 확인됐다. 연구소를 차려 놓고는 전혀 맞지 않는 상업학교 출신을 광석 전문 연구원이라고 앉혀 놓고 장관·국회의원·군수 추천이랍시고 들어온 직원이 30%나 됐다. 그리고 입금된 돈은 먼저 본 사람이 주인이 되는 형편이었다.
자동차 체인을 10년분이나 비축한 것은 그 지역 국회의원이 체인 도매점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창고에 쌓여 방치된 자재, 썩어 가는 식품, 분말 우유가 얼마나 지났는지 돌처럼 굳어 있기도 했다. 그럼에도 회사가 망하지 않고 돌아간 것은 돌을 캐다가 수출하는 말 그대로 대동강 물을 팔아먹은 봉이 김선달식의 회사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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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마후라 -73- 보지도 듣지도 못한 12억 흑자 | | 나는 매일 군복(공군준장)을 입고 누구보다 먼저 출근해 현관 청소부터 시작했다. 기존의 조직 체계를 확 쓸고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상징적 행동의 표시였다. 그리고 인적 청산을 단행했다. 쓸데없는 인력이 남아돌아 오히려 일하는 사람들의 사기와 작업 분위기를 저하시키고 있었다. 그래서 요즈음식으로 조직의 슬림화를 대대적으로 단행한 것이다.
동식 사건으로 사장이 구속되고 현역 군인과 미국식 교육을 받은 정예 공군 예비역들이 들어와 다부지게 일을 처리해 나가니 그해 12월 결산에서 생전 보도 듣도 못한 12억 원이라는 대흑자를 냈다. 당시 12억 원은 요즈음으로 말하면 수백억 원에 해당한다. 그래서 누구나 벌린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이 같은 내용이 신문에 보도되자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으로부터 1962년 1월 중순 친서가 날아왔다. ‘장군께서 대한중석 사장으로 취임한 후 회사 관리와 운영에 대개혁을 단행해 지난해에도 후반기에 12억이라는 이익을 가져오게 했다는 것은 지극히 경하할 일이며 장군의 노고와 업적에 대해 심심한 격려와 치하를 드리는 바입니다’로 시작된 장문의 친서는 나를 비롯해 전 직원의 사기를 한껏 북돋워 주었다.
이때 상급 기관인 상공부에서 공군중령 출신인 최형섭(전 과학기술처장관)을 찾는다는 연락이 왔다. 광무국장 적임자를 찾는 중이었다.
최형섭은 예편한 뒤 미국 대학에 유학, 최고의 광물학 박사가 돼 돌아와 대학 강단에 섰는데 5·16 이후 자취를 감춰 버렸다. 광물학자는 대한중석과도 깊은 관계가 있으므로 공군 시절 알고 지냈던 그를 나 역시 찾아 나섰다. 그러나 서울 시내에서 그를 봤다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한 지인으로부터 그가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공군 출신 수행비서를 대동하고 서울대병원으로 달려갔다. 원무과에 들러 입원 환자 명단을 살피고 병동을 일일이 돌아보았지만 그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허탕을 치고 돌아오려는데 눈치 빠른 비서관이 복도 끝에서 마스크를 한 환자를 발견하고 “사장님, 어째 낌새가 이상합니다” 하고 나를 그쪽으로 이끌었다. 다가가 보니 과연 최형섭이 마스크와 모자를 눌러쓴 채 우리를 피해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최형, 여기서 뭐하시오?”
내가 가까이 다가가 그를 불렀더니 그가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5·16을 지지하지 않았고, 그래서 군 출신 인재를 찾자 병원에 입원해 피해 다니는 중이었다. 나는 그를 다방으로 이끌어 자초지종을 털어놓고 당부했다.
“최형, 참여해서 국가를 일으켜야지. 그래서 국가 재건 아닌가.”
“아니오, 군에 관여하면 당하게 돼 있소.”
“그럴 리 없소. 박충훈 공군준장도 상공부에서 일하고 계셔.”
나는 버티는 그를 반강제적으로 이끌고 상공부로 갔다. 정래혁 장관이 미리 대기하고 있다가 그 자리에서 광무국장 임명장을 수여했다. 임명장을 수여하면 일단 빠져 나갈 구멍은 차단되는 것이다.
상공부와 대한중석 사무실은 명동 입구에 가까이 붙어 있었다. 그는 광물학 박사답게 중석이나 석탄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나는 유명무실한 연구소를 대대적으로 재정비했다. 조금만 더 연구하면 돈을 크게 벌 수 있는데 이것을 외면하고 타성에 젖어 돌멩이만 팔아먹는 것으로 안주하고 있는 것이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나는 강당만한 초호화 사장실을 3분의 1로 줄이고 5층 전체를 치운 뒤 대한중석 금속연구소를 차려 6명의 박사급 연구원과 여러 명의 직원을 배치했다. 나는 연구원들에게 “연구 기간이 5년이 걸리든 10년이 걸리든 상관 않겠다. 다만 한 가지만이라도 세계 최고품을 만들어 세계 시장을 장악하면 그것으로 만족한다”고 격려했다.
최국장은 나의 이런 계획을 보고 “이제야 과학자들이 일할 기분이 난다”며 내 손을 잡았다.
이것이 추후 홍릉의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모체가 될 줄이야 누군들 점쳤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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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마후라 -74-과학이 나라를 살린다 | | 막상 연구소를 차리기는 했지만 실험 기구 하나 제대로 구할 수 없었다. 당시 국가연구소는 물론 대학의 연구소도 별로 없던 때였다. 그중 국내에서 가장 시설이 잘돼 있다는 서울대 공대 실험실을 찾아갔다. 그러나 실험실은 쥐똥과 거미줄이 반길 뿐이었다. 순간 이러다가는 나라가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창 시절 과학과 이공계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이 분야의 탐구열이 강했다. 그래서 기회만 주어지면 과학 공부를 하고 싶었고,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아 군인의 길을 걷게 됐는데 다행히 과학자를 뒷바라지할 자리에 앉게 됐다. 과학 기술을 발전시켜야 나라가 융성한다는 점을 미 공군대 입교(1952년)와 미 대사관 무관 시절(54년) 뼈저리게 느껴 온 나로서는 ‘지금이 기회다’라는 생각을 했다.
5·16 직후 육·해·공군은 국영 기업체를 각각 한두 개씩 맡아 운영했다. 육군은 석탄공사·충주비료·나주비료 공장을 맡았다. 이들 역시 대한중석이 연구소를 차리자 각기 경쟁적으로 연구소를 개설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하루아침에 5개의 연구소가 생겼다. 이러다 보니 상공부가 예산 지원 등 어려움에 봉착했다.
이때 나온 것이 연구소의 확대 개편안이다. 업무·연구의 중복과 불필요한 인력 소요로 인한 낭비 요인을 최소화하자는 구상 아래 5개 연구소를 통합, 그중 가장 짜임새 있게 운영되는 대한중석 금속연구소에 흡수시켜 한국금속연료가공연구소를 차렸다.
이 무렵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방미했다. 미국은 박의장에게 우호적이지 않았지만 박의장이 너무나 성실하고 진지하게 국가 재건 문제를 설명하자 케네디 대통령도 공감, 무엇인가 선물을 줄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케네디는 “지금 한국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었다.
박의장은 평소 내 건의를 염두에 두었던지 “한국에 대표적인 연구소를 하나 만드는 것이 소원”이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동안 연구소 확대 개편안을 갖고 박의장을 찾아 우리나라의 취약한 연구소 실태를 브리핑, 국가가 번영하려면 과학자부터 배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박의장은 만년 적자인 대한중석을 흑자로 돌려놓자 나를 대단히 신임하고 있었다.
박의장의 요청을 받은 케네디 대통령은 곧바로 한국에 과학의 연구개발(R&D) 관련 특사를 보냈는데 그는 대한중석 연구소를 찾아 살핀 다음 “한국의 과학 기술 싹을 보았다”며 이를 모체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개설 지원 의사를 비쳤다. 나는 연구소 부지와 인력(해외 동포 과학자 포함)을 제시했다. 특사가 귀국한 얼마 뒤 미국의 지원으로 마침내 홍릉에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이 세워지고 초대 원장에 최형섭 박사가 임명됐다.
그러나 나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세계에서 몇 번째 안 간다는 우리 중석을 어떻게든 값지게 팔아먹을 방법이 없는가를 살펴보기 위해 영국·독일·스웨덴을 방문했다. 그리고 미국의 중석 가공 공장을 찾았다. 오리건 주의 포틀랜드 산악 지대에 K. C Lee 중석 가공 공장이 있었다. 사장은 중국인 리씨로서 국공 내전 때 공산당에 밀려 대만으로 도망갔다가 미국으로 건너온 광산 자본가였다.
그는 중국에서 나오면서 트럭 수백 대분의 중석을 싣고 대만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와 중석 가공 공장을 가동하고 있었는데 우리와 똑같은 돌멩이로 12단계를 거쳐 가장 강한 텅스텐 비트를 생산, 우리보다 10배 이상의 값을 받고 있었다. 그에 비해 우리는 3∼4단계의 공정을 거쳐 겨우 푼돈을 받고 있는 정도였다.
나는 리사장을 면담하면서 한국의 어려운 사정을 솔직히 털어놓고 우리 기술진이 K. C Lee 공장에서 연수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기꺼이 받아들여 대한중석 공장장 이하 14명의 기술진이 1년 반 동안 공장에서 연수를 받고 돌아왔다. 이들은 추후 포항제철 공장 신설의 주역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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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마후라 -75-대한배드민턴협회장 되다 | | 대한중석은 단순히 텅스텐 가루를 만들어 팔아먹고 있지만 K.C Lee 공장은 몇 단계 더 가공해 강철로 만들어 열 배의 이윤을 내고 있는 것이 내 눈을 휘둥그렇게 했다. 그래서 리 사장에게 통사정해 우리 기술진을 연수 보냈던 것이고, 마침내 우리도 많은 돈을 벌어들였다. 여기에 제철 공업 기술까지 익히게 되니 일석삼조쯤 됐다. 역시 과학 기술의 힘은 위대했다.
내가 군에 복귀하고 내 후임 김창규 사장에 이어 박태준씨가 대한중석 사장으로 갔는데 그가 마침 박의장의 특명을 받고 포항제철 공장을 건설했다. 이때 대한중석의 기술진을 모두 이끌고 포항제철 공장을 건설함으로써 포철 신화의 모체가 됐다. 말하자면 미국 연수를 한 14명의 기술진이 포철을 만들어낸 주역이 된 것이다. 기술을 익히면 어디를 가나 나라의 산업을 위해 기둥으로 쓰인다는 산증거인 셈이다.
이 같은 사실은 그로부터 10여년 후 포철을 방문한 자리에서 확인했는데 그때 박태준 회장에게 “포철의 초기 기술 인력은 내가 댔노라”고 농담 삼아 자랑한 적이 있다.
대한중석 사장 1년 6개월이 지나자 회사는 정상으로 돌아가고 흑자는 계속 늘어났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그 자리를 지킬 이유가 없었다. 나는 본래 대한중석을 정상 궤도에 올려놓으면 군에 복귀하는 것이 목표였다. 당시 많은 군인이 민정에 참여하기 위해 군복을 벗었지만 나는 철저하게 군인의 길을 걷는 것이 명예와 자부심을 지키는 일로 생각했다. 일부 군 장성들은 정·관계에 진출해 연일 신문에 오르내리고 나에게도 옷을 벗고 나오라고 끈질기게 권유해 왔다. 하지만 그 길은 나의 길이 아니었다. 그래서 1962년 8월 군으로 복귀해 공군소장 진급과 함께 작전참모부장 보직을 받았다.
어느날 장성환 참모총장이 최고회의에 다녀오더니 나를 뚱딴지같이 대한배드민턴회장으로 임명했다. 공군사관학교 체육 교관으로 배드민턴 국가 대표 두 명이 들어와 있었는데 그것이 인연이 돼 공군은 배드민턴협회를 맡기로 했다는 것이다.
영국군이 인도를 지배하면서 즐겼다는 배드민턴은 인도·인도네시아 등 남아시아에서 크게 붐을 일으키고 있는 스포츠였다. 이것이 태국·대만·일본을 거쳐 마지막으로 한국으로 들어왔는데 나로서는 금시초문의 종목이었다. 국민들도 배드민턴이 무슨 운동인지 잘 모르고 있는 때였다. 그러나 각군에 한두 종목씩 배정된 협회를 운영해야 한다고 해 나는 영문도 모르고 대한배드민턴협회장이 됐다.
도입된 지 얼마 안 된지라 우리의 배드민턴 실력은 형편없었다. 6개월 동안 훈련시켜 일본 대회에 내보냈더니 전패를 하고 돌아왔다. 승부욕에서는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은 나는 이들이 귀국한 다음날부터 아내를 시켜 운동장 곁에 솥을 걸어놓고 밥을 짓도록 해 20여 명의 선수를 집중적으로 훈련시켰다. 아내는 가정부와 함께 연일 장작불로 밥을 짓고 고깃국을 끓여 선수들에게 먹였다. 예산이 빈약해 그렇게라도 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장비가 많이 드는 스포츠가 아니어서 그나마 공군에게는 딱 맞는 종목이었다. 이듬해 봄 다시 일본 원정 경기를 보냈더니 10승 10패를 하고 돌아왔다. 50%의 승률을 올린 셈이다.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상당한 실력이었다.
세 번째는 일본 국가 대표를 국내로 초청해 겨뤘더니 우리가 우승했다. 첫 우승인 것이다. 이때 대대적인 선전을 하며 전국을 순회했다. 그때서야 매스컴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63년 전국체전에서 배드민턴이 정식 종목으로 채택돼 인구의 저변도 확대됐다. 비싼 장비가 필요치 않고 축구나 야구처럼 넓은 공간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소공원 빈터에서도 쉽게 할 수 있는 종목인지라 배드민턴은 급속도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이 결과 좋은 선수도 발굴돼 텃밭인 인도네시아·태국에 가서도 당당히 우승을 하고 돌아올 정도가 됐다.
지금은 세계 제일의 실력을 갖추고 있지만 그 시초는 너무도 미약했다. 이제 국민 스포츠가 돼 시민들이 빈터에서 배드민턴을 하며 체력을 단련하는 모습을 보면 배드민턴을 뿌리내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그 옛날의 감회가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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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마후라 -76-판문점 자유의 집 | | 1962년 11월 나는 공군참모차장 전보와 함께 군사정전위원회 한국 측 수석대표를 맡았다(차석대표는 해군). 자유 진영의 수석대표는 유엔의 이름으로 미국이 맡았고 한국·영국·태국이 각국 대표로 참석했다.
공산 진영은 북한이 수석대표를 맡고 중공이 참전국 대표로 참석했다. 중립국감시위원회 대표는 자유 진영에서 스위스·스웨덴, 공산 진영에서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가 참여했다.
군사정전위원회는 한마디로 시비와 억지와 생떼의 경연장이었다. 교통사고를 당하면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논리가 이 회의장에서도 그대로 적용됐다.
북한 무장 간첩선이 남해상에서 발견돼 우리 공군기가 격침한 사건이 있었다. 노획한 선체의 일부와 무기·소지품을 판문점 회의장에 전시해 놓고 군사정전위원회를 소집했다. 유엔 측 수석대표가 전시품을 제시하며 휴전 위반이라고 항의하자 북측 수석대표는 기다렸다는 듯이 일사천리로 반박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런 일이 없다. 너희끼리 싸우다 발생한 일을 우리에게 전가시키는 몰상식한 일을 하고 있다. 너희는 국내 정정이 불안하면 이런 장난을 하는데 이번만은 묵과할 수 없다. 소지품을 당장 거둬 가라우. 신성한 회의장을 모독하지 말라우.”
적반하장도 이런 식이니 기가 찰 일이었다. 그런데 언어가 신통치 않은 유엔 측 수석대표는 발언을 어물거리기 일쑤였다. 발언은 규정상 양측 수석대표만 하게 돼 있고 각국 대표는 회의 진행을 지켜보도록 돼 있었다. 내가 발언할 수 없는 것이 원통할 따름이었다.
그래서 나는 수석대표에게 종이에 글씨를 써서 휴전선도 아닌 남해상에서 저질러진 침투 사건이기에 더 변명의 여지가 없으며, 그래서 이를 살펴보고 따지든지 말든지 하라고 일러 줬다. 회의는 오전 10시에 시작해 장장 10시간 동안 식사까지 걸러 가며 진행됐지만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휴전선 침투 등 크고 작은 충돌 사건이 수천 건을 넘었는데 회의는 한 번도 타결된 적이 없었다. 양측 모두 절대로 승복한 적이 없고 또 절대로 사과한 적이 없었다. 세상에 이런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회의가 또 있을까.
판문점 회의장은 들판에 세워졌기 때문에 방문객들이 많은 불편을 겪었다. 특히 냉전의 대결장인 판문점을 찾는 외국인들에게 볼썽사납게 비쳐지고 있었다. 나는 방문객을 위해 휴게소를 짓기로 계획을 세웠다. 이 제의를 받은 유엔은 20만 달러를 지원하겠다고 나섰다. 나머지 예산과 인력은 국방부에서 지원키로 했다.
공군 시설감이 설계한 도면을 받아 든 나는 어딘가 설계도가 마땅치 않았다. 한국적 정취가 묻어나야 하는데 서양풍의 기능적 측면만 강조한 건물 구조를 띠고 있었다. 나는 한국의 정자를 본떠 건물 설계를 다시 하도록 지시했다. 정자는 일대를 조망하는 전망대 구실을 하고 처마는 유엔이라는 글씨체가 나오도록 유선형 곡선으로 처리토록 했다. 건물은 63년 10월 완공했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의 ‘자유의 집’이다.
나는 준공식을 보란 듯이 화려하게 치렀다. 최은희·조미령·김지미·한명숙 등 톱 여배우·가수들을 초청했으며 소 한 마리를 잡아 참석자들에게 점심 식사로 제공했다. 북측 병사들이 입맛을 다시며 기웃거려 뒷다리 하나를 떼어 주었다.
자유의 집이 방문객들의 사랑을 받자 북측도 이에 상응하는 집을 짓기 시작했으며 그것이 바로 판문각이다. 미려하고 자유분방한 모습의 자유의 집과 창고처럼 투박하게 지어진 판문각은 그 후 체제의 상징인 양 비교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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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마후라 -77-핑퐁처럼 왔다 갔다 한 보직 | | 나는 판문점의 바비큐 요리가 인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어느 날 불고기 파티를 열었다. 드럼통을 반으로 잘라 불판을 만든 뒤 장작불로 돼지고기를 구워내면 장교·병사 할 것 없이 달려들어 배가 터지게 고기를 먹는다.
나는 분위기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마주치는 북측 장교와 병사들에게도 “30분 내로 오라우” 하고 이북식 말투로 제의했다. 그들은 “실없는 소리 말라우”하고 돌아섰지만 막상 고기 굽는 냄새가 경내에 진동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달려들어 갈비 한 대씩 입에 물기 시작했다.
“거 보라우. 피차 먹자고 하는 일 아니가. 맛있게 먹으라우”하고 내가 농담을 하면 그들도 “남반부 고기맛 기막히게 좋수다” 하면서 고기 뜯는 일에 열중했다. 평화로울 때는 이렇게 남북이 분간이 안 갈 정도로 통했지만 사건이 나고 정전위원회가 소집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서로 표독스럽게 대치해야 하는 이중성을 띠고 있었다.
영화 ‘빨간 마후라’ 제작에 관여하며 안정된 참모차장직을 수행하고 있는데 1964년 1월 갑작스럽게 공군사관학교 교장으로 보직 변경됐다. 사실 대한중석 사장직을 그만 두고 군에 복귀한 뒤 나는 보직에 관한 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공군소장으로 진급해 작전참모부장을 받자마자 3개월 만에 참모차장으로 임명되고 또 1년 만에 공사 교장으로 발령을 받았다가 다시 8개월 만에 참모차장으로 복귀한 것이다. 핑퐁 식으로 자리를 왔다 갔다 하다 보니 정신이 얼떨떨할 정도였다.
그중 참모차장 1년 만에 공사 교장으로 가는 것이 여러 모로 석연치 않았다. 공군참모차장 - 중앙정보부 차장 - 최고회의 국방위원장으로 있던 박원석 장군이 최고회의가 해체되면서 다시 참모차장으로 롤백하게 됐다. 이렇게 해서 그 사이 참모차장직을 수행하던 내가 밀려나게 됐다.
내 문제로 청와대에서 김성은 국방부장관, 장성환 참모총장, 박원석 후임 차장, 그리고 나 이렇게 4명이 박정희 대통령을 모시고 군수회의가 열렸다.
차 한 잔씩 하고 좌중을 살피던 박대통령이 “장지량 장군을 어디로 보내는 것이 좋겠어”하고 국방부장관에게 물었다. “국방대학원장 자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조용히 있다가 예편하는 자리였다. 이리 밀리고 저리 치이다가 끝내 예편하는가 하자 나는 순간 기분이 나빠졌다. 그래서 “그 자리는 받지 않겠습니다”하고 거절했다. 나는 군복을 벗을 각오를 했고 가족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갈 생각을 했다. 평소 이민길에 오르면 좋은 자리를 주겠다는 미 공군 친구들의 농담 반 진담 반의 얘기도 있었다.
내가 의외로 강경하게 나오자 대통령이 의아스럽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다가 장성환 참모총장을 향해 “임자, 공군 내에서 보낼 곳이 어디야” 하고 물었다. 장총장은 대답을 우물거렸다. 그는 사실 나를 그대로 참모차장으로 곁에 두는 것이 최상의 인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총장이 모른다면 되나?” “네, 작전사령관 자리가 있기는 합니다만….”
“그럼 그리로 보내면 되지 않아?” “그런데 사단장(미 공군사령관 겸 314사단장·현재는 공군중장 보직)이 미 공군준장인데 소장을 보낼 수가 없어서요.”
“그건 안 되지. 그럼 다음 자리는 뭔가.” “공군사관학교 교장 자리가 있습니다.”
박대통령이 나를 보며 “거긴 어때”하고 물었다. 나는 생각할 것 없이 재빨리 대답했다. “공사 교장이라면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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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마후라 -78-자고 나자 바뀐 人事 | | 공군사관학교 교장이라면 학구적인 곳이고 명예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가겠다고 응답한 것이다. 회의가 끝난 뒤 박정희 대통령이 나를 따로 부르더니 타이르듯 조용히 말했다.
“다음 참모총장과 차장 임명 때는 동시에 똑같이 낼 테니까 그리 알아.”
말하자면 군소리 없게 해 주겠다는 것이고, 나를 박원석 장군 후임 차장으로 임명해 주겠다는 언질이었다. 이렇게 해서 공사 교장으로 갔는데 가자마자 나는 엄청난 모략을 받았다.
내가 공금을 유용했다는 신문 보도가 터져 나온 것이다. 6년 전 그러니까 1958년 제11전투비행단장 시절 미국 경제 원조의 일환으로 산업은행의 융자를 받아 전투 조종사 관사 25개동을 지었는데 전투비행단장인 내 이름으로 융자를 받았다. 미 대사관 무관 시절 산업은행 총재를 알게 된 것이 인연이 돼 어렵사리 따 낸 일종의 특혜였던 것인데 공이 돌아오기는커녕 공금을 유용했다는 혐의를 뒤집어 쓰게 된 것이다.
사실 6년이 지난 상태에서 모르는 사람의 경우 서류상으로 드러난 대로라면 국방부로부터 나온 돈이 내 이름으로 입금됐으니 내가 착복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한 번만 확인하면 금방 알 수 있는 내용이었다.
당시 비행단장이었던 나는 내 이름으로 공사를 했고 융자금 수입 지출이 내 이름으로 나가기는 했으나 국방부에서 융자금 예산이 나오면 곧바로 산업은행으로 입금됐다. 내 이름은 돈의 정거장일 뿐 융자금을 갚아나가는 과정은 나도 모르게 국방부 - 공군본부 - 산업은행이라는 절차를 밟아 이뤄졌고 그것은 내가 다른 보직을 받아 떠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융자금을 갚아나가는 과정에서 중간에 내 이름이 끼었다고 해서 내가 공금을 착복했다고 뒤집어 씌운 것이다.
거기에는 나를 제거하기 위한 엄청난 흉계와 모함이 있었다. 6년이란 세월이 지난 일이라고 해서 어물쩍 뒤집어 씌운 것이지만 결코 그들도 모르는 사안이 아니었다. 진위에 상관없이 어떻게든 신문에 터뜨리고, 특히 돈 문제에 관한 한 그것이 허위로 확인됐다 하더라도 본인에게는 치명타가 되기 때문에 어떻게든 엿먹이자는 장난이 개입돼 있었다. 나를 음해하는 세력은 그 점을 노리고 의도적으로 중앙정보부와 위세를 부리던 국회의원을 동원해 이 같은 몹쓸 짓을 했던 것이다.
나는 군 수뇌가 참석한 국방위원회에서 이 같은 얘기를 듣고 해당 국회의원에게 명패를 집어던지며 “분명히 알고 처신하라”고 고함을 질렀는데 김성은 국방부장관이 나서서 말리고 그 국회의원이 자리를 피해버려 큰 충돌은 없었다. 그러나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문제였다.
이는 내가 차기 참모차장이 되고 참모차장은 곧 결정적 하자가 없는 한 참모총장을 승계하게 돼 있었으니 어떻게든 공사 교장으로 물러나 있을 때 나를 제거하려는 술책에서 나온 것이었다.
묵묵히 군인의 길을 걷고자 했던 나에게 이때처럼 절망감을 안겨 준 적이 없었다. 적어도 죽을 고비를 열아홉 번이나 넘긴 내가 자리 하나 때문에 무너져야 하다니. 그런 생각에 미치자 참을 수가 없었다. 일을 더 열심히 한 것이 오히려 흠이 된다면 누가 감히 나서서 일하겠는가. 주어진 직책을 시간 때우기 식으로 적당히 보내고 경력 하나 쌓는 것으로 더 나은 보직 운동을 한다면 누가 열심히 일 하겠는가.
나는 자금의 입출금 과정을 소명하고 비열하게 나를 죽이려는 사람을 찾아 나섰다. 폭로한 국회의원은 사안이 180도 다르다는 것을 알고 곧 사과하고 흉계를 꾸민 사람들은 깊숙이 ‘잠수’했지만 내 명예가 회복됐다고는 볼 수 없었다. 폭로된 신문만 보고 그것을 믿어버린 사람이 있고, 사실이 아니라는 내용이 보도되더라도 보지 못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폭로된 내용은 대서 특필되는 반면 사실이 아니라는 내용은 신문에 조그맣게 보도되거나 묵살된다. 그래서 억울한 것이다. 나의 결백은 명명백백히 밝혀졌지만 한동안 병이 날 지경이었다.
나는 이 때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을 한 사람은 음습하게 피해 다니며 끝내 말로가 좋지 못하다는 것을 보았다. 역시 인생은 정도(正道)라야 값지다는 철리를 배웠다. 야비한 행동으로 인사상의 이익을 본 사람이 있기 때문에 때로 이런 사술과 흉계가 난무하지만 결코 정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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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마후라 -79-인사카드에서 출신도 삭제 | 온갖 음해와 모함이 있었지만 나는 공사 교장 7개월 만인 1964년 8월1일 공군참모차장에 임명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약속 대로 참모총장과 참모차장 인사를 동시에 냈다. 이 인사로 나의 결백이 입증되고 나를 흔들었던 사람들이 오히려 곤혹스럽게 돼 버렸다.
공군참모차장으로서 역할을 수행하는 데 일이 썩 잘 풀리는 것은 아니었다. 베트남 파병 문제로 육·해·공군 차장과 해병대 부사령관 회의가 서종철 합참본부장 주재로 국방부에서 열렸다. 육군과 해군·해병대의 대규모 파병이 결정되고 공군은 1개 전투대대를 파병키로 했다. 이 안건은 참모총장에게도 보고하지 말고 보안을 유지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뒷말을 남기고 싶지 않아 그대로 보고했다.
그런데 공군 파병 건은 뚜렷한 이유없이 취소됐다. 나는 미국이 제공하는 최신예 전투기로 참전해 전쟁이 끝나면 고스란히 가져올 수 있다는 기대감, 전투력 향상의 기회, 그리고 6·25전쟁 때 100회 출격 기록을 세우려다 정전 조인으로 뜻을 이루지 못한 후배들에게 기록 보유의 기회도 제공할 수 있다는 기대감 등으로 파병을 추진했는데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런 문제는 참모차장·참모부장·작전국장 회의를 소집, 결정해야 하는데 그런 절차도 무시됐다.
공군의 대표적 행사인 국군의 날 기념 에어쇼도 뚜렷한 이유없이 취소됐다. 국군의 날 피날레 행사로 에어쇼가 펼쳐지고 이는 모든 국민이 에어쇼를 보며 긍지와 자부심을 갖는 계기가 되는 중요한 행사였다.
국군의 날을 마치면 청와대 주최로 경회루에서 주요 인사들이 참석하는 가운데 축하 리셉션이 열린다. 1965년 그해도 리셉션이 열리고 주빈인 대통령이 좌석을 돌며 참석 인사들과 담소를 나누는데 나를 발견하자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왜 에어쇼를 취소했나?”
나는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대통령은 “대통령과 국민이 모처럼 한자리에서 스킨십을 하는 좋은 자리야” 하며 다른 자리로 옮겨갔다.
66년 8월 중장 진급과 함께 제9대 공군참모총장 명령을 받았다. 이제 내 뜻대로 소신을 갖고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총장이 되자마자 나는 먼저 인사국장을 불러 영관급 이상의 인사기록부를 가져오도록 지시했다. 300장 가까이 되는 인사기록부였다. 인사기록 카드 맨 오른쪽 상단에는 장교들의 출신도가 기재돼 있었다. 나는 인사국장이 보는 앞에서 출신도난을 학습용 면도칼로 잘라 냈다. 인사국장이 의아하게 나를 바라봤지만 부임 첫 일이라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나 역시 그에게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악마의 주술과도 같은 출신 지역. 능력도 전문성도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고 오직 출신 지역에 따라 인사 기준이 적용되고 또 파벌이 조성된다. 이것처럼 비과학적이고 미신적인 것이 어디 있겠는가. 혜택받은 사람은 자기 잘난 맛에 별로 의식하지 못 하지만 불이익을 당한 사람은 눈에서 피눈물이 나는 것이 출신 지역이다. 나는 그동안 장교인사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하면서 진급과 보직 결정의 불합리성을 너무 많이 봐 왔다. 그래서 인사권자가 되면 이것부터 고치자는 생각을 마음속 깊이 다져 왔다.
비행기를 타는 사람은 경상도네 전라도네 충청도네 구분하는 것이 우습다. 김포 기지에서 이륙하면 10분도 안 돼 경상도 전라도 땅끝에 도착하고, 4000~5000피트 상공에서 내려다 보면 지역이 구분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 산골짜기와 강줄기, 논밭, 농부들의 일하는 모습, 건물까지 무엇 하나 다를 것 없이 평화로운데 지상에만 내려 오면 아웅다웅 다투며 승리자와 패배자로 나뉘어 웃거나 피눈물을 쏟는다. 이는 적어도 공군의 정신에는 맞지 않는 일이 | 온갖 음해와 모함이 있었지만 나는 공사 교장 7개월 만인 1964년 8월1일 공군참모차장에 임명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약속 대로 참모총장과 참모차장 인사를 동시에 냈다. 이 인사로 나의 결백이 입증되고 나를 흔들었던 사람들이 오히려 곤혹스럽게 돼 버렸다.
공군참모차장으로서 역할을 수행하는 데 일이 썩 잘 풀리는 것은 아니었다. 베트남 파병 문제로 육·해·공군 차장과 해병대 부사령관 회의가 서종철 합참본부장 주재로 국방부에서 열렸다. 육군과 해군·해병대의 대규모 파병이 결정되고 공군은 1개 전투대대를 파병키로 했다. 이 안건은 참모총장에게도 보고하지 말고 보안을 유지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뒷말을 남기고 싶지 않아 그대로 보고했다.
그런데 공군 파병 건은 뚜렷한 이유없이 취소됐다. 나는 미국이 제공하는 최신예 전투기로 참전해 전쟁이 끝나면 고스란히 가져올 수 있다는 기대감, 전투력 향상의 기회, 그리고 6·25전쟁 때 100회 출격 기록을 세우려다 정전 조인으로 뜻을 이루지 못한 후배들에게 기록 보유의 기회도 제공할 수 있다는 기대감 등으로 파병을 추진했는데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런 문제는 참모차장·참모부장·작전국장 회의를 소집, 결정해야 하는데 그런 절차도 무시됐다.
공군의 대표적 행사인 국군의 날 기념 에어쇼도 뚜렷한 이유없이 취소됐다. 국군의 날 피날레 행사로 에어쇼가 펼쳐지고 이는 모든 국민이 에어쇼를 보며 긍지와 자부심을 갖는 계기가 되는 중요한 행사였다.
국군의 날을 마치면 청와대 주최로 경회루에서 주요 인사들이 참석하는 가운데 축하 리셉션이 열린다. 1965년 그해도 리셉션이 열리고 주빈인 대통령이 좌석을 돌며 참석 인사들과 담소를 나누는데 나를 발견하자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왜 에어쇼를 취소했나?”
나는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대통령은 “대통령과 국민이 모처럼 한자리에서 스킨십을 하는 좋은 자리야” 하며 다른 자리로 옮겨갔다.
66년 8월 중장 진급과 함께 제9대 공군참모총장 명령을 받았다. 이제 내 뜻대로 소신을 갖고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총장이 되자마자 나는 먼저 인사국장을 불러 영관급 이상의 인사기록부를 가져오도록 지시했다. 300장 가까이 되는 인사기록부였다. 인사기록 카드 맨 오른쪽 상단에는 장교들의 출신도가 기재돼 있었다. 나는 인사국장이 보는 앞에서 출신도난을 학습용 면도칼로 잘라 냈다. 인사국장이 의아하게 나를 바라봤지만 부임 첫 일이라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나 역시 그에게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악마의 주술과도 같은 출신 지역. 능력도 전문성도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고 오직 출신 지역에 따라 인사 기준이 적용되고 또 파벌이 조성된다. 이것처럼 비과학적이고 미신적인 것이 어디 있겠는가. 혜택받은 사람은 자기 잘난 맛에 별로 의식하지 못 하지만 불이익을 당한 사람은 눈에서 피눈물이 나는 것이 출신 지역이다. 나는 그동안 장교인사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하면서 진급과 보직 결정의 불합리성을 너무 많이 봐 왔다. 그래서 인사권자가 되면 이것부터 고치자는 생각을 마음속 깊이 다져 왔다.
비행기를 타는 사람은 경상도네 전라도네 충청도네 구분하는 것이 우습다. 김포 기지에서 이륙하면 10분도 안 돼 경상도 전라도 땅끝에 도착하고, 4000~5000피트 상공에서 내려다 보면 지역이 구분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 산골짜기와 강줄기, 논밭, 농부들의 일하는 모습, 건물까지 무엇 하나 다를 것 없이 평화로운데 지상에만 내려 오면 아웅다웅 다투며 승리자와 패배자로 나뉘어 웃거나 피눈물을 쏟는다. 이는 적어도 공군의 정신에는 맞지 않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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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대한중석
그때 이후 또 망가졌지요
기업도 인재를 만나야 재기된다는 사실..
재미있게 잘 읽었기에 감사드립니다.
비리의 대한중석 인재난이 있었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