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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학당] 진여와 열반 41강 - 유식학의 3가지 무자성(三無性)(5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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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원저자의 의도가 이게 아닌 것 같은데 하면은 누가 뭐라고 했든 무시하고 다시 팝니다. 그래서 원전 위주로 공부를 저는 했거든요, 어떤 종교 철학을 하든. 그래서 저는 웃겨요. 제가 성경 강의할 때요 저는 성경만 봤어요. 성경만 보고 원저자의 그 흐름 속에서 읽어내서 얘기합니다. 가끔 인터넷 뒤지고. 남의 책은요 잘 안 봐요. 가끔 이제 저랑 취향에 맞는 책 몇 개 보는 정도.. 근데 웃겨요. 그렇게 하고 나면요, 이제 악플이 아니라 막 댓글이 달리는데 누구누구 학자의 무슨 신학 이론과 통하는군요. 내가 알 게 뭐예요. 저는 거의 시중에 파는 성경 하나 사서 본 건데 그러니까 원전 위주입니다, 저는 무조건. 원저자의 힘이 있어요. 이 글에서 오는 이 느낌을 받으시면요.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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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공부하셔야 되는 게 방금 원저자 글 읽으셨죠. 읽고 느낌 딱 세우셨죠. 근데 만약에 교수건 스님이건 누군가 유식30송을 썼는데 펴서 딱 봤는데 설명이 원저자랑 안 맞아요. 그럼 여러분이 맞는 겁니다. 이게 짱이에요. 딱 보고 이제 어디 서점 가서 아이고 여기서.. (설레설레) 이런 자세가 생겨요. 전문가가 돼요. 물론 이제 거기서 다른 글도 보셔야 돼요. 그러니까 어떤 방식으로 다른 분들 했나도 알긴 알아야 되죠. 그런데 원저자의 의도는 자기가 자신이 있어야 돼요. 그래야 서로 이제 절충도 방편으로 써먹을 수도 있고 더 유연해질 수도 있고. 그러니까 내 것만 고집하라는 얘기가 아니거든요. 항상 원저자의 의도를 제일 중시해야 됩니다. 저는 그래서 제가 자신 갖고 하는 거예요. 주역이건 뭐건 원저자의 의도에 제일 가까운 강의는 학당 강의다. 자신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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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반대로 전혀 다르게 욕을 먹긴 하더라고요 저는. 자기 마음대로 푼다고. 그래서 이게 또 갭이 크네. 그래서 제 입장에서는 원저자 의도인데 남이 볼 때는 통상 해석과 다르니까 또 제 마음대로 푼 게 돼버리더라고요. 윤홍식 강의는 다 지식으로 다 푼다고.. 그래서 제 식으로 또 되고 지식으로도 되고. 지식으로만 푼다. 이 말도 맞네요. 두 그런 악플이 다 달려요. 근데 저는 항상 진짜 원저자의 의도 중심입니다, 후대 분들은 의견은 그냥 보조로. 제 모든 강의 들으시면 공통적일 거예요. 다만 원저자의 의도를 실감나게 전해드리는 과정에서 또 새롭게 들리실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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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뭘 만들어서 하네. 이렇게 그런 것 같아요. 23송 갈게요, 23송. 아까 이것만 다시 적고요. 23송 갈게요, 23송. 아까 이것만 다시 적고요. 유식 3자성이 있고 이제 3무자성 할 참이거든요. 원성실성(圓成實性)의 무자성(無自性)은 뭐죠? 자성의 측면이면 자성이 없다의 측면에서는 뭐죠? 승의(勝義). 승의는요 궁극의 의미입니다. 궁극의, 가장 뛰어난 이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궁극의 무자성이에요. 가장 심오한 의미의 무자성. 궁극의 의미라는 뜻이거든요. 의(義)은 의미고요 승은 뛰어날 승(勝)자, 승리했다 했죠. 승의, 뛰어난, 수승한 이런.. 남다르게 뛰어난 이게 수승(殊勝)하다는 뜻이거든요. 수승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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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수가 이제 다를 수(殊)자죠. 다를 수. 수승한 의미. 그다음에 의타기성(依他起性) 다른 것에 의존해서 일어나는 성품. 이게 두 의미라 그랬죠. 모든 것은 식(識)의 전변이다. 의식의 작용이다. 그리고 그 플러스 이제 연기, 연기성. 그다음에 변계소집성. 점점 안 될 것 같은데요.. 의타기성의 무자성 측면은요 다른 것에 의존해서 일어난다잖아요. 포인트가 다른 것에 의지해서 일어난다. 그러니까 독자적으로 일어난 게 없다는 거예요. 스스로 생겨난 것은 없다. 그래서 생무자성(生無自性)입니다. 독자적으로 생겨난 건 없어, 다른 것에 의지해서 일어나지. 두 가지예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식의 전변. 의식의 작용으로 일어나고 식의 전변, 의식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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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식은 8식·7식·6식이죠. 식의 전변 아니면 연기죠. 다른 것에 의지해서 일어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독자적으로 생겨난 게 없죠. 스스로 생겨난 자. 성경에 나온 I AM THAT I AM 나는 스스로 있는 나다. 이 정도 되어야지 독자적이거든요. 그건 불변의 실체예요. 근데 그렇게 생겨난 게 있냐 이거죠, 이 펜이. 나는 오직 펜일 뿐! 하고 생겨난 적이 없죠. 이게 여러 개가 조합되다 이게 나온 거죠. 그러니까 독자적 불변의 실체가 없다. 이런 거랑 연결됩니다. 지금 중관학파가 달라이 라마께서 주로 강의하는 데가 이 영역이죠. 여기랑 통하죠, 유식학에서는. 식의 전변은 인정 안 해요, 중관파는. 연기는 인정하죠. 그러니까 연기하니까 독자적으로 변하지 않는 고정불변의 실체는 없지 않냐? 이 주장, 이게 지금 대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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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는 귀류논증중관파입니다. 중관파도 여러 입장이 있으니까. 아무튼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은 상무자성(相無自性) 그건 이름하고 명(名), 상(相) 이름과 상만 있지 실체가 없다. 그래서 자성이 없다. 전혀 다른 느낌이에요. 연기하니까 자성이 없다가 아니라 걔네는 이름하고 상만 있지, 실체가 없다. 나랑 남이라는 게 이름만 있지 진짜 나와 남은 없다. 한 의식의 작용일 뿐인데.. 여러분 꿈속에서 그걸 남이라고 했는데 깨고 보니까 내 의식이었잖아요. 진짜 남이었어요? 꿈에서 본 대상이? 외계인일 수도 있지 않나요? 막 이런 주장하지 마시고 아무튼 내 의식의 작용이었잖아요. 그 소리예요. 다 내 의식의 작용인데 얘는 내 의식 아닌 것처럼 굴었단 말이에요, 내가 나와 남을 찢어가지고. 깨어보니까 그건 다 이름이었고 내 이미지였다는 거예요. 내 마음에 지닌 상이었지 실제로 그런 존재가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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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상무자성이고 이것도 귀류논증중관파의 논리 안에도 들어갑니다. 그래서 모든 존재는 이름만 존재한다. 이거를 달라이 라마께서 계속 강조해요. 이건 상무자성 쪽이에요. 그런데 상무자성과 생무자성이 또 만나요. 뭐냐면 이름만 존재하니까 실체가 없다는 측면은 상무자성이고요. 만법이요 의타기성 안에는요 의타기성 안에는 이름이 붙어야만 서로 의지해 가지고 우리 세계가 굴러가잖아요. 이름이 없으면 지금 우리의 세계가 굴러가지를 못해요. 여러분 이름 안 붙이고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할 말이 없죠. 제가 예전에 민사고 가 가지고 지금 민사고 교사 된 제 친구랑 둘이 단기 알바 뛸 때가 있었어요. 민사고 안에서 몰입 강의 좀 해달라고. 따로 식당을 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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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리 잉글리시.. 둘이 할 말이 없어요. 뭐야. 다른 애들은 진짜 영어하는 거야? 이제 근데 아무튼 확인할 길이 없어서 밥만 먹고 나왔습니다. 이름 빼고 생각해 보세요. 이름 빼고. 말이 안 되죠. 언어가 없으면요 세계도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측면이 제가 아까 얘기한 이런 측면에서 의타기성의 확장으로도 봐줘야 돼요, 변계소집 자체도. 여기서 이름만 얘기하는데요 이름만 얘기하더라도 이름 또한 의타기 중에 하나입니다. 이름이 필요해요. 근데 이름을 지으면 필연적으로 아집·법집이 생기는데요. 아집·법집은 버려야 되고 이름은 그 연기로 껴안고 이게 좀 이상하잖아요. 이해되시죠. 아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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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도 그 귀류논증중관파에서 볼 때는 연기의 한 모습이에요, 서로 의존해서 존재하는. 이름 또한 이름이 없이는 연기할 수가 없다는 거죠. 그래서 어떤 5온이 화합했을 때 이름을 붙이는 거죠. 그래서 만법은 다 이름으로만 존재한다는 거예요. 귀류논증중관파는 이 입장입니다. 그래서 재밌는 게 귀류논증중관파도요 결론에 가면요 이 이름 붙여가지고 만법이 연기라고 아무리 분석해도 이거는 뭐예요? 주객이 있고 주객이 찢어져 있는 분석이죠, 공성에 대한. 이거밖에 안 돼요. 이거를 희론(戱論)이라고 합니다. 언어유희. 따라서 모든 희론을 버리고 그래서 자량위(資糧位)라고 하는 수행의 밑천 쌓는 계위, 지위, 보살도 이제 막 시작해서 6바라밀 열심히 6바라밀에 해당되는 공덕 쌓을 때예요. 바라밀이라고 아직 부를 수는 없지만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를 열심히 닦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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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가행위(加行位), 가행위에 들어가는데 이 가행위에 들어가면 지관쌍운(止觀雙運), 여기서부터는 무분별지를 써요. 쓰긴 쓰는데 아직 주객이 찢어져 있다고 그래서 가행위까지는 주객이 찢어진 자리로 봅니다. 이게 달라이 라마 강의에요. 그때 지난번에 한 번 제가 읽어드렸어요, 달라이 라마 책 발췌해가지고. 그래서 결국 무분별지는 지관쌍운이 익어지고, 익어지고 무분별지는 있으니까 어디까지는 보냐면요 아공의 법공의 실상까지는 증득하는데 이 아공·법공 포괄한 구공, 여기는 구공의 세계거든요. 아·법이 다 갖춰졌다고 해서 구공(俱空)이라 그래요. 이 구공(具空)은 제가 붙인 이름이고요. 6바라밀을 구족한 공이라고 제가 붙인 이름이고요. 원래 불교에서는 구공(俱空). 아·법을 다 갖추고 있거든요. 나도 공하고 법도 공하고 아 법이 공하다는 것도 공한 자리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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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공을 터득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냐면 무분별지를 얻어야 돼요. 무분별지 얻어가지고 이 진여의 실상, 구공의 실상을 증득해야 돼요. 이 길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귀류논증중관파에서도 마지막 가면 언어를 다 버리고 어떻게 해야 돼요? 희론을 떠나서 무분별지에 들어가야 돼요. 그럼 이 무분별지를 인정 안 할 수가 없으니까 달라이 라마도 겔룩파 귀류논증중관파의 수장인 달라이 라마도 이거를 청정광명심이라고 인정하고 밀교에서 말하는 지극히 “미세한 마음이다”라고 인정하는데 동질의 것만 동질의 걸 보기 때문에 이게 사실은, 그리고 주객이 있으면 안 되기 때문에 무분별이니까 한 덩어리라고 보자는 게 닝마파면 닝마파도 중관파에 지금 속해 있죠. 중관파의 계통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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닝마파는 “이게 본래 하나”라고 본다면 귀류논증중관파는 “아니다. 이 마음도 역시 무상하다. 영원한 건 맞다.” 왜? 부처도 계속 이걸 갖고 있어야 되거든요. 계속 진리를 인식해야 되니까. 그래서 “영원하고 불멸, 멸하지 않는 것도 맞다만 무상하고 생멸 작용을 하고 있다. 마치 8식 아뢰야식처럼 폭포수처럼 흐르면서 생멸하고 있다”고 했죠. “그래서 생멸하면서 계속 자기는 움직이면서 진여를 계속 인식하고 있다.” 이런 이론을 주장하는 거죠. 그럼 동질이 못 되는데.. 이해되시죠. 여기까지 아시면요 지금 이걸 가지고 제가 달라이 라마를 왜곡하는 게 아니라는 게 이걸 알아야 달라이 라마 책을 보시면 이해가 돼요, 뭔 말 하는지. 달라이 라마는 이 말을 계속해요. 왜냐하면 본인한테 이게 첨예한 부분이거든요. 계속하는데 사람들은 관심 없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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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이거는 계속 귀류논증파입장에서 다른 문파들하고 싸우다 보니 유식학 특히, 이런 애들하고 계속 싸우면서 자기 입장을 계속 주장해야 되기 때문에 계속 책에서 주장하는데 일반인들한테 관심 영역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행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지? 이러고 보는데 거기다 계속 이 얘기를 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게 안 보이셨을 거예요. 다시 한 번 집에 있는 달라이 라마 책 뭐든지 꺼내서 보시면 이 얘기를 계속 합니다. 지극히 광명한 마음을 실체로 보면 안 된다. 절대 이걸 실체화하면 안 된다. 논리도 간단해요. 이걸 실체화해버리면 힌두교랑 같아진다. 이 입장 하나입니다. 힌두교랑 같아진다. 그럼 우리 문파의 독자성이 사라진다. 우리는 힌두교가 아니다. 따라서 청정광명심을 영원불멸하긴 하지만 생멸이 없다고 해서 생각하면 안 된다. 연기적, 달라이 라마 표현입니다, 의식 연속체로 봐야 된다. 계속 이 주장을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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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안 맞다. 우리 입장에서는 이것 다 맞다. 자량위, 가행위에서는요 아직 무분별지를 얻었지만 얻었다는 건요, 딱 시공을 초월해서 진리를 탁 증득하는 게 있어요, 직관하는 게. 제 Z자 이론에서 여기에 무분별정이잖아요. 무분별정에 들어서 무분별지를 가지고 진리를 직관하는 무분별지가 진여를 직관하는 공성을 직관하는 데까지는 가요. 여기까지 맛을 봐요, 가행위가. 그래서 가행 정진하는 단계라고 하는 거예요. 그전하곤 달라요. 그런데 다 보지 못해요. 딱 이 상태, 무분별지와 진여가 한 덩어리가 된 상태라고는 안 보는 거예요. 이게 한 덩어리가 돼버리면요.. 죄송한데 또 제가 계속 이쪽으로 펼쳐져 가고 있네요.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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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의라는 말이 나와요. 승의의 보리심입니다 이게. 청정광명심이 그대로요, 궁극의 의미의 절대적 의미의 보리심이 돼요. 이게 우리의 보리심의 핵입니다. 그래서 이게 증득이 되면 1지예요. 왜냐하면 승의보리심 얻으면 1지예요, 교학적으로. 계속 이어지죠. 다 1지를 논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가행위 다음 단계가 1지인 견도위(見道位)입니다. 그래서 견도위 설명할 때 달라이 라마도 뭐라고 하냐면 이분법을 떠난다고 그래요. 이분법을 떠나서 진여를 오롯이 공성을, 거기서는 공성이라고 그러죠, 공성의 진리를 오롯이 직관할 수 있다, 한 점 가림 없이. 이때는 뭐예요? 그러면 가림이 있다는 얘기죠. 가행위 때는, 가행위 때는 뭔가 가리는 게 있어요. 부분만 증득해요. 온전히 여러분 안에 있는 청정광명심을 증득할 때가 1지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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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서 증득할 때. 밖으로 구현이 안 돼서 지금 10지가 아닌 거지 진리를 본다는 측면에서는 1지나 10지나 불지나 똑같아요. 밖으로 구현이 안 돼서.. 1지는 봐요. 봤어요. 그래서 지금 자기 역량껏 구현해 봐요. 하지만 밖으로, 안에 있는 이 승의의 보리심이 밖으로 온전하게 구현이 되면 불지(佛地)가 되는 겁니다. 그 아집을 완전히 잡아가지고 에고가 방해 안 할 정도로 구현하면 8지라 그래요. 그리고 8지부터는... 이 얘기 하나만 드리면 1지~7지, 그리고 8지~10지 있잖아요. 이 1지~7지는 유루의 수행 단계입니다. 왜? 아집이 작동해요. 8지~10지는요 무루라 그래요. 왜 무루라고 하냐? 아집이 죽었어요.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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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바라밀 구현하는 데 에고가 방해하지는 않아요. 근데 그럼 뭘 계속 닦습니까? 법집이 아직 남았어요. 모르는 게 있어요. 법집이 남았다는 건 모르는 게 있어요. 그래서 마지막 이제 불지에 가면 궁극에 완성된다는 게 유식학 입장이고요. 저는 화엄경 입장으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건 10지다. 왜냐하면 10지까지는 아직 법집이 있어요. 탐진치를 남겨둔 가장 위대한 상태를 저는 더 강조하고요. 기존 불경들은 완벽하게 아집·법집을 제거한, 변계소집성을 완전히 제거한 상태를 불지라고 부릅니다. 근데 저는 이 불지는 비로자나불이나 해당되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라는 게 제 입장이에요. 이 이론이 틀렸으면 제가 책임집니다 아무튼. 왜냐하면 제가 계속 이 주장을 하고 다녔기 때문에 아무도 안 해요, 저만 하지. 책임은 제가 져야죠. 나중에 거기 지옥 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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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제가 갇혀 있는 걸 보더라도 저것 때문이다. 혹시 갇혀 있다면 헛소리 해가지고.. 저는 각오하고 있습니다. 아니 뭐 주장을 하려면 각오를 해야죠. 왜 아무도 안 하는 주장을 제가 하는 거니까 계속. 제 경전적 근거는 화엄경입니다. 화엄경에서 10지에 끝내 버려요. 10지에서 딱 끝내요. 저는 그게 더 인간적이라고 봐요. 탐진치가 아직 남아있지만 정말 이미 갈 때까지 간 경지, 그게 아름답다고 봅니다. 불지는 인간미가 없어요. 여기는 아집도 법집도 없어요. 탐진치도 없대요. 이거 뭐예요. 그래서 근데 또 이름도 다 또 개성이 있어요. 아미타불하고 또 막 갈려요. 다 말이 안 된다는 제 입장이에요. 그거는 힌두교 신화에서 왔다. 신은 시공을 초월한 존재인데 아들·딸 낳고 와이프도 있고 다 있어요. 시바·비슈누·브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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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셋으로 쪼개져가지고. 이런 인도 문화에서 설명될 수 있는 거지 이게 불교에 들어왔다고 보는 겁니다. 완벽한 신이면서 동시에 개성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 그럼 그 개성을 가진 하나의 에고인데 아집을 버렸는데 다시 또 아집이 생기는.. “그건 아집 아니야”라고 해버리면 그건 신을 얘기하는 거예요. 인간이 아니라 신화에서 가능한 겁니다. “신이니까 다 돼”라고 주장하거든요, 힌두교는. 힌두교는요 시바·브라마 다 와이프 있고 아들도 있고 다 있거든요. “근데 어떻게 이게 가능하냐?”고 그러면 “신이라서 된다”고 합니다. “너희는 못해. 너희는 해탈만 가능해. 신들만 이게 가능해.” 이 이론이에요. 이게 불교에 들어온 거예요. 그래서 불지 이론을 제가 안 믿는 거예요. 저는 힌두교 신화가 그대로 들어온 거라고 보는 겁니다. 힌두교 신화가 그대로 들어온 것만이 아니라 완전히 해탈해서 열반에, 아집과 법집을 다 비우고 열반에 들어야 한다는 부처님 가르침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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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두교 신화가 짬뽕된 거예요. 완벽히 열반에 들어서 신이 되어서 다시 점 찍고 돌아오신 거예요. 점 찍고 돌아와서 “나 아미타 아닌데, 중생 아닌데” 하면서 “나 부처인데.” “에고 있으시지 않아요?” “나 부처라서 에고 없는데..” “지금 저 누구랑 얘기하나요? AI인가요?” AI나 가능한 얘기죠. AI설이에요. 부처 AI설. 이때가 되면 USB가 되든가, AI가 되든가?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신화에서나 가능한 얘기다. 이해되시죠. 신만 가능하고 인도에서는 신만 가능해요. 마야의 세계에서도 자유자재는 신만 가능해요. 인간은 해탈만 가능해요. 여러분은 백화점 안 되고 다이소만 가능하다 뭐 이런 거예요, 힌두교 신화는. 좋으세요? 다이소를 비하하려는 건 아니고요. 저는 애용합니다만 아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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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길(백화점) 왜 가?” 막 이런 거죠, “넌 거길(다이소) 가. 아니 넌 해탈을 해야지, 뭔 네가 보살도를 해?” 그래서 불교의 대승불교의 위대성도 여기에 있어요. 인도에서는 신만 가능한 영역을 내가 신이 되겠다고 선언하는 것, 이게 대승불교에서 나온 거예요. 이게 인도에서 못 받아들여진 겁니다. 모두가 신이 되겠다는 철학이라니까요 대승불교는. 지금 이 주장 보세요. 이대로 밀고 나가면 “다 신이 돼서 온 우주를 책임지겠다.” 인도에서는요 신만 우주를 책임져야 돼요. 여러분이 그런 서원을 하는 게 망발이에요. 내가 관세음 같은 위대한 보살이 돼서 근데 관세음은 거의 지금 시바신과 동격이거든요. 천수경에 쭉 찬양 문구가 다 시바신 찬양 문구예요. 시바신에 해당되는 존재예요. 그런데 “내가 관세음 같은 위대한 보살이 돼서 영원히 이 우주를 관장하겠다” 그러면요 이거는 시바랑 캐릭터가 겹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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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힌두교에서 좋아하겠어요? 그러니까 이게 안 맞는 거예요. 인도랑 안 맞는 게 그 부분입니다. “내가 신이 돼서 온 우주를 남김없이 구제하고 책임지겠다”는 발상 자체가 인도에서는 신만 가능한 거예요. 인간이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돼요. 바가바드기타 보세요. 그럼 신이 하는 거예요. “너는 나랑 합일만 하라” 그래요. “너는 나랑 합일만 해라.” 브라만과, 신과 합일만 하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인도 도인들이 편해요. 합일만 하면 돼요. 계속 삼매에만 들어있는 거예요. 뭘 안 해도 돼요. 보살도, 동양의 보살은요 빡세요. 뭐 하면 못 했다고, 다 지적 사항이에요. 중생 중에 하나만 울어도 내 책임이잖아요. “다 구제하겠다고 하시지 않으셨어요? 각서 쓰신 걸로 아는데.. 근데 지금 옆집이 쌀이 떨어졌다는데요.” 그러면 애매하지 않아요, 구제하겠다고 말했는데. 갑자기 신이나 할 일을 내가 하겠다고 선언한 거예요, 덜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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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나서 이 책임을 져야 되는 거예요. 이게 빡센 거예요. 그래서 인도에서는 별 재미가 없는 철학이다. 신 믿고 빌면 되지 신이 되겠다고 주장하는 철학. 이게 대승불교의 힘입니다. 저는 우리는 주장하자는 거죠. 다만 막 불지까지, 힌두교 신급의 그런 경지까지 우리가 가야 되는 건 아니다. 10지보살만 가도 이게 이미 신급이다. 현실적인 신급이에요. 그래서 10지보살 조, 화엄경 가시면 10지보살이 시바신의 경지라고 써 있어요. 화엄경이 그래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이유가 화엄경을 쓰신 분은요 인도의 신들마저도 그냥 인격, 저 사람들은 신이 아니라 인간 중에 최고봉 수준이라고 본 거예요. 그거를 인도에서 신으로 알고 있다라고 본 거예요. 그래서 10지보살이 주로 뭘 하느냐? 시바신 역할을 한다. 그렇게 써 있어요, 화엄경에. 황당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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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죠. 뭐 하다 여기까지 왔을까요? 제가. 어디서 잘못 됐는데, 상무자성 하다가.. 왜 왜 누가 저를 자극했죠? 아무도 그런 사람이 없나요? 근데 이거 이해 좀 되시죠. 이것만 아셔도 돼요. 지금 제 얘기만 들으시니까 이런데, 이러고 진짜 달라이 라마 책들 좀 보시고 해보면 좀 이 지식들이 다 쓰일 겁니다. 어떻게 쓰이는지 아실 거예요. 일단 진도 나갈게요.
[제23송
이 3가지 자성에 의지하여(요의了義, 현료상顯了相) 저 3가지 무자성을 확립하였다(미요의未了義, 은밀상隱密相).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밀의’密意로 일체 법에 자성이 없다고 설하셨다. 卽依此三性 立彼三無性 故佛密意說 一切法無性]
이 3가지 무자성에 승의무자성, 생무자성, 상무자성에 의지하여 그러니까 결국 아까 이 얘기 드리려다 거기 갔네요. 귀류논증중관파 입장 가더라도 마지막에는요 저기 유식학에서 승의무자성이라고 하는 그 세계로 들어가야 돼요. 여기만이 진실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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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만이 시공을 초월한, 주객을 초월한 세계거든요. 여기는 주객이 없습니다. 그 얘기는요 무분별의 지혜와 진여는요 하나예요. 이걸 둘로 보겠다는 발상을 왜 하냐고요? 달라이 라마식 발상하지 말라고요. 하나로 놓고 보면 다 풀릴 일을 계속 쪼개버리려고 하는 분열시키려고 하는 이게 이게 뭐냐 하면 주객이 자꾸 찢어진 이 공부를 하고 있는 거예요. 자량위, 가행위의 공부라서 그래요. 견도위 이상은 하나로 보지 이걸 둘로 보지 않습니다. 견도위 밑에서는요? 둘로 보여요. 지식이라고요. “인식 주체네, 인식 객체네. 어떻게 이게 하나야?” 머리로는 이게 하나라고 아무리 개념으로 배워도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심정적으로 이게 둘이다. 진짜 하나라고 맛을 못 본 사람들은 이걸 하나라고 말을 못합니다. 하나인 줄 아는 사람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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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최소 1지거나 최소 가행위에서 무분별 지관쌍운을 증득해야 그 하나인 세계를 알 수 있어요. 지금 홍익학당에 오시면 바로 실습해서 해드리잖아요. 몰라 상태에서 진리랑 한 덩어리로 있는 그 시간을 자꾸 가지셔야 돼요. 연장하라고 하잖아요. 이게 엄청 귀한 겁니다. 이게 안 되니까 이게 지금 이해가 안 되는데 이걸 어떻게 이해해요? 그래서 1지부터는 청정광명심을 품고 사는 거예요. 접속해서 사는 거예요. 한점 가림 없이 청정광명심을 보고 있다고요. 그러니까 항상 6바라밀이 나올 수밖에 없는 거예요, 기본값이 깔려버려가지고. 6바라밀을 잘하진 못해도, 잘 못하니까 1지죠. 잘하면 10지지. 잘 못해도 계속 기본값이 바뀌어 있어요. 기본값이 바뀝니다. 그래서 화엄경의 1지부터는 범부라고 볼 수 없다. 그 종자가 바뀌었다. 기본값이 바뀌었다는 얘기를 해요. 범부 종성이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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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여래 종성이다. 여래 집안 사람 됐다. 그리고 그 까말라 실라 수행의 단계 같은 책 봐도 거기는 유가행중관파 책인데 거기서도 1지가 되면요 이제 보살의 무오류성을 증득했다 그래요. 오류 없이 진리를 보는 경지에 들어갔다고, 그래서 “여래 집안사람이 됐다” 이렇게 얘기해요. 범부랑 완전히 기본값이 바뀌었다는 얘기를 들어야 1지입니다. 그 과정을 정확히 써놓은 게 이거예요. 그다음에요 이 3가지 무자성, 3가지 자성은 왜 요의라고 했을까요, 제가? 중관파는요 3가지 무자성만 얘기했다는 거예요, 유식학이 볼 때. 중관파가 먼저입니다. 역사적으로 유식학이 그다음인데, 유식학이 용수의 중관파에 반대할 때 너네는 지금 이것만 봤다. 무자성 쪽만 봤다. 그래서 공종, 공에 집착해 있다. 공종이다. 3무자성 우리는 상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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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종이 더 진실을 말하고 있다. 상종이 진실을 팠다. 여기가 완전히 궁극의 가르침이다. 요의(了義) 그래요. 미료의(未了義) 아직 궁극의 가르침이 아니다. 방편을 썼다. 즉 부분적 자명만 얘기하고 있다. 전체적 자명은 여기(의타기성)다. 부분적 자명만 얘기하고 있다. 텅 빔만 얘기하고 있다. 꽉 찬 건 얘기를 안 하고 있다. 이 자성이 꽉 차 있다는 얘기는 안 하고 있다. 그래서 요의, 미료의 그리고 현료상(顯了相) 진리를 온전히 드러내 보였다. 은밀상(隱密相) 진리를 숨기고 있다, 은밀하게 진리를. 공이라고 말하면 쉽게 말하면 이거예요. 반야심경에서 색즉시공(色卽是空)하면서 공을 얘기했죠. 텅 빔만 얘기하면서 은밀하게 그게 진여라고 얘기하고 있다는 거예요. 반야심경도 다 뭐가 돼요? 이렇게 풀어버리면. 이게 은밀상이죠. 은밀하게 지혜를 진리를 얘기하고 있어요. 공을 얘기하면 마치 아무것도 없는 것 같잖아요. 방편을 써서 공이라고 하면서 진여를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사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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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만하게 성취된 진실, 자성이 있는데 불공의 측면이고, 공의 측면이에요. 공만 얘기하고 불공을 빠뜨려서 얘기하고 있다. 그래서 은밀하게 불공을 전하고 있다. 대놓고는 공이라고만 하고 있다. 그건 완전히 안 밝혔잖아요. 우리 유식학은 다르다. 현료, 완전히 드러냈다. 자성을 얘기한 거예요. 원성실자성을 얘기해서 공이 아니라는 걸 밝혔다. 이해되시죠.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밀의(密意), 은밀한 뜻으로 일체법에 자성이 없다고 설하셨다, 사실은 자성이 있는데.. 여기까지입니다, 유식학이. 공종을 완전히 까는 게 지금 상종이에요. 이때 등장해서 “그렇게 막 싸우지마!” 하면서 성종이 껴안아요. “공종도 취할 게 있어! 텅 빔, 자성, 불공도 취할 게 있어.” 그래서 통합시키면서 그 한마음으로 끌고 가요. 보세요. 공종은 무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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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비어 있음을 강조합니다. 아공·법공·구공. 상종은요 어떻게 아뢰야식에서 우주가 펼쳐졌는지를 강조합니다. 성종은요 인식 주체에 주목합니다. 인식 주체와 객체가 통합돼 있는 그 자리, 그걸 한마음이라고 부릅니다. 한마음·공적영지·청정광명심교예요. 청정광명심을 본성이라고 부른 거예요. 그래서 성종이라고 하는 거예요. 원래 성종은요 심종(心宗)이에요, 심종. 더 잘 말하면 심종이에요. 인식 주체를 강조하는 겁니다. “마음이 있어야지. 진리가 진리만 있으면 뭐 해! 진리를 아는 마음이 있어야지.” 그 마음이 우주를 창조하는 거예요. “그 마음이 그대로 진리다.” 이게 성종입니다. 본성 성(性)자 써가지고 성종. 여기서 성은요 사실은 이게 한마음이에요. 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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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요. 이거 이겁니다. 무분별지와 진여가 한 덩어리로 돼 있는 이 세계가 공적영지의 마음, 심종입니다. 상종은 뭐가 문제냐면 아뢰야식에서 우주를 설명해 가요, 아뢰야식부터. 이렇게 말을 못해요. “원성실성이 우주를 나투었다” 이렇게 표현을 못 해요. 왜냐하면 상종은 뭐에 또 걸려 있냐면, 원성실성은 불변이거든요. 출세간은 불변이고 세간은 변화예요. 변화가 불변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봐요. 얘네들 또 힘들게 살죠. 다 왔는데 또 힘들어져요. “그럼 원성실성이 우주를 나투나요?” “그건 아니고요. 원성실성의 작용인 건 맞는데..” “그러면 이 작용을 누가 일으키나요? 원성실성이 직접 일으키나요? 청정광명심이 직접 일으키나요?” “근데 청정광명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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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변이라 좀..” “그럼 뭐가 변화를 일으키나요?” “8식.” 그래서 아뢰야식에서 우주가 나온다고 하지 원성실성에서 우주가 나온다고 말을 못해요. 그러니까 성종이 답답해서 “원성실성이 청정광명심이고 우주는 다 거기서 나오지, 무슨 8식, 오염식 8식, 오염식인데 오염식에서 우주 나온다는 소리만 하고 있냐. 오염식 또한 일심의 작용일 뿐이다” 하고 껴안아버린 게 대승기신론입니다. 그 안에 가면 나중에 우리 교재에 다 있어요. 이 사정이 다 다시 나옵니다. “청정아뢰야식·청정식·여래장·한마음의 작용이 이 작용이 생멸 세계에 드러날 때 오염식인 8식으로 작용한다.” 끝. 이렇게. 그러니까 유식학을 그대로 껴안는 거예요. 그러니까 유식학을 아셔야 되는 게요 유식학을 다 부정한 게 아니고요 8식 오염식이 우주를 어떻게 나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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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우주에서 우리가 어떤 일이 펼쳐지는지에 대해서는 유식학 설명을 다 껴안는 거예요. 껴안되 그 8식 아뢰야식 자체가 청정9식의 작용이다 하고 가버리는 거예요. 그럼 하나가 돼버리죠. “그럼 청정9식은 뭡니까?” “그게 한마음이다.” “왜 어떻게 한마음인가요?” “진여를 꿰고 있는 무분별지가 이게 한 덩어리인 이지명합(理智冥合)의 이 마음이 이게 성이다. 본성이다. 우리의 본성이다.” 이렇게 하고 가는 거예요. 공종·성종·상종. 저 성이라는 거는 지금 한마음을 말해요. 한마음. 상종은 아뢰야식에서 우주 나오는 설명에 치중했다는 거고 공종은 자성이 없음, 텅 빔에 치중했다는 얘기고, 성종은 공적영지, 텅 비어 있으면서 한마음이 있다가 거기서 우주를 다 만들었기 때문에 텅 비었음은 공종과 통하고 텅 비었지만 비어 있지 않은 그 한마음이 우주를 다 만들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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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비어 있음은 공종 회통. 텅 비어 있지만 텅 비어 있지 않은 불공의 이 한마음이, 인식 능력이 우주를 다 나퉜다. 나툴 때는 유식학 회통. 이래서 원효대사가 대승기신론은 유식, 공종과 상종을 싹 회통했다 해가지고 대승기신론을 강조하게 된 겁니다. 이거 하나면 불교를 다 회통했다. 끝없이 제가 회통시키고 있죠. 공종·성종·상종. 성종이 한마음이라는 걸 아셔야 돼요. 이런 뜻이에요. 인간 마음 안에 있는 불성, 즉 한마음, 여래장종이라는 뜻입니다. 불성종 이런 뜻입니다. 그냥 성종이 좀 이해가 안 되시면 불성이라고 생각하세요. 불성종(佛性宗)이에요. 불성이 모든 걸 만들어냈다. 온 우주의 지저분한 것도 다 불성에서 나왔다. 여래장에서 나왔다 이겁니다. 24송, 25송까지 가볼게요. 이 26송부터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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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수행의 단계입니다. 이거 설명 들어갈 거예요. 자량위·가행위·견도위·수도위. 1지가 견도위고요 1지 이후는 수도위예요. 그래서 마지막 불지, 구경위까지 쭉 단계별로 다 풀어놓은 겁니다. 미리 한번 읽어보고 오세요. 그리고 이제 일단 무자성 빨리 끝낼게요. 24송.
[제24송
처음은 ‘상무성’相無性(형상이 자성이 없음)이며, (변계소집자성은 ‘이름’을 짓고 그 ‘형상’에 집착하여, ‘가아와 가법’에 ‘아와 법’의 이름을 붙이고 ‘아집ㆍ법집’으로 집착하여 ‘실아ㆍ실법’으로 여기나, 이러한 형상은 본래 존재하지 않는 허망한 것이기에 자성이 없다.) 다음은 ‘무자연성’無自然性(스스로 그러한 자성이 없음)이며, (의타기성은 ‘의식의 전변’인 ‘연기’에 의거하여 ‘견분과 상분’인 ‘가아와 가법’이 발생함이니, 본래 스스로의 힘으로 발생할 수 없기에 자성이 없다.) 마지막은 앞(변계소집자성)에서 집착한 ‘아’와 ‘법’을 멀리 떠남으로 말미암는 자성(승의무성勝義無性)을 말한다. (아공과 법공으로 드러난 ‘진여’에는, 아집과 법집이 없고 주객의 분별 자체도 없으며 공하다는 형상도 없으니, 승의로 자성이 없다.)
初卽相無性 次無自然性 後由遠離前 所執我法性]
처음은 상무자성이다. 상무자성은 형상이 자성이 없다는 소리죠. 상에는 자성이 없다. 근데 그 상은 왜 자성이 없냐? 변계소집자성은요 이름을 짓고 그 형상에 집착해요. 그래서 가아·가법, 임시적인 자아, 임시적인 법, 즉 견분과 상분을 아와 법이라고 이름을 붙여가지고 아집·법집에 집착해서 실아·실법. 실체로서의 나, 실체로서의 법이 있다고 믿어요. 그러니까 유식학 입장에서 보면요 저기 중관학파도 실아·실법에 집착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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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아와 법이 따로 있다고 생각해버리면, 뭐냐면 입장이 다른 게 중관학파는 이게 실제로 있다고 보는 거예요. 있다고는 보는 거예요, 실제로. 근데 유식학은 그게 다 마음작용이라고 보는 거예요. 여기서부터 서로 달라요. 중관학파는 실제로 있다고 봅니다, 이게. 이게 있는 거예요, 펜이. 다 있는데 무상해서 고정불변의 펜이 없다고 얘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고정불변의 펜이라는 이름만 존재하지 고정불변의 펜은 없다. 하지만 얘는 있어요. 실재하는 얘는 있다” 예요. 유식학은 이 “실재한다는 이 모든 게 의식의 작용”이라고 보는 거예요. 또 달라요 얘네들은. 유식학은 또 달라요. 이걸 다 의식의 작용으로 보는 겁니다, 꿈과 같은. 그래서 유식학 안에도 두 파가 있어요. 진짜 이 꿈과 같은 이 의식만 있다는 파가, 주관적인 의식의 세계라고 보는 파가 있고요 각자 자기 주관 의식을 보고 있다. 근데 우리 객관적인 의식을 보고 있다는 파가 있고요. 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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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라고 보면 이게 주관적인 꿈일 수도 있는 거잖아요. 사실 저는 알 수가 없잖아요. 여러분이 막 저를 이해해주고 지금 고개 끄덕여도 이 모든 게 내 의식의 작용이라면, 내 꿈일 뿐이라면 꿈하고 어떻게 구분하지? 유식학으로 파고들다 보면 이런 이론도 가능하죠. 이런 입장도 있어요. 그러니까 “다 허상이다”라는 입장이 있고요, “아니다 실상, 의식의 작용이지만 분명히 이것도 다 객관성이 있다”라는 입장이 있어요. 두 입장 가능하겠죠. 이게 마하리쉬만 해도요 두 개를 다 써요. 막 얘기하다 보면. “이 일체가 참나작용이다”고 하다가요, 가끔 어떤 얘기하냐면 누가 와서 질문하면요 “이게 다 꿈일지 어떻게 아느냐?” 이렇게 쳐요. 그러니까 한 번씩 이런 사고도 하고 있는 거예요. 꿈하고 차이가 없다고도 보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꿈에서 깨어나라고 빨리 참나만 찾으라고 하는 거예요. 꿈에서 깨어나라 무조건. 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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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건 진실이건 깨어나라. 이게 힌두교입니다. 이런 식 사고를 또 활용해 가지고 하나하나의 또 학설로서도 정립되고 있는 거예요. 유식학 안에서도. 이게 다 허상이라고 보는 입장과 실상이 있다고 보는 입장. 하지만 실재한다고 보는 건 아니에요. 의식 밖에 실재한다고 보지는 않아요. 그래서 이런 비판도 가능하다는 거죠. 중관파에 대한 비판에서. 현실을 실재한다고 보는 것 자체가 유식학파의 입장에서는 의식의 작용일 뿐인 것을 진짜 의식의 작용이고 이름으로만 존재하는 이미지인데 현실이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또 그런 문제가 있다. 이런 비판도 가능할 수 있다. 실아·실법으로 여기나 이러한 형상은 본래 존재하지 않는 허망한 것이기에 자성이 없다. 실아·실법은 없다 이겁니다. 이런 차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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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관학파는 존재는 하는데 연기하니까 고정된 실아·실법이 없다는 거고, 유식학파는 의식의 작용이라서, 모든 게 내 마음 작용이라서 실아·실법이 없다는 거예요. 둘이 좀 다르다는 느낌만 가지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니까 둘 다 가능하다. 꼭 유식을 들고 오지 않아도 이런 걸 주장할 수 있다. 무상하니까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다는 주장은 할 수 있다. 다음은 무자연성(無自然性)이며.. 그럼 여기서 생무자성을요 무자연성이라고도 원문에서는 무자연성이라고 풀었어요. 스스로 그러한 건 없다. 그러니까 스스로 생겨난 건 없다는 겁니다. 스스로 발생하는 성품은 없다. 의타기성은 의식의 전변인 의식의 변화죠. 의식의 전변인 연기에 의거하여 견분과 상분인 가아·가법이 발생함이니 본래 스스로의 힘으로 발생할 수 없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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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성이 없다. 연기에 의존하는 것만 해도 중관학파도 연기는 공감하니까 자성이 없지만 다 의식의 작용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의지하는 게 있어요. 8식·7식·6식에 의지해서 지금 존재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생겨났다고 할 수가 없죠. 마지막은 앞에서 앞이 변계소집자성으로 보여요. 앞에서 집착한 아와 법을 멀리 떠남으로 말미암는 자성, 아와 법을 멀리 떠나 있는 게 뭐죠? 아공·법공의 자성이 원성실자성이죠. 이거를 다른 이유로 이제 무자성으로 말할 때는 승의의 무자성이라고 말한다. 아공과 법공으로 드러난 진여에는 아집과 법집이 없고 주객의 분별 자체도 없으며. 주객의 분별이 없어야 돼요, 원성실성은. 그러니까 원성실성에서요 진리를 인식하는 주체가 있다면 그 자리도 진리랑 한 덩어리여야 됩니다. 주객이 없어야 됩니다. 그래서 청정광명심이 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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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원성실성은 지금 어떤 하나의 성질이잖아요. 성품인데 자성이라는 뜻인데 청정광명심은 마음이라는 거잖아요. 그 마음이 성이라니까요. 지금 유식학에서도 마음이 성이에요. 왜냐? 이 원성실성은요 진여 자리인데 진여를 인식하는 주체가 있어야 돼요. 하지만 대상과 둘이 아니어야 돼요. 이게 기본으로 깔려야 돼요, 여러분 머릿속에. 대상만 영원하다라고 논하는 건 의미가 없다고요. 그걸 어떻게 아시는데요? 그러면 그 영원한 대상을 에고로 타자로 접근해서 주객을 초월한 진리를 에고라는 주관을 가지고 어떻게 아실 거냐는 거예요. 중관학파가 계속 하고 있는 뻘짓이 그겁니다. 계속 책으로 연구하고 있는 거예요, 논리로 분석해서. 주객을 초월해야 된다면서 비행기는 날아올라야 된다면서 계속 활주로만 달리고 있는 거예요. “언제 날래?” 하는 거죠? 희론을 떠난다는 건 날아올라야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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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날아올라야 알죠, 주객 없는 세계를. 그래서 저희 홍익학당에 오시면 바로 날려드립니다. 오시면 바로 군장을 차게 할 거예요. 그다음에 밀어드려요. 번지점프 하듯이, 일단 날아봐야 알죠. “아, 이거구나!” 하고, 근데 이거를 안 날고 계속 뭐라고 뭐라고 막 떠드는 거는 지식만 쌓여가고 논리만 더 복잡해져 갑니다. 그거를 달라이 라마마저도 뭐라 그래요? 희론(戱論)의 세계, 희론의 세계라고 합니다. 주객의 분별 자체도 없으며 공하다는 형상도 없어야 돼요. 공공(空空)이라고도 해요. 그래서 이 구공의 세계를요 공공(空空)이라고도 합니다. 이거는 뭐 용수보살도 강조해요. 공공. 공도 공하다 예요. 공이란 말도 없어야 돼요. 아무것도 없어야 돼요, 그냥. 주객을 초월한 무분별지만 있어야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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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수보살도요 무분별지를 강조했다니까요. 이 무분별지에 들어가라고 지금 용수보살은 그 수많은 모든 언어를 파괴하는 책을 쓰신 거예요. 부처님 말까지 다 성립할 수 없다고 파괴해서 언어를 파괴해가지고 어떻게 하려고요? 설 수 없게 만들려고요. 언어를 다 날려버리면 자동으로 몰라가 되지 않겠어요. 한마디 말도 할 수 없는데. 자성청정심 이 말도 할 수 없어요. 자성이 청정하다는 그 마음이라는 건 또 하나의 실체화인데 이 실체화는 불가능하다. 자성이 영원히 청정한 그 마음이라면 너는 더럽혀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 말도 안 되네. 다 날려버리는 거예요.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만들어서 초월시키려고 한 거예요. 그래서 제가 반대한 거예요. 달라이 라마의 말이 자성청정심도 사실은 무상하다라고 해버리는 순간 지상에 집을 지어버렸어요. 용수의 주장은요 집을 안 짓게 하려는 거예요. 자성청정심, 뭐 열반 다 안돼요. 성립 안 돼요. 언어의 세계에서 그거 성립한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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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가짜라고 다 쳐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앉을 곳이 없죠. 그럼 깨어있는 거죠. 예전에 참새 어떻게 잡았어요? 모택동 때 참새는 해충이다 하니까 중국 인민들이 다 뛰어다니면서 참새가요 땅에 못 앉게 했어요. 앉을 곳이 없게 해가지고 지쳐서 죽어서 떨어졌어요. 살벌하죠. 참새를 앉을 곳이 없게. 그러니까 내려만 오면 난리 치는 거예요. 막 꽹가리치고 막 그래가지고 계속 날게 해가지고 지쳐서 죽게 만들었어요. 용수가 한 일이 그런 거와 똑같아요. 여러분 언어가 어디에 좀 쉬려고만 하면 “죽겠다. 그냥 나 자성청정심이라도 믿을래.” “자성청정심은 왜 안 되는 줄 알아? 자성이 청정한데 너는 왜 그래?” “그러네, 내가 왜 그럴까? 이것도 아니네.” “자성이 청정하면 계속 청정해야지. 자성이 청정인데 왜 갑자기 흐려져 있어? 자성이 청정한데 어떻게 흐려질 수 있어?” 말을 들으니까 다 맞아요. “그러네.” 하고 또 생각을 더 못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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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도 자성청정심이라는 생각을 못하게 만들어서 살불살조(殺佛殺祖)죠. 부처도 죽이고 조사도 죽이게 만들어서 깨어나게 만들려고 한 거예요, 용수보살이 한 작업은. 저는 너무 무리한 작업이라고 보죠. 이러면 진리를 담을 수가 없어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세워야 되는데 손가락도 잘라버린 거예요. “손가락은 달이 아니잖아!” 하면서 잘라버리고. 그럼 또 말은 맞는데 어쩌라는 얘기야? 그냥 달이어야지. 이런 게 용수보살의 정신인데 달라이 라마식의 그런 주장은 그 정신도 깬다. 이해되시죠, 무슨 말인지. 그러니까 결국은 하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회통이 된 거예요. 대승에 오면요 공종도 회통돼요. 중관파까지 다 회통돼요. “너네도 뭔 말 하려는지 알겠어. 무분별지 들어가자는 거잖아. 거기는 텅 비어있는 어떤 자성도 없는 세계라는 거잖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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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에 너무 집착했어. 원성실성, 그 안에 원만하게 성취돼 있는 진리가 있다는 것도 알았어야지. 심지어 반야경에서도 다 이미 구공을 다 주장했어. 그 텅 빈 공성 안에 6바라밀이 있다고 다 얘기했어. 중관파 너무 심했어.” 그러면서 이제 껴안는 거죠. 공종·상종·성종을 싹 껴안아버리고. 25송까지 지금 딱 몇 분 남았어요. 25송.
[제25송
이것이 모든 법의 ‘승의’(궁극의 의미, 일체법의 승의제)이며, 또한 바로 ‘진여’(무루로서 참되고 무위로서 상주불변함)이다. ‘항상 똑같음’이 그 자성이니, 바로 ‘유식의 참다운 성품’이다. (‘무분별지’이자 ‘진여’인 원성실자성만이 유식의 참다운 승의의 성품[무루ㆍ무위]이니, 의타기자성은 유식의 세속적 성품[무루ㆍ유위]이며, 변계소집자성은 유식의 허망한 성품[유루ㆍ유위]이다.) 此諸法勝義 亦卽是眞如 常如其性故 卽唯識實性]
이것이 모든 법의 승의, 궁극의 의미, 일체법의 승의제이며. 이게 지금 원성실성 얘기로 지금 들어간 겁니다. 지금 방금 얘기한 그 원성실자성이 모든 법의 궁극의 실상이라는 거예요. 궁극의 의미, 궁극의 실상, 또한 바로 진여. 진(眞) 참되다는 거는 무루고요. 여(如)라는 거는 영원불변이라는 뜻입니다. 여, 똑같은 여(如)자잖아요. 항상 똑같은 거는 불변이죠. 무위죠. 무루·무위, 무루로서 참되고 무위로서 상주불변한 그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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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원성실성이다 이겁니다. 그리고 동시에 승의무자성이다. 항상 똑같음이 그 자성이니. 그럼 고정불변의 실체라는 얘기죠. 중관파가 제일 싫어해요. 항상 똑같은 자성을 실체로 인정하면 안 돼요. 이걸 언어의 세계에서 인정해버리면 안 된다는 거예요. 언어의 세계에서 성립할 수 없다는 거예요, 항상 똑같다는 게. 그렇죠. 개념으로 성립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개념을 세울 수 없는 무분별 상태로 들어가야 된다는 거거든요. 그런데 단어를 가리키는 손가락은 있어야죠. 유식학은 손가락은 필요하다 이겁니다. 항상 똑같음이 그 자성이며 이것이 바로 유식의 참다운 성품이다. 이거를 뭐라고 해요? 유식성(唯識性)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그동안 앞에서 다뤄온 거는요 유식상(唯識相)이었어요. 이래서 상종(相宗)이죠. 유식상은 8식·7식·6식의 세계, 의타기성과 변계소집성의 세계입니다. 근데 지금 25송에서 드디어 유식성이 나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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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의 본성, 이게 원성실성입니다. 이게 원성실성이고 청정광명심이에요. 이 청정광명심이 드디어 이제 나온 겁니다. 이게 청정광명심이다. 그다음에 이제 26송부터 마지막 30송까지는 유식의 수행의 단계라고 해서 유식위(唯識位)라고 합니다. 그러면 자량위, 가행위 좀 친해지세요, 이름들하고. 견도위, 도를 봤으면 수도를 해야죠. 수도위, 그다음에 구경위, 부처의 경지까지. 됐죠. 유식30송 끝. 이게 바로 유식의 참다운 성품이다. 이게 25송이에요. 이게(유식성唯識性) 25송, 이건(유식위唯識位) 26송~30송. 1송~24송까지 유식상(唯識相). 무분별지이자 진여인, 아시겠죠, 이제 지혜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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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분별지·청정광명심, 그리고 대상으로서는 진여라는 진리, 공성의 진리인 원성실자성만이 유식의 참다운 승의의 성품입니다, 무루·무위기 때문에. 의타기자성은요 유식의 세속적인 성품입니다. 무루·유위거든요. 그리고 변계소집자성은 유식의 허망한 성품입니다. 실체가 없는 성품, 유루·유위거든요. 하지만 변계소집성도 반드시 저는 의타기성 안에 포섭되는 부분이 있는바 방편으로 잘 써야 되는 영역이다. 없을 수는 없다. 그러니까 유식30송에서도 그걸 3가지 자성 중에 하나로 쳐 주잖아요, 반드시. 근데 이걸 이걸 이제 없애자고 그분들은 쓰지만 저는 껴안고 같이 가야 된다. 독은 독이면 법제하라고 하죠. 한약, 한의원에서 법제를 해가지고 약으로 해서 쓸 수 있다. 실제로 이 유식30송 자체가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 이름과 명상, 이름과 형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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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어져 있죠. 근데 이렇게 유용하게 쓰이죠. 이게 진리를 찾는 길이 되어 주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되어 주죠. 유용하게 잘 쓰면 된다. 이걸 너무 “손가락만 쳐들어봐 다 잘라버리겠어” 하는 용수식 이론은 부작용이 너무 많다. 공종의 부작용을 치유하려고 상종이 등장했다. 상종의 부작용이 또 뭐냐 하면 이 원성실자성에서 우주가 나툰다고 하면 될 거를 원성실자성은 영원한 우리가 도달해야 할 목표처럼 제시하고, 현상계를 나투는 실체는 아뢰야식을 근본식으로 해가지고 8식 오염식에서 우주가 나퉜다고 주장한다. 원성실자성은 우리가 도달해야 될 목표로 제시해요. 부처가 돼야 온전히 구현할 수 있는.. 이렇게 초월시켜버립니다, 원성실자성을. 그래서 이게 법상종(法相宗)이고요. 이 경전을 다르게 읽을 수 있어요. 섭론종(攝論宗)은요 요것만 한번 강조하고 끝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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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론종과 법상종 차이, 이 유식30송에 대한 이해에서 방금 이 오염8식을 강조한 거는 유식30송이고, 유식30송 입장에서는 법상종이 더 맞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섭론종 입장이 우리는 더 와 닿습니다. 보세요. 오염8식이 있죠. 그러면 이 안에 있는 지금 방금 말한 원성실성의 영역은요? 오염8식은 지금 의타기성의 영역입니다. 왜? 여기서 우주가 나오니까 그래서 불변의 세계는 우주를, 만법을 나툴 수 없고 변화의 세계에 있는, 변화에서 변화가 나온다. 따라서 모든 변화의 근원은 8식이다. 8식에서 7식·6식이 나오는 거다. 6식 안에는 5식 들어가 있고요. 이거 이해되시죠. 이게 지금 법상종입니다. 그래서 이 원성실성이 불변의 세계고 여기가 청정심인 건 맞아요. 근데 8식의 청정한 부분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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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8식이다. 이렇게 불러줍니다. 그리고 여기(원성실성)는 불변의 세계이기 때문에 우주는 8식 책임이다. 그런데 우주가 여기에 영원한 목표라는 게요 이 청정식을 회복해서 8식 자체가 청정해질 때가 온다. 그때가 불지에 도달할 때다. 그때 이 8식의 이름이 오염식에서 뭐로 바뀌었냐면 무구식(無垢識)으로 바뀌어요, 청정무구식(淸淨無垢識)으로. 이게 법상종입니다. 뭔가 좀 찜찜하죠. 우리랑 안 맞죠. 섭론종은요 됐고 9식이다. 8식이다. 8식은 오염식이다. 9식은 청정광명심이다. 9식은 그냥 청정광명심이에요. 청정광명심에 우리가 접속해 가지고 이 8식까지 청정하게 만들면 된다. 청정광명심이 그대로 무구식이다. 무구식이 달라요. 우리 안에 있는 청정광명심이 청정무구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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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론종은. 지금 이게 우리 입장이에요. 여러분 안에 있는 참나가 9식이에요. 그게 청정광명심이에요. 8식은 무의식이에요. 그래서 제가 여기(청정의식)는 초의식, 8식은 무의식. 구분했죠. 근데 저기 법상종은요 무의식을 강조하는 철학입니다. “저 무의식 근원에 저기 초의식이라는 게 있는데 우리가 우리 무의식을 다 정화하면 그 초의식이 온전히 구현돼서 우리의 의식으로 통해 드러나. 그걸 대원경지라 그래. 그러니까 우리 의식 정화가 중요한 거야.” 무의식이 초점이에요. 무의식 관점에서 지금 설명하고 있어요. 무의식 너머의 세계는 지금 대충 처리되고 있어요. “원성실성 최고! 막 죽여!” 막 하는데 지상에 못 내려오게 해요. “거기 계시죠. 우리가 잘 할게요. 우리를 정화해야죠. 그게 중요한 거죠.” 이쪽은요 청정9식이 정화시키는 거예요. 청전9식이 우리 안에 있어서 무분별지를 바로 만나면 청정9식과 바로 접속이 돼서 우리 8식 오염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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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청정9식으로 정화시켜야 해요. 무구식이 바로 등장합니다. 이쪽(법상종)은요 불지(佛地)되어야, 무구식이라는 용어가 불지 때 등장해요. 갑갑하죠. 누가 무구식을 그럼 논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아뢰야식이 완전히 정화돼서 한 점 오염이 없을 때 무구식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오염식이 정화된 걸 무구식이라고 부르면 법상종. 우리 안에 있는 원성실성을 그대로 무구식이라고 부르고 9식이라고 불러서 8식의 근원으로 삼고 이 자리가 있다고 믿으면, 주장하면 섭론종. 하지만 법상종·섭론종은 다 상종(相宗)이다. 성종에 오면 청정9식이 우주를 나툰다고 주장을 해요. 여기까지 가야 돼요. 아직 섭론종은 청정9식과 8식은 설명됐지만 이제 여기는 불변의 세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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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변화의 세계라는 점에서는 아직 지금 벽들이 있습니다. 이해되시죠. 그러니까 현상계의 주체는 8식인 거예요, 여전히. 하지만 우리 안에 있는 청정9식이 존재하고, 이 청정9식을 우리는 계속 접속해서 회복해 내야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는 점은 우리랑 더 잘 통한다. 하지만 대놓고 청정9식이 우주를 나퉜다라고 하면요 그러면 그거는 이제 성종이에요. 이때 청정9식은 그대로 성(性), 일심(一心)이 돼요. 한마음 왜 왜 섭론종이라 하더라도 왜 성종과 다르냐면요 그들의 바이블인 유식30송에서 지금 설명이 안 되고 있잖아요. 간단해요. 원전을 보셨으니까 알죠. 얘네들은 이 유식30송을 풀이하다가 나온 거예요. 서로 이견이, 달라진 거예요. “9식이 따로 있다고 보자.” “아니 원전에 9식이란 말이 없지 않냐. 그냥 8식으로 밀고 나가자 계속. 8식의 그냥 청정분이라고 보자, 원성실성은. 8식이 오염분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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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식의 오염분, 8식의 청정분, 오염8식, 청정8식 이렇게 구분하자.” 근데 섭론종은 “이걸 풀 때 따로 9식이라고 보자. 여긴 유식30송에서는 그렇게 말 안 했지만 9식이라고 보자. 그래야 이게 설명이 된다.” 이해되시죠. 결국 이게 경전이란 말이에요. 이건 근데 치워버리고 “그냥 우리는 화엄경에 근거하겠다. 일체유심조라고 했는데 무슨.. 청정광명심이 우주 나투는 거다.” 이게 모든 여래장 계통은 이제 다 이거 주장합니다. “여래장에서 생멸의 세계가 나왔다. 한마음에서 생멸문이 나왔다.” 이런 말이 이제 모든 여래장 사상에서는 다 나옵니다. 그래서 공종(空宗)이 중관파가 법을 열었더라도 상종(相宗)이 그걸 비판하고 성종(性宗)이 종합했다. 근데 돌고 돌아서 뭘로 돌아갔어요? 성종이 화엄종(華嚴宗)이거든요. 결국 화엄경으로 돌아갔다. 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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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불교의 철학의 역사는 화엄경을 이해하기 위한 철학의 역사였어요. 화엄경이 제일 먼저 나왔어요, 기원후 1세기에. 반야경들이 먼저 나오긴 했죠, 공종 계통의 경전들이. 하지만 지금 중관, 유식, 성종보다 더 먼저 나온 게 화엄경입니다. 결국 화엄경을 잘 이해하고 끝났어요. 이것도 재미있는 겁니다. 이 공종 주장하신 용수보살도 화엄경의 10지를 풀려고 되게 노력했어요. 10주비바사나품 이런 경전 쓰시고 10주가 10지를 말해요. 10지를 풀이하려고 되게 용수보살도 노력했습니다, 화엄경을 풀려고. 결국 전체적으로 보면 반야경도 풀려고 노력했지만 유식과 중관이 화엄경을 풀려고 되게 노력했습니다, 10지를 풀려고. 그래서 유식학에서도 10지를 강조한 거예요. 아예 유식30송에 이제 이 10지 수행체계가 들어있는 거예요. 그래서 화엄경이 지금 경전 중에 이제 왕이라고 하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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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화엄경을 이해하기 위한 역사였다. 중관, 유식, 공종, 상종, 성종을 거쳐서 결국은 성종에 와서 성종의 대표적인 게 화엄종이죠. 화엄을 다시 이해하기. 이렇게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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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녹취) [홍익학당] 진여와 열반 41강 - 유식학의 3가지 무자성(三無性)(58:18) (홍익학당) | 작성자 수호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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