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물이 가슴에 배어있는 꽃은 잊히지 않는다. 향기가 가슴 시리게 다가올 때는 더하다. 추억이 꽃을 배달하고 관심이 꽃을 보게 한다.
마음속에는 고리가 있다. 줄줄이 늘어선 생각의 고리를 오늘도 어김이 엮는다. 하나하나의 고리는 서로 의지하며 생각을 이어지게 한다.
몇은 적당히 접어 구겨서 던지고 어느 하나는 액자에 넣는다. 다행히 다치지 않고 마음의 비탈을 내려온 기억도 바람대로 다 추억이 되지 않는다. 볍씨가 모판에 자라 모내기한 논의 환경에 적응하여 ‘사람’을 하듯이 생각도 자라고 자라 추억이 된다. 추억은 논 개구리 소리 요란한 유월의 어느 밤에 희미하게 다가와서 감정이란 우물에 빠뜨린다.
오월이 되면 장미가 만발하고 붉은 덩굴장미가 담장을 휘감으며 유혹한다.
대구의 첫 직장은 신천변에 있었다. 오월엔 울타리의 덩굴장미가 출근하는 나를 반겼고 아침 일찍 출근하여 장미를 돌보는 선배의 얼굴에서 열정을 보았다. 20대 후반의 감수성으로 본 장미는 아름답다 못해 슬프기도 했다.
선배는 “인간이 먼저 된 후 품격을 가지고 아이들과 소통해야 한다.”라고 했다. 이전 직장에서는 굵은 구리 튜브를 가공하여 아주 가는 구리 관을 만드는 일을 했다. 원가나 생산성 등의 단어를 입에 달고 다니며 품질관리에 신경 쓰다 보니 사람과의 대화보다는 기계나 데이터와 씨름하였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과 재미있게 지낼 수 있죠?”
“음, 장미 앞에서는 장미 꽃말도 알아야지. 노래도 계절에 따라 부를 수 있으면 좋고. 봄에는 봄비, 여름은 여행을 떠나요, 가을에는 가을 편지, 겨울에는 겨울 아이, 분위기에는 직녀에게, 떠들고 놀 때는 고래사냥이나 돌아와요 부산항에 정도는 불러야지.”
팝송도 비틀즈의 Let it be, Yesterday와 짐 크로치의 Time in a bottle 정도는 알아야 한다고 했다. 운동은 테니스가 필수고 볼링도 하면 좋다고 했다. 오월의 붉은 덩굴장미 아래에서 맛나게 웃는 선배의 얼굴이 지금도 선명하다.
새소리에 놀라 일어나 보니 마당의 잔디 중간중간에 노란 씀바귀꽃이 이슬을 머금고 고개를 내밀고 있었고 참새들도 몰려와 때 이른 아침을 먹고 있었다. 오늘도 기온이 33도가 넘는단다. 월요일부터 꽃을 주제로 글을 쓰려다 보니 그동안 보이지 않던 꽃이 보이기 시작했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하여 고향에 오면 하는 루틴을 따르기로 했다. 차를 타고 괘릉 원성왕릉과 불국사를 거쳐 추억이 묻어 있는 보문호에 주차한 후 호수를 한 바퀴 걸은 다음 더 케이 호텔에서 온천욕을 하는 것이다. 아내가 시간적, 경제적 낭비라고 싫어하기 때문에 혼자일 때 하는 루틴이다.
동대산에 해가 보이고 아침이슬에 젖은 풀들이 기지개를 켠다. 라한 호텔 옆길을 지나 교원드림센터 옆의 조그만 주차장에 주차했다. 내가 즐겨 찾는 주차장이다. 보문호 산책로에는 부지런한 사람들의 천국이다. 조깅을 하는 사람, 산책을 하는 사람과 호수를 바라보며 멍을 때리는 사람도 보였다. 모내기 철이 지나고 연일 30도가 넘는 무더위로 인해 수위가 많이 줄어있었다. 호텔과 관광업소가 밀집해 있는 북쪽 산책로엔 야생화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깨끗하게 정리했기 때문이리라. 남쪽 산책길 주변에는 야생화가 보였다. 노란색의 선씀바귀꽃, 노란 민들레, 씨만 남아 날아가기 직전의 민들레가 보인다. 친근한 토끼풀꽃도 보인다. 흰색은 시들어 가고 붉은색 꽃은 그래도 버티고 있다. 상처 난 곳에 짓이겨 바르면 좋다는 은은한 핑크빛을 띤 지칭개도 보인다.
더케이 호텔은 야외에서 알몸으로 노천온천을 즐길 수 있다. 온천과 피톤치드를 방출하는 편백 나무 산림욕을 하다 보면 풍욕은 덤이다. 기분 좋게 몸을 담그고 둘러보니 금사매라고도 불리는 노란 망종화가 보였다. 24절기 중 9번째 망종 무렵에 핀단다. 돌 틈 사이에는 아직 꽃이 피지 않은 봉선화 몇 포기도 보인다. 노천탕이 생길 때부터 이용했는데 지금에서야 꽃이 보이다니.
불국사, 신계와 괘릉을 돌아오는 길은 꽃길이다. 노란 금계국이 흔들리고 있고 일찍 핀 분홍색 코스모스가 고개를 내밀고 있다. 담장 넘어 계면쩍게 고개를 내밀고 있는 석류꽃도 있었다. 어릴 적에 소풍을 와서 뛰어놀았던 원성왕릉에 들렀다. 왕릉과 오래된 소나무나 왕릉을 지키고 있는 석상을 그대로인데 관리 방법이 다른 것 같았다. 야생풀이 자연스럽게 관리되고 흰색의 꽃잎에 중간이 노란 개망초가 자유롭게 자라고 있었다. 왕릉에도 개망초가 있었다. 우연히 발견한 자주색 꿀풀도 수줍게 웃고 있었다. 보문단지의 정형화된 관리도 좋지만, 괘릉의 자연스러운 관리도 괜찮은 것 같았다.
차를 마을 주차장에 세워두고 걸어오다 보니 마을 길이 온통 꽃길이었다. 분홍 달맞이꽃이 하늘거리고 키가 큰 하얀 나비바늘꽃, 천수국, 키가 나보다 더 큰 접시꽃이 있었다. 담장 아래는 채송화가 꽃을 피우고, 붉은 꽃양귀비가 나를 맞이한다. 앞집 담장을 기세 좋게 덮고 있던 붉은 덩굴장미는 내리쬐는 햇살에 고개를 숙이고 있다. 마을에 이렇게 꽃이 많다니.
대문을 열고 들어서니 텃밭에는 하얀 감자꽃과 참깨꽃, 자주색 가지꽃이 고개를 숙이고 있고 노란 오이꽃도 고개를 들고 있다. 노란 토마토꽃, 하얀 고추꽃과 어제저녁에 쌈을 싸 먹었던 쑥갓에도 하얀 꽃봉오리가 맺혀 있다.
지금까지 결과만 바라보다 과정인 꽃을 보지 못하고 살았다. 모든 생물은 태어나는 이유가 있고 자라는 과정이 있으며 열매를 맺고 사라지는 결과가 있다는 것을 잊고 살았다.
도착을 목적으로 가는 나그네는 길에서 쉬지 않고, 잘 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나그네는 길에서 뛰지 않는다고 한다.
꽃 한 다발을 만들고 싶다. 사랑을 기본으로 큰마음, 배려, 관용, 친절, 겸손, 건강, 행복을 꽃말로 하는 꽃 한 다발을 만들고 싶다.
2024.6.15. 김주희.
첫댓글 꽃 이야기 길게 썼셔군요. 좋아하는 꽃 하나를 좀 더 부각하면 좋을 듯 합니다. 수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