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에 읽어보는 조선사
아내마저 적이 된 태종
1407년 7월, 태종이 왕위에 오른지 7년째, 세자가 왕세자에 오른지, 3년째에 태종의 처남이자, 왕세자의 외숙부인 민무구, 민무질 형제가 의금부에 붙잡혀가는 사건이 발생한다. 왜 이 사건이 일어난 원인이 무엇인가? 시간을 거슬러, 1400년, 태종이 왕위에 즉위할 때로 돌아가도록 하자. 1,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는데, 앞장선 태종이 마침내, 오랜 인고 끝에 마침내 정종의 선위를 받고, 왕위에 올라간다. 이렇게 어렵게 받았던 왕위를 남에게 쉽게 빼앗기지 않게 해야겠다고 생각하여, 왕권강화에 주력하게 된다. 당시 의정부 서사제에서, 육조 직계제로 바꾸어, 모든 정사 결재를 의정부를 거쳐가도록 했던 것을 육조가 직접 임금에게 올리도록 했다.(하지만, 이 제도는 세종 말년에 다시 폐지되고, 의정부 서사제로 환원된다)
하지만, 제도만으로서는 왕권강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왕권에 위협될만한 세력을 모두 제거해야 하는 것.. 하지만, 자신의 왕권에 도전할 만한 세력은 보이지 않았지만, 자신의 세자, 어린 세자인 양녕대군에게는 있었다. 다름 아닌 세자에게 외삼촌이 되는 민무구, 민무질이었다. 세자인 양녕대군은 어렸을 때, 외가에서 오랫동안 지냈으며, 외가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자라왔다. 그러다보니, 외삼촌들과 친하게 지냈고, 민무구, 민무질 등은 태종의 왕비인 민씨와 양녕대군을 보기 위해 자주 궁궐을 출입했다.
하지만, 태종은 이것을 그다지 좋게 보지 않았다. 왕권이 강해지려면, 임금이 강해야 하고, 임금이 강하게 되려면, 사사로운 정을 단칼에 잘라낼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자기가 혹시 죽을지 모를 사후를 대비하기 위해, 외척세력을 무슨 수가 있어도 제거하고, 그 후세 사업을 세자에게 넘겨야 하겠다고 믿었다. 태종은 아직 나이가 40도 안된 상태에서 세자에게 양위(자위를 넘김)하겠다고 충격선언하게 된다. 그러자 온 조정은 발칵 뒤집히며, 궁궐 앞에서 반대 상소를 해야 했다. 헌데 이것은 태종의 숨은 뜻이 있었다. 바로 민무구, 민무질 형제의 제거, 자신을 별로 좋게 보지 않을 처남들을 죽이기 위한 포석이었다.
태종은 당시 원경왕후 민씨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태종이 정도전의 사병철폐 정책으로 인하여, 궁지에 몰릴 때, 원경 왕후 민씨가 집안에 숨겨놓았던 군사와 무기를 꺼내주며, 이를 독려했다. 그뿐이 아니라, 처남들은 제 2차 왕자의 난, 즉 방간의 난 때 혁혁한 공적을 세워 정사공신까지 책봉된 자들이었다. 당연히 원경 왕후 민씨와 민씨 형제들은 태종에게 걸맞는 대접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태종이 왕위에 오르자, 태종은 왕비 민씨를 멀리하고, 후궁들을 가까이했으며, 민씨 형제들한테 그렇게 생각만큼 대접을 못 받자, 태종에게 불만이 생겼다. 따라서 당연히 자신들과 가까운 세자와 왕자들에게 기대를 걸었으며, 태종은 세자와 지나치게 친한 민씨 형제들을 견제했다.
여러 신하들의 반대상소로 인하여, 결국 선위를 철회한 태종은 1407년 영의정 부사 이회의 상소문을 받았다. "태종이 세자에게 양위한다고 했을 때, 민무구, 민무질 형제가 웃음을 지었으며, 거짓으로 반대 상소를 했다."면서, 탄핵을 상소했다. 원래 무고(남을 음해함)죄가 거짓일 경우, 반좌율(무고된 사람의 죄목에 해당하는 형벌를 되돌려 받는 것)에 의하여, 무고자가 처벌받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정확한 근거 없는 풍문만으로 민무구, 민무질 형제는 의금부에 갇히게 되었다. 옥에 갇힌 지 2일 만에 연안으로 유배되었고, 그로부터 19일후 공신녹권을 회수하게 되고, 4개월 후 공신첩마저 빼앗고 서인으로 만들고 만다. 그 후 여흥으로 다시 유배간다.
그로부터 2개월 뒤 태종은 민무구 형제들의 죄를 인정하는 발언을 하지만, 왕비 민씨, 장모 송씨, 장인 민제의 면목을 봐서 처벌을 완화하려고 했으나, 이미 그들의 죽음은 이미 예정된 수순이었다. 장인인 민제가 죽은 뒤, 그들은 귀양가고서도 대간들의 탄핵(어떤 신하가 잘못하면, 비판하는 제도)을 받았고, 제주도로 귀양간 뒤, 태종의 명으로 자진(남에 의하여 억지로 자살함)하게 된다. 그로부터 5년 뒤 민무휼, 민무회 형제의 옥이 일어나고 만다. 자기 형인 민무구, 민무질 형제가 억울하다며, 탄원소를 올린 것이었다. 하지만, 이 역시, 태종은 묵살하고, 오히려, 그들을 귀양보내어 다시 자진시킨다.
연이은 왕비의 동생들을 죽인 태종, 당연히 원경왕후와 사이가 좋을 리 만무했다. 태종과 원경왕후는 원경왕후가 죽는 1420년까지 거의 남남처럼 지냈다. 전에 KBS<용의 눈물>에서처럼 원경왕후가 죽을 때, 태종이 찾아가 사과했다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런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을 수 없었다. 왕비인 민씨마저 멀리하며, 왕권 강화에 주력한 태종, 하지만, 그에게는 남모를 시련이 많았다.
양녕대군 폐세자 사건과 세종의 즉위
1418년 4월, 태종이 즉위한지 18년 되는해, 세자였던 장남 양녕대군 이제는 폐세자가 된다. 그 뒤를 충녕대군 이도가 잇는다. 왜 양녕대군은 폐세자가 되는가? 양녕대군, 야사나 실록이나 그의 행적이 괴이하고, 방탕했다고 기록되어있다. 다만 야사에서는 양녕대군이 형제간의 싸움과 외삼촌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으로 세자 자리가 싫어서 일부러 그렇게 했다고 한다. 과연 그랬을까? 1415년, 민무휼, 민무회의 옥이 일어났다. 이 사건이 일어났던 원인은 다름 아닌 양녕대군이었다. 양녕대군이 태종에게 말하기를 "소자가 일전에 민무휼과 민무회가 어머니와 얘기를 하는 것을 들었는데, 아바마마께서 민무구 형제를 죽인 것에 대해 불만을 토했습니다. 그러자 소자가 "그들은 죄가 있어 죽은 것이다."라고 하니, 그들이 "세자께서는 우리 집에서 자라시지 않았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이 세자의 진술로 조정은 발칵 뒤집히고, 민무휼, 민무회 형제를 탄핵하는 상소가 끊이지 않았다. 민무휼 형제는 의금부에 하옥되고, 그들은 무죄를 주장했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어 그들은 귀양가게 된다. 왜 세자는 외삼촌인 그들을 밀고했을까? 세자가 밖을 자주 돌아다니며, 사고를 치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태종 14년 정월에 양녕은 밤에 기생을 끌어들이면서 세자궁의 종을 시켜 김한로의 집에서 말을 끌어냈다. 김한로는 다름 아닌 양녕의 장인이란 점에서 문제는 심각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녕은 그해 10월에는 부마 청평군 이백강의 집에서 연회하면서 밤이 깊도록 기생 초궁장을 끼고 공주의 대청으로 들어가 술을 마셔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태종은 세자의 잦은 월장을 막기 위해 재위 16년에는 창덕궁에서 종묘로 통하는 세자전 서쪽에 담장을 쌓기도 했으나 소용없었다.
이 사건으로 궁지에 몰리자, 궁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민무휼의 말을 끌어낸 것이었다. 이렇게 외삼촌을 죽이면서까지 사건을 무마하고자 했으나, 이 사건 이후 양녕대군의 행실은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심각해져만 갔다. 더구나 큰 사건은 유부녀였던 어리를 납치한 사건이었다. 곽선의 첩인 어리를 데리고 가기위해, 양자인 이승을 위협해, 어리를 잡아간 것이다. 어리가 당시 "자신은 병이 있으며, 유부녀이므로 안 된다."라고 했음에도 일으킨 사건은 양녕대군이 세자지위를 잃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태종이 아무리 여색을 좋아하는 군주라도, 세자를 용서할 길이 없었다. 세자의 장인인 김안로를 변방에 부차하고, 어리와 양녕대군을 떨어뜨리는 방법으로 이 사건을 넘어가고자했다. 그러자 양녕대군은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려 반항한다. "전하의 시녀는 궁중에 받아들이면서 신(양녕)의 여러 첩은 내보내 곡성이 사방에 이르고 원망이 나라 안에 가득 차게 하십니까? 한나라 고조는 산동에 있을 때 재물을 탐내고 색을 좋아하였으나 마침내 천하를 평정하였으나, 진왕 광은 비록 어질다고 칭하였으나 즉위한 후 몸이 위태롭고 나라가 망하였습니다. 전하는 어찌 신이 끝내 크게 효도하리라는 것을 알지 못하십니까? 이 첩(어리) 하나를 금하다가 잃는 것이 많을 것이요, 얻는 것이 적을 것입니다 "
이 글을 받아본 태종은 탄식하면서 정승을 불러들여 말했다.
"세자가 여러 날 동안 불효하였으나 집안의 부끄러움을 바깥에 드러낼 수 없어서 항상 그 잘못을 덮어두면서 다만 잘못을 뉘우치고 깨닫기를 바랐는데, 이제 도리어 원망하는 마음을 가짐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다. 내가 어찌 감히 숨기겠는가?" 이것이 세자의 폐위를 염두에 둔 말임을 알게 된 신하들은 태종에게 세자폐위를 건의하고, 이에 태종이 윤허함으로써 마침내 양녕대군은 세자자리에서 쫓겨나고, 태종의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이 왕세자에 올라간다. 그럼 둘째인 효령대군은 왜 올라가지 못하는가? 전교에 보자면, "술을 못한다."는 이유였다.
결국 세자가 된 충녕대군은 두 달 후 왕위에 올라가니, 이 분이 바로 조선 4대왕 세종이었다. 세종이 즉위한 후에도, 양녕대군의 기행은 멈추지 않았다. 유배가 있던 광주에서 담장을 넘어서 도망가, 상왕인 태종과 세종이 방을 붙여서, 상금을 걸고 찾을 정도였다. 그뿐이 아니라, 양녕대군의 기행은 세조 조까지 이르러, 대간들의 탄핵대상이었다.
하지만, 단종을 죽인 세조도 양녕대군에 대해서 쉽사리 건들릴 수 없었다. 최고의 종실어른이었고, 더구나 자신을 지지해준 얼마 안 되는 왕족이었기 때문이었다. 한때의 세자였지만, 풍류왕자인 양녕대군은 결국 1462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왕위에 올랐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연산군을 능가하는 최악의 폭군이 아니었을까?
대마도 정벌
조선사에서 조선 건국부터 태종 시대까지는 '창업의 시대'라 부르고, 세종시대부터는 '수성의 시대'라고 부른다. 특히 세종 조는 조선역사를 통틀어 문화적으로 가장 융성했던 시기로, 과학이나 문화면에서 가장 획기적인 발전을 이른다. 더구나 함흥 이남에 불과하던 영토를 두만강과 압록강 유역까지 확대시킴으로써 지금의 우리나라 영토를 확정시킨 시대이기도 했다. 세종대왕은 수많은 치적을 남겼지만, 3대 치적으로 구분했다. 첫 번째 치적이 바로 4군 6진을 통한 영토 확장과 왜구 정벌, 두 번째 치적이 집현전을 통한 문화 창달, 훈민정음, 세 번째가 장영실, 이천 등 과학자를 등용한 활자나 측우기, 앙부일귀 등 과학 기술의 발전이다.
태종은 세종에게 선위를 하면서, 병권은 자신이 맡겠다고 했다. 따라서 군권은 태종에게 가있었다. 따라서 대마도 정벌은 세종이 아니라, 상왕이었던 태종의 구상이었다. 대마도는 왜구의 소굴이었다.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왜구 침략은 그야말로 절정을 이루던 시대였다. 고려 멸망 중 하나가 왜구들의 기승이라는 점을 들 때, 왜구는 이성계 일파에 의해 위화도 회군의 명분으로도 쓰이기도 했다. 위화도 회군 이후 1388년에는 박위를 중심으로 대마도 정벌이 단행되기도 했다. 조선 초에도 왜구가 극성부려서, 태조 때는 문하우정승 김사형을 시켜, 대마도 정벌을 추진하기도 했다. 하지만, 1418년 기해년에 왜구가 또다시 비인과 해주를 공격해 왔다. 이에 상왕이었던 태종은 대마도 정벌을 단행한다. 이때의 기록을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대마도는 전에 신라에 속했던 땅인데 언제부터 왜놈이 차지했는지 알 수 없다. 세종 기해년 5월에 왜선 30여 척이 비인ㆍ해주 등지에 노략질하러 왔었다. 임금께서는 이틈을 타서 무찌르시려고 영의정 유정현을 도통사로, 최윤덕을 도절제사로 명하시고, 몸소 한강까지 납시어 전송하셨다. 그리고 경상ㆍ전라ㆍ충청도 등지의 병선 327척에 17,000명을 내어 65일치의 양식을 가지고 바다를 건너 대마도의 두지포에 다다랐다. 적들은 모두 도망갔으므로 적선 129척을 빼앗고, 적의 소굴 2,000 군데를 불태우고, 적의 우두머리 200여 명을 목 베었다. 이 전역(戰役)은 5월 스무하루에 출정하고 6월 열이레에 닿을 올려서 7월 초사흘에 돌아왔다. … 이로써 조종(祖宗) 때의 병력의 강성함을 알 수 있다. "
위 기록에서 보다시피, 대마도 정벌은 (음)6월 13일에 시작되어, 7월 3일 끝났다. 그렇다면, 한 달도 채 못 되어 끝난 것이었다. 아무리 대마도가 조그만 섬이라고 하지만, 한 달 가량의 정벌로 가지고는 왜구를 정벌하기 힘들었다. 왜 그랬을까? 음력 6월 13일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7월 하순정도이고, 음력 7월 3월이면, 8월 중순 정도이다. 일본은 그때 태풍이 한창 밀려올 때였다.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하러 갔을 때, 태풍으로 인하여, 큰 피해를 보아, 결국 일본 정복에 실패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그때의 밀려온 태풍을 신풍이라 부르고, 태평양 전쟁 때 자살특공대를 신풍, 즉 가마가제로 불렀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던 조선 정벌군은 오랫동안 머물렀다가, 배가 태풍에 의해 피해입어서, 돌아가지 못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더구나 패배한 왜군들이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에 더 이상 머물러야 별 소득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더구나 대마도주가 항복을 청해오자, 더 이상 머물 이유가 없었던 조선 정벌군은 이에 응하고, 회군하게 된다. 하지만, 왜군의 뿌리를 완벽하게 소탕하지 못했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이를 소탕해야 한다고 논의가 되었다. 이를 강력히 주장하던 인물은 바로 박은이었다. 하지만, 우의정 의원은 "예기가 쇠하고, 선박의 장비가 파손되었으며, 날씨가 나빠져, 정벌을 무리하게 추진했다가, 실패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 또한 옳은 말이라, 태종이 박은에게 말하니, 박은은 시기를 놓치면, 안된다면서, 추진할 것을 주장했다. 결론이 나지 않는 판국에 결정적으로 정벌이 재차 추진되는 것이 중지되는 사건이 일어났으니, 바로 정박 중이던 선박이 태풍을 만나 침몰한 것이었다.
대마도 정벌로 인하여, 백성의 피해는 심각했다. 한창 농사철이던 음력 6월에 정벌을 추진했으니, 농사를 제때 짓지 못하여, 흉년이 들었다. 뿐만 아니라, 염전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조정에서는 정벌군으로 참전한 사람에게 염전을 받지 않도록 명을 내렸다. 백성은 전쟁에서 승리해도, 패배해도 피해보는 것은 매한가지이다. 조선 역사에서 거의 드문 정벌의 역사중 하나인 대마도 정벌, 그 뒤에는 백성들의 고통과 눈물이 숨어져있는 것이다.
4군 6진
북쪽의 여진족을 중심으로 하는 야인들의 잦은 침입과 약탈 역시 골칫거리였다. 물론 야인들 가운데서도 어떤 부족들은 서울까지 와서 자기들의 토산물을 바치고 필요한 물건을 얻어갔다. 조정에서는 이들에게 허직을 주어 회유하려 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는 듯 하였지만 아직도 대다수의 야인들은 평안도 · 함경도 등지로 들어와 농산물을 약탈하여 백성들을 괴롭히기 일쑤였다. 세종은 이들에 대해서도 강력한 대응이 필요함을 절실하게 느꼈다. 여진족을 소탕하려면 압록강을 건너야만 한다. 하지만 명의 입장은 이에 대해 국경 침입이라는 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명나라와 조선의 국경 사이에서 약탈을 행하는 여진의 존재는 양국 간의 관계에 있어서 미묘한 존재였다. 1433년(세종 15) 세종은 곧 의정부 · 육조와 삼군 도진무에게 여진 토벌 방책을 논의하게 하고 군대를 동원할 계획을 세웠다. 3월 7일 평안도 도절제사 최윤덕의 토벌계획 보고가 있은 뒤 오랑캐들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였다. 5월 7일에 이르러 최윤덕은 평안도 · 황해도의 군사 1만 5천명을 이끌고 파저강(婆猪江) 부근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오랑캐 이만주의 무리를 소탕하였다. 5월 26일의 일이었다.
세종은 이에 이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근정전에서 잔치를 베풀고 최윤덕을 우의정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 일은 명과의 외교문제를 일으켰고 야인들은 이를 믿고 다시 조선을 침입할 계획을 세웠다.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힘은 명나라에 있었다. 그들이 야인들에 대한 호의를 거두어들이기만 한다면 별 문제가 없을 터이기 때문이다. 좌승지에 오른 최치운은 문제 해결의 핵심을 정확히 짚어 이를 명나라에 알려 양해를 구할 것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최치운은 황제의 외교적 양해를 얻고 칙서를 받아 돌아옴으로써 문제가 해결될 수 있었다. 최치운의 이러한 공적에 대해 세종은 진심으로 고마워하면서 그에게 전 5백결과 노비 30명을 내렸지만 최치운은 자신은 충성심에 따라 일을 행하였고 국록을 먹고 있는 자로서 당연한 일임을 들어 몇 차례씩이나 사양하였다. 세종도 또한 그가 진심으로 그러함을 알고 거두어 들였다.
태종 16년에 갑산(甲山) 소동두(小董豆)의 서편을 끊어서 여연군(閭延郡)을 설치한 것에 기초하여 세종15년에는 자성군(慈城郡)을 두었고 18년에는 무창현(茂昌縣)을 두었으며 25년에는 우예군(虞芮郡)을 설치하게 됨으로써 비로소 사군(四郡)이 개척되었다. 한편으로 함경도 쪽으로 들어오는 야인에 대한 대비책도 필요하였다. 특히 경원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은 조선의 왕실이 일어난 곳으로 보존하여야 할 중요한 곳이었다. 이에 따라 야인의 침입을 막고 수비를 튼튼히 하기 위하여 진(鎭)을 설치하고 사람들을 이주시켜 정착시키려는 노력이 일게 되었다. 세종 16년부터 김종서와 여러 대신들은 많은 논의 끝에 세종과 김종서의 주장대로 육진을 설치하게 되었다. 김종서는 함경도 도절제사가 되어 이를 책임 맡았다. 경원(慶源) · 종성(鐘城) · 회령(會寧) · 경흥(慶興) · 온성(穩城) · 부령(富寧)의 육진이 세종 31년에 설치됨으로써 앞서의 사군과 육진의 지역을 경계로 삼는 오늘날 우리나라 영역의 골격이 마침내 완성되었다.
세종과 김종서가 서로를 잘 이해하고 믿은 결과였다. 처음에 세종이 김종서에게 명하여 육진(六鎭)을 설치하려 할 때 조정의 의논이 분분하였었다. 반대하는 자는
“종서가 한도가 있는 사람의 힘으로써 이룩하지 못할 일을 시작하였으니, 그 죄는 죽여야 옳다.” 고 극언을 서슴치 않았다. 그러나 세종은 이에 대해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즉, “비록 내가 있으나 만일 종서가 없었다면 이 일을 족히 할 수 없을 것이요, 비록 종서가 있으나 내가 없었더라면 족히 이 일을 주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라고 하면서 그 결정에 대해 흔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믿음이었다.
세종은 북방의 야인과 남쪽의 왜인들에 대해 강력한 대응책으로 국방을 튼튼히 하였음은 물론이고 동시에 변방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이후에도 간혹 여진족과 왜구 등의 침입이 있었으나 그들도 조선의 강력한 대응을 두려워하여 미약할 수밖에 없었다. 세종은 다른 한편으로 그들이 조선과 무역을 하여 생계를 도모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제시하여 숨통을 터주기도 함으로써 강온 양면 계책은 모두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세종의 대외관계 면에서의 정책은 확연히 성공을 거두게 되었던 것이다. 즉, 명에 대한 사대의 외교는 성(誠)으로써, 그리고 왜인과 야인에 대한 교린의 외교는 신(信)으로써 한다는 조선왕조의 외교정책이 마침내 빛을 발한 것이었다.
세종의 기쁨과 슬픔은 백성들과 함께 하는 것이었다. 그 스스로의 편안함을 도모하여 방탕한 세월을 보내지도 않았다. 어려서부터 익혀온 경서와 사서, 그리고 부왕인 태종의 치세에서 보고 느낀 것 등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백성을 위한다는 위민정신에 바탕을 둔 왕도를 익히고 펴나갔다. 나라가 위태하면 즐거운 임금이 없고 나라가 평안하면 근심하는 백성이 없다. 나라가 혼란하면 위태하고 나라가 다스려지면 편안하다. 이를 위해서는 왕과 신하, 그리고 백성들이 한마음이 되어 순리에 따라 조화롭게 움직여야 한다. 세종과 신하들, 그리고 백성들의 웃음과 기쁨의 환호성이 온 천하에 가득 찼던 것은 이러한 까닭에서였다. 이제 대왕은 역사 속에서 그 웃음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현재의 우리들 가슴에도 그의 언어와 동작 하나하나가 새겨지고 있다. 한민족이 존재하는 한 이는 영원할 것이다.
대왕을 세종이라 칭하게 된 연유를 보면 더욱 그의 업적에 숙연해 지기만 한다. 즉 문종 즉위년 3월 13일에 허후(許) · 정인지(鄭麟趾) 등이 의논하여 대왕의 시호를 고치기를 다음과 같이 아뢴 일이 있었다.
“역대(歷代)에 세종(世宗)이라고 일컬었던 군주(君主)는 중흥(中興)하였기 때문이거나 혹은 창업(創業)하였기 때문이었는데, 대행 대왕(大行大王)은 이와 같지 않은데도 세종이라고 일컫게 되면 덕행(德行)을 기록하는 뜻에 결점(缺點)이 있어서 역대 칭호(稱號)의 뜻과 같지 않습니다. 청컨대 문종(文宗)이라고 고쳐서 실제의 덕행을 기록하게 하소서.” 하니, 문종이 말하기를, “비록 칭호는 세종(世宗)이라고 하지마는, 선왕(先王)의 덕행은 누가 이를 알지 못하겠는가? 더구나 북방(北方)에서 공훈(功勳)이 있었으니, 세종(世宗)이라고 일컫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하면서 중흥과 창업에 모두 의미가 있다하여 세종이라 정하게 하였던 것이다.
끝으로 의정부에서 세종의 업적과 인품을 기록하여 예조에 상신하는 글의 말미를 인용하면서 세종대왕을 기리고자 한다.
“ …… 왕이 인자하고 명철하여 과단성 있게 결단하였고, 효성 있고 우애하며 부지런하고 검박하였으며, 대국을 섬기는데 지성스럽고, 어버이를 섬기는 데 효도를 다했으며, 구족(九族)과 도탑게 화목하고, 상벌을 공정하게 하였습니다. 어진 사람을 임명하고 재능 있는 사람을 시키고, 일은 반드시 옛 것을 스승삼아 제도를 분명하게 갖추어 놓았으니, 그물[網] 을 들면 그물눈[目]이 저절로 열려서, 섬에 사는 왜인과 야인(野人)들도 위엄을 두려워하고 덕을 사모한 지 30여 년간에, 백성이 전쟁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편안하게 살면서 생업을 즐기었습니다. 문교(文敎)가 크게 일어나서 울연(蔚然)히 볼 만하였으니, 훙서(薨逝)하신 날에 멀고 가까운 곳의 사람들로 울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집현전
유교문화의 완성이라는 점은 집현전의 운영, 육전의 법, 경연, 삼강과 오륜의 행실도, 예악의 정리, 경서 및 사서의 편찬 등을 통하여 나타났다. 이 내용은 이를 기획하고 추진하는 훌륭한 유학적 소양을 갖춘 신하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들과 세종 자신이 갖고 있는 왕권을 조화롭게 운영하지 않았다면 많은 잡음과 함께 실패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먼저 세종이 이들을 어떻게 이끌어내고 그들의 학문을 키웠으며, 또 그들과 함께 정치운영을 하였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 가장 먼저 학문연구기관이자 인재양성소로서의 집현전의 운영을 검토함으로써 그 토대가 어떻게 마련되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집현전의 설치와 운영에 대해 알아보자. 집현전은 고려 인종(仁宗) 14년(1136)에 연영전(延英殿)을 집현전이라고 이름을 바꾼 데서 비롯된다. 또한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정종 대에 설치된 일이 있었고 또 태종 17년 정월에 사간원에서 상소하길, 정치를 하는 데는 나라에서 나라 일을 맡길 인재를 길러야 하는데, 수문각(修文閣) · 집현전 · 보문각(寶文閣) 등 이 이름뿐이지 제구실을 못하니 새로 집현전을 만들자고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집현전을 설치 운영하여 그 성과를 거둔 것은 세종 때였다. 즉 집현전이라고 하면 세종 2년 3월에 설치 운영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때 집현전을 설치하게 된 목적은 조선이 표방한 유교정치와 대명(對明) 사대관계를 원만히 수행하는 데 필요한 인재의 양성과 학문의 토대구축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교 교양에 철저한 인재의 양성 및 이에 입각한 문물의 정비와 전통문화의 정리가 요구되기도 하였다. 이를 위해 집현전에는 유학에 능통한 연소한 문사들을 뽑아 이들에게 여러 가지의 특전을 주어 그들의 학문과 연구 활동을 보장하였다.
사헌부(司憲府)의 규찰을 받지 않아 신분이 보장되었고, 경제적인 배려 또한 각별하였다. 산사(山寺)에서 독서에 몰두할 수 있도록 장기간의 휴가인 사가독서(賜暇讀書)의 혜택을 주었다. 정원은 처음에 10명이던 것이 뒤에는 20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의 직무 중 중요한 것은 경연(經筵)과 서연(書筵)이었다. 따라서 이곳에 소속된 간원은 경연관(經筵官) · 서연관(書筵官) · 시관(試官) · 사관(史官) · 지제교(知製敎)의 직책을 겸임하기도 하였다. 경연과 서연이 인정(仁政)을 베풀기 위한 국왕과 세자의 수덕(修德)을 담당하고 있다는 점에서 집현전의 기능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들의 연구 분야는 중국의 옛 제도를 연구하거나 각종 서적의 편찬사업에 동원되기도 하였다. 충실한 연구와 학문을 쌓도록 하기 위해 세종은 이들을 다른 관부에 전직도 시키지 않고 집현전에만 10년에서 20년 가까이 있게 하였다. 이것은 일면 굉장한 특혜였다. 국왕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서 학문과 연구에 정진할 수 있었다. 이렇게 철저한 신분보장과 필요한 물품의 지원, 그리고 세종 자신의 학문적 관심은 집현전을 당대 제일의 학문연구기관으로 만드는데 충분한 것이었다. 따라서 집현전은 세종조의 국가 정치 일반 있어서 자문기관 역할을 하기도 하였고, 또한 국가 제도 · 정책 연구 기관의 기능을 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집현전을 운영한 결과 수많은 인재가 배출되기 시작하였다. 최항(崔恒) · 박팽년(朴彭年) · 신숙주(申叔舟) · 성삼문(成三問) · 이선로(李善老) · 이개(李塏) · 류의손(柳義孫) · 권채(權採) · 남수문(南秀文) 등이 그들이다. 이러한 인적 자원은 세종 때 찬란한 문화와 유교정치의 발전을 이룩하게 한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세종 11년에는 대궐 서편에 집현전을 새로 마련하고 또한 장서각을 집현전 북쪽에 다시 올렸다. 집현전에 나오는 사람들은 아침 일찍이 들어와서 저녁 늦게 나갔다. 때를 맞추어 부지런히 연구하였으며, 일상 왕의 옆에서 공부하였다. 집현전의 학자들에게는 삼시 세끼를 직접 궁중의 내관(內官)들이 대접하였고, 학사들은 밤에도 순번을 정하여 집현전을 지키면서 밤을 새워 책을 읽기도 하였다. 새벽이면 일찍 일어나는 세종인지라 혹 집현전의 학사 중 무리하여 병이 나는 자라도 있을까 염려하여 내관에게 불을 밝히게 하고 집현전을 수시로 찾았다. 간혹 독서하다 피곤하여 깜빡 잠이 든 학사가 있으면 그들을 깨우지 않고 초피(貂皮)의 웃옷을 벗어 살며시 덮어주곤 하였다. 어찌 보면 열심히 공부하는 제자를 스승의 사랑과 보살핌의 손길로 아껴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린 학사들이 있으면 당대의 유학자들에게 보내어 그들의 학문을 배우도록 하는 배려도 아끼지 않았다. 결국 집현전의 운영은 세종 과 집현전 학사들의 노력이 한데 어우러진 것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집현전에서 편찬된 서적을 몇 가지 든다면 다음과 같다.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 · <치평요람(治平要覽)> · <훈민정음(訓民正音)> · <역대병요(歷代兵要)> · <효행록(孝行錄)> · <삼강행실(三綱行實)> 등이 그것이다. 이외에도 수많은 서적들이 언해되거나 주석되어 그 학문적 성과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나타내 준다. 특히나 학사들의 학문적 성취와 관심에 대해서는 명나라의 유신들도 감탄하는 지경이었다.
그러나 세종 때 이렇게 활발한 연구 활동과 학문 활동 등이 수행된 집현전은 결국 정치적 역풍에 휘말려 세조 2년 육신사건(六臣事件)으로 혁파되게 되었다. 이 후 여러 차례 집현전과 같은 기관을 두고자 하는 노력은 있었지만 결코 세종 때 집현전의 기능을 갖기란 어려웠다. 하지만 한편으로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관주도적인 문화(편찬)사업은 그 뒤 홍문관(弘文館) 또는 정조대의 규장각(奎章閣) 등에 의해 계승되기도 하였다.
집현전의 운영을 통하여 마련된 유교적인 학문연구의 성과는 경전의 주해, 제도의 연구 등 여러 분야로 파급되어 나갔다. 여기서 특히 괄목할 만한 것은 예조 ·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 · 집현전 등에서 연구하고 마련한 국가의 유교적 의례인 국가오례(國家五禮 : 吉禮 · 嘉禮 · 賓禮 · 軍禮 · 凶禮)와 사대부 · 서인들의 유교적 의례로서 정리된 사례(四禮 : 冠禮 · 婚禮 · 喪禮 · 祭禮) 등의 제도가 마련됨으로써 왕조적 질서와 사회적 질서체계가 올바로 운영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세종 조에 이루어진 오례의 내용은 사실상 왕실중심의 의례만을 일단 정례화한 것으로 나타난다. 전체 국가질서의 편성보다는 왕실의 권위와 존엄성을 생각하는 의례, 더욱이 왕위계승을 유가적 논리 안에서 정치적 관행으로 정착시키려는 정치적 의지를 보인다.
왕실중심의 의례의 정례화는 왕권을 유교이념으로 명분을 정립시키려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사례로써 소개되는 주자가례는 사대부 중심의 사회공동체 질서론을 반영한 의례로 자리 잡게 됨을 의미한다. 조선 초기 사회의 정돈과정에서 보여 준 역사사실의 실태라고 하겠다. 이것은 조선왕조가 왕실과 왕권의 권위를 어떻게 설정하고 있었는가를 내용으로 한 것이었다. 이는 조선왕조의 정통성의 문제와 새로운 정권의 혁명적 내용도 수용하는 명분논리, 그리고 왕실의 정치적 위상의 정비가 바로 유교적 예론으로 심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오례의 운영구조가 가지는 의미는 왕실 즉 왕권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가를 가늠해주는 척도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겠다.
사례(四禮)의 체계와 내용은 이미 조선시대에도 그 보급 노력이 있었다. 세종조의 단계에 들어와서는 양반 사대부층의 유교적 윤리 실행의 표준으로서 주자가례(朱子家禮)가 정착되었다. 이것은 당시 유자층으로서 사대부의 반열에 있는 이라면 누구나 따라야 하는 도덕규범의 의례였으며, 상층사회구조의 운영도 이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 백성에 대해서도 유교적인 교화정책(敎化政策)으로서 열녀 · 효자 등에 대한 표창과 이를 기리기 위한 정표(旌表)의 정책이 있었으며, 나아가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가 만들어져 보급되었다. 집현전(集賢殿)에서 새로 올린<삼강행실>의 서문(序文)에 이르기를,
“천하의 떳떳한 도가 다섯 가지 있는데, 삼강이 그 수위(首位)에 있으니, 실로 삼강은 경륜(經綸)의 큰 법이요, 일만 가지 교화의 근본이며 원천(源泉)입니다. 만약 고대(古代)의 일을 상고하여 본다면, 순(舜)임금은, 오전(五典)을 삼가 아름답게 하였으며, 성탕(成湯)은 일찍이 사람의 기강(紀綱)을 닦았고, 주(周)나라에서는 백성에게 오교(五敎)를 소중히 여기어서, 향삼물(鄕三物)로 선비들을 추거(推擧)하여 손님으로 예우(禮遇)하였습니다. 그러니 제왕(帝王)의 정치가 무엇을 먼저 힘쓸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선덕 신해년에 우리 주상 전하께서 측근의 신하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삼대(三代)의 정치가 훌륭하였던 것은 다 인륜(人倫)을 밝혔기 때문이다. 후세에서는 교화가 점점 쇠퇴하여져서, 백성들이 군신 · 부자 · 부부의 큰 인륜에 친숙하지 아니하고, 거의 다 타고난 천성(天性)에 어두워서 항상 각박(刻薄)한데에 빠졌다. 간혹 훌륭한 행실과 높은 절개가 있어도, 풍속 · 습관에 옮겨져서 사람의 보고 듣는 자의 마음을 흥기(興起)시키지 못하는 일도 또한 많다. 내가 그 중 특별히 남달리 뛰어난 것을 뽑아서 그림과 찬을 만들어 중앙과 지방에 나누어 주고, 우매한 남녀들까지 다 쉽게 보고 느껴서 분발하게 되기를 바란다. 그렇게 하면, 또한 백성을 교화하여 풍속을 이루는 한 길이 될 것이다.'고 하시고, 드디어 집현전 부제학 신(臣) 설순에게 명하여 편찬하는 일을 맡게 하였다. 여기에서, 중국(中國)에서부터 우리나라에 이르기까지, 동방(東方) 고금(古今)의 서적(書籍)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모아 열람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 중에서 효자·충신·열녀로서 우뚝 높아서 기술할만한 자를 각각 1백 인을 찾아내어, 앞에는 형용을 그림으로 그리고 뒤에는 사실 을 기록하였으며, 모두 시(詩)를 붙이었다. 이를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라고 이름을 하사하시고, 주자소(鑄字所)로 하여금 인쇄하여 길이 전하게 하였다.
군신 · 부자 · 부부의 도리인 군위신강(君爲臣綱) · 부위자강(父爲子綱) · 부위부강(夫爲婦綱)의 삼강의 보급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세종 스스로도 직접 당시의 세태가 인륜을 저버리거나 인륜을 참되게 알지 못하여 군신과 부자, 부부의 도리가 천리에 어긋나고 있음을 지적하고, `삼강(三綱)은 인도의 대경(大經)이니, 군신(君臣) · 부자(父子) · 부부(夫婦)의 도리를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혹은 `내가 생각하건대 하늘이 준 덕과 진심, 그리고 의젓하게 타고난 천성은 생민(生民)이 똑같이 받은 것이므로, 인륜(人倫)을 도탑게하여 풍속을 이루게 하는 것은 나라를 가진 자의 선무(先務)이다.'
`입으로 외고 마음으로 생각하여 아침에 더하고 저녁에 진취하여, 그 천성의 본연(本然)을 감발(感發)하지 아니하는 자가 없게 되면, 자식된 자는 효도를 다할 것을 생각하고, 남편된 자와 아내된 자는 모두 자기의 도리를 다하게 되어, 사람들이 의리를 알고 스스로 새롭게 하려는 뜻을 진작할 것이니, 교화(敎化)가 행하여지고 풍속이 아름다워져서 더욱 지치(至治)의 세상에 이르게 될 것이다.' 라고 강조하였다.
세종은 이렇게 삼강과 오륜, 인간사회의 질서체계를 오례와 사례의 구조를 통하여 사회의 운영을 교화해 나가고자 노력하였다. 이와 더불어 종실의 범위를 종친과 마찬가지인 왕의 현손(玄孫 즉 4대손)까지의 자손으로 하고 이들에 대한 교육의 제도를 정하였다. 즉 처음으로 종학(宗學)의 법을 정하였던 것이다. 사실 종실 자제들에 대한 교육은 그들이 문장을 잘 하도록 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학문을 닦아 몸가짐을 신중히 하고 자질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종친들은 관직에 나아갈 수 없도록 법률로 금지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많은 사회문제를 일으키는 무뢰배들과 어울려 갖은 비리를 저지르기 일쑤였으며, 공부하는데 관심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사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종친들을 권력으로부터 소외시키려는 의도와 관료들의 입장에서는 왕실의 세력 확대를 견제하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 그러나 왕실 주변의 인물을 정치권에서 배제시키는 제도적 조치는 종실의 인재들의 건전한 사회활동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종학을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세종은 1428년 7월에 대군 이하 종실 자제들의 교육을 위하여 종학을 처음으로 건립하였고, 이듬해 10월에 학사를 세우고 교수로서 종학교수관(宗學敎授官)을 두었으며 또한 종학식략(宗學式略)을 상정하기도 하였다.
심화 확대된 유교의 정치이념과 사회윤리는 예악(禮樂)의 정리로 더욱 세련화되었다. 유교사상에서 예(禮) · 악(樂)의 정비는 곧 모든 질서의 안정을 뜻한다. 예라는 것은 도덕인의(道德仁義)에서 나오는 것으로서, 예제(禮制)가 행하여지면 이와 더불어 악(樂)이 흥한다는 것이 유가의 기본 인식이었다. 따라서 세종 때에 유교정치를 추구하고 이것이 안정되어감에 따라 이러한 예악관에서 왕조의 예 · 악의 기준을 확립코자 하였던 것이다.
세종조 농업과 과학 기술의 발전
농사는 천하지대본이라고 했다. 조선시대는 농업이 조선 경제의 주산업이었기 때문에 특히 중요시했다. 세종이 즉위 초, 연이은 재해와 정벌로 인하여, 조정에 들어오는 세곡이 줄었다. 이에 따라 농사를 장려하고, 농업 생산량을 증대하기 위해 과학기술이 발달되었다. 그것이 바로 해시계와 물시계, 측우기였다. 기후와 강우, 시간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한 노력이 경주되었다. 1437년에 원나라의 천문학자 곽수경(郭守敬)의 제도를 본떠 정식 천문 관측 장치로 경회루 연못 북쪽에 지름 6자 정도 크기의 간의(簡儀)가 만들어졌다. 또 경회루 남쪽에는 세종 때 위대한 장인인 장영실(蔣英實)이 자동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를 만들었고 이를 더욱 교묘하게 하여 옥루(玉漏)가 고안되었다. 이것은 자동 물시계에다가 천문현상과 신선(神仙) 등이 나타나 저절로 움직이도록 만든 것으로 정교한 자동시계였던 것이다.
여기에 농경에 꼭 필요한 역법의 바른 정리를 위해, 또한 기상관측을 위하여 대간의(大簡儀) · 소간의(小簡儀) · 혼의(渾儀) · 혼상(渾象) · 앙부일구(仰釜日晷) ·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 규표(圭表) · 금루(禁漏) · 선기옥형(璿璣玉衡) 등이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강수량을 과학적으로 측정하기 위한 장치로서 측우기(測雨器)는 서양보다 2세기나 앞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 측우기는 전국 주요 지점에 강우량을 측정할 수 있도록 만들어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또한 한강과 청계천의 수위를 측정하기 위해 수표(水標)가 만들어져 중대한 관측기구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측량 및 천문 관측기구와 더불어 천문역산학의 연구 성과로서 1442년에 <칠정산(七政算)> 내편과 <칠정산> 외편이 완성되었다. <칠정산> 내편은 원의 곽수경 등이 완성한 수시력을 서울에 맞게 수정한 것이며, 외편은 원나라에 들어와 있던 아랍 천문학체계를 소화한 것이었다. 이것은 모두 이순지(李純之) · 김담(金淡) 등의 천문학자가 중심이 되어 이룩한 성과물이었던 것이다. 세종조의 경제제도로서 빼놓을 수 없는 업적 중의 하나가 공법(貢法)의 제정이다. 이 공법을 실시하기 위해서는 전지(田地)를 올바로 측량하고 기록해야만 한다. 그 동안의 측량은 측량자가 가서 전답의 필지를 일일이 답사하여 기록하는 것으로서 답험손실법이 운영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실상 답험자의 자의성이 개입될 소지가 많았다. 중간부정을 막고 국고의 충실을 기하기 위한 조세원의 정확한 파악, 경작자인 농민들에게는 그 부담을 줄이고 혜택을 주기 위한 것으로서 `공법'이 도입되기에 이르렀다.
공법이란 본래 여러 해 동안의 토지생산량의 평균치를 기준으로 삼아 10분의 1에 해당하는 일정한 액수를 과세하는 일종의 정액세법으로서 중국의 하후씨(夏后氏) 때 행하였다는 전설적인 제도이다. 세종은 즉위 초부터 이러한 공법에 대한 구상을 하고 있었다. 이를 구체적으로 처음 토로한 것은 세종 9년의 중시(重試)의 책제(策題)에서이다. 즉, “예로부터 제왕의 다스림에는 반드시 일대의 제도를 먼저 수립하는 법이다. … 손실답험은 구차히 애증에 좇아 고하가 그 손에 달려 있으므로 백성이 해를 입는다. 이 폐단을 구하려면 응당 공법이나 조법(助法)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조법은 반드시 정전(井田)을 한 뒤에라야 행할 수 있으므로 역대 중국에서도 오히려 불가능했다. 하물며 우리나라는 산천이 험준하고 언덕과 진펄이 뒤섞여 있어 그것을 쓸 수 없음이 명백하다.
공법은 하서(夏書)에 실려 있고 주나라 역시 조법을 썼다고 하나 향수(鄕遂)에서는 공법을 썼다. 다만 그것은 여러 해 작황을 비교하여 평상치를 정하는 까닭에 좋지 않다고 이르는 것이다. 공법을 쓰면서도 이른바 좋지 않다는 점을 없애는 길은 어떠한 것인가.” 여기서 공법의 좋지 않은 점은 농업생산성이 불안정한 당시로서 풍년에는 관계없지만 흉년에는 정액에 맞추기 때문에 수탈이 자행될 여지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이의 실시를 자기 혼자만의 의지로 추진한 것은 아니었다. 현실에 적합한 것인지를 먼저 따져보아야만 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현실로 볼 때 세종은 이를 매우 획기적인 방안을 통하여 해결하고자 하였다. 실제 그 담세층인 농민들로부터 각 도 감사 · 수령 · 품관들에게 그 가부를 물어 계문토록 한 것이다. 전국적으로 공법의 시행을 찬성하는 자는 9만 8,657인이며 반대하는 자는 7만 4,149인으로 큰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좀 더 자세히 분석하면 토지생산력이 높은 지역인 경상도·전라도의 경우 6만 5,864 대 664로 찬성편이 절대 우세하였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토지생산력이 낮은 함길도·평안도의 경우는 1,410 대 3만 5,912로 반대편이 우세하였다. 여기에 관료들은 대체로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이 결과에 자신을 얻은 세종은 마침내 세종 18년 윤 6월에 공법의 전담 주무관청으로서 전제상정소를 설치하고 이를 수행하게 하였다.
오랜 기간을 두고 검토하고 논의하며 그 타당성을 실험한 결과로 결국 세종 26년 공법의 내용이 확정되게 되었다. 또한 여기에는 농서의 보급을 통한 선진농업기술의 적용 등을 통하여 농업생산력의 향상을 동시에 꾀하였다. 위에서 지적한 농업생산력의 불안정을 해결하고자 동시에 노력한 종합적인 구상에서였다. 그 결과 드디어 결부제에 의거하는 전분육등(田分六等)과 연분구등(年分九等)의 공법이 확정되었던 것이다. 오랜 세월과 고심 끝에 마련되기는 하였지만 문제는 여전히 상존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백성의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제도의 구상과 실시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세종이 참으로 성군임을 알 수 있다.
훈민정음
세종이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항상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은 백성의 생활에 대한 걱정이었다. 백성들이 먹고 사는 문제는 그 동안 많은 정책으로 삶의 질은 높은 성장을 보였다. 세종은 결코 이에 머무르지 않았다. 지금 백성들의 먹고 사는 것이 좀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그것으로 만족하여 머무르지 아니하였다.
특히 그 동안 백성들의 생활상을 이해하고 그것을 개선하고자 했던 세종에게 있어 관심사는 백성의 원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직접 접하는 수단을 발명하는 것이었다. 뜻을 펴려고 하여도 글자를 몰라 이해를 못하고 있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세종은 훈민정음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우리나라는 말과 소리가 중국과 달라서 중국문자와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마침내 그 의사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나는 이것을 안타깝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어 사람들로 하여금 익혀서 나날이 쓰기에 편리하도록 하였다.”
또한 정인지(鄭麟趾)의 후서(後序)를 보면 이는 더욱 분명해진다.
“우리나라는 예악과 문물이 중국과 대등한데 다만 방언과 풍속의 말이 중국과 같지 않다. 이 때문에 글을 배우는 자는 뜻을 깨닫기 어려움을 근심하고 옥사(獄事)를 다스리는 관리는 곡절을 통하기 어려움을 괴롭게 여겼다. 옛날 신라의 설총(薛聰)이 처음 이두를 만들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관부와 민간에서 사용하고 있지만 모두 한자를 빌어 쓰는 것이어서, 혹은 난삽하고 혹은 막히어, 비루하고 고거(考據)가 없을 뿐만 아니라 언어의 사이에 있어서는 그 만분의 일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군데 모두 그 동안 교화정책을 행함에 있어 상하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었음을 지적하고 편민(便民)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나라말에 따른 문자에 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세종은 따로 밝히고 있듯이 옥사에서의 억울함을 해결하고자 함을 먼저 들고 있었다. 백성들에게 이편(利便)함이란 바로 이를 두고 한 것이었다. 또한 진정으로 `민본(民本)'이란 무엇인가를 치자의 입장에서가 아닌 피치자 즉 일반백성의 입장에서 생각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의도를 가지고 훈민정음을 창제하려 하였으나 일군의 집현전 학자들과 대신들은 많은 상소를 올려 반대를 하였다. 특히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崔萬理)가 올린 반대 상소문에서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 대강의 요지는 사대의 노선에 이러한 문자 창제는 결코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우리의 현 문화 의식 수준은 중국과 같은 정도인데 구태여 문자창제를 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최만리가 밝힌 반대 이유는
1. 중국과의 외교적 · 문화적 사대관계상의 문제점,
2. 새로운 문자를 만드는 일 자체가 이적(夷狄)의 일이라는 것,
3. 지금까지의 우문정책(右文政策)에 미쳐질 손실,
4. 형정(刑政)의 요체는 결코 언문(諺文)의 마련에 있지 않다는 것,
5. 창제의 과정이 충분한 논의 없이 너무 서둘러지고 있다는 것, 6. 동궁(東宮)이 이 일에만 전념하여 그 성취에 손(損)이 생기고 있다는 것 등이다.
그러나 세종은 이 상소문에 대하여 분명하게 대응하고 있었다.
“너희들이 `음을 사용하고 글자를 합한 것이 모두 옛 글에 위배된다'하였는데, 설총의 이두도 역시 음이 다르지 않느냐. 또 이두를 만든 본의가 백성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느냐. 만일 이것이 백성을 편리하게 했다면 지금의 언문도 백성을 편리하게 한 것이 아니냐. 너희들이 설총은 옳다고 하면서 군상(君上)이 하는 일은 나쁘다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또 네가 운서(韻書)를 아느냐. 사성(四聲) · 칠음(七音)에 자모(字母)가 몇이나 있느냐. 만일 내가 이 운서를 바로잡지 않으면 누가 바로잡겠느냐. 또 소(疏)에 `새롭고 기이한 하나의 기예'라 하였으니, 내가 만년에 날(日)을 보내기가 어려워서 서적으로써 벗을 삼았을 뿐이니, 어찌 옛 것을 싫어하고 새 것을 좋아해서 하는 일이겠느냐. 또 이것은 전렵(田獵)으로 매사냥을 하는 따위가 아닌데, 너희들의 말이 너무 지나치다. 그리고 또 내가 연로하였으므로 국가의 서무를 세자에게 오로지 맡겼으니, 비록 조그마한 일이라도 참여하여 결정하는 것이 당연한데, 하물며 언문이겠느냐. 만일 세자로 하여금 항상 동궁에만 있게 한다면 환관들에게 일을 맡겨야 한단 말이냐. 너희들은 시종하는 신하로서 나의 뜻을 환히 알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옳으냐."
[<세종실록> 권103 26년 2월 경자(20)]
훈민정음 제작의 뜻이 오직 편민에 있음을 강조하고 상소문에서 지적한 것에 대해 일일이 다시 되묻고 있는 것이다.
사실 훈민정음은 이미 세종 25년 12월에 완성되었었다. 위의 내용들은 훈민정음의 반포와 시행을 둘러싸고 일어난 것이었다. 세종 25년 12월의 말미 기록에 보면 `이 달에 상이 언문 28자를 친제(親製)하셨다. 그 글자는 고전(古篆)을 모방하였고 초 · 중 · 종 삼성(三聲)으로 나누었으며 이들을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룬다. 무릇 한문 및 우리나라 말을 다 적을 수 있으니 글자는 비록 간요하지만 전환이 무궁하다.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이른다'고 적고 있다. 여러 과정을 거치면서 세종 28년 9월 말에 이르러서야 수정 보완이 끝났음을 실록에서는 보여주고 있다. 이제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우리의 문자를 가지게 된 것이니 훈민정음의 창제야말로 위대한 문자혁명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창제된 훈민정음의 활용에 있어서 세종은 26년에 일단 언문청(諺文廳) 또는 정음청(正音廳)이라는 기구를 두고 언해작업을 시도하였다. 그 첫 번째로 <운회(韻會)>라는 음운서를 택하였지만 어려움이 있자 다른 운서를 택하여 곧 <동국정운(東國正韻)>의 편찬을 보게 되었다. 이 책의 의미는 상당히 크다. 즉 여기서 우리나라 한자음의 표준화를 꾀하였던 것이다. 그 후 이를 바탕으로 한자음 표기의 노력으로 계속해서 언해사업이 이루어졌는데 불경이 주로 이용되었다. <석보상절(釋譜詳節)> ·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 <월인석보(月印釋譜)> 등의 작품이 그 예이다. 또한 세종은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노래 역시 훈민정음으로 적어 여타 군신들에게 550부를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이렇게 세종이 불경의 언해를 먼저 시작한 데에는 그의 다른 의도가 숨어있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앞서 훈민정음 반대 상소와 여론에서 살펴보았듯이 그 반대층이 대개 유자층인 까닭에 유교경전이 아닌 운서나 불경을 택함으로써 유자들과의 충돌을 피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훈민정음은 이렇게 하여 우리 민족의 위대한 문화적 창조력을 보여주었으며 마침내 이로 인해 국어의 전면적 표기가 가능하게 되었다. 그 창제 의도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오늘날 세종대왕의 이 빛나는 업적을 기리기 위해 `한글날'이 정해져 그 뜻을 새기고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