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봉 위문 등을 경유하는
삼각산을 다녀와서!
한반도의 명산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고 과한 호칭이 아니라고 말 하고 싶은 산
더욱이 도시가 형성된지 육백년이 훌쩍넘은 대한민국 수도서울의 진산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는 삼각산 도봉산 사패산이 일체로 이어져 맥을 형성하고있는 북한산성
은 거대한 바위로 뭉처져 있고 수많은 역사의 유적들과 가람들이 있고 풍부한 얘기꺼리가
되는 유래를 지니고 있는 산 오늘은 수도서울의 육백년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삼각산에 올라
정유년 한 해가 시작되고 있는 정초에 서울의 도심을 내려다보니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2017년1월4일 오늘은 인터넷 카페 "5060아름다운세상" 산행동호회에서 수요산행지로
정한 삼각산에 가기 위해 오전 여덟시 삼십분 버스로 전철로 수유역에서 또 130 번
버스로 우이동 종점에 내려 모두들 늦게 오는 나를 기다려 주시 산우님들과 새해
인사를 주고 받으며 들머리인 하루재로 진입하여 인수봉이 건너다보이는 잠수암바위
능선에 약간의 물기가 있어서 미끄러운 바위 길을 오르면서 나무와 실랑이하듯 잡고
기어서 오르기도 하면서 반 쯤 올라가서는 줄을 타고 오르는데 위험천만한 순간들에
마음을 졸이면서도 올라가서는 해냈다는 성취감인지 어쩐지는 모르지만 쾌감같은
즐거운 마음으로 배낭에서 음식을 꺼내 시장기를 면하고선 위문을 지나 용암문을
향해 가다가 진달래능선은 다음에 탐방하기로하고 원점인 우이동으로 내려와 뒤풀
이를 하고 집에 돌아오니 저녁 여섯시 40분이였습니다. 오늘 첫리딩에 수고 많으셨던
맹구님께 감사드립니다..
산행코스: 우이동~하루재~잠수함바위능선~위문~용암문~진달래능선~우이동
북한산성 위문, 용암문, 인수봉!
북한산성 백운봉암문 "위문"
백운봉암문(白雲峰暗門)의 크기는 높이 1.7m, 폭 1.9m(높이 6척 3촌(寸)) 가량이다.
북한산성에는 6개의 대문과 7개 암문 1개 수문이 설치되었는데, 암문은 성곽의 깊숙
하고 후미진 곳에 적이 알지 못하게 만든 비상출입구로 그 중 하나이다. 백운봉과
만경봉사이에 위치해있다. 일제시대 이후 위문으로 널리 통용되고 있었다. 방형의
문으로 출입구는 높이 1.7m, 폭 1.9m 가량이다. 문 내부에는 성의 바깥쪽으로 문비
(門扉)를 달았던 원형의 돌확구멍과 장군목을 건너질렀던 방형 구멍이 남아있다.
조선 시대 북한산성 축성 당시의 이름은 백운봉암문이었다. 그러나 일제가 들어
서면서 이름을 위문으로 고쳤다. 지금은 일제 잔재를 없애려는 노력으로 이름을
백운봉암문으로 다시 고쳐 부르고 있다.
북한산성 "용암문"
용암문(龍巖門)은 북한산성에 있는 암문으로, 원래 이름은 용암암문
(龍巖暗門)이었다. 조선 시대 단위로 규모는 높이 6척 5푼, 너비 7척 5푼
당시 공사를 담당하였던 삼군문(三軍門: 훈련도감ㆍ금위영ㆍ어영청)은
각기 축성 영역을 분담 진행하였는데, 각각의 구간별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훈련도감(訓練都監)은 수문 북변에서 용암봉까지의 2,292보(체성
형태는고축 1,052보, 반축 771보, 지축 여장 469보)로 수문ㆍ북문(홍예식)ㆍ
서암문ㆍ백운봉 암문 등의 성문과 704첩의 여장을 축성하였다. 금위영
(禁衛營)은 용암 남변에서 보현봉 까지의 2,281보(체성형태는 고축 474보,
반축 1,836보, 반반축 511보)로 용암 암문ㆍ소동문(홍예식)ㆍ동암문
ㆍ대동문(홍예식) 등의 성문과 1,107첩의 여장을 축성하였다. 어영청
(御營廳)은 수문 남변에서 보현봉까지의 2,507보(체성형태는 고축
1,220보, 반축 299보, 지축 여장 908보)로 대서문(홍예식)ㆍ청수문 암문
ㆍ부왕동 암문ㆍ가사당 암문ㆍ소남문(홍예식) 등의
성문과 986첩의 여장을 축성하였다.
북한산성의 경우 지형의 굴곡이 심하고 험난하여 별도로 의도하여
치를 만들지는 않았다. 다만 성곽의 형태상 치의 기능을 하였던 것으로
생각되는 곳이 몇몇 있을 뿐이다. 대체로 10 여 개소 정도인데, 북문에서
시구문 사이에 2개소, 시구문에서 수구문 사이에 1개소, 부왕동암문에서
청수동암문 사이에 1개소, 대남문에서 대성문 사이에 1개소, 대성문에서
보국문 사이에 1개소, 보국문에서 대동문 사이에 1개소, 대동문에서 동장대
사이에 1개소, 동장대에서 용암문 사이에 2개소 등이다. 이중 동장대에서
용암문 사이의 반용봉에 있는 치는 가장 규모가 크며, 숙종년간에 제작된
북한도(北漢圖)에서도 곡성(曲城)이라는 명칭으로 표기하고 있다.
출처:(문화원형백과 한국의 산성), 2004., 한국콘텐츠진흥원)
북한산성 "인수봉(仁壽峰)"
《논어》에 <인자수(仁者壽)>의 글귀가 있다. 이는 ‘어진 이가
오래 산다’는 뜻이며, 인수로 요약할 수 있다. 서울의 진산으로 알려진
북한산에 인수봉이 있다. 인수봉은 해발 810m로서 백운대보다는 낮으나,
돌출한 기상에서만큼은 북한산의 으뜸이다. 이 산은 신라 때부터 부아악
(負兒岳)으로 불러왔다, 이는 기상에서 남성의 성기를 닮은 ‘불두덩’에
기원한 것이라고, 장호(章湖) 시인은 《한국의 명산기》에서 밝히고 있다.
돌출된 봉우리가 인수봉을 비롯하여 셋이므로, 삼각산(三角山)으로 통용
하기도 한다. 고려 때의 오순(吳洵)은 시에서 ‘공중에 높이 솟은 세 송이의
푸른 연꽃, 아득한 구름 안개 몇 만 겹이던가’라고 읊었다. 이존오(李存吾)
도 ‘세 송이의 기이한 봉우리 멀리 하늘에 닿았는데, 아득한 대기에 구름
연기 쌓였네. 쳐다보니 날카로운 모습 긴 칼이 꽂혔는데, 가로 보니 비슷
비슷한 푸른 연꽃 솟았네’라고 읊었다. 이것은 세 봉우리가 날카롭게 솟아,
구름에 덮여 있는 상태를 서정적으로 노래한 것이다.
인수봉은 날카롭게 솟아 있으므로, 오늘날 등반 코스로 활용되고 있다.
최초의 등반인은 1926년에 영국인 아처와 일본인 하야시로 공인하고 있다.
이후 인수봉에 매료된 젊은 등반인들이, 암벽의 골과 면마다 볼트와 하켄을
박아대면서 봉우리에 올랐다. 그 결과 오늘날 인수봉이 만신창이가 되어
섬세한 아름다움에서, 원형을 잃어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출처:(땅 이름 점의 미학, 2008. 5. 15., 부연사)
방랑삼천리/여 운
아득한 지평선에 해가 저무는데
나를 반겨 줄 사람은 오늘도 없네
흘러간 반 평생이 하도 허무해
껄껄웃 고 떠나간다 방랑 삼천리
발길이 닿는대로 나는 가련다
가다가다 멎는 곳이 고향이로다
지나온 타향살이 괄세도 많아
쓴웃음을 지며간다 방랑 삼천리
2017-01-04 작성자 청해명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