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 샤자한은 목이 타는 갈증을 느껴 눈을 떴다. 샹들리에의 촛불이 가늘게 떨고 있는 것이 어슴프레 눈에 들어왔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순간 누군가 물이 가득 찬 황금그릇을 코앞에 내밀었다. 왕비 뭄타즈 마할이었다. 그녀의 커다란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있었다. 목이 말라서 잠을 깬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하긴, 뭄타즈는 한시도 내 곁을 떠난 적이 없었지. 샤자한은 왕비가 황제에 대한 걱정으로 남 몰래 눈물을 훔치는 것과 한숨 짓는 것을 그동안 여러 번 목격한 적이 있었다.
뭄타즈 마할이 두 번째의 왕비로서 아그라성에 들어온 것은 17년 전이었다. 결코 아름답지도 않았으며, 키도 작고 피부도 까만 전형적인 드라비다 여인이었다. 첫 번째 왕비나 세 번째 왕비의 미모에 비하면 너무나도 볼품없는 여인. 굳이 좋은 점을 찾자면 맑은 목소리와 넘치는 애교, 그리고 꾸밈없는 밝은 성격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지성은 어디서나 단연 돋보였다.
궐 후에도 다른 왕비처럼 거드름을 피우거나 사치스럽지도 않았다. 왕비의 품위를 잃지도 않으면서도 늘 밝게 웃으며 매사를 솔선 수범함으로서 대신들과 궁녀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샤자한의 마음을 읽는데도 탁월해서, 언제나 황제가 무엇을 원하는지 마술처럼 알아 맞추고는 그를 대신해 모든 것을 미리 준비하는, 언제나 황제만을 생각하고 사랑하며 사는 그런 여인이었다.
어느덧, 샤자한은 뭄타즈 마할이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어디를 가나 무슨 일이 있거나 언제나 뭄타즈를 동반했다. 그녀는 심지어 황제가 전쟁터에 나갈 때도 두말 없이 따라 나섰다. 사랑이란 외모의 아름다움만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뭄타즈마할의 헌신으로 느낄 수 있었다. 다른 두 왕비의 따가운 눈초리와 질투를 감수하며 뭄타즈만을 사랑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샤자한은 자신의 마음을 읽고 따르는 착한 그녀를 혼신을 다해 아끼고 사랑했다.
다른 왕비들처럼 남을 비방하거나 험담하는 일도 없었다. 뭄타즈는 또한 샤자한에게 결혼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17년 동안 무려 14명의 자식을 낳아 주지 않았는가! 하나부터 열까지 그야말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사랑스러운 아내, 그 이름 뭄타즈 마할이었다.
그런 왕비가 또다시 임신한 채 만삭의 배를 끌어안고 끝내 몸져누운 것이다. 이전과 달리 점점 야위어져 가기만 하는 아내의 모습은 샤자한의 마음을 불안에 떨게 하였다. 창백한 달빛이 아그라 성의 테라스에 걸친 어느 날 밤, 결국 뭄타즈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듯 곁에 앉아있는 샤자한을 올려다보며 마지막 미소를 지었다. 그는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왕비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대의 소원이 있다면 무엇이든 들어주겠노라고.
뭄타즈는 자신을 위해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어 줄 것을 황제에게 부탁하였고, 그는 죽어 가는 왕비의 손을 잡으며 굳게 약속했다. 1631년 6월 7일의 일이다. 뭄타즈는 14번째의 아이를 낳다가 39세의 젊은 나이로 마침내 황제의 곁을 떠나게 되었고, 황제는 슬픔을 가누지 못하여 장례를 치르는 기간동안 흰 상복을 입고 왕비의 죽음을 애도했다.
샤자한은 뭄타즈 마할 사후 곧바로 그녀와의 약속을 실행에 옮겼다. 이로서 아그라의 야무나 강 남쪽에 기념비적인 건축물이 역사적인 착공에 들어가게 된다. 그 이름은 타지마할. 타지마할은 ‘왕관모습의 궁전’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오스만투르크제국 최고의 모스크 전문 건축가 우스타드 라호리가 초빙되었고, 아지메르 지방에서 최고급의 흰 대리석들이 재단되어 속속 아그라로 도착되었다. 인도 전역에서 내노라하는 조각가들이 불려졌고, 이탈리아와 터키, 심지어 남미산 유색 대리석과 오닉스가 수입되었으며, 루비와 사파이어, 그리고 옥이 중국과 아라비아 등지에서 대량으로 수입되었다. 2만명의 노예들이 건축가의 지시를 받아 무려 22년간의 대 공사 끝에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은 무굴 제국의 영광과 샤자한의 명예에 걸 맞는 아름다운 자태로 창조되었다.
놀랄 정도의 섬세한 조각과 백색의 대리석에 홈을 파서 유색의 대리석을 잘라 상감 처리한 정교한 기술은 더 이상의 다른 건축물과의 비교를 단호히 거부하였다. 코란을 새겨 넣은 높은 대리석 기둥은 밑에서 올려다보았을 때 시각적으로 맨 윗 부분과 아랫 부분이 정확히 같은 너비로 보이도록 하기 위해,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판의 너비와 글자를 넓히고 크게 새겨 넣은 그 세심함은 감탄사만으로는 부족하다. 본관의 주위에 높이 솟아있는 네 개의 미나르(첨탑)는 타지마할의 완성미를 더해줄 뿐 아니라, 본관을 중심으로 5도씩 바깥으로 벌어지게 함으로써 전면에서 똑바로 보았을 때 탑이 원근법에 의해 안쪽으로 구부러지지 않고 반듯하게 보일 수 있게 하였으며, 만에 하나, 지진이 발생하였을 경우 안쪽으로 넘어지지 않도록 한 믿어지지 않는 설계와 시공기술에는 그저 혀를 찰 뿐이다.
붉은 사암으로 된 정문은 중앙운하에 한가로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본관의 맞은편에 열려있으며, 건축의 균형과 세련미를 위해 본관의 한쪽 옆에 모스크를 만들고는 그 반대쪽에는 모스크와 외형이 똑 같은 건물을 세운 그 치밀함이여. 가히 세계 7대 불가사의에 속하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이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은 이렇게 탄생하게 되었다. 타지마할이 건설되면서 죽은 후 2년 동안 그 앞뜰에 임시로 묻혔던 뭄타즈마할은 바닥 공사가 끝나면서 바로 타지마할의 지하에 옮겨졌다.
타지마할이 완성되는 날, 샤자한은 성대한 행사를 갖고 뭄타즈마할의 영혼을 다시 위로했다. 죽은지 23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생전의 왕비를 사랑하는 샤자한의 눈에 뭄타즈는 생전의 모습 그대로 살아있었다.
샤자한은 타지마할이 완성된 후 오히려 더 괴로워했다. 타지마할을 볼 때마다 아내의 얼굴이 떠오르고 그리움은 다시 고통으로 다가왔다. 황제는 타지마할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잠시 쉬는 게 좋겠다는 대신들의 조언을 받아, 조부인 악바르 대제 시절의 한때 수도였던 파테푸르 시크리로 6개월간의 휴가를 떠난다. 샤자한이 대리석을 좋아하는 것은 거의 병적이다시피 했으므로, 이곳에 머무는 동안 그는 파테푸르 시크리 성내에 자리하고 있었던 성자 시크리의 초라한 무덤을 대규모의 대리석으로 증축하고 공간을 확장하는 한편, 시민들에게 1년에 한번씩은 이곳을 순례하도록 하였다.
그는 뭄타즈마할이 없는 아그라에 머물기보다는 외부에 출타하는 일이 많아졌고, 이윽고 조부 후마윤의 수도였던 델리에 샤자하나바드를 건설하기 시작한다. 독실한 이슬람교도인 샤자한은 장차 이슬람세계의 끝까지 그 명성을 떨칠 도시를 건설하기 위하여 붉은 사암의 거대한 성, 이른바 '랄킬라'를 짓기 시작했다. 성안에는 인도에서 가장 큰 모스크를 짓도록 명령했는데 그것이 바로 유명한 자마마스지드이다.
샤자한이 제국을 통치하던 30년간, 제국의 확장에 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타지마할의 건설로 국고가 결국에는 바닥을 드러내게 됨으로서 그의 업적이 빛을 잃게 되었다. 말년에는 중병에 들어 국사를 돌보기가 힘들어 지게 되었고, 왕비 뭄타즈마할에 대한 그리움으로 야무나 강 북쪽 타지마할의 반대쪽에, 이번에는 검정대리석으로 타지마할과 같은 거대한 자신의 묘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황제의 임종과 국고의 탕진을 염려한 네 아들이 서로 황제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경합을 벌이게 되었고, 그 중 군인기질이 가장 풍부한 야심가 아우랑제브가 장남과 다른 형제들을 제치고 재빨리 아그라를 차지함으로서 실질적 권력을 쥐게 된다. 그는 아버지 샤자한을 아그라 성채의 작은 방에 감금하고는 아버지가 진행시키던 샤자한의 묘의 건축을 중지시켰다.
무려 8년이라는 기간을 이곳에 갇혀 살던 샤자한은 75세의 나이로 멀리 야무나강 너머의 타지마할을 바라보면서 쓸쓸히 세상을 하직하고 만다. 사후 그의 묘는 타지마할 지하의 뭄타즈마할의 관 옆에 안치되었다. 뭄타즈마할에 대한 샤자한의 사랑은 그야말로 시공을 초월한, 타지마할 만큼이나 불가사의한 사랑, 바로 그것이었다. 하루에도 네 번씩 색깔을 바꾼다는 타지마할의 자태는 고요한 달빛에 비칠 때면 보라 빛을 띤 상아색으로 바뀌고, 그 고운 모습은 마치 샤자한과 뭄타즈마할의 달콤한 속삭임처럼 다가온다. 아그라 성채에서 타지마할을 바라보면, 멀리 떨어진 타지마할을 손에 잡힐 듯 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바라보게 된다. 8년 동안 이곳에서 타지마할을 바라보기만 해야 했던 샤자한의 애절한 마음은 어떠했을까. 사랑을 논하려면 아그라를 먼저 가 보라. 사랑과 애달픔이 곳곳에 스며있는 곳. 아그라는 그런 곳이었다.
<글·그림/레포츠365·KBC여행사>
살아있는 신의 도시, 카트만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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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만두에서의 아침일정은 보다나트 스투파(Boudanath Stupa)로 시작했다. 이곳은 티베트인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는 곳으로 이 스투파는 라마교의 전형적인 불탑이다. 이 스투파는 티벳 불교(라마교)의 성지순례지역이기도 하여 많은 불교신자들이 마니차(라마교의 경전이 새겨진 원통)를 손으로 돌리며 ‘옴마니반메훔’을 읊조리면서 탑돌이를 하고 있었고, 탑 안에는 붉은 법복을 입은 승려들이 불경을 읽고 있고 키 작은 티벳 할머니 하나는 스투파의 허리를 돌면서 연신 쌀을 뿌리고 있었다. 탑 주위에는 많은 선물가게와 향, 불경을 파는 가게들이 있고 조그만 기름 촛불들이 연신 켜지고 있었다.
스투파의 상단에는 동서남북의 사면에 각각 부처의 눈이 그려져 있었는데, 이것은 만물을 꿰뚫어 보는 부처의 눈, 또는 법안이라 하며, 영어로는 All Seeing Eyes라고도 불린다. 눈과 눈 사이에는 물음표 모양이 코의 모습처럼 그려져 있고, 신비로움을 위해 짧은 커튼으로 드리워진 이마에는 또 다른 한 개의 눈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을 제3의 눈이라 하며 카르마(종교적 이법)를 훤히 꿰뚫어 보고 있음을 나타낸다고 한다.
성지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찾은, 보다나트에서 남서 쪽으로 불과 몇 키로 떨어진 곳의 파슈파티나트(Pashupatinath)는 또 하나의 충격거리였다. 이곳은 힌두 교도들의 성지로서, 마침 보름인데다 휴일이 겹쳐 수많은 힌두인들과 관광객으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보다나트의 시큼한 기름 냄새와는 달리 이곳은 입구부터 썩어 가는 강물과 사람의 시체가 타는 냄새가 우선 후각을 강하게 압박했다.
작은 개천을 연상케 하는이 강의 이름은 바그마티(Bagmati). 인도의 갠지스 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강으로서, 네팔인들이 신성시하는 강이다. 보름날은 힌두인들에게 특히 신성한 날이므로, 이 날은 강가의 화장터에서 쉴 새없이 시신이 장작더미에서 화장되고 있었다. 시신은 염을 마치고 노란 천으로 감아진 후 대나무들것에 실려 이곳에 도착한 후 신성한 강물에 담가진다. 장작더미가 쌓아지면 시신이 그 위에 놓여지고, 상주가 시신을 돌며 고동을 분다. 마치 소라고동의 ‘부우-’하는 소리가 나는데, 이것은 이승을 떠나는 고인의 마지막 신호음이 되는 셈이다. 사람의 신체 중 입이 이승에서 가장 많은 죄를 지은 탓일까. 상주는 성냥불을 시신의 입에 가장 먼저 갖다 대었다. 입 주위가 타오르기 시작하면 시신의 여러 곳에 불을 붙이고 짚단을 올려놓으며 불을 추스렸고, 이윽고 시신은 붉은 화염에 완전히 휩싸이며 회색의 한 많은 연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이곳에는 파슈파티라는 사원이 있는데, 원래 ‘파슈파티’란 ‘모든 짐승의 주인’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이는 즉 시바 신을 말한다. 황금색의 이 사원은 힌두 교도만이 엄격히 입장을 허가 받으므로 일반인은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힌두 교도라도 태어나면서부터 힌두 교도라야 한다. 인도의 라지브 간디가 이 사원을 방문했을 때 그의 아내인 이태리인 소냐 간디는 이곳에 들어갈 수 없었다.
남편을 따라 힌두 교도가 되었지만 자격이 주어지지는 않았던 것이다. 사원의 밑으로 강으로 이어지는 작은 가트는 죄를 씻으려고 목욕하는 사람들과 꽃을 뿌리는 사람, 식기를 닦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신성한 강물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신심으로 가득했다. 보다나트와 파슈파티나트를 보는데 반나절밖에 안 지났는데, 머리 속은 삶과 죽음, 행위와 업, 윤회, 불교와 힌두교 등등에 대한 생각으로 혼미하고 어지럽기 시작했다. 우리는 카트만두의 고대 도시 파탄으로 향했다.
파탄은 카트만두 분지에 있었던 마쯔라의 세 왕국의 수도였으며, 카트만두 왕국, 파탄 왕국, 그리고 박다푸르 왕국 중 가장 먼저 건설된 곳이다. 후에 세 왕국으로 갈라지면서 앞 다투어 서로의 것을 모방했기 때문에 세 도시의 모습은 비슷비슷해서 구별이 안 갈 정도라고 한다. 규모 면에서는 카트만두가 가장 크고, 가장 잘 보존이 된 것은 박타푸르라고 한다. 파탄은 불교의 유적이 잘 보존되고 있고, 이것을 기념하듯 성밖 주위에는 아쇼카 대왕이 세웠다는 스투파들이 남아 있었다.
더르발(Durbar)이라 불리는 왕궁 광장에 들어서니 동쪽으로는 왕궁 건물이, 그리고 서쪽으로는 사원들이 일직선으로 늘어서서 왕궁을 마주보고 있었다. 파탄의 사원들 중 눈길을 끄는 것은 17세기에 건축된 크리슈나 사원으로서, 정교한 석조 건물로 아름답게 서 있었다. 크리슈나는 비슈누가 네 번째로 환생한 화신인데, 사원의 앞에는 비슈누 신이 타고 다니는 가루다 상이 있었다. 파탄에서는 왕궁 광장도 광장이지만, 왕궁 주변의 좁은 옛 골목들이 고색 창연하게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볼만했다.
오후에는 카트만두에서 가장 유명한 스투파인 스와얌부나트로 향했다. 네팔에서는 붓다가 태어난 룸비니 동산 다음으로 바로 이 스투파가 가장 신성시되고 있다고 한다. 높다란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는 이 스투파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멀고 가파른 계단을 숨을 몰아 걸어 올라가야 한다. 부근의 숲에서는 원숭이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참배객들의 눈치를 보고 있고,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5가지의 원소를 나타내는 5색 깃발이 스투파의 꼭대기로부터 어지럽게 나부끼고 있었다.
인간은 5가지의 원소로 이루어져있는데 물과 불, 흙과 공기, 그리고 영혼이 그것이라고 한다. 힌두교나 불교에서 사후 시신을 화장하는 이유는 이 다섯 가지의 원소를 완전 분해하여 원래 있던 그 자리로 되돌리기 위함이 아닐까. 그래서 완전한 소멸로 이룸으로서 이들이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 해탈에 이르게 되기 위함이 아닐까. 아무튼 이곳도 아침 일찍 보았던 보다나트의 불탑처럼 많은 순례자들이 경건한 불심으로 마니차를 돌리면서 탑을 돌고 있었다. 스투파를 한 번 돌면 불경을 1천 번 읽는 것만큼의 공덕이 쌓아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스투파의 금색 상단의 4면에도 붓다의 눈이 그려져 있고, 둥근 하단의 몸체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5가지 원소를 관장하는 각각의 부처 형상이 보존되어 있었다. 상단 이마에는 역시 제 3의 눈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렇다면 카트만두에만 존재하는 살아있는 여신 ‘쿠마리’의 이마에 있는 제 3의 눈과는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 우리는 향내와 꽃가루, 불경의 소리가 가득한 스투파를 뒤로 하고 쿠마리가 살고 있는 쿠마리 바할을 보기 위해 서둘러 카트만두의 더르발로 향했다.
쿠마리 바할이란 쿠마리가 기거하는 곳으로, 카트만두의 더르발 광장 남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작은 창 세 개가 나란히 달려있는 작은 목조 건물의 3층에 살고 있는 쿠마리를 보기 위해 이미 많은 관광객들이 창문 밑에서 목을 빼고 그녀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옛날, 힌두의 탈레주라는 여신이 인간의 몸을 빌어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으로 카트만두 왕국에 출현했다. 왕은 여신을 극진히 모시며 여신이 영원히 같이 있어주기를 희망했다. 어느 날 여신과 장기를 두고 있던 왕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그만 이성을 잃고 여신을 범하여 들었다. 그러자 여신은 분노하여 이승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왕은 크게 잘못을 뉘우치고 여신이 돌아올 것을 빌었으나 그 여신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왕의 절망적인 기도는 계속되었고, 그의 진심을 이해한 여신은 그에게 직접 다시 나타나는 대신 초경을 겪지 않은 순수한 어린 여자아이를 선택해 그녀를 자신의 분신으로 섬기기를 명했다. 왕은 여신이 제시한 조건에 따라 어린 여자아이를 뽑아 여신으로 섬기기 시작했다. 이 여자아이가 바로 쿠마리인 것이다.
쿠마리는 대개 기초적인 분별력만이 생성되는 5세에서 8세의 나이에서 선발된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네왈리의 카스트를 지녀야만 하고 그것도 성이 샤카인 씨족에서만 선택된다고 하는데, 샤카는 ‘석가모니’의 샤카라고 한다. 신체적 조건도 까다롭다. 경전에 의하면 쿠마리의 몸은 보리수와 같아야 하며 허벅지는 사슴과 같고, 눈꺼풀은 소와 같아야 하며 목은 고등 같아야 한다고 한다.
일단 기본적인 조건이 만족되면 쿠마리가 되기 위한 본격적인 테스트로서 빛 한줌 들어오지 않는 캄캄한 방에 갇혀 하루를 지내야 하는데, 그 방에는 소, 돼지, 양, 닭 등의 머리가 피 냄새를 풍기며 놓여 있게 된다. 아이가 무서워서 견디지 못하고 울거나 소리를 지르게 되면 신으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여기게 되며, 무난히 지나고 나면 비로서 신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일련의 시험을 거쳐 선택이 되면 쿠마리라는 이름의 여신이 되어 매년 9월에 있는 인드라자트라 축제의 주인공이 되는데, 이 때 국왕이 제일 먼저 쿠마리에게 무릎을 꿇고 복을 빌며 여신으로 섬김을 맹세한다.
쿠마리로 지내는 동안은 그야말로 여신에 준하는 대접을 받으며, 짙은 화장에 이마에는 ‘티카’라 불리는 제 3의 눈이 그려진다. 이것은 불교의 스투파 상단의 제3의 눈과 같은 것으로서, 삼라만상의 모든 이치와 법을 꿰뚫어본다는 신성한 눈이 되는 셈이다. 힌두 여신인 탈레주의 현신이 된 셈이지만 네팔에서는 모든 종교를 초월해 현신으로 숭배를 받는다고 한다.
쿠마리로 있는 동안은 어떠한 경우를 막론하고 피가 몸에서 나와서는 안된다고 한다. 작은 가시에 찔려 한 방울의 피를 흘린다고 해도 이미 그녀는 부정을 타는 것이 되고, 쿠마리의 자격도 바로 박탈당하게 된다. 12세 전후 첫 생리가 시작되면 쿠마리의 생활도 끝이 나게 되고, 화려한 여신 쿠마리로서의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녀는 여신이 아닌 평범한 소년의 자격으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집에서는 반갑게 맞아주지 않는다고 한다. 쿠마리가 되었던 소녀가 집으로 돌아오면 가족들이 죽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결혼도 하기 어렵다고 한다. 결혼을 하면 남편이 일찍 죽어 버리기 때문이다.
사회와 가정에서 외면을 당하는 소녀는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자취를 감추거나 멀리 떠나 버린다고 한다. 오죽하면 이렇게 비참하게 변해 버린 쿠마리에 대한 영화까지 등장했을까. 하지만, 이것은 모두 미신에 지나지 않는다고 우리의 안내원은 역설했다. 왕년의 쿠마리들은 대부분 현재 결혼해서 아이 낳고 남편과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물론 확인된 바는 아니지만.
어쨌든, 이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린 쿠마리는 사람들의 요청에 의해 아주 잠깐동안 창문으로 얼굴을 내밀어 주었다. 그 얼굴은 짙은 화장에도 불구하고 앳되고 천진한, 그리고 안쓰러움이 혼합된 그런 모습이었다. 새로운 세기를 살아가는 시대에 아직도 이런 믿기 어려운 전통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믿기 어려웠다. 카트만두는, 아니 네팔은 신의 나라이다.
인도처럼 카스트가 존재하고, 힌두의 신들에게 기도를 함으로써 하루의 일과를 시작한다. 곳곳에 사원이 있고 스투파가 있으며 사당이 있다. 신의 범주를 떠난 일상생활은 생각할 수조차도 없다고 한다. 특히 카트만두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원이 있는 도시로 유명하다. 비록 짙은 매연으로 인해 쾌적한 도시라고는 할 수 없어도, 카트만두는 살아있는 여신의 불가사의와 볼거리로 가득한 신기한 도시임에는 분명하다.
<글·그림/레포츠365·KBC여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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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永遠)의 도시- 바라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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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영혼의 도시, 혹은 영원의 도시라 불리는 바라나시를 다시 찾은 것은 실로 꼭 18년만의 일이었다. 바라나시는 이미 기원 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는 2천 5백 여년 전에 조성된 도시로서 역사로 치자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이다. 인도인들, 엄밀히 말하자면 힌두 교도들이 가장 성스럽게 생각하는 갠지스 강이 남북으로 흐르는 거룩한 도시인 바라나시. 일생에 한번은 성지 바라나시를 순례하여 강물에 목욕을 함으로써 죄를 씻고 신에게 기도를 올림으로써 영혼을 구제받는 것이 뭇 인도 인들의 소원이라고 하는데…. 10년이면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뀔 정도로 숨가쁘게 변해가는 요즈음, 과연 바라나시는 어떻게 변해 버렸을까.
캄캄한 새벽, 서둘러 호텔을 나와서는 다싸스와메드 가트(Ghat: 강으로 이어지는 계단)로 달려가 배를 탔다. 바라나시의 일출을 다시 보기 위해서 였다. 넓은 강물을 배경으로 붉게 떠오르는 태양의 모습 그 자체도 장관이지만, 그 일출을 기해 100여개의 가트에서는 일제히 물 속에 들어가 몸을 씻고 신에게 기도하는 수 많은 순례자들의 진지하고 경건한 모습들이 더욱 가슴을 뭉클하게 하기 때문이다. 무슨 죄를 지었길래, 아니면 무슨 사연이 있길래 저토록 흐느끼며 절규하듯 신에게 합장을 올리는 것일까.
바라나시는 18년 전과 그대로였다. 같은 태양인데도 바라나시의 태양은 확실히 더 붉었다. 이것도 그 때와 같았다. 해가 뜨면서 주위가 점차 밝아오자 모든 것이 옛날과 다르지 않았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하나 둘 씩 그 증거들을 보여주었다.
가트의 곳곳은 많은 순례자와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찾아온 온갖 환자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고, 빨래터로 유명한 도비 가트에서는 빨래 감을 물에 적셔 어깨 너머로 돌에 매 치는 것도 옛날 그대로였다. 화장터로 유명한 마니까르니까 가트에서는 두 곳에서 회색의 무거운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머리를 삭발한 상주는 장작더미 옆에서 우두커니 타는 시체를 바라 보고 있었다. 그 옆에는 방금 도착한 사체 한 구가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고, 화장터의 접근을 허가받지 못한 여인들은 가트의 위쪽 발코니에서 슬픔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사체를 화장할 때 머리는 서쪽으로, 발은 동쪽으로 위치시키기 때문에 강 쪽에서 보면 두 개의 발이 보이기 마련. 그 타는 광경을 차마 오래 보기 어려워 강물로 시선을 던졌더니 마침 그곳에는 젊은 여자의 시체가 떠 있었다. 아, 그렇다. 모든 것이 옛날 그대로였다. 마치 18년 전에 보았던 바라나시를 꿈속에서 다시 보고 있는 것처럼, 어떻게 이토록 그 때와 같은 해와 같은 광경이 그대로 보여지는 것일까. 바라나시의 시간은 정지되어 있는 것일까.
이들은 윤회를 믿는다. 이들에게 있어 시간은 1회성이 아니라 돌고 도는 것. 그러므로 한 생명의 끝은 다른 시간의 시작을 의미한다. 사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다음 세상에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끝없는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 완전한 소멸(消滅)로 이르는 것. 이것을 해탈이라 하며, 이 갠지스 강에서 화장을 하고 그 뼈를 강물에 띄움으로서 해탈에 이르게 된다고 믿는다. 업(業)을 만들었던 온갖 행위를 완전한 무(無)로 돌리기 위해서는 살아있을 때의 그것도 중요하지만 마무리 역시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그래서 이들은 화장을 한다. 인간의 몸은 물, 불, 공기, 흙, 영혼의 5가지의 요소로 만들어져 있다. 이 요소는 불로 완전히 태움으로서 완전한 소멸로 이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동물의 시체는 그렇다 치더라도, 강물에 처참히 떠있는 사람의 시체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들은 어떻게 이 강 위에 정처없이 떠 다니는 것일까. 그들의 영혼은 과연 신으로부터 구제 받게 되는 것일까. 그들은 해탈에 이르게 되는 것일까.
바라나시는 영원의 도시이다. 온갖 영혼들이 영원한 안식을 찾아 이곳에 몰려온다. 바라나시의 갠지스 강 물은 목욕하기에 결코 맑은 물이 아니지만, 이들은 갠지스강의 사실성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오직 강가(Gangga)의 신성에 대해서만 믿으려 한다. 그래서 이들은 시체가 떠다니건 말건, 옆에서 빨래를 하건 말건 연신 물 속에 몸을 담그며 심지어 강물을 마시기도 한다. 그것도 모자라 강 물을 통에 받아 가기도 한다. 순례자들만 바라나시에 오는 것이 아니다. 많은 요가 승들도 이곳에 몰려 장사진을 이루며, 순례자들을 상대로 점을 쳐준다. 한 걸음 나아가 외국 관광객을 상대로 장사를 하기도 한다. 사람들로 가장 붐비는 가트인 다싸스와메드는 또한 덥수룩한 수염의 불쌍한 거지들로 가득하다. 층계마다 하나씩 자리를 차지하고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일제히 내밀어지는 돈냥 그릇과, 일일이 동전 한 닢씩을 떨구며 지나가는 여인들의 모습에서 나는 또 하나의 바라나시의 영혼을 느꼈다. 바라나시에는 더 이상의 삶도 죽음도 없었다. 갠지스는 숱한 인간의 애절한 영혼을 모두 품은 채 오늘도 말없이 흐르고 있을 뿐. 바라나시는 옛날 그대로였다.
<글·그림/레포츠365·KBC여행사>
1. 교통편 : 서울에서 바라나시까지는 직항이 없으므로 델리나 네팔의 카트만두에서 항공기를 갈아타면 최단 시간내에 도달할 수 있으나, 당일에 도착하기는 어렵다. 바라나시 시내는 도보나 릭샤를 이용해 구경하는 것이 편리하다.
2. 숙박 : 바라나시에는 값 비싼 호텔부터 게스트하우스까지 다양한 숙박시설이 준비되어 있다. 가격은 게스트하우스가 $5-$15 선(시설에 따라 차이가 있다). 호텔은 1박에 $30-$100 정도.
3. 식사 : 식사는 가급적 호텔의 식당에서 하는 것이 안전하다. 물은 생수를 사 마시거나 끓인 차이를 마시는 것이 좋다. 간단한 밑반찬과 고추장, 그리고 컵라면 등을 챙겨 가면 식사에 큰 어려움은 없다.
◇바라나시(Varanasi)는 바루나 강과 아시 강이 갠지스강과 만나는 지점으로서 이 두 강 이름의 머릿글자를 따서 바라나시라 불리게 되었다. 바라나시는 무굴제국의 아우랑제브 황제에 의해 베나레스(Benares)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되었는데, 영국 통치시대 때에도 그대로 그 이름이 불리게 되면서 지금도 가끔 베나레스로 표기되기도 한다. 하지만 인도 정부에 의해 1956년 5둴 24일을 기점으로 공식적으로 바라나시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현지인들은 바라나시를 ‘카시(Kasi)’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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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의 비경 하롱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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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아침햇살을 가르며 선착장을 떠난 지 한시간 여, 일행을 태운 배는 하롱베이의 동쪽 혼가이(Hongai)라 불리우는 어촌에 접어들고 있었다. 얼핏보아도 활기에 찬 어촌의 전형적인 풍경이 매캐한 기름냄새와 생선시장의 소란스러움으로 고조되고 있었다. 그물을 걷어올리는 어부들, 생선을 메고 가는 아낙네, 곰살맞은 손을 파닥이며 젖을 보채는 갓난아이, 석탄을 리어카에 싣고 달리는 아버지와 아들, 소금장수의 외침소리, 국수 파는 아줌마의 바쁜 손놀림…. 소박한 어촌의 모든 것이 거기에 있었다.
혼가이에서 점심식사에 필요한 재료들을 구입한 후 배는 다시 하롱베이의 한 가운데를 향해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아갔다. 귓전을 울렸던 어촌의 소란스러움이 차츰 멀어지기 시작하면서 어느덧 호수와도 같이 잔잔한 바다 위에 그냥 얹혀있는 것 처럼 편안함이 느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배 주위로 뾰족한 바위들이 하나 둘 스쳐 지나가는 것이 보이는 듯 싶더니 일행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하면서, 순간 수 천 개의 바위섬들이 망망 대해 위에 흩뿌려진, 하롱베이의 불가사의한 풍경 속 한가운데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하는 우리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렇구나. 이곳이 바로 그 유명한 하롱베이. 영화 ‘인도차이나’의 배경이 되었던 그 신비스러운 곳, 바로 그곳이구나. 앳된 베트남 왕족의 소녀 ‘까뮤’가 사이공으로부터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양어머니의 애인이었던 자기의 첫사랑인 해군장교 ‘장 밥띠스트’를 찾아와, 뜻하지 않은 사고로 조그만 돗단배에 두 몸을 싣고, 하롱베이의 저주를 받아 미로와 같은 섬들 사이를 헤매다가 극적으로 구조를 받게되는 애틋한 장면이 연출되었던 곳. 그곳이 바로 이곳이었구나.
하롱베이의 원 뜻은 하룡(下龍), 즉 용이 내려오 곳이라는 의미에서 출발한다. 전설에 의하면 이곳 하롱베이의 수 천 개의 섬들은 산 속에 살고있던 거대한 용(龍)에 의해서 빚어진 작품이라고 전해진다. 용이 하늘로부터 이곳 해안으로 내려오면서 그 거대한 꼬리가 춤을 추듯 팔딱거리며 계곡과 땅을 파헤치면서 웅덩이가 생기고, 파헤쳐진 수많은 흙과 돌덩이가 물이 채워진 웅덩이로 튀어 들어가 그 윗 부분만 보이게 된 것이 오늘날의 하롱베이라고 한다. 또한 그 용은 영험한 괴력으로 중국으로부터 침략을 당하지 않도록 이 나라를 보살펴 주었다고도 한다.
물론 용에 관한 이야기는 전설이라 치더라도, 이곳 하롱베이는 수중괴물의 출현이 가끔 보고되기도 하였다. 심지어 스코트랜드의 네스호의 괴물처럼 거대한 생명체가 존재한다는 이야기들과 존재 가능성에 관한 설들이 난무하면서, 몇몇 선박회사들은 수중 괴물을 찾기 위한 선전과 아울러 관광상품을 만들어 돈많고 호기심 많은 관광객들의 호주머니를 축낸 적도 여러번 있었다고 한다. 대부분 이러한 괴물의 출현은 날씨가 좋지 않거나 목격자의 건강 상태 등이 온전치 못한 상태에서 하롱베이를 항해하다가 뱃전으로 스쳐 지나가는 기암괴석의 모습에 놀라 괴물로 착각한 것이 분명하다는 당국자의 설명 또한 어느 잡지에 보고된 바 있었으나, 어쨋든 이러한 황당한 이야기들을 접하며 항해를 하고 있노라면 과연 그런 일이 일어날 법도 하다는 묘한 신비감에 젖어드는 것 또한 하롱베이만의 마력이 아닐까.
그런 괴물대신, 불과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해적들이 신출괴몰했던 지역으로서 유명했다고 하는데, 해적들은 교묘하게 바위섬 뒤에 배를 숨기고 기다렸다가 그럴듯한 상선이 지나가면 갑자기 습격하여 약탈과 강도 짓을 서슴치않고는 눈 깜짝할 새에 배를 몰아 어디론가 섬들 사이로 사라져버려 도저히 이들을 방어할 방도가 없었다고 한다.
어느덧 미로와 같은 섬들에 포위되어 적막감과 신비감에 젖기 시작한다. 배가 좀더 앞으로 나아가자 조그만 쪽배가 옆에 와서 붙었다. 조그만 쪽배에는 할아버지가 배 운전을, 할머니와 며느리는 갓 채취해온 산호를 사라고 내 밀었다. 배의 지붕 위에는 잘돼야 서너 살밖에 안된 아기가 자기도 손을 내 저으며 무언가 외치고 있다. 그 귀여운 고사리 손에는 밥풀 몇 개가 붙어있었다. 강아지도 한 마리 있었는데, 주인 옆에서 자기도 무언가 도우려는 듯 일행을 쳐다보며 꼬리를 흔드는 것이 마치 우리보고 물건 좀 팔아달라는 눈치인 듯 해서 모두들 웃음 지었다. 그 작은 배 안에 웬만한 살림살이가 다 있는 것으로 보아 가족의 거의 모든 생활이 이 배 안에서 모두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후 반대쪽에 또 다른 쪽배가 접근했다. 금방 잡은 듯한 새우와 게, 그리고 도미 몇 마리가 펄떡이고 있었다. 일행은 절로 흥이 나는지 다른 이의 만류에도 굳이 새우 한바가지를 사서 소주와 함께 한 점찍어 입에 털어 넣었다. 잠시 후 누군가의 입에서 구성진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모두들 하롱베이의 아름다운 풍광에 넋을 잃었다. 아니, 누군들 이 순간 이러한 풍광에 도취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1927년 프랑스 관광청은 ‘박보만에 펼쳐진 형언할 수 없는 자연의 경이 하롱베이는 세계최고의 비경’ 이라고 인도차이나에 관한 보고서에 기록하고 있으며, 1950년 프랑스의 아세트사가 발간한 ‘세계의 불가사의’라는 잡지에는 하롱베이야 말로 불가사의 중 불가사의라고 발표한 바 있다. 급기야 최근에는 유네스코로부터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글·그림/레포츠365·KBC여행사>
1. 항공편 : 서울에서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까지는 베트남항공만이 주 3회(화 목 토) 운항한다.
2. 교통 : 수도 하노이로부터 하롱市까지의 거리는 약 160km로서 현재 승용차로 3시간. 관광버스로는 4시간 가량은 잡아야 한다.
3. 숙박 : 하롱시는 서부와 동부로 나뉠 수 있다. 서부는 일반적으로 관광객들이 많이 머무는 곳으로서 다수의 호텔과 식당이 자리잡고 있다. 동부는 혼가이라고도 불리며 싼 호텔과 식당이 많이 있다. 최고급 호텔로서는 헤리티지 하롱($80-$120)이 있으며 대개 1박에 $50-$60정도면 무난한 호텔을 구할 수 있다. 이외에도 배낭족들을 위한 호텔들은 대개 1박에 $10-$15정도면 가능하다.
4. 식사 : 베트남음식은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 않다. 다만 쌀이 끈기가 없고 밀가루 대신 쌀가루를 이용한 음식이 많은데 오히려 밀가루보다 부드러워 먹기가 좋다. 생선과 닭고기, 그리고 돼지고기 요리가 많은 편이고 약간 기름진 것들이 많다. 고추장과 김과 같은 약간의 밑반찬을 준비해 가면 어떤 음식을 만나도 문제 없다.
5. 볼만한 곳 : 하롱베이에서는 우선 배를 타고 기암 괴석이 기다리고 있는 바다로 나가야 한다. 선착장은 하롱시의 입구와 혼가이에 있다. 관광용 배는 크기에 따라 가격이 달라지며 흥정할 수도 있다. 대개 20인 승의 경우 시간당 미화 10달러 정도로서 경쟁 때문인지 매우 저렴한 편이다. 배를 빌릴 때는 가급적 2층으로 되어있는 큰 배로 하는 것이 전망도 좋고 편리하다. 관광객들은 보통 5-6시간을 빌려서 만 일대를 돌아보고 배 위에서 점심까지 마친다. 식사는 배의 승무원이 만들어 주는데 솜씨가 다들 수준 급이라고 한다. 아침 일찍 출항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날이 아주 좋은 날에는 오후에 배를 빌려 일몰을 감상 해보도록 권하고 싶다. 아마도 영원히 못 잊을 추억이 될 것이다.
6. 이런 것에 주의!
* 하롱만을 유람할 때 좀도둑에 주의하도록 하자. 근래에 들어 많이 근절되었다고는 하나 아직도 만 일대를 조그만 모터보트에 소량의 산호와 생선들을 싣고 다니면서 관광 유람선에 접근한 후 흥정하는 척 하다가 관광객의 소지품이나 카메라 등을 훔쳐 달아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 하노이 시내관광시 거의 빠뜨리지 않고 들르게 되는 호치민 묘 입장 시 사진촬영은 물론 카메라 휴대와 일체의 잡담이 금지된다. 이를 어기는 경우 현장의 경비원들에 의해서 긴급 체포되는 경우가 있으므로 주의 할 것.
*3. 베트남 주요관광지에서는 불어로 '생명'이라는 뜻의 'La Vie'라는 생수를 파는 곳이 많다. 이것은 아무리 마셔도 뒤탈이 없는 양질의 생수이다. 그러나 이것 외에 유사상표가 많으므로 주의할 것.
동양권 최고의 문화유산, 앙코르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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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의 유적을 보기 위해 시엠립 국제공항에 처음 도착하는 여행자는 이곳이 과연 연간 백만의 관광객을 수용하는 국제공항일까 할 정도로 작고 초라한 청사의 모습에 다소 의아하게 된다. 일년 내내 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공항 내에는 단 한 개의 작은 에어컨조차 찾아볼 수 없고 커다란 선풍기 두어대 정도만이 붕붕 소리 내며 무더운 바람을 되새김 질 할 뿐이다. 자국 내 캄보디아 대사관이 설치되어 있지 않은 여행자들은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이곳에서 소위 어라이벌비자(Arrival Visa)라 불리는 입국 허가증을 받아야 하는데, 따라서 비자가 발급되는 반 시간 동안은 별수 없이 공항의 무더움을 인내하는 훈련부터 감수해야 한다. 물론 그 흔한 컴퓨터 한 대 갖추지 않은 공항인데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캄보디아의 경제적인 현주소는 공항에서부터 웅변해준다. 마치 우리나라의 60년대를 연상케 한다.
시엠립은 수도 프놈펜으로부터 약 330km 떨어진 작은 도시이다. 이곳의 원주민은 약 6만명 정도. 하지만 이곳을 방문하는 여행자들은 연간 백만이상이 된다고 한다. 엠립이라는 말은 100여년 전 현재 태국의 시암족이 앙코르를 침공했을 때 용감히 싸워 이민족을 물리친 후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이름 붙여진 것으로서, 시엠립은 ‘시암족을 물리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곳의 주민들은 원래 대다수가 농업에 종사하였으나 관광이 개방된 1993년도 이후부터는 80%가량이 관광업에 관련된 업종에 종사하며 살고 있다.
앙코르 유적군이 있는 지역은 완전한 평지처럼 보이는 거대한 분지의 형태를 띠고 있는 지역으로서, 해발 150미터 정도되는 언덕 위에 조성된 프놈바껭 사원 이외의 모든 유적은 평지에 조성되어있다. 앙코르는 800년경 자야바르만 왕에 의해 성립되는 것으로 그 역사가 시작된다. 원래 이곳에 왕국을 건설하기 전, 그러니까 6세기부터 8세기까지는 현재 라오스의 남부지역 참파삭 지방에서 비롯되었다. 그곳에는 그 옛날 크메르인들이 힌두교를 받아들여 시바신을 숭앙하며 둥지를 틀고 도시국가를 건설했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이후 크메르인들은 이곳으로부터 남하하여 세력을 키우면서 현재의 앙코르 유적이 있는 곳에서 왕성한 왕국을 이루게 된다.
이곳은 또한 800년대 초부터 이곳은 무역의 인도차이나 반도의 무역의 중심지 중 한 곳이었다. 인도와 중국의 사이에 있으면서 많은 상인들이 오가다 장시간 머물게 되었고, 상업뿐 아니라 자연스럽게 인도의 종교인 힌두교가 전해지게 되었다. 앙코르왕조가 이곳에 도읍을 정한 또 하나의 이유는 부근에 동남아에서 가장 큰 호수 ‘톤레삽’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앙코르’란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도읍을 뜻한다. 앙코르 유적을 보기 위해서는 ‘앙코르톰’이라는 지역을 들어가야 하는데, 앙코르는 도읍(都邑)을 뜻하고 ‘톰’은 ‘크다’는 뜻을 나타내므로 직역하면 대도시 혹은 대왕도(大王都)라는 의미라 할 수 있다.
이 도읍은 자야바르만 7세가 1200년 경 왕국의 수도로서 조성한 것으로서 각 변의 길이가 3km에 달하는 정사각형의 모양을 성벽이 둘러싸고 그 중앙에 우주의 중심을 상징하는 바이욘 사원을 높이 건축하였으며 동서남북으로는 2개의 추축대로가 도시를 4분하게 하도록 하였다. 두 추축이 성벽과 만나는 지점에는 왕도의 문이 4개, 그리고 왕궁에서 동쪽으로 뻗은 대로 위에 1개로 모두 5개의 문이 있다. 이 5개의 문은 앞면에 커다란 뱀을 껴안은 거인 석상의 열을 난간으로 한 다리를 끼고 있으며, 문 자체는 거대한 4면의 얼굴을 한 탑문으로 되어있는데, 중앙의 바이욘 사원은 그보다 반세기 전에 조성된 앙코르와트와 함께 앙코르문화의 쌍벽을 이룰 정도로 예술적, 문화적 가치가 돋보인다.
앙코르 왕국의 초기인 8세기에는 앞서 받아들인 힌두교를 중심으로 사원과 주요 건축물들이 조성되었으나 12세기 자야바르만 7세는 힌두교를 버리고 불교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앙코르의 역사상 이 자야바르만 7세가 통치하던 12세기와 13세기가 가장 전성기로서 번영과 풍요를 이루었으며, 당시의 인구는 100만 이상이나 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숫자로 보면 아무 것도 아닐지 몰라도, 당시로서는 대단한 인구를 가진 거대도시였음을 두말할 필요가 없다. 14세기에 들어서면서 시암족, 참족을 비롯한 주변의 여러 나라들로부터 침략을 받기 시작하고, 더구나 왕실 내에 현재의 나병으로 추정되는 전염병이 돈다는 소문 때문에 크메르인들은 이곳을 버리고 타지로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사실, 그토록 융성했던 앙코르 왕국이 왜 갑자기 멸망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갑자기 정글 속으로 몇 백년동안이나 사라져 잊혀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여 확실한 해답이 없는 상태이지만, 시암(Siam)족 등 외세의 침입에 의한 멸망이라기 보다는 앞서 언급한 전염병의 창궐 때문이라는 설이 한층 설득력을 얻는 것 같다. 프랑스의 탐험가에 의해 1860년 발견될 때까지 이 거대한 유적군은 수 백년간 정글에 파묻혀 아무도 살지 않는 유령의 도시로 황폐화 되어가고 있었다. 그것도 1856년부터 1953년까지 거의 100년간 프랑스에 의해 신탁통치를 받게 됨으로서 가능하게 된 것이다.
수 백년간 숲속에 파묻혔었다는 증거는 타쁘롬이라는 사원에 가보면 잘 알 수 있는데, 마치 석조의 유적들이 거대한 나무의 줄기와 뿌리에 감기고 덮여진 채 아슬아슬하게 서있는 모습을 보면 인간의 모든 영화가 자연 앞에 얼마나 무력한가를 또한 느끼게 한다.아무튼, 앙코르 문화의 초기인 9세기와 10세기의 건축물에는 벽돌문화가 도입되었고 11세기 초기에 이르러 석조문화로 바뀌게 되는데, 주로 사용된 돌로는 사암(沙岩)과 수성암(水性岩)이었다. 사암은 황토색과 분홍색 등 파스텔 색상의 돌로서 부드러워 조각하기 쉽고 습기에 강하므로 외벽의 정교한 조각을 하는데 많이 애용되었으며, 수성암은 매우 부드럽지만 일단 공기와 접촉하게 되면 매우 단단해 지는 특성이 있으므로, 기초나 장식이 필요치 않은 부분에 사용되었다.
12세기 초반에 이르러서는 이 위에 목조문화가 첨가됨으로서 보다 완벽하게 예술성이 가미된 구조물을 보여주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당시의 목조 기둥과 장식물들은 모두 사라졌고 그것들을 받치거나 고정했던 구멍들만이 돌 위에 흔적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사암은 이곳으로부터 약 60km 떨어진 프롬끌렌 산으로부터 톤레삽 호수에 뗏목을 띄워 운반하였고, 평지에서는 통나무를 바퀴 삼아 코끼리로 하여금 끌어 운반하여 현장에서 가공하여 축조해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사암의 조형물과 건축물에는 일절의 접착제를 사용하지 않은 것이 특징인데, 사암의 조형물 중 걸작은 자야바르만 7세에 의해 지어진 바이욘 사원으로서, 1281년에 완공된 불교사원을 들 수 있다. 이 사원은 우주의 중심이라는 의미로 지어진 것으로 앙코르톰의 각 변에서 정확히 1.5km 지점의 정 중앙에 주 탑이 세워졌다. 처음에는 54개의 주탑(主塔)이 있었으나 현재는 37개만이 남아있다. 특이한 점은 하나의 거대한 완성품을 위해 쌓아진 돌의 규격이 모두 틀리다는 점이다.
돌들은 접착제 없이 모두 지그재그로 쌓아져 있는데, 돌과 돌 사이에 원래는 면도날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정확하고 정교하게 조립되었고, 그 후에 조각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교하게 쌓았었다는 증거는 역사적인 연대가 이를 증명한다. 만일 틈이 있었다면 그 틈으로 빗물이 스며들고 공기가 들어가게 됨으로써, 따라서 자연히 이끼가 끼고 벌레가 들어가며 그렇게 되면 자연히 그 틈이 더욱 벌어지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800여년 이라는 세월동안 이렇게 남아있을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주탑(主塔)으로 오르는 계단들은 무척 가파르고 보폭이 좁게 건축되어 있는데, 이것은 사람이 오르내리게 하기 위한 계단이 아니라 신을 모시는 계단이라는 의미로서 신을 연결하는 계단이라는 의미로 설계된 것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얼듯 보면 힌두교의 신들의 조각들처럼 보이는 커다란 바이욘사원이 불교사원이라는 것은 다시말하면 앙코르의 유적은 불교와 힌두교, 또는 반대로 힌두교에 불교가 가미된 그러한 믹스된 종교의 색채를 띠고 있는 것이 또 하나의 특징이라 할 수 있고, 이것은 거의 모든 앙코르의 유적들에서 공통으로 발견된다.
아무튼 앙코르의 유적 중 자야바르만 7세의 40년 재임기간 중 가장 많은 불교사원이 지어지게 되었다.앙코르톰의 남문을 나와 1.5km를 내려가면 앙코르의 유적 중 가장 거대한 유적, 세계적인 불가사의라 불리는 앙코르와트에 다다르게 된다.
이것은 1113년부터 1150년까지 37년간 수리야바르만 2세에 의해 조성되었다. 당시에는 사원이나 궁전을 조성할 때는 풍수지리적인 방향을 무척 까다롭게 따져보았는데, 동쪽은 창조를 뜻하고 서쪽은 죽음을 의미하며, 남쪽은 자연을 나타내고 북쪽은 희망을 상징했다.
북쪽이 희망을 상징하는 이유는, 당시 앙코르의 숭앙의 대상이 되었던 시바신이 살고 있는 곳이 히말라야의 최고봉인 칼리아사 산(우리말로는 수미산이라 한다)이고, 이 영산은 캄보디아를 기점으로 북쪽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모든 사원은 창조나 자연을 나타내는 동쪽 혹은 남쪽으로 정문을 내는 것이 관례화 되어있었지만, 앙코르와트는 유일하게 죽음을 나타내는 서쪽에 정문을 냈다는 것은 무척 인상적이다. 이것은 당시 왕의 권위를 단적으로 엿볼 수 있는 것으로서, 왕은 신과 동격이었고 신으로 불리었으며, 죽어서도 왕이고 싶은 사후의 사원으로 조성하기 위한 왕의 기원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왕의 이름 수리야바르만을 보면, 수리야는 힌두교의 태양신 ‘수르야’를 바르만은 ‘나중의 보호자’라는 의미로서, 당시의 왕은 자신의 이름대신 수리야바르만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신격화된 절대 왕권을 과시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본전으로 들어가는 서쪽 정문으로만 유일하게 석조의 다리를 놓은 것이 앙코르와트의 또 하나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다리의 전면 양쪽으로는 석가모니가 그 아래서 득도했다는 뜻의 상징적인 보리수가 두 그루 놓여 있다.
사실 이 사원은 원래 힌두 사원으로서, 힌두교의 신 비슈누와 자신의 합일을 기원하기 위해 지어진 힌두 사원이었으나, 후세에 이르러 불교도가 이 신상들을 파괴하고 불상을 모시게 됨으로서 얼핏 보면 힌두 사원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전체적인 건축양식과 부조, 그리고 건물을 치장한 장식들은 완벽한 힌두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깥벽은 동서 1,500 m 남북 1,300 m의 직사각형으로 웅장한 규모이며 정면은 서쪽을 향한다. 바깥벽 안쪽에서 육교로 너비 190 m의 해자를 건너면 3개의 탑(塔)과 함께 날개모양의 회랑이 있으며, 여기서 돌을 깔아놓은 길을 따라 470 m쯤 가면 사원의 본전에 다다르게 된다. 사원의 주요 건축물은 웅대한 방추형 중앙사당탑(中央祠堂塔)과 탑의 동서남북에 십자형으로 뻗은 익랑, 그것을 둘러싼 3중의 회랑과 회랑의 네 모서리에 우뚝 솟은 거대한 탑으로 이루어졌는데, 구성은 입체적이고 중앙은 약간 높다. 회랑의 높이는 제1회랑(215×187 m)이 4m, 제2회랑(115×100 m)이 12m, 제3회랑(60×60 m)이 25m이다. 세계의 중심이며 신들의 자리를 뜻하는 수미산(須彌山), 즉 시바의 산 카일라사는 돌을 사용하여 인공적으로 쌓아놓았으며, 높이 59 m의 중앙 사당탑의 탑 끝에서 3중으로 둘러싼 회랑의 사각탑 끝은 선으로 연결해보면 사각추의 피라미드 모양이 된다.
이 사원의 뛰어난 건축양식은 얼핏 보면 인도의 영향을 받아들여 지어진 듯이 보이지만 건물의 형태나 석조장식 등 모든 면에서 앙코르왕조의 독자적인 양식을 지니고 있다. 특히 전장 760 m에 이르는 제1회랑 벽의 부조, 제2회랑 안의 돌로 조형한 샘물, 제3회랑 내부의 화려한 십자형 주랑과 탑 등은 뛰어난 구조물이다. 조형에서는 하늘의 무희 압사라와 여러 개의 머리를 마치 부채처럼 치켜든 커다란 코브라, 그리고 마치 주판알을 붙여 놓은 듯 한 창문 기둥의 장식조각 등이 돋보인다. 그러나 이곳은 1972년부터 외부인에게 폐쇄된 이후 낮이면 베트남군, 밤에는 폴포트의 크메르루주 게릴라가 번갈아 장악하면서 약탈로 인해 훼손되어 수많은 불상이 조각 난 채 나뒹굴고 나중에는 외국으로 밀반출 되어버렸다. 82년 집계에 의하면 앙코르와트의 중요 유물 30점 이상이 없어졌고, 전체 유적의 70 %가 복원불능의 상태로 파괴되었으며, 사원 근처 왕궁의 유물 약 1,000점이 도난 혹은 파괴되었다고 한다. 1995년부터 인도의 건축가들에 의해 부분적으로 복원되었으며, 현재는 유네스코에서 모든 유적을 관리하고 있다.
사실 캄보디아의 국민들은 주변의 어느 나라보다도 암울하고 뼈아픈 상처를 가진 민족이라 볼 수 있다. 1956년 프랑스에서 독립한 캄보디아는 식민지시절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미처 찾아 정비하기도 전인 1970년 미국의 지원을 받아 쿠테타를 일으킨 론놀의 치하에 들어가게 되엇다.
당시 캄보디아를 통치하던 시하누크는 중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시하누크는 사이는 별로 좋지 않았지만 론놀을 몰아내기 위해 크메르루주의 폴포트와 손을 잡게 된다. 하지만 시하누크는 외국에 있고 캄보디아에 있는 그의 추종자들은 주공의 명에 따라 폴포트에 적극 협조함으로서 궁극적으로 75년에 론놀을 축출하는데는 성공하였으나 자연히 실권은 폴포트의 수중에 넘어가게 되었고, 시하누크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 해졌다. ‘루주’는 붉은 색을 의미하므로 크메르루주는 붉은 크메르군이라는 뜻이 된다.
아무튼 정권을 장악한 폴포트는 캄보디아를 명실 공히 자신의 수중에서 완벽하게 장악하기 위해 지식인들을 비롯한 양민을 학살하기 시작하여, 이른바 킬링필드라 불리는 시절 150만명이라는 사람들이 홀로코스트로 사라져갔다.
단 한마디의 영어를 구사할 줄 안다는 이유로, 혹은 단지 안경을 쓴 모습이 지식인처럼 보인다는 이유만으로도 예외없이 죽어갔다. 이를 보다 못한 시하누크는 이번에는 하는 수없이 베트남의 호치민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었고, 호치민은 이를 수락하여 월맹군을 급파하여 크메르루주와 대항하게 되었다.
1979년 결국 폴포트의 군대는 북쪽 정글 속으로 물러나고 캄보디아는 베트남에 의해 해방되었으나, 이번에는 월맹군이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20년 가까이 섭정을 하게 되었다.
1986년 유엔의 개입으로 월맹군은 본국으로 돌아갔지만 오랜 내전과 많은 지식인의 학살로 생활은 궁핍할 때로 궁핍해지고 비참한 생활이 계속되게 되었다.
1993년부터 관광이 개방되고 외국의 자본이 유입되면서, 실낱같은 희망이 결실을 맺어가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아직도 곳곳에는 월맹군에 의해 매설된 수많은 지뢰로 인해 많은 농민과 아이들이 장애자로 바뀌고 있으며, 그 광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깊은 한숨을 짓게 한다. 아직도 이들의 전쟁은 완전히 끝나지 않은 것이다. 지금도 이곳의 아동병원이나 사원들의 입구에는 이러한 지뢰에 희생되어 팔과 다리를 잃은 아이들의 불쌍한 모습이 눈에 띄어 가슴을 메이게 한다.
<글·사진/레포츠365·KBC여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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