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두산공원에서 내려와서 대각사(大覺寺)로 갔다. 대각사(주소-중구 광복중앙로 19(구 주소는 신창동 1가 17번지)는 초량왜관 시절 서관의 3대청 중 중대청(참판옥)으로 일본에서 온 사절단이 머무는 숙소였다. 부산항 개항(1876년) 이후 한국과 일본의 교류가 형성되면서 일본이 우리나라에 지은 최초의 사찰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끌고 있다. 1887년에 세워진 대각사의 원래 명칭은 ‘동본원사’였으며 사찰 역할 외 일본 영사관 구실도 했다.
당시 이곳은 바닷가로 이 지역에서는 유일한 막사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일제의 정책에 의해 1894년(고종 31) 일본 히가시혼간사[東本願寺]의 부산별원(釜山別院)으로 창건되었다. 당시 일본 불교계에 ‘정토진종’이라는 종파가 있었는데 절을 지을 때 늘 동본원사와 서본원사 2개를 짓는데 대각사가 바로 ‘동본원사’였다는 것이다.
동본원사는 개화승 이동인의 밀항을 돕고 10개월간 체류하면서 메이지유신에 성공한 일본의 발전상을 소상하게 살피게 도와주었고 개화사상가 서재필, 박영효, 유대치 등이 숙박한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인법당만 두었으나 뒤에 학교와 병원을 함께 세웠다고 한다. 광복 후 국유였다가 매각 받아 불교 경남 교무원이 되었고 현재 대각사로 불린다. 이후 1950년 6·25전쟁 때 불에 탔으며, 전쟁 중에는 동국대가 들어서기도 했었다. 1954년 이후 수년간 비구, 대처 분쟁에 휘말렸고 그 와중에 1959년 4월 23일 큰 화재가 나는 등 불행한 일도 있었다.
1969년 창건주이자 3대 원장인 김경우(鏡牛) 스님이 건평 3,300여 평의 큰 법당을 건립하고 고려 말에 제작한 삼존불상을 모시면서 대찰의 면모를 갖추었다. 큰 법당은 한꺼번에 3,0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국내 최대 규모의 콘크리트 단층 법당이며, 불교회관 등의 부대시설을 이용하여 다각적인 포교활동을 벌이고 있다.
1970년에는 세계고승 대회를 개최, 1982년 3월 타이완[臺灣]과 타이의 불교 지도자들을 초대하여 국제보살계 대법회를 열었다고 한다. 6·10항쟁 때는 남포동과 더불어 민주 항쟁의 중심이기도 했다.
법당 옆에는 가늘게 높이 치솟은 구층 석탑이 있다. 법당 모서리, 대웅전 추녀마루 끝자락에 있는 이 석탑은 경북 칠곡군 송림사(松林寺)에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이 석탑 안에는 역시 지난 1982년 태국의 불교 지도자가 기증한 부처 사리가 모셔져 있다.
이 외에도 이곳에는 유물로 대장경 3질, 신라 토기 10여 점, 패엽경(貝葉經) 등이 전하는데 이 중 패엽경은 바나나 잎 껍질에 불경을 베낀 것으로 <구사론(俱舍論)> 27매, <열반경> 27매이다. 각각 길이 80cm, 너비 10cm이며 1982년 태국의 불교 지도자가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이 밖에 석등과 범종, 지석 3기 등이 전한다.
대웅전 앞 왼쪽 모퉁이에 범종(梵鐘)이 있다. 매일 저녁이면 저녁 예불을 올리는 타종이 이루어지는 그 범종이다. 이 종에는 ‘명치유신 23년에 주종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종신 왼쪽으로 비천상이 있고 그 아래에는 용이 새겨져 있다. 나머지 3면에는 글이 새겨져 있다. 유곽 안에는 ‘유두’라고 불리는 젖꼭지 모양의 돌기가 25개씩 있다.
이곳은 영화 ‘달마야 놀자’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맞은편엔 동주여상이 있는데 운동장 없는 학교라고 한다. 그 뒤로 용두산공원의 부산타워가 보였다.
중구 대청동에 있는 부산근대역사관으로 갔다. 이곳도 여행 왔다가 둘러봤던 곳이다. 부산근대역사관은 옛 동양 척식회사 부산지점이었다가 1945년 광복 이후 미군의 주둔지였다가 1949년 7월부터 부산 미 문화원으로 사용되었다. 1982년 미 문화원 방화사건, 1989년 5·3사태 동의대 학생 방화사건 시 민주 항쟁의 중심이 되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1996년 10월 미연방 정부에 의해 부산 미 문화원이 철수되고 부산민학회를 비롯한 뜻있는 시민단체들에 의해 ‘부산 아메리카 센터 건물 반환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여 1999년 부산시 기념물 제49호로 지정되기에 이른다. 2003년 7월 3일 부산근대역사관으로 개관하였다.
이곳엔 부산의 근대역사를 한눈에 조명할 수 있는 유물을 비롯, 영상물, 모형물이 2층과 3층에 전시되어있다. 2층 제2전시실엔 부산의 근대 개항, 일제의 부산 수탈, 근대도시의 부산 등 3개 주제로, 3층 제3전시실은 동양 척식회사, 근현대 한미관계, 부산의 비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산의 근대 거리, 일제 강점기 대청동 거리 재현. 모형 가게 및 전차 등을 볼 수 있었다.
40계단은 중앙동 4가와 동광동 5가를 연결하는 계단이다. 광복 후 귀환 동포들과 6·25 당시 피난민들이 이 주위에서 판자촌을 이루고 살면서 피난민들은 시중에 흘러나오는 구호물자를 파는 구호 물 난장 터(도떼기시장)를 벌였다. 동란 이후엔 암달러상들이 줄을 지어 판을 벌인 곳으로 유명하다.
40계단은 한국동란 때 유행했던 가수 박재홍의 ‘경상도 아가씨’란 노래 ‘사십 계단 층층대에 앉아 우는 나그네...’로 유명해졌다. 지금 남아있는 40계단은 1953년 11월 27일 영주동 대화재 이후 옮겨진 거라고 한다. 40계단 앞과 북쪽 거리를 ‘기차 거리’와 ‘부두 거리’로 테마 거리를 만들면서 40계단 중간엔 아코디언 아저씨 조형물을 설치했다.
또 그 시절 애환이 서린 뻥튀기 아저씨, 지게꾼 부자, 물동이를 이고 진 소년 소녀, 아기를 업은 엄마 등의 청동 조형물도 볼 수 있다. 나도 기억하는 모습이어서 정겨웠지만 12차 답사는 일제 강점기 시대를 거쳐 6·25 한국전쟁을 거치는 아픈 역사의 현장을 돌아보는 것이어서 내내 착잡한 마음이었다.
첫댓글 일제강점기역사
흔적을 찿아서
많은곳
답사 하셨군요
사진과 글속에서
언니의
세심한 흔적이 보이고요
많은것 얻어갑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유화님~읽어줘서 고마워요~~
우리가 놀던동네 이제는 별로 감흥이 없는 그런 조용한 동네입니다.
대각사는 부마항쟁때 대학생들이 많이 숨어들어서 보호해주던곳이고
또 요즘은 그 근방이 유명한 국제시장이 인접해있어서
사람이 들끓기는 한데 뭔가가 좀 부족한 그런 땅값비싼 동네입니다.
그냥 있는듯 없는듯 살아갑니다..
아...그러시군요~~
저는 모든게 신기하고 재미(?)있습니다~~
부산 곳곳은 어느 한곳도
역사가 없는 장소가 없겠네요
친절한 해설과 사진으로
그피란의 진통이
그려 집니다
대단하신 배꽃언니
수고 많으셨어요 ~
형부도 잘 계시지요 ? ㅎ
그러더라고요.
모습은 많이 바뀌었어도 지니고 있는 이야기는 그대로 남아 있었어요.
남편도 잘지낸답니다.
안부 전해줄게요.
늘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