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관련자료] 고양 일산(一山) 지명은 과연 일제잔재인가?
광복 50주년을 맞이하던 지난 1995년 무렵에 고양 지역 일산(一山)이라는 지명이 일제잔재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몇 건의 기사가 잇달아 신문지상에 등장한 적이 있다. 이러한 영향 탓인지 지금껏 일산 지명 자체가 일제잔재의 범주에 속한다는 논지가 크게 설득력을 얻고 있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① 『한겨레신문』 1995년 2월 13일자, 「일산은 ‘한산’이 제 이름, 고양시, 시내 40여곳 고유지명 찾기 나서」 제하의 기사 :
“해방 50돌을 맞아 ‘일산’ 새도시를 본래의 이름인 ‘한산’으로 바구는 것을 비롯해 고양시의 마을, 학교, 공공시설 등 일본제국주의 시대의 잔재가 남아 있는 땅이름을 우리 고유의 이름으로 복원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 문화원은 ‘일산’의 본디 이름은 ‘나라의 산’을 뜻하는 ‘한산(韓山)’인데 일제가 1905년 경의선을 건설하면서 ‘한 개의 산’이라는 뜻의 ‘일산’으로 의미를 축소해 지명을 바꾼 것으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하략)”
② 『경향신문』 1995년 7월 26일자, 「일본식 개악 땅이름 바로 잡아야, ‘일제에 빼앗긴 …’ 펴낸 김기빈(金琪彬) 씨」 제하의 기사 :
“…… 경기 고양시 일산(一山)의 원지명은 한산(韓山). 그러나 일제가 대한제국과 관련된 ‘韓’이라는 명칭을 쓰지 못하게 함에 따라 일산(一山)으로 바뀌었다. (하략)”
③ 『경향신문』 1995년 8월 27일자, 「고양 분구(分區) 새 명칭은 일제잔재, “옛 우리 이름 되찾자”」 제하의 기사 :
“…… 일산도 1914년 2차 행정구역 개편 때 중면 와야촌을 획수가 간단한 일산으로 변경한 것으로 돼 있다. (하략)”
④ 『동아일보』 1995년 8월 29일자, 「고양 일산(一山)―화정(花井) 일제잔재 명칭)」 제하의 기사 :
“…… 그러나 고양군지에 따르면 화정은 일제가 지난 1910년 8월 전국 1차 행정구역 개편 당시 화수리와 냉정리의 앞뒷자를 따 만든 것이며, 일산은 1914년 2차 행정구역 개편 때 중면 와야촌을 획수가 간단한 일산으로 변경했다는 것이다.”
이보다 앞서 고양문화원에서 펴낸 『고양군지명유래집』 (1991), 453~754쪽을 보면, 일산 지명의 유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는 내용도 눈에 띈다.
2) 덕이 2리(德耳 2里)
덕이 2리는 송포(松浦) 삼거리에서 가죄리 방향으로 이어진 70번 군도로를 따라 약 300m 지점에 위치한 마을의 행정리 명칭으로 마을 앞쪽으로는 대화 4리 성저리마을이 있고, 우측으로는 덕이 6리가 있으며, 좌측으로는 봉배산을 중심으로 덕이국민학교가 위치해 있다. 현재 이 마을은 대부분 농촌지역으로 남아 있는데 이 마을의 자연촌락 지명은 한산(韓山)마을이다. 1989년 통계로 이 마을에는 125가구, 488명이 살고 있다.
⊙ 한산(韓山; 一山)
한산마을은 송포삼거리에서 정면으로 교하면 방향에 있는 마을의 자연촌락 명칭인데, 한강제방뚝이 생기기 전에 능곡의 삼성당(토당 4리), 강매리 사뫼, 일산의 한산이 고양군 지역에서 최초로 사람이 살기 시작한 동네라 하는데 한산마을은 일산 부근에서 하나[一] 밖에 없는 산이라 하여 일산(一山), 한산이라는 지명을 붙였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식민지시대 경의선 철도가 건설되어 철길 안쪽, 지금의 일산을 일산(一山)이라 칭하여 그 이름을 빼앗고 이 마을을 일방적으로 행정개편하여 한산이라고 명명한 후 현재의 한산마을로 지역을 축소하였다고 한다.
또 『고양군지(高陽郡誌)』를 보면 이곳은 본래 한씨(韓氏) 집안의 산이었기 때문에 한산(韓山)이라고 부르다가 山을 우리말로 하여 ‘한(韓)뫼’ 또는 ‘한(韓)메’라고도 불렀다 한다. 그리고 그것이 변하여 할미가 되었다는 것이다. 또 조선 영조(朝鮮 英祖) 때의 『고양군지』에는 한산촌(寒山村)이라는 지명이 나오는 바 원래 이곳의 한자 표기는 한산(寒山)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렇다면 일산 지명이 일제잔재라는 논제는 어디까지가 사실이며, 과연 어떻게 이 관계를 증명할 수 있을 것인가? 여기에서는 이에 관한 궁금증을 풀기위해 입증이 가능한 구체적인 사료에 근거하여 그 내용을 하나씩 점검하여 추적해보기로 한다.
무엇보다도 고양 일산(一山)의 지명유래에 관한 가장 이른 시기의 흔적으로는 『고양군읍지(高陽郡邑誌)』 (1755)의 ‘송산면(松山面)’ 대목에 포함된 기록이 있다. 여기에는 이 지역의 ‘이명(里名)’으로 덕이리동(德耳里洞)에 속한 한산촌(寒山村)의 존재가 채록되어 있으며, 또한 동일한 자료에 ‘총묘(塚墓, 송산면)’ 항목을 보면 ‘유대정 참판(俞大禎 參判)의 묘’가 덕이 한산(德耳 寒山)에 있다고 적어놓은 구절도 있다.
그런데 근대시기에 이르러 조선총독부가 펴낸 『조선철도사 제1권』 (1929)에 수록된 「군용철도 경의선 건설공구약도(軍用鐵道 京義線 建設工區略圖)」에는 제1착수 구역[46.5마일; 기공(起工) 명치 37년(1904년) 3월 12일, 준공(竣工) 명치 38년(1905년) 2월 15일]에 ‘일산정거장(一山停車場; 일산역)’이 표시되어 있는 바 이를 통해 ‘일산’이라는 지명이 이 시기부터 크게 두드러지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이 시기에 설정된 일산정거장의 위치는 “고양군 중면 와동(瓦洞)”에 해당하는 곳이므로 “송산면 덕이리동 한산촌(즉, 덕이일산리)”과는 지리적으로 딱 일치하는 자리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정거장의 실제 위치와 정거장 명칭의 불일치는 가령 용산정거장(용산역)이나 뚝섬정거장(왕십리역)과 같은 사례에서도 흔히 발견되는 현상이기도 하다.
일제가 이곳의 정거장에 대해 ‘일산(一山, いちさん)’이라고 명명한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제기되고 있으나, 덕이 한산(德耳 寒山)에서 따온 것이라는 점은 대체로 수긍이 되는 부분이 아닌가 한다. 하지만 이 경우 ‘한산’이 ‘일산’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일제의 인위적인 소행이 있었는지의 여부는 불분명하며, 그 대신 “송산면 덕이 한산촌” 지역에 이미 ‘일산리(一山里)’라는 지명이 통용되고 있던 흔적이 보이므로 이를 그대로 정거장의 이름으로 채용하여 붙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하겠다. 참고로, 고양군 원당리 지역에 ‘일정(一井)’이란 곳이 있는데,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간행연도미상)에 따르면 이곳은 우리말로 ‘한움물’로 표기되므로 ‘일’과 ‘한’은 서로 넘나드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이 무렵에 이미 ‘일산리’라는 지명이 존재했던 흔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자료들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① 1905년 10월 5일 이봉래 내부대신서리 내부협판의 조회문(고양군 정거장 역소의 통사 이갑이(通辭 李甲伊)의 해고 및 논죄를 청하는 조회), 『내부래거문(內部來去文)』 (각사등록 근대편 자료)에 “고양군 일산리철도정거장 역소(高陽郡 一山里鐵道停車場 役所)”라는 표현이 거듭하여 등장한다.
② 『대한매일신보』 1905년 10월 13일자에 수록된 「행패의징(行悖宜懲)」 제하의 기사에 “고양 일산리철도정거장 역소”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③ 1906년 8월 29일 의정부 참정대신 박제순의 훈령(고양군수에게 통감부 군사령부원이 경기도 일산리 부근 측도를 시행할 것임을 훈령), 『각관찰도(거래)안』 (각사등록 근대편 자료)에 “…… 경기도 일산리(一山里; 고양 서방의 서남 약 4리) 부근에서 측도를 시행할 터이오니 (하략)”라는 구절이 있다.
④ 1906년 9월 15일 고양군수 박주헌의 보고서(일산 근처에서 일본군의 측도과정을 보고), 『각관찰도(거래)안』 (각사등록 근대편 자료)에 “…… 경기도 일산리(一山里) 고양 서방에 서남 약 4리 부근에서 측도를 시행할 터이오니 …… 본군 일산정거장 후산하와 설군막어해산상하옵고 (하략)”라는 구절이 있다.
⑤ 『황성신문』 1908년 7월 25일자, 「지방소식일통(地方消息一通)」 제하의 기사에 “본월 16일 고양분견대(高陽分遣隊)에서 출(出)한 일병(日兵)이 헌병보조원(憲兵補助員) 1명과 일산리(一山里) 서남방(西南方)에서 폭도(暴徒) 3명을 생금(生擒)하였다 하고”라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⑥ 『대한매일신보』 1908년 7월 26일자(국문판), 「지방정형」 제하의 기사에 “본월 16일 고양군 일산리에서 의병 3명이 일 척후병 3명과 일 헌병 1명으로 충돌하였다 하고”라는 내용이 남아 있다.
⑦ 『대한매일신보』 1908년 7월 31일자(국한문판), 「지방소식」 제하의 기사에 “본월 21일 고양군 일산리(壹山里) 서방에서 의병 5명이 해군 분견대병 9명과 충돌하였다 하고”라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⑧ 『황성신문』 1908년 7월 31일자(국한문판), 「지방소식일통(地方消息一通)」 제하의 기사에 “본월 21일에 고양분견대(高陽分遣隊)가 병졸(兵卒) 9명과 보조원(補助員) 1명의 척후(斥候)를 파출(泒出)하여 일산리 서방(一山里 西方)에서 폭도(暴徒) 5명을 살(殺)하였다 하고”라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⑨ 『황성신문』 1908년 11월 11일자, 「목씨 호소(睦氏 呼訴)」 제하의 기사에 “고양군 송산면 덕위일산리 부근(高陽郡 松山面 德威一山里 附近)에 재한 경우궁 소속전토(景祐宮 所屬田土)는 …… (운운)”이라는 내용이 남아 있다.
⑩ 『대한매일신보』 1908년 11월 11일자(국문판), 「작인등소」 제하의 기사에 “경우궁 소관되는 전답이 고양군 송산면 덕위 일산리에 있는데 …… (운운)”이라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⑪ 『대한매일신보』 1908년 11월 11일자(국한문판), 「궁토작인등소(宮土作人等訴)」 제하의 기사에 “경우궁 소속전답(景祐宮 所屬田畓)이 고양군 송산면 덕위 일산리(高陽郡 松山面 德威壹山里 )에 재(在)한데…… (운운)”이라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이밖에 특히 조선총독부가 토지조사사업을 시행하면서 편찬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간행시기미상)를 보면, ‘일산리’와 ‘일산역’의 위치가 각각 달리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채록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즉, ‘일산리(一山里)’는 소재지가 고양군 송산면 덕평동(高陽郡 松山面 德平洞; 덕이동의 오류일 가능성도 있음)에 속하며, ‘일산역(一山驛)’과 ‘일산시장(一山市場)’은 소재지가 고양군 중면 와동(高陽郡 中面 瓦洞)‘의 항목에 배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조선지지자료』에 수록된 ‘일산(一山)’ 관련 지명 용례
종별(種別) | 지명(地名) | 언문(諺文, 한글) | 비고(備攷) |
촌리명(村里名) | 와동(瓦洞) | - | 고양군 중면 와동 |
역명 | 일산역(一山驛) | - | 고양군 중면 와동 |
시장명 | 일산시장(一山市場) | - | 고양군 중면 와동 |
촌명(村名) | 일산리(一山里) | - | 고양군 송산면 덕평동 |
그런데 『조선총독부관보』 1915년 11월 13일자에 게재된 ‘조선총독부 경기도 고시 제54호’ 「고양군 면내 동리(高陽郡 面內 洞里)의 명칭(名稱) 및 구역(區域)」 (1915년 10월 28일 제정)에는 이때에 이르러 ‘고양군 중면 와동(瓦洞)’이 ‘일산리(一山里)’로 개편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일산역의 위치와 일산리의 원소재지 사이의 지리적 편차와 지명의 불일치 현상을 해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신시가지로 변한 일산역 주변 일대의 지명을 ‘일산리(옆 동네에서 가져온 이름)’로 고쳐 부른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보다 앞서 발행된 『고양 (오만분일 지형도)』 (1911년 측도, 1913년 발행) 및 『통진 (오만분일 지형도)』 (1911년 측도, 1913년 발행)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에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이전의 상황이 묘사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여기에는 ‘일산역’의 소재지에 ‘와동(瓦洞; 고양군 중면)’이 표시되어 있고 이와는 별개로 덕이리(德耳里) 쪽에 ‘일산리(一山里; 고양군 송산면)’의 표시가 또렷이 남아 있는 것이 드러난다.
이 말은 곧 ‘일산역’ 소재지역이 ‘일산리’로 개칭된 것과는 별개로 이미 원래부터 ‘일산리’였던 곳이 따로 존재했었다는 얘기인 동시에 ‘일산정거장’이라는 명칭 역시 일제에 의해 급작스레 창안된 것이 아니라 기존의 ‘일산리’에서 빌려온 결과물이라고 해석할 여지를 만들어준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부분에 있어서는 1904년 경의철도의 부설공사와 함께 일산정거장이 등장하기 이전 시기부터 ‘일산리’의 존재를 확실하고 명쾌하게 입증할 수 있는 별개 자료의 제시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고 하겠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일산이라는 지명 자체는 ‘친일잔재’라는 의구심의 대상에서 말끔히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종류의 입증자료는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간신히 딱 하나 찾아낸 관련자료는 바로 일본의 육지측량부(陸地測量部)에서 펴낸 『통진읍내(通津邑內, 한성 6호) 오만분일 조선약도(朝鮮略圖)』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자료]이다. 이 지도에는 ‘덕이동(德耳洞)’은 물론이고 이에 속한 ‘일산리(一山里)’의 흔적이 또렷이 채록되어 있다. 이 자료의 발행일은 “1911년(명치 44년) 7월 15일”로 표시되어 있으나, 여기에 담고 있는 내용은 “1895년”의 상황이 반영된 것으로 알려진다. (*) 이 자료는 남영우 편저,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舊韓末 韓半島 地形圖) (전4권)』 (성지문화사, 1997)에도 포함되어 있다.
실제로 이 지도의 여백에는 “본도(本圖)는 약측도(略測圖) 목산측도(目算測圖) 등(等)의 집성(輯成)에 의한 것으로 목하 시행중(目下 施行中)인 오만분일도(五萬分一圖)가 완성(完成)되면 폐지(廢止)하는 것으로 함”이라는 표시가 함께 인쇄되어 있다. 또한 이 지도와 한묶음으로 구성되어 있는 『과천(果川, 한성 4호) 오만분일 조선약도(朝鮮略圖)』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자료]의 경우를 살펴보면, 이 지도상에 경부철도 또는 경인철도가 지나는 것이 확실한 ‘안양촌(安陽村; 安養의 오류)’이나 ‘구로(九老)’와 ‘오류동(梧柳洞)’ 지역에 아무런 철도 표시가 없는 것으로 보아 지도제작을 위한 측량 자체가 최소한 경인선 철도의 부설 이전 시기에 이뤄졌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것만이 아니라 『고양(高陽, 한성 2호) 오만분일 조선약도(朝鮮略圖)』(성지문화사 발행자료)를 살펴보면 고양군 중면 지역에 ‘와동(瓦洞)’이라는 표시가 두 곳이나 등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나, 무엇보다도 이 지도상 그 어디에도 철도가 지나다니는 흔적을 전혀 발견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1895년의 상황이 반영”되어 있는 『통진읍내 오만분일 조선약도』에 ‘일산리’의 존재가 포착되어 있다는 것은 경의선 철도가 부설되기 훨씬 이전부터 이미 ‘일산리’가 있었다는 것이고, 이 말은 다시 ‘일산정거장’에 부여된 ‘일산’이라는 지명은 일제의 창안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확실한 흔적인 셈이다.
요컨대, 이러한 객관적 사료들을 바탕으로 하여 살펴본 바에 따르면 대략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관계의 정리가 가능하다.
1) 1904년 경의선철도가 부설되면서 ‘일산정거장’이 설정될 당시에 이미 ‘일산리’는 존재하고 있었다. 이 정거장은 그 위치가 ‘중면 와동’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접지에 자리한 ‘송산면 일산리(덕이리에 속한 자연마을)’의 지명을 따서 ‘일산정거장(일산역)’으로 명명하였다. 이 과정에서 ‘한산’이었던 것을 일제가 인위적으로 ‘일산’으로 변경했다거나 하는 정황이나 사실관계는 입증되지 않는다.
2) 1914년에 이르러 일제가 전국적인 행정구역개편을 실시하는 와중에 정거장 명칭(일산)과 소재지 명칭(와동)의 불일치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이곳을 아예 ‘일산리’로 개칭하였다. 이때 송산면에 있던 기존의 일산리는 ‘송포면(송산리+사포면) 덕이리’에 속한 자연마을이었으므로 별도의 행정구역명칭 변경대상 목록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3) 이러한 관계로 살펴보면 ‘일산역’ 때문에 ‘일산리’가 생겨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존재하던 ‘일산리’라는 지명에서 따서 ‘일산정거장’의 명칭이 만들어진 것이라고 보는 쪽이 훨씬 더 타당한 결론인 듯하다. 더구나 애당초 ‘한산’과 ‘일산’은 옛 지명의 음가표기상 관례에 따라 서로 넘나드는 개념이기도 하고, 실제로 경의철도 부설 이전 시기에 측도(測圖)가 이뤄진 지도자료에 ‘일산리’라는 표기가 명확하게 채록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결국 현재까지 드러난 사료들을 종합하면, 고양 일산(一山) 지명은 일제잔재의 범주와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판단된다.
(*) 이 글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수행하고 경기도 고양시에 제출한 『일제잔재 청산 지원 추진계획수립 연구용역 결과보고서』 (2022.11.29)에 수록한 내용의 일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