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곳간/이미경
1.곳간은 넉넉하면 넉넉할수록 좋지 않은가. 필요 없는 것들은 버리라고 엄마에게 잔소리해 대었는데 곳간에는 엄마에게는 다 소중한 물건만 있었다. 내가 보기 불편하다는 이유로 엄마가 싫다는데도 이렇게 정리하고 있으니 난 엄마를 잘 모르는 딸 임에 틀림이 없다.
2.옷장 정리를 한다. 정리문제로 엄마와 나는 여러 번 실랑이했던 터였다. 그때마다 엄마는 손을 대지도 못하게 하셨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는 물건은 버리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이를 먹으면 가벼워져야 하거늘 엄마는 거꾸로 가는 것 같다. 작은 것 하나도 버리지 못하게 한다. 재차 말했더니 마지못해 반승낙이다. 그러면서도 마음이 안 놓이는지 따라온다.
3.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다. 옷이 많아도 너무 많다. 옷걸이의 옷들은 꽉 끼어 움직이지 않고 바닥은 켜켜이 개어 놓은 옷들로 몇 개의 봉峰을 이루고 있다. 엄마가 이 옷을 다 기억이나 할까? 수술을 앞둔 의사처럼 진지하게 바닥에 있는 옷들을 꺼낸다. 마구 엉켜 엉망일 줄 알았는데 잘 개어져 있다.
4.엄마의 꽃무늬 롱 드레스가 보인다. 이 옷을 마지막으로 입었던 때가 엄마 나이 칠십 대 중반이었으니 15년 전 일이다. 그때 엄마는 뇌졸중으로 쓰려졌고 왼쪽 팔다리가 마비되었다. 그 후로 엄마는 치마를 입지 않는다.
5.어린 시절 동생들과 숨바꼭질할 때면 옷장부터 열었다. 집안에는 딱히 숨을 만한 곳이 없었다. 커튼 뒤거나 방에 깔린 이불속 정도였다. 그래서 제일 먼저 숨던 곳이 옷장이었다. 숨는 곳이 늘 뻔했지만 나보다 어린 동생들은 찾지 못하는 날도 있었다.
6.이상하게 엄마의 옷장 안은 참 편안했다. 옷에서 나는 엄마의 체취를 맡고 있으면 어두운 공간이라도 무섭지 않았다. 그래서 가끔 숨바꼭질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동생의 ‘못 찾겠다.’ 소리에도 한참을 그곳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혼자 집을 보다가 밖에서 무서운 소리가 들리면 나도 모르게 옷장 속으로 숨어들었다.
7.낯익은 스웨터도 보인다. 첫 아이를 낳고 친정에 갔을 때 엄마가 사준 분홍색 앙고라 스웨터다. 버리려고 다른 곳으로 옮기는데 엄마가 못 버리게 한다. 이 옷에서 내 심성을 본단다. 내가 동생들 생각해서 옷을 두고 갔다고 생각하신 모양이다.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는 엄마의 눈먼 사랑 앞에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
8.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은 대부분 면 티셔츠를 많이 입는다. 활동하기도 좋지만, 아이의 연한 살결을 스쳐도 괜찮기 때문이다. 오 남매나 키운 엄마도 그것을 모를 리 없건만 당신 딸이 면 티셔츠만 입고 다니는 게 초라해 보였던지 한달음에 달려가서 사다 주었다. 앙고라 스웨터는 예뻤지만 털 빠짐이 심했다. 아이 입이나 호흡기로 들어갈 것 같았다. 그래서 동생에게 입으라 하고 두고 온 옷이다. 까마득하게 잊었던 추억이 엄마의 옷장을 딛고 죄스러움으로 다가온다.
9.엄마의 옷장에 들어 있던 것은 옷뿐만이 아니다. 둘째 동생이 중학교 다닐 땐 짠 방석 커버도 있다. 손재주가 별로 없었던 동생은 숙제인 방석 카버를 짜다가 그냥 잠이 들었다. 어머니께서 밤새워 짠 덕분에 A+을 받았다. 펄쩍펄쩍 뛰며 해맑게 웃던 동생 모습이 비디오를 보는 것처럼 또렷하다며 엄마가 환하게 웃으신다.
10.옷을 정리하면 할수록 잊고 있었던 추억이 줄줄이 불려 나온다. 셋째 동생이 입었던 물방울무늬 원피스는 재봉틀을 사고 엄마가 시험 삼아 만든 원피스이다. 편안하고 예쁘다며 서로 입겠다고 싸우는 바람에 엄마가 힘들었다고 털어놓으신다.
11.막내가 장가갈 때 입었던 한복도 보자기에 싸여 다소곳하게 농 한쪽을 자리 잡고 있다. 입을 일 없다면 결혼식 날 하루 입고 엄마 옷장 안에 두고 간 옷이다. 큰맘 먹고 해준 옷인데 가져가지 않아 서운했노라 고백하신다. 옷에 얽힌 이야기를 하는 엄마 표정이 가을 같다. 단풍처럼 다채롭기도 하고 낙엽처럼 쓸쓸하기도 하다.
12.젊어서부터 엄마는 옷 사는 것을 좋아했다. 옷은 엄마의 자신감이고 자존감이었다. 패션 감각이 남달랐던 엄마는 싸면서도 어울리는 옷을 샀다. 오 남매의 뒤치다꺼리에서 벗어나 외출할 때면 동네 여자들은 어쩜 저리 옷을 잘 입느냐고 칭찬했다. 그때도 엄마의 옷장은 지금처럼 복잡하지 않았다. 유행이 지났거나 맞지 않는 옷은 즉시 버렸다. 엄마는 언제부터 옷장에 옷을 쌓아 두기 시작했을까? 아마도 15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져 누구의 도움 없이는 외출이 힘들어지면서 엄마는 옷을 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옷장 정리를 멈춘다.
13.내가 옷을 꺼내며 추억을 소환한 것처럼 엄마도 외로울 때면 옷장을 열어 옷을 꺼내 빨고 말리며 녹슬어 가는 추억을 닦아 비추었으리라. 엄마에게 옷장은 우리 이야기와 엄마의 삶이 고스란히 살아 있는 추억의 곳간이었다. 그동안 엄마는 곳간과 소통하고 있었다.
14.나이를 먹으면 추억을 먹고 산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버리려고 분류해 놓은 옷을 다시 개어 옷장에 넣고 문을 조심스럽게 닫는다. 이제는 틈나는 대로 친정에 와서 엄마와 함께 옷장을 열고 엄마만 아는 옷의 전설도 들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