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전의 전개(연천 - 철원 병참선 확보)
제 4 절 연천 - 철원 병참선 확보
1. 개요
미 제1군단은 미 제10군단이 하계제한 공격작전으로 해안분지를 확보하고 방어선을 개선하는 한편, 그 마무리 단계로 단장의 능선 전투를 치르고 있을 무렵, 서부에서도 이와 유사한 추계공세를 실시하기로 계획을 수립하고 "특공작전(코맨도 작전)이라 명칭을 붙였다.
이 작전은 당시 한강 하구-문산-연천-철원에 이르는 군단 방어선을 역곡천까지 약 10KM 정도 추진하여 그곳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한다는데에 목적을 두었다. 이 작전의 목표선은 고랑포 동남 임진강 제방-사미천변의 사미천-고왕산-마량산-임진강변 계호동-역곡천 남안의 고지군-281. 395고지-철원북서 중토소-중가산-438고지-한탄천과 남대천의 합류지점 정연리를 연하는선으로 "제임스 타운선"이라 명령하였다.
군단장은 이 작전으로 방어선을 역곡천까지 추진하여 현재 점령 중인 와이오밍선의 방어력을 더욱 튼튼히 하고, 연천-철원 계곡의 병참선을 적의 포병사격이나 관측으로부터 방호하고 아울러 적의 균형을 파괴하고 아군이 정체상태에 빠지는 것을 예방할 수 있다는 등의 전략.전술적 이점을 고려하여 작전을 계획하였다.
2. 작전계획
이 계획은9월 말 군사령관의 승인을 받았으며 미 제1군단의 우익이 돌출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우인접 미 제9군단의 좌익 미 제25사단도 동참하도록 조치를 받았다.
가. 군단 죄익의 임진강을 방어중인 국군 제1사단은 판부리 서쪽 91고지, 146고지 일대(M00N)를 점령 방어하라
나. 영연방 제1사단은 187고지, 고왕리 일대(Foster)와 마량산, 고잔리 일대(Moore)를 점령 방어하라
다. 미 제1기병사단은 늘음고개, 346고지 덕은동 일대(Courson)와 347고지, 갈현리 일대(Craig)를 점령 방어하라. 또한 목표 크레이그를 탈취 후 우인접 미 제3사단의 목표 바틀러 공격을 지원할 준비를 하라.
라. 미 제3사단은 중토동-도밀리, 324고지-덕산리 일대(Butler)와 대마리-281-266-중어성 잃대(Watts)를 점령 방어하라. 바틀러 목표는 북쪽과 남쪽에서 공격하되, 이것이 불가하면 1개 연대를 좌인접 제1기병사단 지역으로 기동시켜 서쪽에서 공격하라
그리고 미 제25사단은 좌전방 터키여단으로 하여금 김화-평강 사이의 중간지점까지 전진하여 방어진지를 편성하도록 지시하였다.
*395 백마고지 제임스타운선
역곡천
Watts
*234
불모고지 철원
*275 Butler 제7연
제65연
제15연
임진강 Craig 미 제3사단 = 미 제25사단(터키여단)
제7기병
Coursen
제5-3대대 제8연대
고왕산
*355 Moore 제5연대(-)
사미천 Foster 캐나다 제25여단
영제28여단 미 제1기병사단
Moon
임진강 국제1-15-2대대
국제1-12연대
한편 미 제1군단의 전방에는 좌로부터 중공군 제19병단 예하 제65군과 제64군이 임진강 연안에 배치되었으며, 역곡천 일대에는 제47군과 대치중이었고,철원-김화 전방에는 제42군과 제9병단의 제26군이 평강에 이르는 접근로를 방어하고 있었다. 그리고 예성강 서쪽에는 북한군 제1군단이 배치되어 있었다.
3. 작전 경과
가. 미 제1군단의 제임스 타운선 점령(특공작전)
미 제1군단은 특공작전은 10월 3일 이른 아침 06:00시에 시작되었다.
국군 제1사단은 군단의 좌익에서 임진강상의 주진지를 확보한 가운데 우전방 제15연대가 사미천 서안의 91고지와 146고지를 점령함으로써 군단 목표를 점령하였다.
우익의 제25사단도 터키여단이 경미한 교전끝에 이길리의 372고지를 점령하고 제14연대가 제임스타운선 동단의 정연리 북측 430고지를 접적없이 점령하여 목표선을 확보하였다.
제1기병사단(배속:그리스 대대,타이 대대)은 첫날 좌전방 제5기병연대가 목표 커슨에 이르는 중간목표 222,272,346,267고지 일대에서 적의 강력한 저항에 고전하였고, 우전방 제7기병연대는 제3대대와 그리스 대대, 제2대대를 전방으로 하여 크레이그 목표 저항에 부딪쳐 347고지, 313고지, 418고지를 공격했으나 적의 강력한 저항으로 몇번의 백병전 속에서 탈환하지 못하였다.
제1기병사단 좌익의 영연방 제1사단은 우전방 제28연대가 목표 무어 하단의 고잔하리-199고지를 점령한데 이어 목표 포스터와 무어의 중간 지점까지 진출하였다.
제1기병사단의 우익 미 제3사단은 이미 목표 왓스는 점령한 상황이었으므로 공격의 초점은 바틀러 목표에 모아졌다. 왓스 탈환 임무를 부여받은 중앙의 제7연대는 이미 395고지(후에 백마고지)와 266고지를 확보한 상황에서 공격 초일 수색중대가 중어성 남쪽 도로 교차점까지 점령하여 281고지(후에 화살머리고지)만을 남겨주고 있었다. 우익의 제65연대(-)(배속:필리핀대대)는 철원평야의 284고지와 중가산 일대까지 일부 부대를 추진 배치하여 제임스타운선을 점령하였다. 좌전방제15연대는 목표 바틀러 남쪽 야월산(487)고지를 무혈 점령하고 천덕산(477)을 공격하였다.
공격 이틀째인 10월 5일에도 전선의 상황은 적의 저항으로 큰 변동이 없이 계속하여 많은 피해가 발생하고 있었다.
그러나 10월 5일에는 적의 방어선도 일부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제1기병사단의 우익 중앙에서 313고지를 공겨하던 그리스 대대가 정상에 이르렀을 때에 150구의 시체를 남기고 사라졌다. 우측의 418고지도 무혈입성하였다. 따라서 연대는 마지막 목표인 347고지와 334고지만을 남겨두게 되었다.
한편 영연방 제1사단은 10월 4일 중앙의 캐나다 제25사단이 187고지와 가마골 일대의 고지를 점령하고 좌전방 제29여단이 187고지 서단으로 진출함으로서 목표 포스터를 점령하였다. 우전방 제28여단은 목표 무어와 포스터의 중간에 위치한 고왕산(355)과 227고지를 점령하고 목표 무어의 남단 일각을 점령하였다. 이 여단은 다음날 10월 5일, 공격을 재개하여 마량산(317)과 그 서남의 217고지를 점령하여 목표 무어를 확보하였다.
미 제3사단은 10월 4일 제15연대가 천덕산을 점령했다 적의 역습으로 피탈되었다. 제7연대는 281고지까지 점령하여 목표 왓스를 확보하였다. 제65연대는 제임스타운선에 대한 정찰을 강화하고제15연대는 10월 5일에 천덕산을 탈취하고 324고지를 6일에 무혈 입성함으로써 목표 바틀러를 점령하였다.
군단 작전 4일째인 10월 6일에도 제1기병사단은 격전을 계속하였다. 목표 커슨 남단 346고지를 공격한 제5기병연대는 적의 저항으로 탈취하지 못하고, 제7기병연대는 334고지를 점령하였다. 이때 생포된 포로들의 진술이 이미 식량과 탄약이 고갈되어 역곡천 북방으로 5~7km 후퇴하였다고 진술하였다.
계속적인 공격에도 제5기병연대의 346고지를 확보하지 못한 가운데 10월 9일 군단은 코맨도 작전을 종료하였다. 하지만 제1기병사단은 마지막 목표인 346고지군의 목표 커슨을 점령하기 위해 공격작전을 계속하였다.
한편 10월 10일부터 사단의 전초임무를 띠고 학당리 338고지에 추진된 벨기에-룩셈부르크 대대가 11일과 12일에 진전으로 기습해온 중공군의 공격을 격퇴하여 제임스타운선 방어에 큰 기여를 하였다.
마지막 목표 커슨에 대한 공격은 10월 15일, 새 작전계획에 의거 제5기병연대는 벨기에 대대를 배속전환받아 346고지를 공격하고 제8기병연대가 287고지에서 346고지의 북동쪽을 공격하여 18일에 완전히 점령 확보하였다.
10월 3일부터 10월 19일까지 역곡천 남안의 모든 목표를 확보하고 중공군은 강 북쪽으로 퇴각하였다. 여기서 새로운 중공군의 전술이 그동안 아군이 진격하면 뒤로 물러나 전력을 흡입하여 포위전술로 맞서던 것에서 이번 이곳 역곡천 일원의 전투는 고수방어를 실시하여 10여 차례에 이르는 반복 쟁탈전이 전개 되었다.
중공군 전사에도 이 당시 전투에 언급하여 고수방어로 맞서며 쟁탈전을 계속하여 어던 중대는 10~30여 명이 살아남아도 진지를 고수했다. 마량산 진지는 5차례 쟁탈전 속에 빼앗기고, 217고지는 갱도진지에서 하룻동안 21차례의 공격을 격퇴하였다고 기기록하고 있다.
이 특공작전 기간에 중공군은 포로 500명을 포함 21,000여 명의 손실이 발생하였고, 이중 76%인 16,000명이 제1기병사단에의해 초래되었다. 미군도 제1기병사단의 2,900명을 포함해 4,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나. 중공군의 계속되는 역습
하지만 이후에 중공군은 상실된 진지를 회복하기 위해 끝임없이 공격을 해왔다. 특히 11월부터 적의 동계공세에서 중공군 제64군은 마량산과 고왕산에 대해 집중적인 공격을 가해 왔다.
중공군은 11월 2~3일, 영연방 사단의 좌전방 (캐나다 25여단)지역에 양공작전을 한 다음에 , 11월 4일 제28연대가 방어중인 마량산(315)과 217고지를 전차까지 동원해 공격을 감행하여 결국 피탈되고 말았다.
중공군은 11월 17일 밤에 역시 제28여단의 좌단인 고왕산 서쪽 227고지를 공격해 왔다. 결국 227고지와 고왕산 사이의 안부로 물러났다. 이 무렵 단행된 전투지경선 조정에 따라 사단의 우전방이 된 캐나다 제25여단이 예하 대대가 안부진지를 인수하였고, 그 동쪽 고왕산은 미 제3사단에 인계되었다.
그러나 부대배치의 조정을 알아챘는지 중공군이 23일 바로 공격을 해와 고왕산을 상실하게 된다. 이어서 캐나다 군이 방어중인 안부진지로 중공군이 밀어 닥쳤으나 진내사격을 감행하며 맞선 캐나다군이 바로 피탈되자마자 역습으로 되찾았다. 이에 따라 미 제3사단도 다음날 역습으로 고왕산을 탈환하여 회복하였다.
4. 작전 결과
이들 전투에서 마량산을 상실한 반면 고왕산을 확보한 상황에서 군사분계선 회담에 그대로 반영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5.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결과
가. 고왕산과 안부진지에 남겨진 탄흔(벌집처럼 남겨져 눈이 덮힌 후 녹기시작하는 봄에 보면 둥근원이 비슷하다)
나는 고왕산을 들어갔다. 이 곳을 가기위해 통문을 지나 얼마안가면 고지라기보다는 평탄한 야지 공원같다. 이곳을 지나며 바로 저기에 마량산도 보이고 그 유명한 베티고지도 보이고 왜 이곳을 차지하려 격전을 했는지 알 수 있다. 때는 가을에 한번 이른 봄에 한번 등 2번을 탐사차 들어갔는데 가을에는 가을대로 단풍이 들어가는 나즈막한 잡초들의 숨소리에 황홀에 빠지고 이른 봄은 그 수많은 탄흔들의 모습에 마치 달나라 표면같은 느낌이 들었다.
물론 개척된 통로를 벗어날 수는 없다. 살아있는 지뢰가 너무 많이 있기 대문이다. 그런데 막상 지피 막사 출입문에 들서서니 아뿔사 문 기둥주변에 뼈들이 산재해 있고 각종 탄피 들이 널부러져 있다. 이곳이 중공군과 캐나다군, 그리고 미군이 전투한 곳이고 끝까지 사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나. 고왕산 GP공사간 노출된 유해와 유품들(대부분 중공군 유해와 미군 유품이 다수)
그래서 당시 GP 공사간 관련된 소문을 수집해 보기로 했다. 우리를 안내하는 간부와 이 지역에서 가장 오래 근무했다는 원사급 간부를 수소문해서 찾아 대면을 했다.
"그 당시야 공사를 빨리 끝내야 하는 것이 임무이고 워낙 흔한 것이 뼈라서 다 밀어버렸다"
이 말이 사실 진실이다. 내가 초임장소 시절에도 산에 가서 진지공사 또는 훈련간 개인호를 구축한다고 땅을 파면 어디나 탄피나 철모들이 나오곤 했다. 어저다 뼈가 나오면 제수없다고 버리는 동료도 있고 나는 정중히 잘 양지쪽에 묻은 걸로 기억된다.
따라서 155마일 휴전선에 지피마다 진출입로 공사와 막사(벙커)공사간 얼마나 많은 유해들이 파쇄되었는지~~~
다. 영국군을 따라다닌 유격부대의 전투기록이 없다.
영국군(캐나다군 포함)이 전투한 곳이 연천군 백학면 북쪽 고잔하리와 신서면, 중면의 서북방향이다. 서쪽으로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임진강, 동에서 서로 흐르는 역곡천이 발달하여 임진강에 합류되는 일대로 이곳이 서울에 이르는 3번국도에 이르는 첩경지역이다
나는 강화도 유격대의 회장('21. 12현재)님으로부터 의미있는 증언을 받은 적이 있다. '51. 4월 중공군 공세시 당시 캔사스선으로 진출하는 영국군을 지원하기 의해서 강화도 유격대에서 1개 중대가 편성되어 설마리 앞 임진강상에 트럭을 이용하여 갔고 중공군진지로 잠입해 들어가 정보를 입수하는 임무를 수행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설마리 전투에 그런 기록은 전혀없다. 오지 영국 황실대대가 장렬히 옥쇄하여 3일간을 버팀으로서 미 제1군단 예하부대들이 골든선으로 철수할 수 있게 되었다는 내용이 전부다
사실 바로 서측이 사미천이고 판부리로 국 제1사단이 방어하던 곳인데 영국군 단독으로 이 일대에서 공격 또는 방어작전을 수행했다는 것은 무리한 판단이라 생각이 든다. 분명 차후 미 제3사단이 또한 이곳에 들어오고 국군 제1사단이 들어오는데 관련된 투입부대들의 세밀한 분석이 중요하다.
" '51. 2월 지평리전투도 그렇다."
우리 전사에는 기록이 없지만 프랑스군 기록에 국군 유격대 1개중대가 프랑스에 배속되어 지금 지평리역, 서북방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중공군의 침투에 대비한 지면편성이 남아 있다. 나는 그걸 근거로 지평리지역 국군 유해발굴 작전을 수행했다. 또한 미군측 기록에도 한군 노무자 80여 명이 참가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라. 국회의장이 묵념한 곳은 중공군 무덤이었다?
사실 이 코맨도 작전의 핵심 부대는 국군은 투입된 건재 부대가 없다. 국군 제1사단은 사미천 서측방에서 전투를 했다. 그러나 나는 당시에 미군 중대급에 우리 노무자 아니면 캬츄사가 50여 명 정도 지원된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지역일대를 탐문했다.
하지만 사실 우측 백마고지 일원에 '52. 10월 경에 제9사단이나 그후에 제2사단이 들어온 것은 증언 또는 제보하는 참전용사님이나 지역주민은 만났지만 이곳 현재 제28사단 동측과 제5사단 전방지역에 국군이 전투했다는 증언청취는 많지않았다. 휴전임박하여 제1사단, 그리고 해병 대대급이 지원와서 전투했다는 정도다.
그런데 안전상 이유로 출입이 통제되고 있을 때에 나는 천덕산 GOP선에 올라 철책을 따라 탐사중에 당시 안내 원사로부터 본인들이 수색정찰간 수많은 유품을 목격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철책이남 정찰로를 따라가 보았다.
"수색로상 법면에 노출된 유해, 유품은 모두 미군것이다"
이곳 일대가 진명산과 천덕산 구역으로 전사는 미 제1기병사단 전투지역이고 사실 전사에도 몇번식 중공군과 백병전을 했고 진출시는 중공군이 미쳐 수습해 가지못한 유해가 100여 구씩 남아 있었다는 지역이다.
그런 어느날 국회에서 의장님(정의화)이 유해발굴 지역을 방문하여 헌화하고 싶다고 하여 접근성이 용이한 진명산 앞 부분(여기서 보면 역곡천이 훤히 내려다 보인다)이 선정되었다고 연락이 왔다. 그런데 한국군 전사가 없다. 그래서 결국 당시에 미군에 한국인 노무자가 보급품을 운반하고 카츄사가 중대단위로 지원하여 전투를 했다는 사실로 엮어서 의장님에게 브리핑하고 현장을 소개했다. 당시에 몇구의 유해가 엉켜있고 박격포탄 박스가 그대로 있고 한 개인호에 집단으로 매몰된 유해였다.
마. "나는 26구의 유해를 발굴하여 한 곳에 매장했다" 조영호 대위(중대장)의 제보와 4개의 무덤군의 얽힌 사연
유해발굴 작전이 계속되면서 현역근무 시절에 유해를 목격했다는 내용의 많은제보가 있었다. 물론 재다수 제보는 현재 부대들이 주둔하고 있기에 그 실태를 확인하는데는 큰 문제는 없었다. 다만 DMZ안에서의 목격담은 접근이 그리 쉽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이 곳 출입은 절차가 중립국 유엔감시단의 승인이 있어야 하기에 적시에 이루어지기는 곤란하다.
그런 어느날에 백마고지 우측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유해를 발견하여 처리했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전화를 했더니 사관학교 동기생이다.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난 사관학교 동기생의 제보]
나는 육군 3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전화를 해보니 당사자도 나와 같았다. 그는 중대장을 끝으로 제대하여 지금은 부천 시장에서 수산물 중개상으로 많은 돈을 벌고 있었다. 나는 바로 부천으로 달려가 직접 대면으로 실상을 파악했다.
"영호야 너가 직접 발굴하여 처리했다는 거냐?"
"영호 : 그래 그 뭐냐 추진 철책 작업을 하라해서 병력을 데리고 들어가 백마고지 우측지역 작업을 했지. 그런데 기동로를 만들어야 차가 출입할 수 있잖아. 도쟈가 동원되어 우회도로를 만드는데 작업병이 뭐가 있다는 거야. 그래서 가 보니 조그만 가매장 묘같은 것이 널려 있는데 나는 시골에서 그런 것은 함부로 하는게 아니라는걸 들었거든. 그래서 행정관을 불러 한지와 일부 약식제례 올릴 것을 구입해 들어와 그래도 정중하게 수습하여 한곳에 옮겨서 다시 양지바른 곳에 가매장해 들였지"
"야 그럼 발굴할 때 다른 유품이 안 나오더냐?"
[화공작전으로 모두 다 화장되었다?]
"솔직히 그 문제가 좀 걸려서 너가 티비에 나와서 증언이나 제보를 기다린다고 할 때에 바로 연락을 못했어. 물론 그 때는 너가 동기생인 줄은 몰랐지만. 왜냐하면 지금은 모르지만 80년 까지도 철책안은 미확인 지뢰지대라고 못들어가게 하고, 때맞춰 화공작전으로 다 태워버리잖아, 그러니 소대장 시절에 그리 많았던 뼈들은 사실상 다 불에 타서 화장되어 버렸다고 봐야 해. 하지만 철모나 수통 반합 탄창들이 널려 있는거야. 그러니 땅속에 묻혀있는 분은 그래도 그 화망을 피했으니 발굴할 수 있었지. 그런데 발굴하면서 보니 유품이 있는 곳도 있고 없는 곳도 있고 해서 나중에라도 문제가 될 수 있다 싶어서 나는 발굴 장소에 대한 요도와 실태를 작성하여 부대일지에 부착시켜 놓았어. 지금 그 부대일지가 살아 있으면 가장 정확하다고 봐야 돼"
[부대일지에 그 사실을 요도로 작성하여 유지했다]
"와 너 복받는다. 그 당시에 그렇게 처리한 사람은 너밖에 없다. 내가 거의 15년간 이 사업을 추진하며 기록에 남겼다는 사람은 너밖에 없다"
그래 우리 반번 같이 현장에 가 보자. 너가 사업에 지장이 없는 날을 택하여 주면 내가 출입절차를 밟을께. 아니면 철책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바로 가도 돼. 대략적인 장소를 지정하면 그 안이야 별로 변화가 없으니 쉽게 해당부대원을 대동하고 답사하면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영호 : 그래 내가 우화도로 밑으로 26구를 오와열 맞추어 가매장 해 들였으니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거다. 누가 그 후로 손대지 않았으면... ."
우리는 철책으로 몇일 후 달려갔다. 영호 가족도 나섰다. 남편의 근무 장소를 한번 보고싶다고 해서 나섰다. 맛있는 점심도 준비해서 왔다. 물론 나는 먼저 사전 정찰을 하여 실태를 파악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 우회로가 당시보다 한 곳이 더 생겼다. 그리고 26구의 무덤군은 보이질 않고 4개의 봉분이 명확한 무덤군이 잘 단장되어 있었다.
"영호야, 저기가 백마고지다. 내가 저 우측으로 들어가 저기 오른쪽 지피까지 걸어서 답사를 1차로 했거든. 그런데 너가 말한 우회로가 또 생겼더라. 부대 간부가 말하길 90년에 언제인가 우회로를 추진철책과 너무 가까워서 앞으로 당겨서 다시 만들엇다고 한다. 보니까 수풀 속에는 아직도 전투유품은 종종 볼 수 있더라."
"그래, 그러면 그 가매장지가 없어 질 수도 있겠구나. 그걸 아는 사람은 없더냐?"
"너가 있을 때에 행정관이나 간부들은 모두 전역했더라. 그 부대일지도 20년이나지나 찾기가 곤란해. 그런데 새로생긴 우회로 밑에 4개의 큰 무덤군이 가지런하게 만들어져 있는데 그 곳으로 옮겨서 다시 묻었는지 지금 확인 중에 있다."
"야 많이도 변했다. 내가 전역한 것이 20년도 지났으니 강산이 두번이상 변한 것 아니냐. 너 참 고생한다."
우리는 이어서 고석정으로 이동하여 영호 가족이 준비한 음식으로 점심을 먹었다. 야전에서 예비역 동기생 사장 가족이 만든 점심이란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아직도 그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고 진행형이다?]
적어도 '19년정도 까지는 발굴했다는 소식을 듣지못햇다. 왜냐하면 26구 전체가 국군 전사자란 확신이 없고, 이곳 전투는 물론 제9사단이 백마고지 전투에 참여하여 하였지만 그 당시는 우리가 작전 주도권을 갖고 있기에 이런 평지는 쉽게 노무자들이 전사자를 처리할 수 있었다고 봐야 한다. 물론 옮기는 과정에 적의 기습이나 포탄 공격으로 놓고 도망칠 수도 있지만. 문제는 이 지역이 전쟁 전에 평야지대로 민간인이 거주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동네 무덤군이 될 수도 있기에 부대일지를 봐야 하는데 이제 그것도 다 발굴하여 다시 옮겨 4개의 무덤군에 통합되었다면 실증이 어려운 문제인 것이다.
바. 전 제31사단장 정웅소장(광주사태시)의 제보 : 내가 화살머리 고지일대에 미군을 몇구 매장했다.(소대장 시절)
또 얼마 되어 정웅 소장님과 통화를 했다. 소대장시절인지 중대장 시절이지 281화살머리 고지일대에서 근무간에 인식표도 보고 철모나 많은 유품을 목격했고 실제 몇 구의 유해가 노출되어 한 곳에 갖\매장 했다고 한다.
그런데 90년 말에 실제 화살머리 고지에서 유해를 발굴하여 정상절차로 처리(유엔사에 연락하여 승인하 발굴, 가져갔다)된 사실이 부대 간부로부터 확인되었다. 미군유해인지 중공군 유해인지 아니면 국군 유해인지는 모르고 유엔사 처리반이 들어와 운반해 갓다는 것이다.
그러니 장구님과 함께 현장을 탐사해 보기로 했는데 물거품이 되었다. 추억 여행이 아니라 실중여행이 이기에 모시고 들어가기가 좀 그래서 양해 전화를 드렸다.
사. 돌아가지 않는 떡방앗간(에리고지 탐사간 목격), 그리고 수많은 철모와 유품들(무너진 엄체호안에는 무엇이 있을까)~~!
나는 5사단 전방에서 유해가 노출되었다는 신고가 와서 당시 수색대대장의 직접 안내를 받아 에리고지 일대로 들어갔다. 수색대원들이 호위를 하고 현장으로 진출하는데 도중에 면 소재지가 있던 곳을 지나는데 아무리 화공작이 잇닿더라도 쇠붙이들은 남아 있었다. 얼마를 걷고 있는데 떡방앗간인 모양이다. 기계들이 불에 그을려 시꺼먼 모습으로 그대로 있다. 여기서 우린 잠시 걸음을 멈추고 묵념을 올렸다.
계속 진출이다. 이곳은 휴전선 끝이 북한보다 위에 있다. 타원형의 지형으로 우리가 올라가 있고 북한이 옆으로 밑에 잇다. 백마고지지역도 그렇고 몇 군데가 이런 형상이다. 얼마 걸어가니 이번에는 무슨 토치카가 있었다. 가시 덤불로 덮혀 있어 내부는 들ㅇ어갈 수 없었다.
철조망이 몇 겹으로 드리워져 있고 그 주변에 널려있는 탄통이며 각종 전투유품이 천지다. 대대장 이야기가 화공작전을 하거나 여름철 번개에도 이 일대에서 폭발물이 터져 놀라게 한다고 한단다. 휴전 막바지에 토키카를 구축하여 적의 진출을 막고 필요시 우리는 이 위에 진내사격을 퍼부었을 것이다.
드디어 정상에 도달했다. 9월이 지나가는 싯점이라 벌써 풀들이 많이자라고 가을빛을 먹기 시작했다. 발견돤 곳을 가보니 아마도 DMZ내에 살고 있던 동물이 화공작전에 질식되어 죽어서 남긴 흔적으로 보인다. 다시 돌아거 내려오는 길은 정말 긴장감이 돌았다. 만약에 이 속에 적군이 들어와 있다 뒤에서 가지 말라고 당기면 어덯게 되는 건가... .
아. 백마고지에서 전투한 제9사단 용사님을 모시고 현장에 들어갔다.
어느날 제9사단 참전전우회에서 연락이 왔다. 당시 실제 전투를 한 에비역 대령분과 그 휘하의 인원 2명이 구백마고지 지피일대에 증언을 하겠다는 것이다. 휴전까지 이 곳에서 보내며 진지에서 배구도 하고 당시에 많은 유해가 죽어간 지역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절차를 밟아 지피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당시에 구지피 바로 앞, 우리 수색대원ㄷ들이 매복작전을 위해 주간에 가매복진지를 구축하면서 유해가 나왔다 하여 이미 들어가서 발굴을 한 나였다.
백마고지전투는 차후에 언급이 또 되겠지만 중공군이 10,000여 명 이상 죽었고 우리도 3,000여 명이 전사한 곳이다. 철책에서 차량으로 지피앞까지 이동하는 로정에도 주변에 전투 유품이 훤하게 보인다.
증언에 의하면 많은 적군의 시체가 썩어가는 냄새가 코피를 쏟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발로 밀어서 교통호에 밀어넣고 가매장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 군인들도 포격에 의해 신체가 파열해 버리면 누가 누군지 알 수가 없다고 한다. 이러한 경우는 마찬가지로 옆에 포탄이 떨어진 곳이나 교통홍에 밀어넣고 흙을 살짝 덮는 것이 최선이란다. 물론 가장 좋은 방책은 노무자들이 온전하게 수습하여 내려가는 것이다.
[저기에서 우리가 포복으로 접근하는 적을 박살내었지... .]
차량으로 오르는 도중에도 두 눈에 보이는 교통호의 흔적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고, 남서방향에서 우리의 전차가 진입하여 고지를 공격하고, 적과 뒤섞여서 전투를 햇다는 용사님들의 무용담이 계속된다.
이 곳은 구지피가 너무 북으로 도출되어 위험성이 높아서 고지 남족에 다시 신지피를 구축했다. 그러니 그 시설을 짓기 위해 얼마나 많은 유해가 훼손되엇을까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드디어 지피앞에서 우회로를 따라 구지피방향으로 들어간다. 가는 도중에 백마고지 표식이 조그망게 보이는데 그곳에 내려갔다. 이곳에서 전쟁 말기에 휴전을 기다리며 미군과 배구 경기도했단다.
백마고지는 온통 산에 나무 한그루 없다. 오직 잡풀이 우거지다 가을이 오면 모두 쓰러져 적이 들어오지 못하게 자연적인 관측을 제공한다. 그런데 그 밑에는 거의 교통호가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어 그 속을 발굴해야 한단다. 물론 우리의 전사기록은 정확하지 않다.
[백마고지 : 전사 505명, 실종 391명, 미수집 67명, 화살머리 고지 : 전사 180명, 실종 16명, 미수집 17명]
백마고지는 '52.10.6-15일까지 제9사단이, 화살머리고지는 제2사단이 '53.6.29-7.11일까지 전투한 기록이다. 잘 알고 잇듯이 화살머리 고지는 유해발굴 사업 최초로 DMZ안에서의 유해발굴이 진행된 곳이다. 그러나 숫자만을 가지고 분석하면 꼭 화살머리고지에서 발굴작전을 북한과 혀조하여 진행했어야 하는 의문점도 남는 곳이다. 여기서 발굴된 유해는 인식표에서 확인된 이름으로 유가족과의 DNA감식으로 신원이 확인되어 현충원에 안장된 인원이 3~4명에 이른다. 모두 제2사단이다. 백마고지는 진행하다 북한과의 협조가 제대로 되지않아 지금은 중단된 상태다
자. 진명산의 비밀('11부터 500여 구 발굴됨)
이 지역은 사실 구군의 전사 기록이 부재하다. 미 제1기병사단이 주 전투 부대이다. 앞에서 국회의장의 현장 방문이 이루어진 곳이다. 그동안 10여 년의 발굴기간에 약 500여 구가 발굴되었다.
유해발굴 작전도 많은 시간이 지나며 선정방식이나 조건도 바뀐 느낌이다. 내가 통제하던 시절은 국군이 주 전투를 담당했던 전사지역을 선정했고, 낙동강으로 밀리던 기간은 미군과 국군의 여러 조직이 합동작전을 실시한경우가 많기 때문에 지역 주민들의 제보를 들어 발굴지역을 결정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발굴숫자에 민감한 상부의 눈치를 보다보니 기존의 대규모 발굴지역(유다부동지구, 영천 진격산지구 현리 매봉지구, 양구 피의 능선, 양구 백석산지구 등)은 다시 발굴하여 부분유해를 샅샅이 흙속에서 찾아내 한 구로 하는 실태가 연출되고 있기도 한다.
이곳 진명산은 대표적인 미군과 중공군이 전투한 지역이다. 코맨도 작전간 무려 거의 2주간 격전이 벌어진 곳이다. 10월 3일부터 10월 19일까지 역곡천 남안의 모든 목표를 확보하고 중공군은 강 북쪽으로 퇴각하였다. 여기서 새로운 중공군의 전술이 그동안 아군이 진격하면 뒤로 물러나 전력을 흡입하여 포위전술로 맞서던 것에서 이번 이곳 역곡천 일원의 전투는 고수방어를 실시하여 10여 차례에 이르는 반복 쟁탈전이 전개 되었다.
중공군 전사에도 이 당시 전투에 언급하여 고수방어로 맞서며 쟁탈전을 계속하여 어던 중대는 10~30여 명이 살아남아도 진지를 고수했다. 마량산 진지는 5차례 쟁탈전 속에 빼앗기고, 217고지는 갱도진지에서 하룻동안 21차례의 공격을 격퇴하였다고 기기록하고 있다.
이 특공작전 기간에 중공군은 포로 500명을 포함 21,000여 명의 손실이 발생하였고, 이중 76%인 16,000명이 제1기병사단에의해 초래되었다. 미군도 제1기병사단의 2,900명을 포함해 4,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과연 진명산의 발굴 유해는 국적이 어디일까, 우리 노무자가 참여는 했다. 그렇다고 일선에서 총을 들고 전투는 없을 것이고 전상자를 수습하고 보급품을 운반하는 일은 분명히 했을 것이다.
제 5 절 금성지구 확보
1. 개 요
군사령부의 하계제한공세전략에 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은 해안분지를 확보하고, 서부전선에서 미 제1군단이 연천-철원 도로 및 철로를 확보하기 위해 주저항선을 10km 정도 밀어올리는 코맨도 작전을 시작하자, 중부 전선의 미 제9군단장은 군단의 방어선을 개선하고 적에게 압력을 가하기 위하여 10월 8일 금성 진격작전계획을 승인받았다.
당시 제9군단은 철원 동북 중산리-김화 북방 적근산-백암산-북한강에 이르는 주저항선(와이오밍선)에 미 제25사단(터키 여단 배속), 국군 제2사단, 미 제24사단, 국군 제6사단을 배치하고 미 제7사단(-)를 예비로 확보하였다.
이때 대치중인 중공군은 제20병단 제67군으로, 제200사단을 적근산 북쪽에, 제199사단을 백암산 북쪽에 전개하고, 제201사단은 금성부근에 예비로 보유한 채로 방어에 임하고 있었다.
제9군단이 작전의 목표로 한 금성은 현 전선으로부터 약 12km 북쪽에 금성천변 분지에 위치하여 통천-평강, 원산-회양-창도리-평강으로 이어지는 도로와 화천으로 남하하는 도로의 분기점으로 교통의 요지다. 따라서 이 작전은 병참선상의 요충을 확보하는 한편 오성산(1062)에 위협을 가하여 철의 삼각지 통제에 기여할 수 있는 중요한 곳이다.
2. 작전 계획
*425 외야동 *552 폴라 라인
폴라 라인
*477
미 제25사 = 국 제2사 풍동리 *482 월봉산
노메드 라인
상풍동 노메드 라인
*452 *421 *424 *434
하진현
남대천 *462 북정령 국2사 = 미24사
폴라 라인 / 노메드 라인
*492
*433 *439
*600
방동
송동
제9군단장은 단계별 제한공격을 계획하여 우선 현 전선을 일단 약 5km 밀어올려 금성천을 확보할 복안에 제1단계 목표선을 하소리-풍동리-죽동-여문리-금성천 하구로 설정(노메드 라인)하였다. 그런데 이대 군단 좌익인 미 제25사단이 미 제1군단 작전을 지원하고 있기 때문에 3개 전방사단으로 작전을 전개하기로 계획을 수립하였다.
10월 10일, 중앙의 미 제24사단이 중앙에서 적근산-주파령선에서 17번도로와 적근산으로부터 북으로 뻗은 능선 접근로를 따라 금성 공격을 주도하고, 그 좌우에 포진한 국군 제2사단과 제6사단이 외야동과 교암산 방향으로 협조된 공격을 전개하도록 하였다.
이때 좌익의 미 제25사단에는 미 제1군단 작전에 협조하면서 평강에 대한 파쇄공격임무를 부여하였다.
3. 작전 경과
제9군단은 명령대로 10월 13일 공격을 개시하여 3일동안 5km를 전진하여 16일에 목표선을 확보하였다(노메드선). 다시 약 4km를 전진하여 금성 남족 약 3km까지 전진하기로 하고 10월 17일부터 공격을 속개하여 하소리-외야동-봉화산-교암산-성동리-금성천 하구를 연하는 폴라선으로 진출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3개 사단은 21일 목표선을 확보하였다. 20일 마지;막 날 미 제24사단의 전차부대가 금성으로 돌진하여 시가를 제압하였으나 중공군이 전차와 대전차화기로 대응함으로써 아군 전차부대는 금성에서 철수하였다.
가. 금화-금성진격작전
국군 제2사단은 '51. 10월 초순 미 제9군단의 중앙 좌익 사단으로 김화 동쪽 송동으로부터 바조봉-승암고개-적근산 서측 두목을 연하는 선에 주저항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제31연대가 457-송동-방동의 좌일선에, 제32연대가 785-734-두목의 우일선에 배치되고 제17연대가 예비로써 고비목과 말고개에 집결하였다.
사단은 지난 6월에 이곳에 진출한 이후 지난 8월에 중공군이 점령하고 있던 734고지를 공격하여 탈취하였고 9월 초 이들의 공격을 격퇴하여 사기가 높았다. 대치한 적은 중공군 제67군 예하 제200사단으로 교전리-북정령-진현리-633일대에 주력을 배치하고 있었다.
사단은 10월 13일 05:00시에 조공인 우익의 제32연대가 먼저 492, 600고지를 목표로 공격을 했으나 600고지에서 일진일퇴의 백병전 속에 전폭기의 지원과 화염방사기의 분사 등을 통하여 8시간만에 600고지를 점령하였다.
조공보다 1시간 늦게 공격을 개시한 주공 제17연대는미 제25사단 전차중대(-)를 지원받아 보전협동으로 우선 북정령과 462고지를 공격하였다. 제1대대가 북정령을 3시간의 격전 끝에 점령하였으나 462고지에서는 전폭기의 지원을 받는 등 격전 속에서 적 103명을 사살하고 12명을 생포하는 전과 석에서 목표를 점령하였다.
한편 조공인 제31연대 제3대대는 좌익에서 433고지를 점령하고 노메드선 하단 462고지로 진출 중에 적의 역습으로 14일 새벽에야 제압하였다.
10월 14일, 주공인 제17연대는 노메드선에 도달하였으나 조공인 제32연대는 전날 탈취하지 못한 492고지와 600고지 서쪽 491고지를 공격하여 적 85명을 사살하였다. 492고지는 제2대대가 공격하여 41명을 사살하고 17명을 포로로 하였으나 84명이 사상자를 내었다.
노매드선에 도달한 사단은 10월 15일, 노매드선 북쪽 1km 살구정-풍동리-419고지 선으로 추격을 감행하여 확보하고, 17일부터 폴라선으로 작전을 확대하였다. 그런데 사단의 폴라선 책임지역은 금성 서남방 3~5km지점 미나리골-외야리-522고지를 연하는 4km폭에 불과하였다.
사단장은 제17연대와 제31연대의 각 1개 대대로써 공격작전을 계획하여 10월 17일 06:00시에 제31-1대대는 477고지에 이어 외야리를 확보하여 목표선에 도달한 반면 우측의 제17-2대대는 522공격에서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결국 제3대대로 교체하여 공격하여 목표선에 도달하여 금성 서남쪽을 방어하게 된다.
나. 금성천 . 교암산 전투
*690 *663
교암산
*700 폴라선
송동리
*585 *488 *485 용호동
*482 여문리 *529 관망산, 폴라선
1/19 노매드선
*522 *541 미 제9군단 북한강 미 제10군단
*551 금성천/북한강
3/7 3/19
1/7 2/7 *472 등대리 *462
미제2사 = 국제6사 금성천 1/19
*565 구대 2/6
2/7 1/7
3/19
2/19
*819
국군 제6사단은 군단이 노메드선으로 진격작전을 할 때, 1951. 10월 군단의 우전방 사단으로 백암산(1179)을 방어중이었다.
제7연대와 제2연대가 어민선인 백암산 후방 1057-782-수상리-780고기 선에서 방어중이었고, 제19연대는 백암산 전방의 819-수고지-780고지 선에서 사단 전초 임무를 수행하였다. 사단의 좌로는 미 제24사단, 우로는 미 제10군단 예하 국군 제8사단과 북한강을 경계로 인접하였다.
당시의 중공군은 제67군 예하 제199사단이 금성천 북안의 585-여문리-529고지 선에 주저항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제6사단정 장도영 준장은 1951. 10. 10일, 미 제9군단장으로부터 10월 13일 06:00시에 공격을 개시하여 죽동-여문리-금성천입구를 연하는 노매드선을 점령하여 군단의 동측방을 엄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이미 적이 장기간에 걸쳐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여 특공대 운용 등 진지를 제압할 특수전법이 강구되어야 했다.
사단 우측인 북한강 동안 938고지에서는 국군 제8사단이 공격중에 있어 경우에 따라 사단 동측방이 노출될 염려가 있고, 금성천을 도하하면 포병의 진지변환간 화력지원이 중단될 것이므로 지속적인 화력지원 대책이 강구되어야 했다.
이러한 애로의 타개를 모색한 결과 사단장은 제7연대를 좌일선, 제19연대를 우일선으로 하되, 제7연대가 565고지를 확보한 다음 금성천 대안에 교두보를 확보하도록 하고 제2연대와 수색중대는 동측방을 방어하도록 하였다. 또한 전방 연대에 공병 1개 중대식 직접지원하여 장애물 제거와 기동로 개척에 운용토록 하고, 가용인원을 최대 동원하여 전방연대의 보급을 지원하기로 하였다.
사단은 10월 13일 06:00시에 좌익의 제7연대는 819고지에서 금성천 남안의 565고지를 점령한 다음 도하하여 472고지를 확보하여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그러나 우일선의 제19연대는 462고지에서 배수진을 친 대대 규모의 적의 저항으로 149명의 사상자를 내고 404명의 적을 사살하고 13명을 생포하였다.
10월 14일, 제7연대는 연대가 모두 도하한 다음 551-522고지를 공격하여 점령하였으나 25명이 전사하고 17명이 부상당하였고, 적 374명을 사살하고 44명을 생포하였다.
제19연대는 462고지를 점령한 제1대대의 엄호하에 15일 02:50분에 양지촌에서 등대리로 도하하여 541-529고지를 공격하였다. 이날 제3대대는 인접 제7-3대대의 지원으로 541고지를 점령했으나 우익의 제2대대는 529고지를 점령하지 못했다. 따라서 이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제1대대를 투입하여 야간 곡격가지 했으나 탈취하지 못하고 노매드선을 확보한 상태에서 10월 16일 군단의 폴라선 진출계획에 따라 교암산 송동리선의 적을 격멸하고 이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사단장은 예비인 제2연대로 585-교암산 축선으로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10월 17일 06:00시에 공격을 재개하였다. 제2대대가 585고지 방향으로, 제1대대가 482고지에서 585고지로 공격을 전환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제2대대가 585공격에서백병전 속에서 12명이 전사하고 105명이 부상하는 등 혼전이었고, 제1대대도 482고지에서 적의 저항에 진전이 없었다.
10월 18일에도 585고지에 제2-2대대가 맹공을 퍼부었으나 점령하지 못하고 있었고 제1대대는 482고지에 대해 특공대가지 투입하여 탈취하고 585고지 동측 능선으로 진출하려 했으나 적의 강력한 저항애 돈좌되었다. 이때 사단은 탈취한 482고지를 제7연대에 인수시키고 ㅈ제2연대는 585고지 공격에만 집중토록 하고 제19연대는 동측방을 엄호하였다.
10월 19일, 제2연대는 금성천 남안의 진지를 사단 수색중대에 인계하고 제3대대까지 집실리로 이동시켜 585고지 공격에 나섰다. 결국 3개 대대 투입으로 585고지를 점령했으나 제2대대장이 후송되고 대대원 50%가 손실되었다.
중간목표를 점령한 사단은 제2연대를 주공, 제19연대를 조공, 제7연대는 노매드선 방어임무를 부여하여 10월 20일 공격을 재개하였다. 제2연대는 제1,3대대를 전방으로 공격을 하여 제1대대가 정면 동격을 감행하여 적 87명을 사살하고 14명을 생포하면서 교암산을 이르는 488고지를 탈취하였다. 연대는 10월 21일 교암산 공격을 감행하여 결국 1,3대대가 동시 백병전으로 고지를 탈환하게 된다.
당시 중공군은 석굴을 이용하여 은신하였고 아군은 화염방사기와 수류탄으로 특화점 공격을 하면서 적을 제압하는 값비산 교훈을 얻었다.
그러나 이 작전의 결과 폴라선을 확보는 했으나 전선에 만곡부가 형성되어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미 제9군단은 국군 제6사단의 교암산 지역을 미 제24사단에게 인계한 후 북한강 서안으로 이동한 다음 11월 중순, 우인접 미 제10군단의 국군 제8사단 서측 연대(제21연대)를 배속받아 만곡부의 동측에 우람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949고지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이 전투에서 용호동-949고지-973고지-석장동을 잇는 게리선을 확보함으로서 양 군단의 전선을 완만한 곡선으로 정리하였다.
4.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결과
상기 김화 금성 진격작전지역은 대부분 지역이 DMZ이나 북한지역에 해당되어 탐사는 실질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만 참전용사님의 증언은 다수 청취하여 여기에 실리게 되었다.
가. 이보영 참전용사(제6-19-3-9중대) : '53. 7월 휴전이 임박하여 전투가 치열했고 교암산 일대가 피로 물들였다. 이미 제2사단이 수도사단 등이 점령한 적도 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이곳에서 철수해 나왔다. 엄체호안에 수많은 동료들이 들어가 있다. 막상 이렇게 65년 만에 칠성OP에 올라 교암산을 바라보니 눈물만 난다.
나. 이종록 대대장(수도사) : 내가 그곳 전투에서 적이 야간에 기습하여 우리 교통호에 들어와 화염방사기로 지지고 수류탄을 투척하게되어 공황이 발생하여 군의관과 전령만 빠져 나왔다. 솔직히 얼마나 죽었는지도 모르겠다. 전사자들은 모두 교통호에 있을 것이다.
다. 김기헌(제6-19-2-7중대) : 양구 서북방 949고지를 공격하였다. '51. 11월인데 중공군보다 아군의 전사자가 더 많았다고 기억된다. 전사자들의 모습은 흡사 개미데가 죽어있는 모습과도 같았다. 다음에 제3사단 제18연대와 교대했는데 제6-19연대는 전멸하다시피 할 정도로 다 죽었다.
라. 최병창(제6-7연대) : 백암산과 교암산 전투에 투입되었다. 소총병으로 참가했는데 949고지와 교암산 정상 기준 북측 능선에서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마. 000참전용사(제6-19연대) : 북한강을 건너 제8사단지역으로 들어가 949고지를 공격했다. '51년 11월인지 낙엽이 떨어져 있는데 군인이 더 많이 죽어 있더라. 중공군인지 아군이지도 모른다. 여기저기 억억하고 죽어가는데 피아구분이 어디 있겠는가. 말이 949고지지 올라가니 평지로 남과 북으로 능선이 되어 있는데 옆에서 중공군이 튀어나와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졌다. 어딘지는 모르겠고 정상이 아닌데 월남전 정글수색하듯이 전진하는데 잎이 다 떨어진 나무가지에 사람이 걸려있다. 놀라서 보니 아니 사람 가죽을 벗겨서 걸쳐놓았다. 그놈들은 피도 눈물도 없는 놈들이었다. 그런 곳에서 어떻게 시신을 수습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