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s://www.ddanzi.com/ddanziNews/115044941#
일본에서 열린 제5회 ‘동아시아 평화와 인권 국제심포지움’에서 한국군 위안부의 존재를 공개한다.
이 엄청난 사실은 <아사히신문>과 <오마이뉴스>(링크)에 동시에 보도됐다. 국내 주요 일간지와 뉴스에서도 이 충격을 다뤘다. 하지만 이 사실은 곧 묻혀 버리고 만다. 누구나 열람이 가능했던 <후방전사>는 외부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치워졌고, 김귀옥 교수는 윗선으로부터 입김을 받은 대학 당국으로부터 ‘조심해 달라’는 경고를 받았다. 한국의 지식인들은 ‘당신의 연구 성과는 인정하지만 굳이 민족의 수치를 이렇게 드러내야 겠느냐’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에 방해가 될 것을 우려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3년이 지난 1956년, 육군본부는 <후방전사(인사편)>이라는 책을 낸다. 책의 서언에는 이후 군대에 대한 후방 지원 업무를 발전시키는 데에 기여하고자 함을 출간 목적으로 밝힌다. 바로 이 책에 특수위안대에 대한 내용이 밝혀져 있다. 이는 특수위안대가 한국전쟁기 군인에 대한 후방 지원을 목적으로한 군대 시설의 하나이며, 국가에 의해 창설된 것임을 보여준다.
그 설치의 배경 및 목적을 보자
그러니까, 군인들의 사기를 고취하고 성욕을 분출하지 못하는 데에서 야기되는 지장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설치한 것이 바로 특수위안대였다는 것. 남성의 성욕은 스스로 절제할 수 없다는 생각, 그리고 여성을 그 분출구로 보는 시선은 사실 2016년 오늘날의 일상 속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인지라 너무나도 놀랍지 않은 것이 더욱 놀라울 따름이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계산해 보면, 국군의 특수위안대에는 대략 180~240명 정도의 위안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53년에 신설된 4개 소대까지 합치면 300명이 넘을 것으로 짐작된다.
육군본부의 <후방전사>에는 1952년 특수위안대 실적통계표가 수록되어 있다. 서울의 세 개 특수위안대 소대와 강릉의 한 개 소대의 ‘실적’을 월별로 표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실적이란 ‘피위안자’의 수로 대표된다. 피위안자라 함은 위안부로부터 위로와 안녕을 구한 이들을 말한다. 즉, 위안부를 통하여 성욕을 해소한 군인들 되겠다.
처음 이 표를 보았을 때, '실적'이라는 표현이 상당히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아, 여성을 대상화하지 않았다면 특수위안대 따위 설치하지도 않았겠구나’ 하는 생각이 잇따랐다. 사실, 한국전쟁 당시 위안부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제5종 보급품이었다. 사람이 아니라 ‘보급품’.
다시 통계로 돌아가서. 1952년 특수위안대 실적통계표에 따르면 그 해 서울의 세 개 소대 특수위안대와 강릉의 한 개 특수위안대에 속한 위안부들이 20만 명이 넘는 군인을 상대했다. 위안부 한 명이 하루에 평균 6명 이상과 성행위를 하도록 강요받았던 것이다. 다만 여기 나타나는 ‘실적’은 4개 위안대에 직접 출입한 군인들의 통계인지, 전선 부대에 출장을 간 위안대를 이용한 군인들의 통계까지 포함하는지는 불명확하다. 따라서 하루 평균 피위안자의 수가 더 많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하겠다.
여기서 ‘출장’이란 본래 특수위안대가 있는 곳에서 군인을 받는 것이 아니라, 위안대원 몇을 전투 중에 있는 군인들을 위해 사용할 목적으로 전선으로 보내는 것을 일컫는다.
한국전쟁 중 전선이 고착된 1951년 7월 이후부터 후방에는 사창가가 확대되었다. 법적으로는 1947년 이래 공사창제가 폐지되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사창가가 있었어도 전투지에 주둔하는 군인들은 여자를 만날 수가 없었다. 장교들은 현지처를 두었고, 간혹 병사들이 강제로 데리고 온 여성들로부터 ‘성 상납’을 받기도 했다. 일반 병사들은 점령지 여성들을 강간하는 것으로 성욕을 해소했다.
실제로 한국군이 38도 이북 지역을 점령했을 때, 소위 인민군이나 빨갱이 가족, 여성들에 대해 거의 예외 없이 성폭력이 가해졌다고 한다. 밤마다 한국군이 젊은 여성들을 겁탈하고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이웃 마을부터 전해왔고, 곧 그 소문은 사실로 밝혀졌다. 어떤 처녀는 세 번 이상 겁탈을 당하고는 마을을 떠나고 말았고, 어떤 이는 당하는 게 무서워 거지처럼 꾸미고 다니거나 정신병자인 척 했다고 한다. 육군본부 측에서는 전선이 고착되면서 이 카오틱한 상황을 정리하고, 또한 전투로 노고가 많은 군인들을 위로 및 포상하기 위하여 특수위안대를 조직했다.
또한 전선에서 위안부대의 출입은 하나의 포상이었다. ‘티켓제’. 즉, 위안부와 자려면 티켓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에게나 티켓을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라 전쟁터에서 용감하게 싸워 공을 세운 순서대로 배부하는 것이다. 또한 공훈의 정도에 따라 티켓의 수도 달라졌다고.
첫댓글 와…… 일본한테 이딴 거를 배워왔냐고 진짜 부끄러운 역사다
역대 군사대빵들이 일본군인출신이라 일본제국한테 전쟁성노예배운짬으로 여성을 조직적으로 학살한듯 걍 졸라우울하네 또 한반도에 전쟁이라도 나서 저런일이 발생할까봐 진짜 두렵다 반성도 없고 피해자 구호도 없고....
와…. 그냥 할 말이 없음 저놈의 성욕 때문에 얼마나 많은 여자가 피해를 본거냐고 ㅋㅋ 남자는 성욕이라는 감정이 드는 거 자체를 ㅈㄴ 부끄러워해야 돼
선감학원 생각남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 공무원선출해서 고아들 잡아죽이고 각종 노동시키고했는데 일제강점기끝나고 일제에 부역했으나 어떠한처벌안받고 한국의 복지계에서 죽을때까지 존경받다가죽음.....진짜 일제강점기가 특히 친일파숙청을 못하고 넘어간것이 한국의 여성사뿐만 아니라 너무 많은부분에서 상처를 내버렸어 복구수준이아님
내가 너무 대가리꽃밭인줄은 모르겠는데 이 내용을 몇번 보다보니 그래도 진보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고..또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형태의 보급, 다른 형태의 여성혐오와 착취가 생겨나고 있단 생각을 했어.
그러니까 희망 잃지 말고 기운 잃지 말고 여성 인권을 위해서 싸우자. 다음 세대는 또 다르다는 생각으로 싸우던 분들이 저 때도 있었을테니까..
일본 놈들한테 안 좋은거만 넘어오는데 그건 것도 진짜 경계하자..다시 저 시절로 돌아가면 우린 전 세대보다도 못한 세대가 되어버림
국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국가가 가해자라 공론화하지도 못했다며.. 지금도 저런 인식이 딱히 바뀌진 않은 것 같음. 저렇게 여자 보급하면 문제 되니까 대신 ^위문공연^ 하잖아ㅋㅋㅋ 사기 진작 목적인 것도 똑같음.. 진짜 충격받은 게 엄마아들 입대식에서 헐벗은 댄스팀 공연하고 한남 몇 마리 무대로 불러내서 무릎에 앉고 거의 애무하는 짓 시키더라;; 국제사회 눈치보느라 못하는 거지 지금도 여혐민국은 여자 보급하고 싶을걸
여시들 윗댓 표 봐바 다 일제시대 일본군 출신임..;
일본한테 배운거지
저 여혐국과의 시너지도 있지만 원래 유구했어 유민들 잡아다 강제로 관기 삼은 게 이 여혐국 기생의 유래고 그게 국가 주도로 이루어졌다는 게 너무 어이가 없음 이미 고려시대 때부터 열녀문 있었고 노비종모법으로 가축처럼 불린 여종 성착취해서 또 불리고 공녀 팔아먹고 화냥녀 비난하고 명예살인 등등 여자를 티기고 티겨왔음 지금 여혐하는 솜씨 봐봐 답 나오잖아
일본군 위안부 모집할 때 일본놈들이 그만 데리고 오라고 할 정도로 한녀 신나게 팔아먹었던 것도 있음 같은 민족 아니 인간으로도 생각을 안 한 거지 자꾸 쭉정이 이론 들이밀면서 한반도남 세탁해주려고 하는 놈들 반성해 그것도 일종의 유니콘 찾기야
근본이 여혐민국이었구나 이 나라에 애국심 1도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