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9/04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09 - 2009 태권도의 날 기념식 및 태권도공원 기공식 개최 문화체육관광부(장관 : 유인촌, 이하‘문화부’)는 전라북도, 무주군, 태권도진흥재단, 세계태권도연맹, 국기원, 대한태권도협회와 공동으로 9월 4일(금), 14:00부터 전북 무주 태권도공원 조성부지에서“2009 태권도의 날 기념식 및 태권도공원 기공식”을 개최한다. 이번 행사에는 필립 월터 콜스(호주), 토니 쿠리(레바논), 사미 무달랄(시리아), 이반 디보스(페루), 문대성 IOC위원을 비롯하여 국내외 정·관계 및 체육·태권도계 주요 인사와 태권도인, 지역주민 등 1,500여명이 참석할 예정이며, 식전공연, 저명인사 축하영상메시지 상영, 개막공연, 경과보고, 홍보영상 상영, 환영사, 치사, 휘호/발파 퍼포먼스, 식후공연의 순으로 진행된다. 아울러 9월 3일(목), 10:00에 문화부 장관회의실에서 30년 이상 해외 태권도 보급에 기여한 70세 이상의 원로 태권도인 8명(전체 표창대상은 26명)에게 장관 표창장이 수여될 예정이다. ‘태권도의 날(9월 4일)’은 태권도가 시드니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날(1994년 9월 4일)을 기념하여 2006년 세계태권도연맹 총회에서 공식 선포되었으며, 문화부는 2007년‘태권도 진흥 및 태권도공원 조성 등에 관한 법률’에‘태권도의 날’을 법정기념일로 명시하고 작년 9월 4일 올림픽공원에서 처음으로 기념행사를 거행한 바 있다 또한, 전북 무주의‘태권도공원(부지 2,314천㎡, 개발부지 879천㎡, 건축연면적 66천㎡)’건립사업은 2005부터 총 2,361억원(국고 2,044, 지방비 141, 기부금 176/민자는 별도)을 투입하여 수련, 연구, 경기, 문화산업, 관광 등을 아우르는 전 세계 태권도의 메카를 조성하는 것으로, 지난 8월 문화부의 기본계획 승인 고시를 거쳐 오는 12월 착공, 2013년 9월 개관할 계획이다. 태권도의 날 기념식과 태권도공원 기공식을 겸한 이번 행사는, 세계 189개국 7천만 명이 수련하는 세계화된 무도이자 올림픽스포츠로 성장한 태권도의 과거, 현재, 미래를 조명하고 국내외 태권도인들의 화합과 교류를 증진시킬 뿐 아니라 태권도공원 조성사업의 성공적인 추진을 위한 토대 마련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서울=뉴스와이어) 2009년 09월 02일 17:31
- 2006년 9월 4일. 태권도의 날을 기념해 세계태권도연맹이 자체 발행한 기념우표
2006 - 9월 4일 '태권도의 날' 선포식 9월 4일 세계태권도의 날 1994년 9월 4일 파리국제올림픽총회에서 태권도가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날을 기념하기 위해 지정된 "태권도의 날 선포식"이 4일 올림픽공원 제2체육관에서 성대하게 개막됐다. isilverain's blog 2006/09/08
9월4일 '태권도의 날' 지정 세계태권도연맹(WTF·총재 조정원)은 25일 베트남 호찌민시 에콰토리얼 호텔에서 총회를 열고 매년 9월4일을 ‘태권도의 날’로 지정했다. 9월4일은 1994년 파리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태권도가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날로, 연맹은 앞으로 이를 기념해 태권도 이미지 제고를 위한 이벤트를 마련할 계획이다. 연맹은 또 오세아니아 키리바티와 아프리카 잠비아를 새 회원국으로 승인하고 영국령 맨섬을 준회원국으로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회원국은 총 182개국(준회원국 포함)으로 늘어났다. /부산광역시태권도협회 2006-07-31
2001 - 불조직지심체요절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다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 간단히 〈불조직지심체요절〉, 〈직지심체요절〉, 〈직지〉)은 백운화상 경한이 선(禪)의 요체를 깨닫는 데에 필요한 내용을 뽑아 1372년에 펴낸 불교 서적으로, 상·하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원나라에서 받아온 불조직지심체요절의 내용을 대폭 늘려 상·하 2권으로 엮은 것이다. 중심주제인 직지심체는 사람이 마음을 바르게 가졌을 때 그 심성이 곧 부처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과거에 직지를 직지심경(直指心經)이라고 부르곤 했는데 이는 잘못된 표현이다. 불서(佛書) 중 직지는 경(經)이 아니라 요절(要節)이기 때문이다. 전 세계에 남아 있는 금속 활자로 인쇄된 책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2001년 9월 4일 《승정원일기》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현존하는 것은 하권 1책 뿐인데, 1800년대 말 콜랭 드 플랑시 주한 프랑스 공사가 프랑스로 가지고 갔으며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는 독일 구텐베르크의 활자보다 78년 이상 앞서 편찬되었다. 직지에 대한 오해 병인양요 때 약탈되어 간 것은 직지가 아니라 외규장각 문서이다. 직지가 프랑스로 넘어간 것은 대한제국 말기이다. 당시 주한 프랑스 공사였던 콜랭 드 플랑시(재임 1890년~1903년)가 직지를 수집해 프랑스로 가져갔다. 모리스 쿠랑(Maurice Courantㆍ1865∼1935)이 1901년에 저술한 `조선서지`의 보유판에 게재된 것 등으로 미루어 보아 1900년에 이미 수집된 것으로 추측된다. 플랑시는 우리나라에서 수집해 간 대부분 고서를 모교인 동양어학교에 기증했는데 직지는 앙리 베베르(Henri Vever, 1854∼1943)가 180프랑에 구입하여 소장하고 있다가 1950년께 유언에 따라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되었다. 그 후 직지의 존재는 잊혀졌다가 20여 년이 지난 1972년 5월 27일, 파리에서 열린 ‘책의 역사’ 전시를 통해 그 존재가 다시 알려지게 되었다. 곧바로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으로 공인받았고 2001년엔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현재는 프랑스와 반환 협상이 전개되고 있다. /위키백과
1995 - 북경 세계여성회의 개막 제4차 북경 세계여성회의가 1995년 9월 4일 평등, 발전, 평화를 주제로 개막되어 21세기에서 여성 지위를 높일 수 있는 실천적인 방안을 논의했다. 북경 중심가 북쪽의 국제회의센터에서 열린 개막식에는 명예단장 손명순 여사와 김장숙 정무제2장관 등 50여명의 우리 정부 대표단을 비롯, 1백85개 가입국 가운데 소말리아, 유고슬라비아, 사우디아라비아, 도미니카 등 7개국을 제외한 1백78개국 정부대표들과 각종 유엔 산하기구 대표 1만여명이 참석했다. 꼭 20년 전인 1975년 멕시코 시티에서 열렸던 1차 세계여성회의 GO 회의 참가자가 2천여명이었던 것에 비하면, 무려 다섯배에 이르는 수적 팽창이다. 이번 회의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실제 권한의 강화에 초점이 주어진 것. 여성들이 정치, 경제면에서 실제 권한을 가져야한다는 것이 새로운 개념으로 등장했다. 이번 대회의 또 다른 특징은 성과 임신 출산에 대한 여성들의 건강 결정권이 본격적으로 논의된 점. 여성이 자신의 성생활과 자녀수 결정에 권리를 가진다는 것은 바티칸과 회교권 국가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으나 대부분 받아들여졌다. 12일간 계속된 북경세계여성회의 정부간 회의는 9월 15일 "전세계의 여성들은 모든 인류의 이익을 위해 평등-발전-평화를 증진시키자"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북경 선언'을 채택하고 폐막됐다. /조선
- 제27회 시드니올림픽대회, 2000
이에 따라 태권도는 올림픽에서 남녀 4체급씩 8개의 금메달이 걸린 종목이 됐다.
1994 - 일본 오사카 간사이국제공항 개항 1994년 9월 4일 개항한 간사이국제공항은 일본이 21세기를 대비해 세계로 가는 일본의 새 관문으로 조성한 최첨단 공항이다. 일본공항 최초로 24시간 운영체제를 갖추고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거점공항을 지향하고 있다. 오사카 동남쪽 5Km 해상에 건설된 공항은 도로와 철도 선박 등 모든 교통수단과 연결돼 있다. 육지를 잇는 길이 3.75Km의 연육교는 상단은 왕복 6차선도로, 하단은 복선 철도가 배치돼 있다. 특히 국내선과 국제선이 같은 청사를 사용함으로써 연결탑승이 쉽다. 그러나 간사이공항은 바다를 매립했기 때문에 사용료가 세계에서 가장 비싼 공항이라는 비난을 듣고 있다. 간사이공항이 제1의 경쟁상대로 꼽는 곳은 우리나라의 인천국제공항이다. /조선
1989 - 프랑스의 소설가 조르주 심농(Simenon, Georges) 사망 심농(시므농) [Simenon, Georges Joseph Christian, 1903.2.13~1989.9.4] 벨기에 출신 프랑스의 소설가. 벨기에 리에주 출생. 아버지는 프랑스의 브르타뉴 출생이고 어머니는 벨기에 사람이다. 상세르베이대학교 졸업. 16세 때 《리에주 가제트》라는 지방신문의 통신기자가 되었고, 17세 때 처녀작을 이 신문에 발표하였다. 20세에서 30세까지 16가지의 필명을 사용하여 수많은 통속 장편을 썼다.
1982 -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서울 개막 [역사속의 오늘]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서울개막 1982년 9월 4일,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가 서울에서 개막했다. 이 대회에는 각 대륙별로 2개국씩 총 12개국이 참가하여 66게임을 벌였다. 대회를 우리나라가 유치하는 바람에 쿠바가 불참을 선언, 우리나라는 우승까지 바라보았다. 하지만 첫날 한국은 비교적 약체인 이탈리아와 시합을 벌여 충격적인 패배를 안는다. 이후 "더 이상 지지 않으면 된다. 우승의 꿈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결의로 한 게임 한 게임을 이긴 한국은 일본과 나란히 7승1패를 기록하며 결승에서 일본과 맞붙게 된다. 한국 선발은 19세의 선동열( 현 삼성라이온즈 감독) 이었다. 2대 0으로 뒤진 운명의 8회말. 9번 대타 김정수는 통렬한 중월 2루타를 터뜨려 심재원을 홈으로 불러들여 답답해하던 온 국민을 열광케 했다. 1번 조성옥이 번트로 김정수를 3루로 밀어놓고 난 다음에 등장한 김재박이 팔짝 뛰며 필사적으로 번트, 타구는 묘하게 라인 안쪽으로 굴러 들어가 안타가 됐고 그 사이 김정수는 홈으로 뛰어들어 동점을 만들었다. 이후 한대화의 홈런으로 5대 2 승리를 따낸 한국은 세계선수권대회 출전 사상 아시아지역에서는 최초의 우승을 차지했으며 선동열은 최우수선수상을 수상했다. 정보관리부 이재근 /매일신문 2008년 09월 04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0626&yy=2008
1981 - 미국의 알앤비 가수, 배우 비욘세(Beyoncé) 출생 비욘세 (지젤 놀스) [Beyoncé Giselle Knowles, 1981.9.4~ ] 비욘세 지젤 놀스(Beyoncé Giselle Knowles, 1981년 9월 4일 ~)는 미국의 알앤비 가수, 배우, 댄서이자 패션 디자이너이다. 흔히 비욘세(Beyoncé)로도 알려져있다. 비욘세는 텍사스 주의 휴스턴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에는 예술 초등학교에 입학해 그곳에서 다양한 공연을 하고 대회에 나가면서 가수의 꿈을 키워나갔다. 이후 비욘세가 인기를 얻는 계기가된 1990년대 말 알앤비 3인조 걸 그룹 데스티니스 차일드의 리더로써 활동하였고 이 그룹은 약 5000만 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리며 미국에서 음반을 가장 많이 판 걸 그룹으로 남았다. 또한 그래미 상 수상의 기회도 주어졌다. 그룹이 인기를 얻자 비욘세는 2003년에 첫 솔로 앨범 Dangerously in Love를 발매하면서 솔로 데뷔를 치렀다. 싱글 "Crazy in Love", "Baby Boy" 등을 히트 시켜 미국에서만 400만 장이 넘는 판매량과 세계에서 900만 장을 팔며 화려한 솔로데뷔를 하였다. 2004년 비욘세에게 다섯 개의 그래미상 트로피를 안겨준 앨범이기도 하다. 한편, 2005년 6월 비욘세가 가수로서 성공의 계기가된 데스티니스 차일드가 해체를 맞이한다. 2006년 비욘세의 25번째 생일 날 발매된 2집 B'Day역시 성공적이었다. 이 앨범은 전 세계 차트 10위권안에 진입했을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약 700만장 넘는 판매고를 올렸으며, 앨범 수록곡인 "Deja Vu", "Ring The Alarm", "Irreplaceable"은 전작 못지않은 히트곡이 됐다. 이 앨범 역시 비욘세에게 그래미 상을 안겨주었다. 2008년 4월에는 힙합 가수인 제이-지와 결혼했다. 이후 세 번째 앨범인 I Am... Sasha Fierce를 발매한 뒤, "Single Ladies (Put a Ring on It)"라는 히트곡을 탄생시킨다. 이 음반은 전 세계에서 600만장을 팔아들였으며, 빌보드 200 1위, 그래미 어워드 10개부문에서 노미네이트로 선정되었다. 또한 2010년 제52회 그래미 상에서는 6관왕에 올르며 하룻밤 사이에 기록을 갈아치웠다. 비욘세는 2001년부터 뮤지컬 영화 《카르멘:힙 호페라》에 출연하면서 영화 데뷔를 치렀다. 1981년 브로드웨이 작품을 재해석한 영화 《드림걸즈》의 주연으로 출연해 골든 글로브상에서 2개의 수상을 하면서 영화 배우로써도 성공을 했다. 2004년에는 자신의 패션회사인 하우스 오브 데레온을 설립했다. 2010년, 경제 전문지 《포보스》가 발표한 1년간 최고의 소득을 기록한 30세 이하의 셀러브리티 12인을 선정해 발표했는데, 비욘세는 8700만달러를 벌어들이며 1위로 선정되었고 이는 2년 연속 최고의 셀러브리티라는 기록을 세웠다. 또한 《타임》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100인" 중 비욘세가 포함되어있었다. 또한 비욘세는 미국 음반 산업 협회(RIAA)에 따르면 지난 2000년 부터 2009년까지 골드와 플래티넘 인증을 가장 많이 받았는데, 이는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보다도 더한 기록이다. 비욘세는 데스티니 차일드 시절까지 합해 2009년 12월까지 세계적으로 7,500만 장 이상의 음반 판매고를 올리고있다. 생애 /위키백과
1965 - '원시림의 성자' 알베르트 슈바이처(Schweitzer, Albert) 사망 슈바이처 [Schweitzer, Albert, 1875.1.14~1965.9.4] 슈바이처 사망 1965년 9월 4일 `20세기의 성자` `최고의 휴머니스트` `인류애의 화신` 등으로 불려진 알베르트 슈바이처가 사망했다. 독일인으로 태어났으나, 고향 알자스 카이제르스부르크가 1차 대전 후 프랑스령으로 넘어가는 바람에 그는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프랑스인이 되었다. 스트라스부르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졸업 후에는 목사와 대학강사로, 그리고 어려서부터 천부적 재질을 보인 파이프 오르간 연주가로 활약했다.
1964 - 정부, 언론보복조치 철회 1964년에 제정된 ‘언론윤리위원회법’은 겉으로는 언론의 자율규제를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관제(官製) 윤리위원회를 발족시켜 언론자유를 침해하려 한 대표적인 악법이었다. 법안이 국회를 통과(8월2일)하고 공포(8월5일)되자, 분노한 전(全) 언론인들이 들고 일어섰다. 언론인들이 투쟁 강도를 높여가자 정부는 언론사 발행인을 직접 겨냥, 사주들의 불안감을 자극했다. 이때문에 다수 언론사들이 투쟁대열에서 이탈했다. 8월28일. 이날은 각 언론사 대표가 신문발행인협회에 나가 윤리위 소집에 대한 찬반입장을 밝히는 날이었다. 정부의 압력이 얼마나 집요했던지 조선일보ㆍ동아일보ㆍ대구매일 등 5개사만 반대하고 나머지 21개사는 그새 찬성으로 돌아섰다. 정부는 이들 5개 언론사에 보복적 탄압을 가해 정부기관은 5개사 신문을 구독하지 못하도록 하고 은행은 융자회수를 무기로 압력을 행사했다. 심지어는 취재기자의 야간통행증까지 회수해갔다. 그러나 함석헌ㆍ장준하 등 사회 지도층 인사들까지 나서 정부를 비판하기 시작하자 결국 박대통령은 9월4일, 언론보복조치를 철회할 수 밖에 없었다. 법 시행도 곧 보류돼 언론계를 뜨겁게 달궜던 언론윤리위법 파동도 막을 내렸다. /조선
1963 - 프랑스의 정치가 로베르 쉬망(Schuman, Robert) 사망 슈만 [Schuman, Robert, 1886.6.29~1963.9.4] 프랑스 정치가. 룩셈부르크 출생. 제2차세계대전 후 유럽통합의 중심인물이다. 본·뮌헨·베를린·스트라스부르 각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였다. 제1차세계대전 종료 때까지 독일국민이었으나 로렌지방의 프랑스 귀속으로 1919∼1940년까지 프랑스의 하원의원을 지냈다. 제2차세계대전 때는 독일군에게 잡혔으나 프랑스로 탈주했다. 대전 뒤 인민공화파(MRP) 간부로서 1946년 비도내각의 재무장관, 1947∼1948년 총리로 일했다. 그의 최대 업적은 1948∼1953년 여러 차례에 걸쳐 외무장관을 역임하면서 유럽통합의 계기를 마련한 점이고, 1950년 5월 쉬망플랜으로 알려져 있는 유럽석탄철강공동체의 창설을 제창하여 이를 유럽 6개국간에 발족시켰다. 1952년 서독의 재군비를 인정한 유럽방위공동체조약을 성립시켰으나 프랑스의회가 비준을 거부했기 때문에 무산되었다. 1958년에는 스트라스부르의 유럽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어 유럽통합기구를 만드는 데 노력했으며, 1962년 정계를 은퇴하였다. 벨기에 브뤼셀의 EC본부 앞에 있는 광장은 그를 기념해서 쉬망광장이라 불린다. /야후 백과
1950 - 여자의용군교육대 입소식 거행 [역사 속의 인물] 한국 여군의 모태, 김현숙 대령 “모병을 실시하고 있는 중대한 위란기에 일부 비겁한 남자들은 이를 회피하기 위하여 각처를 돌아다니고 있다. 남자들의 비겁한 태도에 많은 우리 여성들은 통한을 금할 수 없는 바이다. 남녀를 막론하고 국가 총력으로 최후의 평화를 획득할 때까지 싸워야 할 것이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 김현숙 병과장은 여자배속장교 출신들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에게 여자의용군 모집을 건의했고, 그 충정을 높이 산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다. 이어 8월에는 부산지구 계엄사령부에서 여자의용군 모집에 관한 담화를 직접 발표했다. 담화문 발표 효과는 컸다. 전국 18~25세의 젊은 여성 3천여 명이 몰렸을 정도로 지원율이 높았다. 심지어 혈서를 써서 지원하는 여성들도 있었다. 1950년 9월 1일 부산에서 제2훈련소 예속으로 500명 정원의 여자의용군교육대가 창설됐고, 4일 입소식이 거행되었다. 조국과 시대의 부름에 기꺼이 응답했던 여자의용군을 직접 가르친 김현숙 병과장은 1953년 3월 한국 여군 최초로 대령으로 진급했고, 1954년에는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으로부터 공로훈장을 수여받았다. 1960년 9월 30일 전역한 그는 한국 여군 탄생의 주역이자 한국 여군의 역사 그 자체였다. 제8대 전국구 의원과 평화통일정책 자문위원을 거쳐 1981년 11월 별세했다. 배성훈 편집2부장 /매일신문 2013년 09월 04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4143&yy=2013
1937 - 오스트레일리아의 수영선수 돈 프레이저(Fraser, Dawn) 출생 프레이저 [Fraser, Dawn, 1937.9.4~ ] 프레이저[ Dawn Fraser ] 오스트레일리아의 수영선수. 여자 선수로서는 최초로 1956, 1960, 1964년 올림픽 대회에서 3연속 금메달을 획득했다. 1956~64년에 그녀는 100m 자유형에서 9차례 연속으로 세계신기록을 수립했다. 1964년 2월 29일 노스시드니에서 세운 100m 자유형 58.9초의 기록은 1972년 1월 8일까지 깨지지 않았다. 당시 같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수영선수인 셰인 굴드가 시드니에서 58.5초의 기록으로 새로운 세계신기록을 수립했다. 1956년 멜버른 올림픽 대회에서 프레이저는 100m 자유형과 400m 자유형 계주에서 금메달을 땄으며, 400m 자유형에서 은메달을 땄다. 1960년 로마 올림픽 대회와 1964년 도쿄[東京] 올림픽 대회에서는 다시 100m 자유형에서 금메달을 획득했으며, 400m 계주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다. 1960년 로마 올림픽 대회에서는 400m 혼영 계주에서도 은메달을 땄다. 1964년 도쿄 올림픽 대회에 앞서 그해 3월에 그녀는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었기 때문에 그해 도쿄 올림픽 대회에서의 선전은 특히 대단한 위업으로 평가받고 있다. 1957년 프레이저는 미국 선수권대회 여자 자유형 100m에서 우승했다. 오랫동안 깨지지 않았던 100m 세계신기록 외에 220야드(약 200m)에 이르기까지 5개의 자유형 종목에서 세계 스탠더드 기록을 수립하기도 했다. 이 기록들은 모두 1970년대초에 깨졌다. 해리 고든과 공동 집필한 그녀의 자서전 〈수면 아래에서 Below the Surface〉가 1965년에 출판되었다. 같은 책이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금메달의 소녀 Gold Medal Girl〉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브리태니커
1908 - 미국의 소설가 리처드 라이트(Wright, Richard) 출생 라이트 [Wright, Richard, 1908.9.4~1960.11.28] 라이트는 백인들의 흑인차별대우에 저항한 미국의 흑인작가이다. 조부모는 노예였으며, 아버지는 라이트가 5세 되던 해 가출해 가난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여러 직업을 전전한 끝에 북부 이주 대열에 합류해 테네시 주의 멤피스로 갔다가 시카고로 옮겼다. 그곳에서 '연방작가 프로젝트'를 통해 글을 쓸 기회를 얻었다. 1932년 공산당원이 된 뒤 1937년 공산당지 <데일리 워커 Daily Worker>의 편집장이 되었고, 이후 미국작가동맹의 부회장이 되었다. 중편소설집 <톰 아저씨의 자식들 Uncle Tom's Children>을 발표하면서부터 주목받기 시작했다. 백인들의 차별대우에 저항하는 작가의 의지가 잘 드러나 있는 <미국의 아들 Native Son>(1940)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미국의 아들>은 다른 흑인작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어 제2차 세계대전 후 문학을 통한 저항운동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작품은 1941년 브로드웨이에서 상연되어 성공을 거두었으며, 1951년 아르헨티나에서 만든 영화에서는 작가 자신이 주인공을 맡았다. 이밖에 <지하에 살았던 남자 The Man Who Lived Underground>(1942)·<흑인 소년 Black Boy>(1945)·<방관자 The Outsider>(1953) 등을 발표했다. <미국의 탐욕 American Hunger>은 그가 죽은 뒤인 1977년에 출간되었다. /브리태니커
"블루스, 흑인 영가, 민담들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다. (중략) 이 모든 것들이 흑인들의 지혜가 흘러나오는 통로를 이룬다."
- 리처드 라이트
1907 - 노르웨이의 작곡가 에드바르 그리그(Grieg, Edvard) 사망 그리그 [Grieg, Edvard (Hagerup), 1843.6.15~1907.9.4] 노르웨이의 작곡가. 베르겐 출생. 스코틀랜드 가계(家系) 출신, 어머니에게서 피아노의 기초를 익힌 뒤 1858년부터 4년간 라이프치히음악원에서 수학하였다. 이때 R.슈만과 J.멘델스존의 영향을 받았으며, 게제 ·노르들라크 등 민족주의적인 작곡가들과 사귀면서 독자적 작풍을 확립하였다. H.입센의 작품을 바탕으로 한 부대음악(附帶音樂) 《페르귄트》(1876 초연)와 《피아노협주곡》(1868)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몸에 밴 고전적 형식에서 민족적인 음악을 찾으려고 애쓴 그는 《제3바이올린소나타》(1885∼1887)에서 피아노곡인 《노르웨이의 농민무용》(1902)에 이르는 일련의 작품 속에 민족음악의 선율과 리듬을 많이 도입하였으며, 민족적 색채가 짙은 작품을 다수 만듦으로써 오늘날 노르웨이 음악의 대표적 존재가 되었다. /naver
1905 - 중국 푸단公學 설립 [책갈피 속의 오늘]1905년 中푸단公學설립 1905년 9월 4일 중국 상하이(上海)에 푸단(復旦)공학이 설립됐다. 푸단공학은 현재 푸단대의 전신이다. http://news.donga.com/3//20060904/8346907/1
1892 - 프랑스의 작곡가 다리우스 미요(Milhaud, Darius) 출생 미요 [Milhaud, Darius, 1892.9.4~1974.6.22] 프랑스의 작곡가. 남프랑스의 엑상프로방스 출생. 유대계 프랑스인으로 어릴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고, 1909년 파리음악원에 입학하여 처음에는 바이올린을 전공하였으나 다시 작곡에 전념, 뒤카와 댕디 등에게 사사하여 재학시절부터 창작력에 넘친 작품을 발표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시인 외교관 클로델의 비서로 브라질에 체재하면서 그 곳 민족음악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귀국한 뒤 1920년에는 이른바 ‘6인조’가 탄생하여 그는 그 일원으로 오네게르와 함께 활발한 창작활동을 계속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미국에 망명하였으며, 대전 후에는 격년으로 도미하여 작곡의 교편을 잡는 한편, 1962년까지 파리음악원의 작곡과 교수로 있었다. 다조(多調) ·복조(複調)에 의한 폴리포니를 특징으로 하였고, 모든 음계를 친근하기 쉽도록 선율과 불협화음을 교묘하게 융합하고 있다. 클로델의 대본에 의한 오페라 《크리스토프 콜롱》(1928), 발레음악 《옥상의 황소》(1929) 《세계의 창조》(1923), 관현악곡 《브라질의 추억》(1921) 《프로방스모음곡》(1936) 등 여러 분야에 걸친 방대한 작품이 있다. /naver
1886 - 아파치 전사 제로니모 미군에 항복 [어제의 오늘]1886년 아파치 전사 제로니모 미군에 항복 ㆍ미군도 존경한 전설적 인디언 1886년 오늘, 아파치 전사였던 제로니모가 미군에 항복했다. 이로써 북미 원주민과 유럽계 이주민 사이의 치열했던 전투는 사실상 끝났다. 제로니모는 1829년, 오늘날의 멕시코 혹은 미국 애리조나 지역에서 태어났다. 그의 원래 이름은 ‘고야틀레이’였는데, 이는 ‘하품을 하는 자’라는 뜻이었다. 멕시코인들은 성 제로니모 축일에 고야틀레이의 습격을 받은 후, 그를 제로니모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백승찬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경향신문 2009-09-03 17:54:59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0909031754595&code=100100&s_code=ap005
1882 - 독일의 소설가, 극작가 레온하르트 프랑크(Frank, Leonhard) 출생 프랑크 [Frank, Leonhard, 1882.9.4~1961.8.18] 독일의 표현주의 소설가, 극작가. 부르주아 사회에 의한 개인 영혼의 파멸을 주제로 하는 작품을 주로 썼으며 선정주의와 간결체의 산문을 사용하여 극으로 만들었다. 1904년 뮌헨에서 그림을 공부하여 상업미술가로 일한 후 문학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해 공공연히 반대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1914년 스위스로 도피해야 했다. 같은 해 그의 첫번째 책 〈도둑떼 Die Räuberbande〉(1914)를 발간했다. 이 소설은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만 '착한 시민'으로 끝나고 마는 반항적인 젊은이들의 이야기인데, 중산층의 편협함을 익살스럽고 사실적으로 폭로함으로써, 그의 주요주제를 구체화시키고 있다. 스위스에 있는 동안 억압적인 교육제도를 비판하는 〈동기 Die Ursache〉(1915), 전쟁을 극렬하게 비난하는 〈인간은 선량하다 Der Mensch ist gut〉(1917)를 펴냈다. 1918년 독일로 돌아왔으며, 자본주의 타도의 필연성과 사회주의 건설에 대한 그의 믿음은 소설 〈시민 Der Bürger〉(1924)·〈옥센푸르트의 남성4중창 Das ochsenfurter Männerquartett〉(1927)에 나타나 있다. 같은 시기에 〈카를과 안나 Karl und Anna〉(1926)라는 걸작을 썼는데, 이 작품은 전우의 아내를 유혹하는 한 병사의 이야기를 감상적이지만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1933년 그의 책들은 나치에 의해 판금되었고 불태워졌으며, 그는 다시 스위스로 이민가야 했다. 그곳에서 파리로 갔는데, 1940년 강제수용소에 갇혔다가 여러 번의 탈출과 재수감을 거듭한 뒤 미국으로 도망쳤다. 1950년 독일로 다시 돌아와 2년 후 그의 마지막 주요작품인 〈왼쪽은 심장이 있는 곳 Links, wo das Herz ist〉(1952)을 출간했다. 이 작품은 자신을 다소 위장한 자전적 소설이다. /브리태니커
1870 - 프랑스 나폴레옹 3세 퇴위, 제3공화국 선포 프랑스 나폴레옹 3세 퇴위 1870년 9월 4일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한 후 퇴위했다. 나폴레옹 3세는 나폴레옹 1세의 조카로, 1850~52년 프랑스 제2공화국의 대통령과 1852~71년 제2제정의 황제를 지냈다. 나폴레옹 3세는 나폴레옹 1세의 동생이자 1806~10년 네덜란드 왕을 지낸 루이 보나파르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832년 나폴레옹 1세의 외아들인 라이히슈타트 공작이 죽자 자신만이 정당한 왕위계승자라고 생각해 수차례 쿠데타를 기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마침내 1848년 12월 선거에서 승리해 대통령이 되었으나 권력의 장기화를 목적으로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새로운 헌법을 제정했다. 이어 1852년 11월 제정으로의 복귀를 결의함으로써 프랑스 제2제정의 황제가 되었다. 그는 전제정치를 통해 안정과 번영을 구가했으나 말년의 실정으로 서서히 몰락했다. 1859년 이후에는 제국의 자유화를 무리하게 추진해 경제와 외교 부문에서 실패를 거듭했다. 1870년 7월에는 스페인 왕위계승 문제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프로이센의 자존심을 건드린 결과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을 야기했다. 9월 2일 프로이센에 항복하고 포로가 된 나폴레옹 3세는 9월 4일 폐위되었고, 그와 동시에 프랑스에서는 제3공화국이 선포되었다. /브리태니커
1866 - 미국의 발명가, 잠수함 제작자 사이먼 레이크(Lake, Simon) 출생 레이크 [Lake, Simon, 1866.9.4~1945.6.23] 미국의 발명가. 공해상에서 널리 운항되었던 ' 아고노트호'(Argonaut)라는 잠수함을 건조했다. 1894년 그의 최초의 실험 잠수함인 ' 아르고 주니어호'가 건조되었는데, 길이가 약 4m이고 선체는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수동식 바퀴로 바다 밑을 이동했다. 1897년 건조된 아르고호는 길이가 11m이고, 30마력의 가솔린 기관으로 동력을 얻었다. 기관과 승무원에게 필요한 공기는 물위에 떠 있는 호스(hose)를 통해 끌어들였으며, 나중에는 고정된 관(tube)을 사용했다. 이 잠수함 역시 바닥에서 움직일 수 있도록 바퀴가 있었다. 1898년 버지니아의 노퍽에서 뉴욕 시까지 약 500㎞를 항해했다. 그가 만든 약 18m 길이의 ' 프로텍터호'(1906)를 미해군에서 사려고 했을 때 미의회는 이를 부결시켰다. 그래서 이것을 소련에 판매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 취항시켰다. 그는 수년 동안 그곳에서 잠수함의 재조립과 승무원훈련을 감독했다. 소련의 요청으로 잠수함을 몇 척 더 건조했고, 미국에 판매한 55척을 포함해서 제1차 세계대전 동안 100척 이상의 잠수함을 건조했다. 또한 잠망경 개발과 수중 기어의 발명에도 참여했다. /브리태니커
1843 - 슬로바키아의 작곡가, 지휘자 얀 레보슬라프 벨라(Bella, Ján Levoslav) 출생 벨라 [Bella, Ján Levoslav, 1843.9.4~1936.5.25] Ján Levoslav Bella (4 September1843, Liptovský Mikuláš - 25 May1936, Bratislava) was a Slovakcomposer and conductor, who wrote in the spirit of the Nationalist Romantic movement of the 19th Century. http://en.wikipedia.org/wiki/J%C3%A1n_Levoslav_Bella
1837 - 미국의 화가 사무엘 모스(Morse, Samuel), 전신기 발명 1832년 이탈리아에서 미술연구차 유학하다가 돌아오던 선상(船上)에서 최신 전자기학(電磁氣學)에 관한 내용을 알게 되어, 전신기를 만들어 보기로 결심, 대학 동료인 L.D.게일과 공장주(工場主) A.베일의 협력을 얻어 독자적인 알파벳 기호와 자기장치(自記裝置)를 1837년에 완성하였다. 그 기호가 개량된 것이 모스부호이다. 처음에는 국가자금과 유럽에서의 특허권 획득에 실패했으나, 1843년 워싱턴~볼티모어 간의 시험선(試驗線) 가설비 3만 달러의 예산을 획득하여, 이듬해 5월에 유명한 ‘하느님이 만드신 것’이라는 말을 베일 앞으로 송신하였다. 1856년, H.시블리가 웨스턴유니언 전신회사를 설립한 다음부터 모스는 특허를 통해 처음으로 그의 발명의 보상을 받았다. /naver
1824 -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안톤 브루크너(Bruckner, Anton) 출생 브루크너 [Bruckner, (Josef) Anton, 1824.9.4~1896.10.11]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린츠 근처의 안스펠덴 출생. 학교 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그도 역시 교사가 되기 위해 교육을 받은 뒤 조교원까지 지냈으나, 그 사이 피아노·오르간·통주저음(通奏低音)·화성·대위법 등을 공부하고, 또 성플로리안수도원의 오르간 연주자로 일하면서 J.S.바흐의 작품과 G.P.팔레스트리나, A.가브리엘리 이후의 교회음악 연구를 계속하여, 그 스스로도 《레퀴엠》(1854)과 《미사 솔렘니스》(1854) 등을 쓰고 그는 30세가 넘어서야 교사직을 떠나 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1855년 린츠대성당의 오르간연주자가 되어 오르간 연주자와 즉흥연주자로서 인정을 받았으며, 동시에 린츠극장 악장인 키츨러에게서 악식론(樂式論)과 악기론(樂器論)을 배워, 고전파와 낭만파의 기악곡형식을 깊게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키츨러를 통하여 바그너의 작품에 접하여 창작에 자극을 받게 되었다. 린츠시대에 그는 미사곡 3(제1·제2·제3)과 교향곡 2(0번·제1번) 같은 큰 곡을 작곡하고 1868년에는 빈음악원의 교수가 되어 빈에 정주하였으며, 1878년에는 빈대학 강사도 겸하였다. 제2번부터 제8번까지의 교향곡은 이 시기에 작곡되었다. 브루크너는 바그너에게 깊이 심취하여 1865년에는 그와 만나고 작품도 헌정(獻呈)하였으며, 이러한 그의 행동이 절대음악을 중시하는 전통파(反바그너派로 대표격은 한슬리크)의 반감을 사게 되었으나 이에 저항하는 그를 위해 G.말러·괼레리히·샬크형체·레베 등이 결속하여 그를 도와 주었으며, 그도 《관현5중주곡》(1879) 《테 데움》(1881) 《제7교향곡》(1883) 《제 8교향곡》(1885)의 성공으로 비로소 작곡가로서의 명성이 높아졌다. 만년에는 병에 걸려 음악학교의 직책을 사임하고, 합창곡 《타펠리트》(1893) 《헬골란트》(1893) 등 작품을 썼을 뿐 창작보다는 오히려 옛 작품인 교향곡의 개작과 퇴고(推敲)에 힘을 기울였으며 《제9교향곡》을 완성 못하고 사망하였다. 1891년 그는 명예박사학위도 받았다. 또 그는 19세기 후반의 최대 교회음악가였을 뿐 아니라, 최근에는 최대의 교향곡 작곡가로서도 평가되고 있다. /naver
1809 - 폴란드의 시인, 극작가 율리우슈 수오바츠키(Słowacki, Juliusz) 출생 수오바츠키(스워바츠키) [Słowacki, Juliusz, 1809.9.4~1849.4.3] 폴란드의 시인·극작가. 아담 미츠키에비치, 지그문트 크라신스키와 더불어 폴란드 낭만주의 문학운동을 이끌었으며, 수준높은 기교와 풍부하고 독창적인 어휘, 강한 이미지 등으로 상징주의 시인의 선구자가 되었다. 대학교수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리투아니아 빌뉴스에서 교육을 받다가 1829년 바르샤바에 있는 재무부에 들어갔으나, 시를 읽고 쓰는 데 몰두했다. 1830년 봉기 때 반란정부의 대표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1831년 재무부에서 사직하고 드레스덴·파리·런던을 여행했는데 아마도 급송 공문서를 전달했던 듯하다. 1833~35년에 스위스에 있다가 1년 뒤 이탈리아로 가서 〈스위스에서 W Szwajcarii〉(1839)라는 연애 목가시를 썼다. 1837~38년의 중동여행은 이야기체 시 〈성지여행 Podróż do ziemi świȩtej〉(1866 사후 출판)에 묘사되어 있다. 1830년 봉기 이후에는 폴란드에서 도망쳐온 망명객들이 몰려 있던 파리에서 망명생활을 했다. 파리에서 어머니에게 쓴 편지는 폴란드 산문의 고전으로 꼽힌다. 그밖의 작품으로는 산문시 〈안헬리 Anhelli〉(1838)가 있으며, 여기서 그는 폴란드 해방의 전망을 스스로의 계획에서 찾았다. 이같은 환상적 역사관은 1847년에 일부 발행되고 1925년에 완간된 시집 〈영혼의 왕 Król-Duch〉에도 나타나 있다. 그는 또 셰익스피어, 그리스·로마의 고전 드라마, 칼데론, 파리에서 나온 당시의 작품 등에서 영감을 받아 다양한 희곡을 썼다. 〈릴라 베네다 Lilla Weneda〉(1840)·〈살로메이의 은빛 꿈 Sen srebrny Salomei〉(1844), 반(反)낭만주의 희극 〈환상 Fantazy〉(1843)과 같은 대부분의 희곡은 그가 죽은 뒤인 1866년에 출판되었다. 그의 희곡은 후세 극작가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고, 폴란드에서는 지금도 자주 상연되고 있다. /브리태니커
1768 - 프랑스의 작가, 외교관 프랑수아 샤토브리앙(Chateaubriand, François) 출생 샤토브리앙 [Chateaubriand, François-René de, 1768.9.4~1848.7.4] 19세기 프랑스 낭만파 문학의 선구자. 브르타뉴 해변 생말로의 유서 깊은 귀족의 집안에서 출생. 몰락한 귀족의 어두운 그늘이 감도는 집안에서 오직 모래와 파도만을 벗하면서 자랐다. 1786년 아버지의 명을 받아 육군에 입대, 소위로 나발 연대에 근무하다가 같은 해 가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군에서 제대, 1789년부터 파리로 나와 많은 문인들과 사귀었다. 그러나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여 1791년 단신으로 도미(渡美), 북미의 자연을 만끽하면서 여행을 하기도 하였다. 원래 그는 루소와 볼테르의 영향을 받아 종교를 부정하였으나, 1798년 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의 어머니와 누이가 옥중에서 희생당하자 그리스도교에 복귀, 호교론(護敎論)의 열렬한 투사가 되어 대저 《그리스도교의 정수 Le g暴nie du christianisme》(1802)를 썼다. 이 책에서 그는 자연·문학·예술·고딕 건축 및 제식(祭式) 등의 아름다움을 감동적인 필치로 묘사했다. 이 밖의 작품으로 《순교자》(1809) 《예루살렘 기행》(1811) 등이 있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정수》로 나폴레옹의 인정을 받아 1803년에 로마 대사관의 비서관으로 임명되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외교계에 진출, 왕정복고 후에는 대사로서 각지에 부임하고, 한때는 외무대신이 되었다. 그러나 1830년 7월혁명 이후는 관계를 물러나 방대한 자서전 《무덤 저편의 추억 M暴moires d'outre-tombe》(1848∼1850)을 집필하였다. /브리태니커
1596 - 네덜란드의 시인, 외교관 콘스탄틴 호이헨스(Huygens, Constantijn) 출생 호이헨스 [Huygens, Constantijn, 1596~1687] 네덜란드의 시인·외교관. 진정한 네덜란드 문예부흥의 마지막 거장으로 다재다능했으며, 외교·학문·음악·시·과학 등 여러 분야에서 눈부신 공헌을 했다. 외교직에 있었던 까닭에 여러 차례 영국을 다녀왔는데, 그곳에서 존 던과 프랜시스 베이컨을 만나 큰 영향을 받았다. 존 던의 시 19편을 번역하는 한편 베이컨으로부터 '신학문'을 소개받고 이를 시의 주제로서 네덜란드에 소개했다.
저서에는 도회지 여성들의 저속한 몸치장을 풍자한 〈우아한 어리석음 Costelyck mal〉(1622), 극단적인 하급선원들의 언어로 씌어진 〈선상 이야기 Scheepspraet〉(1625), 세속적인 소극(笑劇) 〈Trijntje Cornelis〉(1653) 등이 있다. 시집 〈나태 또는 할 일 없는 시간 Otia of ledighe uren〉(1625)·〈수레국화 Korenbloemen〉(1658)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시를 '소일거리'로밖에 여기지 않았다. 3편의 자전적 작품 가운데 하나인 〈매일의 작업 Dagwerck〉(1639)은 당대의 지적 풍토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고 있다.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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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