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리
竹山里는 산에 대[竹]가 많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일로읍 소재지에서 남으로 약 2㎞ 떨어진 거리에 있으며 죽산, 양지촌, 당월촌, 도장포, 영화정, 삼천동 등 6개의 마을로 이루어졌다. 원래 무안현 노촌면에서 이로면을 거쳐 일로면 그리고 일로읍으로 바뀌었다.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영화정리, 정월동, 도장동, 양지동, 당월촌, 사량동, 무포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다시 무안군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문헌에 따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무안현 노촌면 양지촌리 정월동리 도장포리 죽고지리 당촌리 등으로 나온다. 1912년의 자료에도 노촌면 양지촌리 정월동리 도장포리 죽고지리 당촌리 등으로 나오며 1917년의 자료에는 일로면 죽산동 당월촌 도장포 영화정 양지촌으로 나온다. 이어 1987년의 자료에는 일로읍 죽산리 영화정 정월동 도장동 양지촌 사양동 무보동 죽산동 당월촌 등으로 표기되었다.
양지촌에 장흥고씨와 나주나씨 도장포에 전주이씨 영화정에 해주오씨 등의 집성촌이 있다. 당월촌에 자방포 관련 언장비와 선정불망비 군수비가 있으며 양지촌엔 장흥고씨 제각인 경모재와 2개의 비가 있다. 죽산마을에는 절부비가 있다.
화살촉을 만드는 죽고지라 불렸던 마을 - 죽산1리 竹山
죽산과 당월촌 삼천동 조치미 마을은 호암산(虎岩山)을 주산으로 하고 있다. 죽산 마을은 죽산1리에 해당하는 마을로 조리형국이다. 안산과 뒷산 주변에 대가 많아 조선시대에는 화살촉을 만드는 마을이란 의미의 ‘죽고지(竹고지)’라 불렀다. 그러나 일로면의 초대 면장인 김상면(호-죽헌, 1862-1928)씨가 현재의 이름인 죽산으로 바꿨다고 한다. 호암산에 있는 범바위는 남창천의 노루를 바라보며 누워있는 형국이라 한다.
‘고지’는 순 우리말로 명사인데 호박, 박, 가지, 고구마 따위를 납작납작하거나 잘고 길게 썰어 말린 것을 말한다. 국어사전을 보면 ‘참나무고지’는 활을 만들기 위하여 다듬어 놓은 참나무를 뜻한다고 한다. 해서 ‘죽고지 마을’ 하면 활을 만들기 위하여 대를 다듬는 마을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고지’는 해안선이나 육지 또는 평야지대의 산기슭이 볼록하게 튀어나온 지형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원래 죽산 마을은 피난지였으며 장목등 아래의 마을 중에서 가장 큰 마을이기도 하다.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온 사람은 장수황씨로 임진왜란 이전부터 살고 있었는데 임란으로 폐촌이 된 후에 남양홍씨와 전주최씨가 이곳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족보 등 자료가 없어 언제 누가 들어왔는지를 확인할 수가 없었다.
전해지는 말로는 당시 최씨가 들어올 때는 이곳에 17가구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모든 집들이 집이라 할 수도 없는 곳에서 거주했다고 한다. 이유인즉 양세(현재의 세금)를 내지 않기 위해 반듯한 집이 아닌 굽은 나무로 집을 짓고 문도 가마니를 올리고 내리는 형태였다고 한다. 현재는 전주이씨 김해김씨 등 여러 성씨가 사는 복합 마을이다.
죽산 마을에는 세 그루의 커다란 당산나무가 있었다. 이암나무골의 이팝나무, 당월촌에서 넘어오는 고개의 팽나무 그리고 할미재의 괴목나무이다. 이중 이팝나무는 오래 전 태풍에 없어지고 팽나무와 괴목나무가 남아 있다. 주민들은 해년마다 이 괴목나무에 당산제를 모시고 있다. 정월 보름에 거리굿을 지내고 마을의 안녕과 한해의 풍년 농사를 기원하며 지내는데 한참 동안 지내지 않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당산제를 지내지 않으면서부터 마을에 변고가 자주 생기자 주민들의 합의로 다시 지내기 시작하여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마을 뒤에는 토기를 구웠던 곳이 있다. 지금도 그 주변에는 옹기와 토기 등이 나온다고 한다.
동학의 흔적이 있어
이 마을에는 1940년에 향교로부터 열부상을 받은 주민이 있다. 주민 김광조씨의 모친인 나주 임씨로 초대 일로 면장이었던 김상면씨의 며느리이기도 하다. 또한 김상면씨가 동학혁명 때 이 지역의 집강으로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나주김씨 족보에 집강을 역임하고 경세제민으로 상을 받았다는 기록이 나오기 때문이다. 執綱은 面 또는 里의 책임자를 나타내기도 하고 동학혁명 때 六任 중 하나의 직책을 지칭하기도 한다. 또한 김상면씨는 당월촌에 있는 ‘경성궁혁폐선정불망비’ 건립의 간사로 나오기도 한다. 이비는 1907년에 세워졌다.
뿐만아니라 후손인 김광조씨의 증언에 따르면 할머니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라며 ‘동학난리 때 당신 집에서 농민군들이 회의를 하고 사람을 잡아다가 벌을 주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나주김씨 집성촌인 몽탄면 사창 마을에서는 동학봉기 때 4명의 접주가 관군에게 붙잡혀 죽은 사실과 많은 사람들이 동학에 관여한 흔적이 있기 때문에 같은 일가의 사람들끼리 연관이 되지 않았을까 추정되기도 한다.
이 마을은 5-60년대 연날리기로 널리 알려진 마을이다. 지형적인 조건이 바람을 잘 타는 곳이 있어 연날리기에 안성마춤이다. 또한 마을 주변에 연 만들기의 주 재료인 시누대가 많이 있어 너도나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죽산 마을과 삼천동 마을 사이에는 호암산의 맥을 이은 재가 있는데 주민들은 할미재라 부른다. 지금은 아스팔트 도로가 나 있지만 예전에는 신작로로 구루마(손수레)길이었다. 할미재는 사연이 있다.
죽산 마을에는 자식과 남편을 먼저 보내고 혼자 사는 할머니가 있었다. 할머니는 날씨가 좋으면 언제나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가 일로읍으로 이고 가서 팔아 생활비에 보태 썼다. 그렇게 근근히 생활하던 어느날 나무를 머리에 이고 재를 넘으려던 할머니가 넘지 못하고 나무를 안고 길에서 고꾸라져 숨을 가뒀다. 지나가던 길손의 통고로 할머니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 주민들은 할머니를 재에다 묻고 재의 이름을 할미재라 부르며 고생만 하다 돌아가신 할머니의 넋을 위로했다. 이후 할미재의 당산나무에 제를 올리고 있다.
이 마을은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한 마을이다. 실지로 할미재를 사이에 두고 삼천동과 이 마을의 겨울과 여름 기온 차이는 시베리아와 제주도의 차이라고 한다. 여름에는 시원해 일로읍의 사람들이 피서를 올 정도라고 한다. 마을 앞에 큰샘이 있다. 물이 얼마나 잘 나오는지 68 · 69 가뭄 때도 넘쳤던 물이다. 당월촌이나 도장포 등 인근 마을에서 물을 길러 가기도 했다.
마을은 여러 성씨가 사는 복합성씨의 마을이지만 주민들의 목소리가 마을 밖으로 벗어난 적이 없다고 한다. 주민들간 문제가 발생하면 서로 협의를 통해서 처리했으며 단합과 양보의 미덕이 주민들 사이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예전 마을회관을 지을 때도 주민들이 십시일반으로 거출해서 건축하였다. 마을에 공공기관이 많다. 진료소가 있으며 교회가 들어서 있다. 또한 2010년에 일로초등학교로 통합된 죽산분교가 있다.
남아있는 지명으로 이암나무거리 뒷잔등 자작골 마당바위 살망태 도투마리골 개골 바윗등 도장포마을 뒷산인 중매산 등이 있다. 할미재 아래에는 1976년에 세워진 나주나씨 절부비가 있다.
자연마을명 '죽고지'에 대한 이견
글쓴이: 고정석 번호 : 191조회수 : 12007.09.14 20:46
원래 '고지'는 순 우리말로 명사인데 호박, 박, 가지, 고구마 따위를 납작납작하거나 잘고 길게 썰어 말린 것을 말한다. 국어사전을 보면 '참나무고지'는 활을 만들기 위하여 다듬어 놓은 참나무를 뜻한다고 한다. 해서 '죽고지 마을'하면 활을 만들기 위하여 대를 다듬는 마을이라고 할 수 있다.<본문인용>
본문의 내용 중 위에 인용한 내용은 잘못된 것으로 보입니다.
'-고지'는 때에 따라 ‘-고지/-구지/-꾸지’로도 불리는데 '-고지' 系 지명은 본래 ‘곶(串,岬)’에서 파생한 변이형태입니다. ‘곶+이=고지’의 형태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곶’은 지세환경으로 볼 때 해안선이나 육지 또는 평야지대의 산기슭이 볼록하게 튀어나온 지형을 가리키는데, 해안선이 오목하게 들어간 곳을 뜻하는 ‘-기미/-지미/-구미/-금’ 系 지명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죽산'이 원래 바닷가였던 점에 착안한다면 당연히 ‘곶’의 의미인 '-고지'계 지명접미사로 보아야 합니다.
다음은 무안지역에서 나타나는 '-고지'계 지명어입니다.
◦ 돌고지(운남 남촌), 청룡고지(운남 남촌), 독고지(일로 복룡)
◦ 당당구지(해제 유월), 세구지(해제 학송), 뒤구지(몽탄 이산), 대삭구지(운남 성내), 진구지(해제 광산 광천)
◦ 언꾸지(운남 내리 언동), 앞꾸지(운남 학례), 뒤꾸지(몽탄 이산)
도청이 들어서면서 따뜻해진 마을 - 죽산2리 良芝村
양지촌은 죽산2리에 속한 마을로 주변에 지초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자료로 살펴 본 마을 이름의 한자가 시대마다 다르게 표기되어 있다.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무안현 노촌면 陽之村으로 나오고 1912년의 자료엔 무안군 일로면 良芝村으로 그리고 1917년의 자료엔 일로면 죽산리 良支村으로 나온다. 최근의 자료인 1987년엔 일로읍 죽산리 陽芝村으로 나온다. 하지만 주민들은 良芝村의 표기가 맞다고 한다. 마을 입구의 표지석에도 良芝村으로 나온다. 참고로 장흥고씨 입향조를 모시는 경모재 옆에 있는 묘의 비문에는 이 마을을 遊島로 표기하고 있다.
이 마을엔 원래 장수황씨가 살았다. 주민들은 마을 뒤 연고 없는 고총들은 대부분이 황씨 묘라고 한다. 하지만 마을엔 황씨들이 한 가구도 없다. 현재는 장흥고씨 나주나씨 등 여러 성받이가 살고 있다.
장흥고씨 입향조는 고처대(자-만중, 호-죽포, 1651-1692)이다. 공은 기우가 청수하고 학문이 높았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이곳에 은거하여 자연을 벗 삼아 일생을 보냈다. 마을에 공을 모신 재각이 있다. 마을유래지에는 ‘400여년 전 광산에서 살던 장흥고씨 고처대에게 어명을 내려 지금의 이곳 陽芝村이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니 사방 30리를 다스리라는 명을 받고 정착하게 되었다’ 고 기록하고 있다.
나주나씨 입향조는 나흥경(자-희원, 1711-1771)이다. 청호리 소포 나덕명의 후예로서 보성에서 이 마을 장흥고씨에게 장가를 오면서 이주한 것으로 여겨진다. 탐진최씨 입향조는 최용흠(1813-1893)이다. 탐진 최씨들은 마을 앞에 간척지가 형성되면서 이주해온 사람들이다. 마을회관 앞 와비에는 양지촌 마을 유래를 ‘조선시대 고씨 나씨 최씨 선비가 입향하여 의형제를 맺고 살면서 마을 언덕에 지초를 심고 서로를 선인과 군자 사이로 의롭게 살아오면서 마을이 시작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마을은 이 넘어(이너매) 저 넘어(저너매) 노랑섬 장자등 농장 새언안 등의 마을로 이루어졌다. 뒷갓뫼라 불리는 언덕을 뒤로 하고 走狗山이라 부르는 장흥고씨 선산을 왼쪽으로, 오른쪽은 영산강 뻘등이 있다. 마을 앞은 건네 밭이 가로 막고 있으나 그 너머에는 간척지가 조성되어있다. 하지만 달롱개산이라고도 부르는 주구산에서 살펴보면 영산강을 향해서 힘차게 뻗어내린 한 맥으로 보인다. 예전엔 이 마을이 섬이었을 것으로 여겨지며 농장이 개 밥그릇 역할을 하였다.
마을 오른쪽에 있는 장자등은 포구였다.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인들이 주민들의 식량을 강제로 뺏어 자기 나라로 보냈던 수탈 창구였으며 50년대 60년대에는 주민들이 수산물을 잡아서 또는 짚으로 마람을 엮어서 목포로 팔러나갔던 경제통로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어려웠던 시절 목포시민들의 인분이나 퇴비 등을 실어와 거름으로 활용해 다른 마을보다 농사를 기름지게 경작해 아이들을 교육시키게 만들었던 고마운 포구이기도 하였다. 당시 길 옆에는 인분을 숙성시키기 위한 구덩이들이 많이 있었다. 현재는 이 포구 앞에 택지가 조성되고 있다.
노랑섬은 黃島라고도 한다. 누런 소나무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는데 예전에는 아름드리의 소나무가 많이 있었다고 한다. 다른 기록엔 누리섬이라고도 표기되었다.
우렁막음창골창이었던 마을
주민들은 이 마을을 우렁막음창골창이라 불렀다. 그만큼 외지고 구석진 곳에 있다는 말이다. 지도로 보아도 일로의 변두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간척이 되기 전에는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형의 지세였다. 하지만 지금은 들판 건너에 도청이 들어서면서 상전이 벽해 되고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는 말이 실감 나는 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이 생활고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마을 앞에 간척지가 형성되고서 부터이다. 조선시대 중기 이후 망월리의 전주이씨와 광산에서 이사 온 장흥고씨들이 마을 앞 바다인 장호를 조금씩 매립하다가 더욱 확대하여 제방을 쌓았다. 사양동에서 주구산까지 매립하여 만든 땅은 70여 정보 되는데 새로 제방을 막아서 생긴 땅이라는 의미로 지금도 새언안들이라 칭한다. 새언안들은 도장포 영화정 앞의 간척지들이다.
이후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는 목포에 사는 미야끼가 오오까상에게 마을 앞 뻘밭을 인수 받아 장자등과 망월리 사양동의 긴섬(장도)를 연결하여 제방을 쌓고 30여 정보 규모의 봉곡농장을 형성했다. 당시 소작 농가는 180여호였는데 광복 후 300평 규모의 2필지씩 주민들에게 불하되었으며 ‘농장’이란 지명이 지금도 남아있다. 농장은 일제 강점기 때 간이학교가 있었는데 해방 이후 죽산분교에 통합되었다.
이렇게 지리적으로 외지다보니 한국전쟁 때는 피난지였다. 목포에서만이 아니라 북쪽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주민들은 그때를 회상하면서 세대별로 번갈아 가며 피난민들에게 밥을 해주었다고 한다. 마을 잔등에는 입향조가 이주 당시 심었다는 동백 나무 두 그루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마을 뒤 나주나씨 소유의 동각잔등이라 부르는 곳에는 고분이 많이 있었다. 밭주인이 밭을 경작하면서 뻥 뚫린 구덩이에 많이 빠졌다고 한다. 구덩이의 내부를 자세히 살펴보면 해골들이 많이 있는 것으로 보아 무덤일 것으로 추정되는데 주인은 무서워서 다시 구덩이를 메꿔버렸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는 이 마을 나주나씨 가문에 유명한 학자가 있어 서당을 열었다.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광암리에서도 배우러 올 정도로 널리 알려진 훈장이었다. 아쉽게도 그 분이 남긴 문집 같은 것을 볼 수가 없어 그분의 학문적 역량을 구전으로만 들을 뿐이다.
청호리 망월리도 그렇지만 이 마을도 바닥이 바위층이어서 물이 귀했다. 해서 조금만 가물면 물 때문에 곤욕을 치러야 했다. 물 때문에 이 마을에서는 축산을 하거나 원예작물을 재배하기가 어렵다.
마을 입구 주구산 아래에 장흥고씨세장비와 열부함평이씨기행비가 있고 마을회관 앞에 1980년에 세운 열부무안박씨절행비가 서 있다. 주구산 기슭에는 장흥고씨 제각인 경모재가 있다. 1962년에 세운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입향조인 고처대 공을 모셨으며 현판도 하나 걸려있다.
남아있는 지명으로 큰밤나무골 작은밤나무골 동각잔등 건네밭 뒷묏갓 솔각끔 새언안 나리가리 큰애기묏등 아골 노랑섬 갱골 그리고 승달산의 끝자락으로 여겨지는 끝밭밑 등이 남아있다.
조선시대 궁장토의 흔적을 안고 있는 마을 - 죽산3리 당월촌
당월촌은 마을의 형상이 반달 모양을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남창천을 사이에 두고 삼향면과 인접해 있는 이 마을은 일로읍에서 영산강 쪽 3㎞ 지점에 있다. 특히 남창천은 용포, 맥포, 장항포, 자방포 등 네 개의 포구를 안고 있어 이곳 주민들의 생활이 바닷길을 이용해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행정구역명으로는 인근의 호암동과 자방포를 합쳐서 일로읍 죽산3리에 해당된다.
마을의 역사는 이 마을의 토박이라는 주민이 4대조까지 있었다는 것을 봤을 때 200여년 안팎의 역사를 갖고 있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1789년에 나온 호구총수에는 무안군 노촌면 唐村里로 나온다. 1912년과 1917년의 자료에는 일로면 堂月村으로 나온다. 주민들에게 唐村이란 말을 들어봤느냐고 물어봤으나 아는 사람이 없었다. 앞으로 唐村의 의미를 찾아야겠다는 숙제를 안았다.
여러 성씨가 살다보니 어느 성씨가 먼저 들어왔는지 확인할 수 없다. 그중에서 장흥고씨는 高碩柱(1878-1953) 옹이 양지촌에서 100여년 전에 이 마을로 들어왔으며 이어 나주나씨 나선균(1858-1938) 옹도 양지촌에서 이 마을로 들어왔다. 또한 압해정씨 정도삼옹이 광암리 광암마을에서 妻鄕으로 들어왔다.
이 마을은 19세기 말 자방포 간척이 시작되면서 전국에서 사람이 몰려들었다. 이어 포구의 특성과 늘어난 인구로 이곳에 시장이 개설되고 일로면사무소가 설치되면서 급격히 마을이 번창하였으며 마을유래지의 기록으로는 이때에 18개 성씨들이 이곳에 정착하였다 한다.
당월촌에서 최초의 일로시장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은 좀 더 고증해보아야 하지만 주민들의 일관된 주장과 당시의 환경이 시장 형성의 조건은 갖췄다고 본다. 일단 이곳에서 출발한 시장은 지장리 송태 (세명장 -삼향장을 이르는 말)로 그리고 월암5구 강남산으로 옮겨 현재 월암2구 황소 마을에서 형성되고 있다.
마을 앞에는 서남해 지역 산업의 축인 L자형(무안 - 광양) 도로가 지나가고 있으며, 이곳과 노리목(장항포)간의 간척공사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농지가 없어 이 마을의 주민들이 궁벽한 생활을 하지 않았을까 여겨질 정도로 마을의 지리적 여건이 궁색하다.
마을은 범바위가 있는 호암산을 주산으로 하고 중매봉을 안산으로 하고 있다. 호암산의 호랑이는 암호랑이로 노루목의 노루를 바라보고 있는 형국이다. 자방포가 막히기 전에 마을 앞 뻘밭이 간척이 되었다. 지금도 그 둑을 ‘중진’이라 부른다.
마을회관 옆에는 세 개의 비석이 있다. 1903년(고종 광무7년. 주민들은 1902년으로 알고 있다)에 세워진 영친왕궁언장비와 1904년(고종광무8년)에 세워진 군수 조진규의 비다. 그리고 1907년(정미년)에 세워진 경선궁혁폐선정불망비가 그것이다.
비문이 없는 영친왕궁언장비는 장항포 둑을 축조하여 궁장토를 만든 기념으로 세워진 것이다. 궁방전이란 궁장토(宮庄土)라고도 하며 왕궁의 경비 조달을 목적으로 한 토지를 말한다. 이러한 궁방전을 획득하는 방법은 권력을 이용한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으나 그 중에서 많이 이용된 것이 바다를 막아 간척지를 조성하거나 산림을 개간하여 농토를 만드는 방법이다.
또 하나의 비는 군수 조진규의 비인데 조진규는 무안에서 1902. 06 - 1906. 07월까지 근무했던 자로 그 당시에 나름대로 선정을 해서 주민들이 세운 것(1904년 - 고종 광무8년)이 아닌가 여겨진다. 비석이 오래되고 石質이 좋지 않아 글씨가 심하게 훼손되어서 읽을 수가 없다.
영친왕궁장토가 경선궁장토로 이속되면서 주민들의 심각한 민원이 계속해서 제기되자 경선궁에서는 두 명의 사정관을 현지로 내려 보내 사태를 파악케 했다. 사정관이 일로에 와서 사정을 들어본 즉, 심하게 세금을 부과했으므로 이를 시정하고 적정한 세금을 내도록 조치하였다. 이에 주민들이 경선궁의 조치에 감사하여 세운 비가 경성궁혁폐선정불망비다. 경선궁은 영친왕의 생모인 순빈 엄씨가 있는 궁을 말한다.
이 비들은 자방포 수문이 있는 민가 옆에 세워졌었는데 농로를 개설하면서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이어 2013년에 주민들이 성금을 모으고 무안군의 지원을 받아 각을 세우고 주변을 정비하였다.
간척지로 인한 아픔의 흔적이 있어
당시 이 둑이 막아짐으로서 형성된 광활한 농토는 이 지역에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으나 주민들은 얼마 되지 않아 커다란 고통을 맛봐야 했다. 이 간척지에서 농사짓는 농민들을 대상으로 매겨지는 세금은 인근 소작농과 비교할 때 턱없이 비쌌으며 이의 부당함을 해소하려 官에다 신고를 해도 왕실에서 행하는 제도라 소용이 없었다.
조선시대 말기의 궁장토는 주민들이 세금을 제대로 내지 못해 대부분 일제강점기 때 동양척식회사로 넘어가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농민들은 철저하게 소외되어 이후 농민항쟁의 주요 원인이 된다. 농민들은 땅을 되찾기 위해 법정 투쟁을 하지만 되찾지 못하고 수많은 고통과 수난을 당해야 했다. 그러다 광복이 되어서야 다시 돈을 지불하고 땅을 사야 했던 역사를 안고 있는 아픔의 땅이 궁장토이다.
이 마을에서 유념해 보아야 할 사항이 ‘자방포’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방포를 건너편 노리목인 장항포를 발음하다 와전되어 자방포라 한다지만 실지로 자방포는 두 가구가 살고 있는 일로읍 죽산 3리의 마을 이름이다. 삼향면의 장항둑은 ‘노리목’을 한자로 표현한 것이고 이곳의 자방둑은 마을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둑을 막을 때 자꾸 둑이 터지니까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 거지였던 ‘자방’이라는 사람을 제물로 해 둑을 완성시켰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 것이다. 즉 인신공양의 결과물로서 얻어진 마을 이름이라는 것이다. 장항둑과 자방둑 전체를 포함해서 자방포라 한다.
해방 이후 마을에 남로당 전남도당 책임자급에 해당하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름이 나종길이라는 사람으로 많이 배우고 담력이 셌다고 한다. 일로읍 곳곳에서 좌우익 싸움으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했는데 이 사람 덕분에 이 마을에서는 이념분쟁의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이 마을은 여러 성씨가 살지만 단합과 협조가 잘 이뤄진다. 또한 주민들간 다툼으로 주민들의 소리가 마을 밖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주민들의 협조와 단결이 있어서 새마을 사업으로 세 차례나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하였다. 마을에서 뚜렷이 이름을 날린 사람은 없지만 한때는 일로읍에서 가장 많은 공무원을 배출시키기도 하였다.
마을이 한반도 지형을 닮았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곳곳에 집이 들어서면서 지형이 많이 흐트러졌다. 남아있는 지명으로 신장골 구석동 당너머 자작골 낚시명당 등이 있다.
‘우리 마을이 천국이다’라고 주장하는 마을 - 죽산4리 도장포
도장포는 죽산4리에 속하는 마을로 원래는 장수 황씨들이 살았던 마을이다. 이후 전주이씨 수춘군 후손들이 망월리에서 분가하여 이 마을에 정착하면서 전주이씨 동족마을을 이루었다. 입향조는 전주이씨 수춘군파 이득룡(1698-1782)이다. 공에 대한 기록은 전주이씨 대동보의 짤막한 기록 외에는 찾을 길이 없다. 하지만 마을유래지에는 ‘입향조는 1650년경 전주이씨 이종우로 부친 이항을 따라 전북 남원에서 관동으로 이거했다가 다시 전남 광산 평동을 거쳐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을은 도촌 준매 초장골 호룡정 동쪽고샅 서쪽고샅 가운데고샅 등 7개 지역으로 이루어 졌다. 道壯浦란 지명도 조선시대 중기 壯湖(호등 또는 호룡정이라고도 한다)와 道村이 둑으로 연결되면서 지어진 이름이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예전에는 이 둑이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러다 경지정리 바람이 불면서 둑이 없어졌다고 한다. 장호(또는 당살뫼)는 남자 형국이고 도촌은 여자 형국이어서 둘이 이어져야 마을이 잘 산다는 속설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도촌에는 대밭이 있어야 하고 마르지 않는 샘이 있어야 마을이 흥 하다는 말이 있었는데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속설을 그대로 지키고 있다. 호룡정은 호랑이 형상의 바위가 있는 마을이다. 그 호랑이가 양지촌 마을의 주구산의 개를 쫓는 형국이다.
이 마을은 세 차례의 간척을 통해서 농지를 확보하였다. 첫 번째는 조선시대 중기 이후 이 마을 주민들과 광산에서 이사 온 장흥고씨들이 마을 앞 바다인 장호를 조금씩 매립하다가 더욱 확대하여 제방을 쌓았다. 두 번째는 사양동에서 주구산까지 매립하여 만든 땅은 70여 정보 되는데 새로 제방을 막아서 생긴 땅이라는 의미로 지금도 새언안들이라 칭한다. 새언안들은 도장포 영화정 앞의 간척지들이다.
이후 세 번째 간척사업으로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 목포에 사는 미야끼가 오오까상에게 마을 앞 뻘밭을 인수 받아 장자등과 망월리 사양동의 긴섬(장도)를 연결하여 제방을 쌓고 30여 정보 규모의 봉곡농장을 형성했다. 당시 소작 농가는 180여호였는데 광복 후 300평 규모의 2필지씩 주민들에게 불하되었으며 ‘농장’이란 지명이 지금도 남아있다. 농장은 일제 강점기 때 간이학교가 있었는데 해방 이후 죽산분교에 통합되었다. 도촌 마을 꼭대기에도 간이학교가 있었다.
자료를 보면 ‘일제강점기에 이 마을 주민들은 도장포 마을의 간척지 경작권을 주장하며 일제에 소작료를 내지 않기 위하여 투쟁하기도 하였다. 도장포의 선창은 해발고도가 7m로 선박의 운항이 가능한 곳으로 조사되었다. 우측에 있는 밭은 일명 '선창밭'이라고 하며 주막집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살뫼 산 기슭에는 상당한 두께의 굴 껍질들이 발견되어 바로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음을 알 수 있다. 당살뫼 앞에는 ‘새피네’라는 독특한 지명이 있다. 이곳은 주민들이 각종 그릇이나 가구 등을 버리는 곳이다.
문헌으로 지명의 변화를 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 무안현 노촌면 도장포리로 나온다. 1912년에는 이로면 도장포동, 1917년에 이로면 죽산리 도장동으로 그리고 1987년엔 일로읍 죽산리 도장포로 나온다.
‘우리 마을이 천국이다’라고 자랑하는 마을
일제강점기 때 일로에서 광암리 광암과 죽산리의 도장포만이 밥술을 뜨고 살았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넉넉한 마을이었다. 세 차례의 간척 덕분이다. 하지만 한때는 ‘밥 바구니에 나락을 담아서 되돌아 온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어렵게 살았던 때가 있었다. 이 말은 이 마을을 포함한 대부분의 마을에서 일제강점기 때 주민들이 나락을 수확하면서 들판에서 밥을 먹었는데 그때 밥을 담았던 바구니에 주인 몰래 나락을 담아서 가져 온다는 말이다. 정당한 방법은 아니지만 당시에는 한 톨의 쌀이 귀한 때라 서로 모른 체 하며 넘어가던 때였다. 이 마을이 생활고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마을 앞에 간척지가 형성되고서 부터이다.
마을 앞에는 둘레가 5미터 20이 넘는 당산나무가 있다. 200여년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나무에 주민들은 마을의 안녕과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며 당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지금은 사람이 없어 제를 모시지 못하지만 주민들은 다시 당산제를 지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다.
마을의 지반이 바위여서 물이 귀해 집집마다 샘을 파놓고 지표수를 받아 생활하였다. 바닥에 바위가 있어 깊게 팔 수가 없는 얕은 샘이었다. 마을에는 세 군데의 공동샘이 있는데 도촌의 옹달샘과 마을 앞 당산나무 밑의 시남샘 그리고 길 가의 큰샘 등이다.
도장포는 자랑거리가 많은 마을이다. 예전부터 주민들의 목소리가 마을 밖으로 벗어난 적이 없다 할 정도로 화합과 단결이 잘 되었다. 또한 마을에서 혼자 사는 노인들을 위하여 주민들이 공동으로 생일상을 차려 노인공경의 본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주민이 喪을 당했을 때도 마을회관에서 거릿제를 지내 주민들 간의 돈독한 정을 과시하기도 한다. 2005년도에는 이러한 주민들의 따뜻함이 널리 알려져 훈훈하고 인정이 넘치는 공동체 구현에 기여한 마을로 한 언론사로부터 ‘좋은 이웃 밝은 동네’의 대상을 받기도 하였다.
주민들의 표정 또한 넉넉해 여유가 있으며 밝았다. 주민들과의 대화에서 한 노인은 ‘천국은 하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마을이 천국이다’고 자신 있게 말하기도 했다. 주부들의 음식솜씨도 좋아 주민들이 이구동성으로 일로 어디를 가 봐도 우리 마을만큼 맛과 정성이 들어가는 음식을 먹어보지 못했다고 자랑 한다.
서로를 위하고 감싸주는 주민들의 모습에서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을 보여주었다. 또한 주민들이 근면하고 검소해 생활은 짜임새가 있으며 윤기가 있어보였다. 전주이씨 동족 마을로 오랫동안 이어왔으면서도 위계를 통한 반목이나 불신의 틈이 없어 보였다. 해서 주변 마을에서 이 마을로 이사 오고 싶은 마을 1순위에 해당하기도 한다.
이러한 분위기가 한국전쟁 등 나라의 변란이 있을 때도 주민들 간의 갈등이 없어 피해가 없었다. 현재도 마을에 현안이 발생하면 이장을 중심으로 모든 주민들이 나서서 해결하고 있다.
죽산리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삼거리를 초장골로 부른다. 삼거리에는 영산강 건너 영암과 연결되는 군사작전도로(국지도 49호선)가 지나고 있어 청호 주룡 나루와 이어져 옛날에는 영암 사람들이 일로 장을 보러 다니는 큰길이었다. 이 삼거리에서 주민들은 일로장을 가기 전 초벌로 장을 보아 초장골로 불리기도 하는 것이다. 한때는 3곳의 가게가 있을 정도로 북적되었다. 주 소득원으로는 쌀 농사이나 갓 재배를 하여 소득을 올리기도 한다.
세 명의 판사가 배출된 마을 - 죽산5리 永化亭
영화정은 죽산5리에 속하는 마을로 정자가 있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예전에 이 마을은 장수 황씨 터였다. 지금은 황씨들이 한 세대도 없지만 전해오는 이야기나 주변의 무덤들을 보면 이곳에 황씨들이 많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황씨들은 청호리를 비롯하여 망월리 죽산리 주변에서 살아온 흔적이 많이 보이나 구체적인 자료가 없어 정리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현재는 전주이씨들과 해주오씨가 살고 있다.
이 마을은 솔이동 청골(정월동. 망모산 아래) 큰 마을로 부르는 영화정으로 이루어졌다. 마을은 주변의 산들로 둘러싸여 있어서 아늑한 느낌을 준다. 잔등산을 주산으로 하고 왼쪽엔 솔이동 오른쪽엔 달몰이(달이 지는 곳이란 의미) 그리고 앞에는 큰 봉이 자리하고 있다. 큰봉 너머에는 망매산(망모산)이 있으며 청호리에서 마을로 넘어오는 고개를 당재 또는 장재라 부른다. 또한 도장포로 넘어가는 고개를 세심재(또는 세심이고개)라고 부르기도 한다. 솔이등 앞에는 민산이라 부르는데 그곳엔 호랑이 바위가 있다.
영산강이 막히기 전까지는 마을 앞까지 물이 들어왔으며 마을 옆 바윗등에는 배를 메었던 흔적이 남아있다. 당시 주민들은 농지가 없어 대부분이 강에서 고기를 잡거나 목화 등 밭곡식을 경작하며 생활해 왔다. 현재 마을 앞으로는 서해안 고속도로 일로 나들목에서 광양까지 연결되는 한반도 서남부의 L자형 도로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또한 마을 주변으로는 철로 건설이 계획되고 있어 주민들은 개발에 대한 효과를 기대하고 있었다.
마을의 입향조가 뚜렷하지 않다. 마을유래지에는 ‘입향조는 전주 이씨 이진만으로 대대로 살아왔던 영광 묘장에서 龍巳의 亂을 당해 동생 종만(청계면 복길리 입향조)과 함께 화를 피해 이곳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데서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후 100여년이 지나서 해주오씨가 입촌하여 먼저 자리 잡은 이씨와 함께 자손을 늘려갔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주민이 갖고 있는 전주이씨 족보에서는 이진만을 찾을 수가 없었다. 마을의 전주이씨 후손들에게 물어봐도 처음 듣는 이름으로 잘 모르겠다고 한다.
하지만 무안향교지에도 ‘李鎭萬은 성균진사로 영광 묘장에서 세거하다가 임진왜란을 당하여 아우 종만과 더불어 이 마을로 피난을 와 정착하였다. 공은 일찍이 이율곡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어린 나이에 문과에 급제하여 명성을 떨쳤다. 불행히도 난을 만나 뜻을 펴지 못하고 이곳에서 자연에 묻혀 생활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로에 전주이씨가 처음 들어온 것은 망월동의 입향조 이준마(1565-1629, 자-경보, 호-노암)이다. 노암 공은 임진왜란을 피하여 이곳으로 들어왔는데 영화정 마을의 입향조 기록과 비교해보면 동시대에 입향 하였지만 확인할 길이 없다. 하지만 주민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추정해본 결과 이 마을에는 1700년대 중반에 전주이씨가 들어오고 그와 인척 관계를 맺어 1800년대 중반에 해주오씨가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마을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해주오씨 입향조는 오연영(1805-1868)으로 남악리에서 이주한 것으로 여겨진다.
참고로 문헌을 통해서 地名을 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무안현 노촌면 正月洞이 나온다. 1912년의 자료엔 정월동리가 빠지고 무안군 일로면 영화정이 나온다. 이후 1917년의 자료엔 무안군 일로면 죽산리 영화정으로 나온다.
배출된 인물이 많은 장수마을
이 마을이 생활고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마을 앞에 간척지가 형성되고서 부터이다. 조선시대 중기 이후 망월리의 전주이씨와 광산에서 이사 온 장흥고씨들이 마을 앞 바다인 장호를 조금씩 매립하다가 더욱 확대하여 제방을 쌓았다. 사양동에서 주구산까지 매립하여 만든 땅은 70여 정보 되는데 새로 제방을 막아서 생긴 땅이라는 의미로 지금도 새언안들이라 칭한다. 새언안들은 도장포 영화정 앞의 간척지들이다.
마을 앞길은 영산강 건너 영암과 연결되는 군사작전도로(국지도 49호선)가 지나고 있다. 이 길은 청호 주룡 나루와 연결 돼 옛날에는 영암 사람들이 일로 장을 보러 다니는 큰길이었다. 현재 마을회관이 있는 자리에 유산각이 있어 지나가는 길손들이 쉬어갔던 자리이기도 하다. 이 유산각 이름이 영화정 이었는데 이것이 마을이름이 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정자주변에는 수십 그루의 구수나무가 있어 풍광이 좋았으나 길이 확장되면서 모두 베어버리고 지금은 두 그루만 남아있다.
길옆에 있는 저수지는 일제강점기 때 미야자키라는 일본인이 주도하여 축조하였는데 그 속에는 성재샘이라 부르는 물이 잘 나오는 샘이 있었다. 또한 잔등산 기슭에는 죽산초등학교로 불렸던 일로초등학교 죽산분교가 있다. 이 학교는 일제강점기 때 세워진 마을 뒤 간립 학교에서 옮겨 온 학교인데 2010년 2월 일로초등학교로 통폐합되었다. 솔이동 옆에는 무덤골이라 부르는 공동묘지 터가 있다. 그 주변에는 호랑이 굴과 호랑이 바위가 있으며 옹기를 구웠던 점등도 있다. 지금도 점등 주변을 파 보면 많은 옹기 조각들이 나온다.
이 마을에는 자랑이 많다. 우선 풍수적 지형이 좋아 인물이 많이 나왔다. 한 마을에서 3명의 판사가 나왔을 뿐 아니라 관료나 교육자들도 많이 배출되었다. 풍수지리를 아는 사람들은 일부러 이 마을로 이주 해 정착하면서 성공한 사람들도 있다. 또한 장수 마을이다. 현재 마을에 살고 있는 주민이 40여명인데 그중에서 80세가 넘은 노인이 16명이나 되며 90세 이상의 어르신이 6분이나 된다. 모두 얼굴이 곱고 정정하다.
마을 뒤에 구정리에서 분리된 죽산 교회가 있다. 주민 들 대부분이 교회와 천주교를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어 표정들이 편안해 보인다. 해서 범죄 없는 마을로 알려졌고 주민들의 소리가 담 밖을 넘지 않는다고 하며 요즈음에는 주민들 스스로 대문을 없애고 있다고 한다. 특히 이 마을 출신 향우들은 성금을 조성하여 마을주민들의 복지 향상에 기여하고 있어 주민들의 자랑이 대단하다. 남은 지명으로 깨정골이 있으며 마을에서 구정리 소댕이로 넘어가는 고개인 소댕이재가 있다.
참고로 마을에서 부르는 망매산은 망모산의 다른 이름이다. 청호리와 죽산리 그리고 망월리가 이 산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나주나씨의 집성촌인 청호리 주룡 마을에서만 망모산으로 부르고 나머지 마을에서는 대부분 망매산으로 부르고 있다. 폐교가 된 죽산분교에는 사단법인 홍익원의 평생교육원이 들어와 있다.
三千洞은 삼천 가구가 살 수 있는 마을 - 죽산6리 삼천동
삼천동 마을은 세 개의 한자 이름으로 쓰였다. 三天洞, 三千洞, 三泉洞이 그것으로 三天洞은 마을 이름으로 잘 쓰이지 않는 이름이다. 三千洞은 마을에 삼천가구가 살고 있다고 해서, 또는 앞으로 삼천 가구가 사는 마을이 형성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어서 붙인 이름이다. 三泉洞은 세 개의 샘이 있는 마을이라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즉 이 마을은 물이 귀한 곳인데 주민들이 사용하는 샘이 세 군데나 있다 해서 붙인 이름이란 것이다. 실지로 마을에는 마을 입구의 청수샘, 鳥寢이(朝雉尾) 샘, 그리고 현재 수로가 지나는 자리에 묻힌 샘 등 세 개의 샘이 있다.
문헌으로 보면 1987년의 자료에도 마을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2008년도에 죽산 마을에서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솔머리라 불렀으며 소나무가 우거진 곳이었다. 주민들은 100여년 전에 몽탄면 양장리에서 나주 정씨가, 죽산 마을에서 전주 최씨가 처음으로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마을 뒤에는 뒷 능선 또는 호암산이 자리하고 있고 오른쪽으로는 일본인 이름을 붙인 미야끼[宮木]산과 알뫼산이 있다. 미야끼 산은 지금도 국유지로 되어있는데 한때는 이석호 사건에 연루되어 어려운 적이 있었다. 알뫼산은 거북등 뒤에 있는 산으로 새 형국을 하고 있어 무덤에 석물을 쓸 수 없다고 한다. 실지로 오래 전에 신씨들이 이곳에 묘를 쓰면서 석물을 했다가 후손들에게 좋지 않은 일들이 일어나자 석물을 치워버린 일이 있었다. 그 후로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현재는 신씨들과 관련된 묘나 석물은 없다.
알뫼산 주변에 여지동이 있다. 그곳은 황촌(黃村)이라고 부를 정도로 황씨들이 많이 살았으며 지금도 황씨들의 문중산이 있다. 청호리 망월리 죽산리의 대부분의 마을에서 황씨들이 살고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한 가구도 살고 있지 않다.
마을에서는 일제강점기에 정병일씨가 서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또한 마을의 왼쪽에 있는 조치미에는 유산각이 있었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도 있었다고 한다. 조치미는 꿩이 많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인데 지금도 꿩들이 많이 날라와 농작물이 피해를 많이 보고 있다고 한다.
거북등은 마을의 수호자
삼천동 옆으로 영산강 건너 영암과 연결되는 군사작전도로(국지도 49호선)가 지나고 있다. 예전에는 신작로 길로 구루마(수레) 정도가 다니는 길이었다. 그 도로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길에 예전의 마을 이름인 솔머리[松頭村]가 있으며 그곳에는 막걸리를 빚는 술도가(술도게 - 양조장)가 있었다. 술도가는 오래 전에 도장포 마을 초장골로 옮겨졌다.
자세히 보면 고인돌로 볼 수 있는 바윗등이라 부르는 거북등이 알뫼 산 앞 장목등에 있다. 크기는 길이 260센티미터 높이 155센티미터이다. 주민들은 그 바위 때문에 마을이 섬으로 부르지 않고 육지로 부를 수 있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영산강 둑이 막히기 전까지는 바닷물이 들어와 마을이 육지와 끊겨져 섬이 되었다가도 빠질 때면 그 둑으로 길[路]이 만들어져 육지의 일부가 되곤 하였기 때문이다.
이 바윗등은 67년 한해(旱害) 때 없어질 뻔 했다. 왜냐하면 영산강 물을 끌어들여 농수로 사용하기 위한 수로를 계획하면서 바윗등 옆의 둔덕을 이용한 계획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민들의 완강한 반대 때문에 실행하지 못하고 밑으로 수로가 나면서 보존될 수 있었다.
삼천동에서 죽산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할미재 또는 할미젖 고개라 한다. 주민들이 낮에도 쉽게 가지 못하는 조금은 무서워 하는 곳이다. 여기에는 각각 전설이 있다. 하나는 승달산 꾸리재에 살고 있던 할미 귀신이 그곳에서 살지 못하고 이곳 죽산재에 와서 살게 되면서부터 할미재라 하였다.
또 다른 이야기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끼니를 연명하던 한 할미가 어느 겨울날 따뜻한 이곳 등성이를 찾아 몸을 쉬다가 깨어나지 못하고 죽었다고 한다. 그 후로부터 그곳에서는 늘 물이 흘러내려 마치 할미젖에서 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하여 할미젖 고개라 하였다 한다. 현재 이 고개는 49호선 도로 때문에 할미재의 당산이 윗 당산과 아랫 당산으로 나누어졌다.
주민들의 모습이 여유롭고 밝아 보인다. 넉넉함이 있고 미래가 있어 보인다. 이장의 말대로 단결과 협조가 잘 이루어져 주민의 목소리가 마을 밖을 벗어난 적이 없다고 자랑이다.
첫댓글 원장님 안녕하세요?
제 고향 당월촌에 대한 자세한 자료 감사합니다.
당너머 밭에 다녀오실땐
진달래꽃 한아름 꺽어 오셔서 장독대 옹기에 꽂아 주셨던 부모님이 많이 생각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