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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2월 28일에 나이 40에 국립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행정학과(학사과정 1회)를 졸업하였다. 참으로 기뻣다. 졸업식이 끝난후 졸업증명서를 발부받아 즐거운 마음으로 용산 한미연합사 인사처에 제출하고 두달 후 1985년 4월 30일부로 전역하였다. 졸업 전년도에는 한국방송통신대 학보사에 학생체험수기 모집에 응모하여 입상은 되지 못했지만 내 글이 단행본 학생체험수기 제4집(삶과 집념의 등불)에 실렸다. 제목은 “더 새로운 곳을 향하여”, 아래 글은 수기집에 실린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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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방이라도 하얀 눈이 펑펑 쏟아질 것만 같은 회색하늘이 지난 5년전 (80.3.2) 전문대과정 행정학과 1학년에 입학하던 그날과도 흡사하다. 방송대인의 수기 제1,2,3집을 읽고 가난과 좌절, 불운과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험난한 배움의 길을 혼신의 힘으로 달려온 학우들에게 보이지 않는 격려의 박수를 보내기도 했고, 성실한 자세로 역경을 극복해 가며 학업을 향한 강한 집념의 불을 끌줄 몰랐던 많은 학우들의 이야기를 읽고는 가슴이 뭉쿨하였고, 참담한 삶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않고 굳건한 의지와 열의로 삶과 배움의 활로를 개척해온 학우들의 이야기엔 눈물을 흘렸었다.
그리고, 세 자녀의 어머니로서, 시부모를 모시는 한 가정 주부와 아내로서, 가난과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 53세의 나이로 건국대 대학원을 수석으로 졸업한 崔庚在씨의 성공적인 만학의 이야기나 16세때 중학교를 중퇴하고 39세때부터 오직 변호사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46세의 늦은 나이로 법대를 졸업하고 꿈을 달성했다는 캐나다의 매키氏의 이야기 들에서---
그들은 모두 다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았다] 또는 [결국 나는 해내고 말았다] 는 등의 승리의 기쁨을 말한다.
때로는 군복마저도 무겁게 눌러대는 군화 발자국 가득한 연병장에서 전우들과 호흡하면서, 아내와 자식들이 잠든 조그만 방에서, 그리고 근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어두운 길목 어느 구석에서도 나의 가슴 속엔 잠들지 않는 십대의 젊은이 같은 고동치는 심장이 간직되어 있었던 것은 부인하기 싫은 나의 솔직한 심정인지도 모른다. 어차피 난 나라를 지키겠다고 나선 푸른 제복을 입은 군인이었으며, 동시에 아내와 1남 1녀의 가장이 아닌가. 어느 누구의 삶도 아니고 어느 누구를 위한 삶도 아니고 어느 곳에 맡겨 놓을 삶도 아닌 나 자신의 삶의 過程에 난 무슨 진정한 말을 할 수 있을런지,
10학기라고 하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 세월들에게 난 무슨 의미를 부여해야 할까. 이제 5학년 2학기 마지막 시험(85.1.7.시행)을 치르고 나니 지난 5년동안의 방송통신대학생활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정말 감개무량하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던 책과의 싸움, 휴무일과 밤낮을 가리지 않았던 방송강의 청취, 협력학교에서의 출석수업, 1, 2부 시험, 과제물 작성 등---. 그러나, 한 단계의 마무리는 동시에 또다른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다. 더 새로운 곳을 향하여---누군가 말했다. 중단하는 사람은 결코 승리하지 못한다고---.
최초 나이 35살, 1980년 3월 2일 방송통신대학 1학년에 입학했을 때, 난 대학생이 되었다는 기쁨으로 설레었지만 늦게 시작하는 대학공부가 조금은 창피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남들과는 이 기쁨을 나누지도 못한 채 외로운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협력학교에서의 출석수업이 끝나면, F 학점이 나지 않았는가 가슴 조이며 [성적표 받기를 열번], 이제 그렇게 가슴 조이고 암울했던 지난 세월들은 85년 1월 7일 출석수업을 끝으로 마감했다.
그 옛날의 창피함으로 남들과 나누지도 못했던 대입의 기쁨을 지금에 와서는 졸업의 기쁨으로 모든 이들과 같이 나누고 싶다. 누가 무어라해도 이제는 나 자신의 노력에 의해 떳떳한 대학졸업생이 되었으며 자신있는 학사임을 난 자랑하고 싶다.
난 지난 5년간의 학교생활에서 무엇을 어떻게 배웠으며 배운 것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 것인가? 동시에, 18년간의 군생활을 정리하고 사회생활을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이 마당에 난 나 자신에게서 뜻깊은 어떤 의미를 되찾고 싶다. 아울러 학사과정 졸업은 물론이거니와 나의 대학원 진학은 더 큰 기쁨이 되었다.
1979년도 말경 의정부시 모사령부에 근무할 때 육본에서 내려온 군장교 2,000명을 군위탁생으로 방송대학에 입학시킨다는 공문을 보았다. 무척 기뻤다. 군생활 12년 중에서 가장 은혜스럽게 느낀 때였고 결혼 첫날밤과도 같이 가슴 설레는 날이었다. 동시에, 16년전 고교졸업 때 너무 가난하여 졸업장 없는 졸업식이 불현듯 머리에 떠올랐다. 대학생이 되면 어떻게든 졸업하고 말겠다고 결심했다.
1980년 3월 2일에 전문대 과정 행정학과 1학년이 되었다. 그 당시 다행이도 의정부 지역에 마침 방송통신대학 경영학과를 먼저 졸업한 후배장교가 인근 부대에 있어 그의 주선으로 1부시험을 대비하여 주말이면 타 대학의 교수님이나 방송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일반대학 3학년에 편입학하여 다니는 방송통신대학 졸업생을 초빙하여 시내학원에서 특별 강의를 듣곤 하였다.
그러나, 국가의 정치적인 변혁으로 비록 여름 한 학기만 시행했지만 지금도 그 당시의 후배장교 강사들에게 크게 감사한다. 또한 이때부터 학사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하여 방송대학보를 철저하게 읽었다. 배달이 안될 때는 연락을 취하거나 직접 가서 얻어오곤 하였다.
입학 후 몇 달이 지나 1학년 출석수업을 맞아 의정부에서 협력학교인 대전의 충남대학교로 가서동료학우와 같이 하숙생활을 하여 하계 및 동계 출석수업을 받았다.
특히 이 자리를 빌어 협력학교인 충남대 배상오 지도교수님께서 방송대생들을 위하여 전임강사가 아닌 충남대 본교 교수님들로 하여금 출석수업을 맡도록 협조 조치하여 주신 데 대해 크게 감사를 드린다.
첫해인 1980년도 1학년때 열심히 공부하였는데도 학점이 기대했던 것보다 너무 적게 나와 속으로 크게 실망하였다. 그러나 2학기 때는 1학기때보다 열심히 하니까 역시 성적이 나아졌다.
그런데, 뒤늦게 시작한 공부가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왜 진작 이런 새로운 학문을 배우지 못했나? 하고 지난 세월을 아쉬워했다. 시간 나는대로 책을 읽었다.
2학년때는 거리 관계상 협력학교를 1년간 정들었던 충남대에서 서울대로 변경하였다. 1개반에 200~300명 되는 콩나물 시루 같은 교실에서 수업을 받았다. 여름엔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등에 땀이 줄줄 흘렀다. 학생이 너무 많아 수업중 질문을 하게 되면 진도에 지장이 있을 것 같아서 휴식시간에 담당 교수와의 커피시간을 이용하여 질문을 하곤 하였다. 또한 시험치를 때는 시험감독이 엄해서가 아니라 남이 싫어하는 맨 앞 자리에 앉곤하였다.
이때에, 학사과정 3학년 편입학계획이 학보에 보도되었다. 계속해서 학사과정까지 공부할 수 있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드디어 기대했던 전문과정을 2학년에 마치게 되었고, 82년 2월 27일 제9회 졸업식에 참석하였다. 졸업식장에서 1학년때 충남대 협력학교 시절의 낯 익은 얼굴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서로가 반가워했다. 전문과정 졸업과 동시에 동계 3학년에 서울 지역으로 편입학 지원을 하였으나 1차에는 불합격이 되었고 며칠 후에 추가 합격이 되었다.
결과론이지만, 그때 경쟁이 심하지 않았던 지방협력대학으로 지원을 할 것을 하고 후회하였다. 좌절과 실의에 빠졌던 그때의 며칠간은 얼마나 쓸쓸하였는지 모른다. 3학년 이후부터는 서울시립대에서 출석수업을 받았다. 열의가 전문과정 때와 같이 미치지 못하였는지 1학기 때에 F학점이 1과목 발생하였다. 그러나, 시험후 그 과목은 자신이 있었던 과목이라 확인을 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2부시험에서 30점 만점에 9점이 채점되었다. 단답식 기재형 시험으로 빠짐없이 자신있게 다썼고 출석수업도 열심히 참석하여 하자가 없었던 것을 생각해서 행정착오겠지 하고 시험이 끝난지 2개울이 경과했지만 앞으로를 위하여 과목을 담당했던 강사의 주소를 며칠을 조사하여 찾아가서 무성의한 채점과정을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다음 학기에 확인한 바에 의하면 나의 항의 이후 2부시험은 다 쓰기만 하면 최저기본점수를 주기로 했다고 들었다.
그런데, 2년이란 여유가 있다는 안이한 생각으로 다른 공부를 하다보니 2학기 때에 F 학점이 3과목이나 발생하였다. 이유야 어떻든 집사람 보기에 스스로 창피하여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무튼 최선을 다 하기로 결심했다. 뒤늦게 공부한답시고 1남 1녀의 가장으로 가정에 충실하지도 못했다. 주로 아이들이 잠에서 깨기전인 아침 일찍 출근해서 일과가 끝난 후로는 도서관에서 밤늦게까지 공부하느라고 아이들이 다 잠든 밤늦게 귀가하곤 하였다. 내 집에서 출퇴근하지만 실로 하숙생활 바로 그것이었다.
특히, 1, 2부시험일자가 년말년시의 정초나 추석명절을 전후해서 시행되기 때문에 마음 편히 명절엔 가족을 데리고 친척방문이나 기분전환하기 위한 여행 한번 제대로 못하였다. 또한, 근무처에서도 남들이 회식하고 놀러간다고 할 때 마음대로 참석할 수 없을 때가 많았다. 그러니, 같은 근무지에서 처음에는 우호적이었던 동료가 나중엔 점점 멀어지고 시기하는 일이 있을 때는 고통스러웠으며 오직 나의 진실을 보여 줄려고 노력하였다.
4학년이 되서 교과편성에 의거 3학년 2학기 때의 F과목이 공교롭게도 모두 1학기로만 편성되었다. 그래서, 4, 5학년 2학기 때는 재시할 과목이 없었다. 그런데, 학칙에 1개학기에 1과목만 재시가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학교당국에 매학기 재시과목을 1개학기에 1개과목만 한정하지 말고 전문과정 때와 같이 2개과목 이상으로 허용해 줄 것을 호소하였으나 학교당국으로부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때, 공부도 열심히 하고 학점관리도 철저히 하였으며 어디까지나 학생의 입장에서 필요한 것은 학교측에 그때그때 건의도 하였다.
시간적 여유을 얻어 교과서이외에 여러 책을 손댈 수 있었는데 그때 우연히 [도산 안창호]란 책을 읽게 되었다. 근대 한국역사에 있어서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이셨던 도산 안창호 선생께서도 생존시 대학공부를 못하신 것을 한때나마 후회하셨다는 글을 읽고 어떻게 해서든지 방송통신대학을 졸업하고 말겠다고 마음 속으로 적극 향학의 의지를 불태웠다.
4학년부터는 3학년때보다도 더욱 열심히 하였고 주요과목에 대해서는 학우주관의 자율학습과 또한 전문과정때 집중 연구했던 덕분으로 성적이 훨씬 좋게 나왔다. 대부분 학생들의 성적이 잘 나왔다. 3학년 1학기 때의 1개 F과목을 재시하여 B학점을 취득하였다.
이 자리를 빌어 서울시립대 김판영 학장님께 감사를 드린다. 우리 대학생을 위하여 학급편성을 1교실에 60명씩으로만 하고 교실 청소며 동계난방지원을 잘 해 주셨다. 4학년 2학기 출석수업시 학장님을 모시고 휜 눈이 쌓인 아름다운 교정에서 전체 학우들과 같이 기념촬영을 하였던 것은 지을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이다.
제1회 한국방송통신대학 학생미술전을 감상하고 예기치 않았던 우리 학생들의 숨은 재주에 감탄하기도 하였으며 또한 제1회 영어발표력 경진대회에 참가하여 영어실력을 배양하는데 노력하였다. 영어발표력대회에서 장려상으로 입상하였는데 시상식 때까지 6살 박이 아들놈이 참석하였다가 뒤에서 아빠가 꼴찌상을 탔다고 말해 모두들 웃겼다.
83년 7월에 서울로 전속됨에 의정부에서 출퇴근했다가 84년 2월에 서울로 이사하였다. 4학년 2학기때부터는 항상 졸업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졸업의 환상을 그리며 재학중의 교내 또는 지역별 각종 행사에 적극 참여하기를 좋아하였다. 학우 상호간의 친목모임을 주선하다보니 어떤 학우로부터는 차기 학우회장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본의 아닌 오해를 사기도 하였다. 졸업하기 전에 나이를 초월하여 한 학우라도 더 사귀어 인간적인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것이 그때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여러 사람과 자주 접촉하다 보니 새로운 정보나 배우는 것이 많았다.
84년 3월 12일자 학보에 졸업시험을 10월 28일에 서울과 제주의 두 곳에서 실시한다고 공고되었다. 과목은 영어 I, 전공필수 2과목과 전공선택 2과목 등 도합 5과목으로 1과목 40점 만점에 총 200점 만점이었다. 5학년이 되어 4월부터는 1학기 시험대비를 위해 매주 일요일이면 학우회에서 주관하는 자율학습에 나갔고 마지막 학번으로 매사에 유종의 미를 거두기로 하였다.
5월 어느날 퇴근길에 1년전에 헤어졌던 행정학과 5학년 학생이자 같은 부대에서 근무했고 군대의 선배였던 L형(당시 중령예편)을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우연히 만났다. 1개월전에 전역하여 새로 신설된 모公社의 공개채용시험에 어려운 경쟁을 뚫고 당당히 합격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을때 나의 일같이 기뻤다. 그런데 어느날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입사한지 1개월이 된 L형이 토요일, 퇴근 후 집에서 동료과원과 음주한 것이 갑작스런 심장마비가 되어 죽었다는 소식이다. L형은 같은 부대에 근무할 때 주위에서 법 없이도 살 사람이란 소리를 들었으며 십여 년전에는 군에 있으면서 국가 보통고시에도 합격하였고 죽기 한 달 전에 만났을 때도 사법고시 준비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정도로 책벌레였다.
47세의 나이에 재학중엔 장학생이었으며 같은 방송대인으로서의 L형의 죽음은 너무나 허무하였다. 모진 고생을 다해 공부하여 그렇게 의미없이 죽으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사람은 살아야 무언가를 할 수 있다. 그저 답답하여 아무말 못하고 L형의 명복을 빌 뿐이었다. 나이들어 공부하는데 있어 육체적 정신적인 건강관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유명을 달리한 L형의 경우를 보고서 절실히 느꼈다.
1984년 6월 17일에 4학년 주관의 서을지역 체육대회에 참가하여 나이를 초월하여 후배학생들과 하루를 동심의 세계에서 보냈다. 체육대회 같은 행사는 공부만 하는 방송대생에게는 학우상호간의 인식과 스트레스 해소를 위하여 필수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5학년 1학기 시험이 끝난 후로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졸업학력평가시험준비에 열중하기로 하였다. 이즈음, 학칙개정으로 82학년도 3학년 편입생들의 졸업학점이 총 159이수학점에서 150학점으로 조정되었다. 그 무엇보다도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졸업의 환상이 눈 앞에 보였다. 우선, 남은 1학기, 2학기와 졸업평가시험에만 통과되면 졸업이 가능했다. 또한, 시험종료 후 3개월간 학우회에서 주관하는 졸업학력평가시험에 대비한 자율학습에 참석하였다.
84년 10월 28일의 졸업평가시험을 얼마 앞두고 너무 긴장하고 초조하여 몸살이 날 정도였으며, 입술이 터지고 먹은 음식이 소화가 잘 안되어, 합격이든 불합격이든 빨리 시험일자만 지나기를 바랬다. 그러나, 속으로는 무조건 합격되어야 한다고 다짐했다. 드디어, 시험은 계획대로 경기공업개방대학에서 오전 9시부터 시행되었다.
첫시간에 영어 I, 둘째시간에 행정조직론과 한국정부론, 그리고 마지막 셋째시간에 조직행정론과 행정통제 과목이었다. 시험은 만족하게 치뤘지만 자율학습에서 예상한 내용과는 전혀 다른 출제였다. 84년 11월 4일에 4학년 행정학과 주관의 제2회 동숭축제 문학의 밤에 참석하여 우리 대학생들의 우수한 잠재력과 학우회 임원들의 헌신적인 노고에 대해 고마움을 느꼈다.
특히, 특별강사로 참가하신 李奎浩 前문교부장관님의 [産業社會와 敎育發展]을 듣고는 우리나라와같이 천연자원이 부족한 나라에서 양질의 교육자원은 필요불가결한 것임을 느꼈다. 3학년 2학기때 실패했던 3개 F과목중 쉬운 과목보다도 가장 어려웠던 교양과목을 5학년 1학기때 먼저 재시하여 A학점을 취득하였다. 기분이 좋았다. 역시 노력한 것만큼 결과가 나타났다.
드디어, 84학년 11월 7일에 대학원 진학을 위하여 졸업예정 증명서를 발부받았을 때의 가벼운 흥분! 5년간 고생하며 공부한 보람이 이제 졸업증서로 확인되는 것이다. 만약을 위하여 학적과에서 졸업가능학점을 확인하였다. 2학기에 전과목 학점을 취득하면 졸업이 확실하였다. 그러고도, 3학점이 초과되었다.
11월 24일의 연세대 행정대학원 시험을 위하여 시내서적에서 [現代行政學演習]이란 교재를 구입하여 공부하였다. 시험문제는 다행히 중점적으로 준비했던 문제범위내에서 출제되었다. 시험후 모모든 것이 손아귀에 꽉 잡히는 기분이었다. 드디어 12월 1일 오전에 합격자 발표! 또한, 같은 날 제2회 영어발표력 경진대회에도 1차 원고심사에 합격되어 12월 1일에 완전히 준비가 된 상태는 아니었지만 마지막으로 참가하였다. 참가자들의 준비가 제1회 때보다 훨씬 향상되었다. 제1회대회에서와 같이 장려상으로 입상, 그리고 12월 7일에 대학원 등록일에 쫓기어 졸업학력평가시험의 합격여부도 통보받지 못한 채 우선 합격을 전제하고 또 전공필수에도 F학점이 있으면 졸업이 불가능하다는 낭설에 재차 학적과에 가서 졸업가능학점을 재확인한 후에야 대학원에 등록했었던 조마조마했던 일이 기억에 새롭다.
등록은 집사람을 시켜 직접하도록 했다. 입학식 및 신입생 지도는 85년 3월 2일에 있다. 기다리던 학사과정 졸업학력평가고사 합격통지서가 84년 12월 17일에 통보되었다. 또, 한 해가 바뀌어 5학년 2학기 시험이 85년 1월 7일날 마지막으로 시행되었다. 심신이 홀가분했다. 이제 대학원 입학식전의 남은 2개월 기간엔 영어를 공부하려고 한다. 실로 1985년도는 우리 대학 학사과정을 첫 졸업하는 나는 물론 모든 동창생들에게 중요한 해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계속해서 또다시 열심히 뛰어야 하는 한 해가 되었다.
그동안 가정을 하숙집 대하듯 하며 생활했던 수많은 날들, 방송강의 시간보다 늦게 귀가할 때는 집사람이 강의내용을 녹음해 주기도 했고, 시간이 없어 과제물 초안만을 작성해 놓았을 때는 깨끗한 글씨로 대필해 주기도 했다. 그동안 내조의 힘을 잊을 수가 없다.
나의 제1회 학사과정 졸업은 나 혼자만의 노력이 아니라 집사람과 자식들의 도움과 이해에 의한 공동 결실이다. 이제 지난 5년간 방송대학 생활 속의 다양했던 희로애락의 순간 순간들은 누군가가 말했듯이 우리의 최대의 영광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실패할 때마다 7전8기의 정신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졸업에 즈음하여 한가지 아쉬운 점은 한번도 전국적인 대회에 출전해 보지도 못하고 또 장학생이 되어 보지도 못하고 모교를 떠나는 것이다. 그러나, 후회는 없다. 나름대로 5년동안 주어진 환경에서 배우며 즐기며 생각하며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특히, 3개의 F 과목 중에서 교양과목을 우선 재시하여 졸업학점을 충족하게 되어 첫해에 졸업을 하게 된 것도 학보를 빠짐없이 읽고 의문이 있을 때 적극적으로 해당 학과장님 및 학교관계 요원과 직접적인 접촉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생각한다. 역시 학문에는 왕도가 없다. 졸업의 확신을 가지고 열심히 하게 되면 어느덧 목표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학사과정 졸업에 즈음하여 후배 재학생에게 선배로써 친구로써 또는 동문으로서 모교를 떠나는 마당에 외람되지마는 다음 두 가지를 당부를 남기고자 한다.
첫째, 캠퍼스는 없지만 재학중에 교내 또는 지역별 행사에는 전체 학우가 동참함으로서 다양하게 약동하는 정서적인 활기발랄한 방송대생의 참모습을 보여 주어 질적인 성숙을 기했으면 한다. 왜냐하면 바라보는 문화는 관념적이고 피상의 일 뿐이나 뛰어드는 문화는 실제적이고 창조적이고 건설적이기 때문이다.
둘째,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평범한 격언을 새삼스럽게 인용할 필요도 없이 부단히 자기 실력을 배양하기 바란다. 왜냐하면, 내 실력은 남보다 내가 더 잘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제력이 있는 방송대생들은 대학원에 많이 진학하여 향학의 열기를 꺼뜨리지 말고 계속 정진하기를 바란다.
한국방송통신대학은 그동안 학교당국의 노고와 학우회 임원들의 열성적인 봉사와 전체 학우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꾸준히 성장 발전하여 왔으며 벌써 그 가치를 사회적으로 크게 인정 받아왔다. 그 증거로 만여명이 넘는 졸업시험 합격자, 7백명에 가까운 대학원 입학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 국가적으로 보아서도 대학교육비 투자의 효율성에 있어 근소한 비용으로 고급인력을 배출우리나라와 같이 천연자원이 부족한 개발도상국가로서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양질의 인적자원을 획득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이제 大望의 1985년도도 벌써 시작되었다. 어제 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노력하는 방송통신대학생,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계속 발전하는 방송통신대학이 되기를 기원한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먼데 작은 실수에 집착하여 공연히 자포자기한 일은 없었는지? 불필요한 일에 귀중한 시간을 낭비했거나 지금까지 이룩한 작은 성공에 자만하지 않았는지? 또 지식만을 추구하다가 가장 중요한 인간성을 그르치지 아니하였는지? 다시금 조용히 반성해 본다.
국내외의 성공적인 만학의 주인공들과 같이 어려운 환경에서도 불굴의 의지로 학업을 계속하는 방송대인의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금번에 경영학과-가정학과-농학과-초등교육과 및 행정학과를 졸업하는 5개 학과 졸업생 학우들은 사회에서 맡은 각각의 분야에서 더욱 열심히 일할 것이다. 차제에 방송통신대학의 기능을 보다 더 보강하여 입학의 문호를 더 개방하고 넘치는 향학열에 보다 생산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국가의 재정적인 배려가 더욱 뒤따르기를 바란다.
거듭 오늘의 학사졸업생이 탄생하기까지 지도 편달해 주시고 음으로 양으로 애써 주신 본대학 학장님, 교수님들 및 교직원 여러분, 남의 대학 학생인데도 출석수업 때마다 편의를 돌봐 주신 협력학교 총(학)장님 및 관계 교직원 여러분, 그리고 어려운 조건에서도 열강하여 주셨던 타대학의 모든 교수님들 및 강사님께 감사를 드린다.
또한 오늘이 있기까지 옆에서 모든 것을 이해하고 후원해 주신 가족 및 친지 여러분에게도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다시 한번 大望의 1985년을 맞이하여 한국방송통신대학 최초의 학사과정 졸업에 관계된 모든 분들에게 머리 숙여 고마운 인사를 전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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