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정의대로 글을 쓰는가?
(수필이론과 수필쓰기)
차주환 선생이 내린 수필의 정의를 보자.
“수필은 산문문학의 한 유형으로 생활과 관련되는 모든 사물을 소재로 하고, 자아(ego)의 표출을 기본으로 하되, 어느 특정한 주의나 주장, 지식의 내용의 전달을 일삼지 않는다. 체제에는 제한이 없으나 대체로 독백 양식이다. 미지의 가장 이상적인 상대를 상정한 일반적인 대화의 한계에 머문다.”
장백일 선생이 내린 정의도 보자.
“소재에 대한 작가 나름의 해석과 이해에 의미의 부여이되, 고백적, 자조 문학의 성격을 갖는다. 수필은 감동을 전제로 하되, 언어를 통해 인생을 새롭게 해석하고 이해시키는 정서화 된 사상의 전달로서 인간학이다.”
도창희의 주장도 보자.
“수필의 기본은 미(美)의 추구이다. 그 외에도 쾌락성을 추구하고, 자아를 표현하는 진솔성이 있어야 한다.”
나는 수필공부 모임에서 수필 이론을 강조한다. 같이 공부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이론을 몰라도 글쓰기에 아무런 장애도 받지 않는다. 맞는 말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론 없이 글쓰기를 하면 한계에 부딪힐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자동차를 운전할 때 네비게이션이 없어도 달릴 수 있다. 그러나 목표 지점을 찾아가기까지 좀 더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앞에서 말한 정의를 보면서 내가 새로운 유형의 수필을 쓰자고 주장할 명분이 없다. 이 정의대로라면 우리 수필이 문학으로 옳은 대접을 받지 못한 현실을 안타까워할 이유가 없다. 이대로라면 문학의 틀을 벗어날 리 없다. 그런데도 새로운 수필쓰기 운동의 필요성을 느낀다는 것은 우리가 위의 정의대로 수필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이 중에 자아의 표출을 기본으로 한다. 독백 양식이다. 또 특정한 주장, 지식 내용의 전달을 일삼지 않는다.를 두고 생각해보자. 솔직히 말해서 우리 수필은 일삼지 않는다는 것을 일삼고 있다. 일삼아야 할 자아 표출과 독백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법이 생긴 것은 사람들이 지키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과 같은 내용이다.
자아의 표출과 독백은 자기와의 대화이다. 우리 수필에서 흔히 만나는 자기와의 대화라면 자신의 감성에 충실한 글이 대부분이다. 자기감정에 깊숙하게 매몰되어서 감정 표현을 하는 글이 대부분이다. 이런 글을 서정성이 짙은 글이라면서 자위한다. 자아는 감정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자기이다. ‘자아의 표출’이란 감정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고, 감정의 뒤에 있는 자기를 찾아내서 서술해야한다. 그래서 나는 새 수필 쓰기에서 감정이 아닌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는 글을 쓸 것을 주장한다.
흔히 만나는 수필 문장의 유형을 예로 들어보자.
“그녀는 솔잎 냄새가 가득한 숲속에 위치한 하얀 발리에 살고 있으며, 그 앞바다에는 햇빛에 반사되는 은빛 물결이 출렁이고 있다.”
“아직은 나는 이 생을 어느 시인같이 소풍 나온 것 같이 살지 못하고 전생의 앙갚음과 내세의 빚을 지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수필에서 흔히 만나는 문장을 보면 중산층의 문화 성격을 지닌 것이 많다. 어느 정도 삶의 안정을 이룬 계층이 이제는 행복을 누릴 조건을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위의 두 문장을 보면 그와 같은 심리상태가 잘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 것이지 자아의 표출은 아니다.
(* 수필에 입문하는 사람을 보면, 중년 이후, 특히 여성이 많다는 것은 경제적 안정을 누린 중산층이 많다는 것을 암시한다.)
감정의 표현은 낭만주의적 취향이다. 어느 정도의 세월 동안 삶을 살았고, 힘든 삶을 벗어날 만큼의 부를 축적한 중산층들이 느끼는 감정은 전통적인 가치에 순응하면서 가정적인 분위기를 가치로 받아들인다. 그렇다고 하여 관능적인 것에 대한 선호도 버리지 못한다. 이러한 이중성이 글에서 낭만주의적 취향이 되어 나타난다.
(*중산층의 특성은 보수성이라고 한다)
글에서 샤갈이 나오고, 하와이가 나오고, 차이콥스키가 나온다. 조용한 분위기에서 커피 향을 음미하면서 한가한 시간을 보낸다. 이국적인 분위기에 자신의 감정을 실어서 표현했다. 이것은 대중들의 일반적인 바람이므로 통속성이 강한 표현이다. 이처럼 대중의 취향에 맞는 예술을 키치적이라고 말한다. 감정 표현을 위주 하는 글쓰기는 키치적이고, 통속적이다. 고급예술에 편입될 수 없는 저급예술이 된다.
(*지금은 키치도 고급예술에서 수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자아의 표출과 독백은 어떤 것일까? 이것은 감정보다 더 밑바닥에 있는 무의식 영역에 속한다. 우리 수필은 나의 무의식에 숨어 있는 진실들을(내면이고, 자아이다.) 토로해내지 못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수필을 가벼운 문학, 변두리 문학의 취급을 받는다.
(* 무의식을 스스로 찾아내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이라 할 만큼 어렵다고 한다. 무의식(자아)에 다가가기 위해서 끊임없는 탐색을 해야 한다. 때문에 수필쓰기에서 자기 탐색을 하는 글을 쓰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치료효과도 가진다.)
수필문학의 가벼움은 어떤 면에서 오히려 문학이라는 지적 놀이에 많은 사람이 참여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이 된다. 다시 말하자면 수필이 문학에서 중심이 아닌 변두리로 취급받는 것이 사실이더라도, 변두리는 누구나 쉽게 접근이 가능한 좋은 점도 있다. 일반인의 접근이 용이한 장점이 있지만, 자아의 표출과 고백 문학이라는 정의에서 벗어나면 수필이 될 수 있을까? 문학이 될 수 있을까?
태생적으로 신변잡기일 수밖에 없지만 표피적인 감정이 아니고 깊숙한 내면의 심리변화를 다루어내면 고급문학이 될 수 있다. 자신의 자아 형성과 관계있는 개인사를 잘만 표현해 낼 수 있다면 다른 장르보다 훨씬 호소력이 강한 문학이 될 수 있다.그러려면 우리는 자기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아야 하고, 자기와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정의대로’라는 말은 이론에 맞게 글을 쓰자, 라고 읽는다. 그러나 누누이 강조하는 말이지만 이론에 우선하는 것은 ‘많이 읽어야 한다.’ 이다. 작품을 읽으면서 나름대로의 터득은 없이 이론만 붙잡고 있다고 글쓰기를 잘 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의 경험이 이론보다 중요하며, 읽기는 경험의 확대이다. 나는 이론과 경험의 접목이야말로 수필을 쓰는 기본자세라고 본다. 옛날 어른들의 말씀이 십년 동안 공부를 붙잡고 있으면 문리(文理-사투리로 물미)가 트인다, 했다. 이 말을 바꾸어서 수필쓰기를 하려면 적어도 10년은 붙잡고 있어야 한다. 문학 이론가인 도로시 세이어스는 ‘이론이 사람 잡는다.’말을 함으로 너무 이론에 경도되는 것을 경계하기도 한다.
나는 젊었을 적에 육아학을 공부했다. 그때 교수님이 강력하게 추천하신 책은 스포크 박사의 육아책이었다. 나는 그 외에도 몇 권의 육아책을 읽었다. 그 중에 ‘더드슨 박사의 육아책’은 인기 있는 책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책을 좋아했다.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내가 말한 육아법이 반드시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엄마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육아법이 있으면 그렇게 키우십시오.’ 미국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렸다는 인기절정의 육아책이었던 스포크 박사의 책도 1980년 대에는 수정했다고 하니, 절대적인 이론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이다. 때문에 수필쓰기에서도 절대적인 이론이란 있을 수 없다고 믿는다.
그렇더라도 이론은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경고해 주고, 바른 길로 이끈다. 이론도 모르고 글을 쓴다는 것은 장님이 지팡이 없이 길을 걷는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