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곡역을 지나며 배공순 종종 기차를 타고 광주에 오간다. KTX가 생기면서 분주했던 임곡역은 사람도, 화물도 내리지 않는 폐역된 지 오래다. 사라져버린 한옥 청사를 그리움으로 더듬는다. 내가 참 좋아했던 길, 금방이라도 피어날 듯 연분홍 꽃망울이 부풀어 있던 벚나무 길도 흔적이 없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 난생처음 군수에게 첫 발령장을 받았다. 내무부 공채에 합격한 신출내기 공무원 열두 명. 그중 절반인 여섯 명이 나를 포함한 앳된 소녀였다. “아이고, 인자 남자들은 집에 가서 애기나 봐야 쓸랑가?” ‘여직원 여섯’이 놀라운 뉴스거리였는지, 나이 지긋한 남자 직원들은 볼 때마다 농을 던졌다. 공채 여직원은 부녀 계장과 주임 단 둘뿐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동기들은 각자 임지로 떠났고 임용장을 챙겨 든 나도 임곡행 기차를 탔다. 내 앞에 펼쳐질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내 선택은 옳은 것이었을까……. 창밖을 보면서도 많은 생각이 꿈틀거렸다. 나는 대학 진학을 포기했었다. 담임 선생님은 예비고사 성적표를 가리키며 교대라도 갈 것을 몇 번이고 권했지만, 그 결정을 바꾸지 않았다. 동생과 나를 연이어 대학에 보내기엔 농사짓는 집안 형편이 녹록지 않음을 잘 알아서였다. 내 마음을 짐작한 외삼촌이 생각 끝에 권한 공무원의 길, 그리 달갑지 않았지만 달리 대안도 없었다. 재색 기와를 인 한옥 청사가 나의 첫 근무지, 임곡면사무소였다. 단정하게 가꾼 정원으로 들어섰다. 담장에 기대선 자목련은 자색 꽃으로 화사했고, 청사를 감싸고 있는 나무들도 싱그러웠다. 마당에는 태극기와 진초록 새마을기가 춤추는 무희의 치마처럼 나부꼈다. 면장실로 향했다. 다소곳이 걷는데도 오래된 마루는 쿵쿵, 삐걱대며 민망한 발걸음 소리를 숨겨주지 않았다. 가무잡잡한 얼굴 탓인지 하얀 이가 도드라져 보이던 면장이 팔자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면장이 내민 두꺼비 같은 손을 잡자 위아래로 흔들어대며 말했다. “아따, 씩씩허구만 잉. 배양 잘 오셨소!” 반겨주는 것이 좋으면서도 난데없이 ‘배양’이라 불리는 것이 난감하고 어색했다. 그땐 그리들 불렀지만, 다방 ‘레지 아가씨’가 되어버린 듯 찝찝한 기분이었다. 임곡면은 집에서 한 시간 남짓한 곳인데도 출퇴근이 문제였다. 아침이면 집 근처 송정리역에서 임곡역으로 오는 기차가 없고, 저녁에는 집으로 가는 기차 편이 없었다. 자취생활이 시작되었다. 조용한 마을, 젊은 부부의 텃밭 딸린 기와집 건넌방이었다. 70년대 중반 시골집은 대부분 무허가였다. 가족끼리 뚝딱뚝딱 집을 지었고 기존 집에 덧대어 넓히는 일도 흔했다. 무허가건물을 파악하는 업무가 시작되었다. 동행을 자원하고 나선 총각 직원 자전거에 매달려 하얀 억새가 한들거리는 강변을 달렸다. 바람을 가르며 논두렁에 접어들면 메뚜기가 포르르 날아가고 익어가는 콩알이 툭, 툭 튀어 올랐다. 평수를 산출하기 위해 집집이 평면도를 그리고 일일이 줄자로 길이를 쟀다. 밤에는 그 무렵 새로 나온 큼지막한 전자계산기를 검지가 아프도록 두들기며 건축물대장을 만들었다. 동네마다 출장이 잦다 보니 재산세가 부과될 거라는 소문이 돌았던 모양이었다. 주민들이 몰려와 퇴근길을 막아서면서 시끌벅적 거친 소란이 일어나곤 했다.
집으로 오는 고샅길은 비에 젖은 수채화처럼 흐렸다. 친구들은 풋풋한 여대생인데 나는 무얼 하는 거지? 산자락을 누비는 것도 모자라 줄자 들고 실골목이나 헤매다니. 휑한 골바람이 가슴팍을 아리게 했다. 대문에 들어서면 ‘오매, 내 새끼 왔는가’ 두 팔 벌려 반기던 엄마가 그리워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런 밤이면 집 뒤 대나무 숲, 댓잎들이 서걱거리는 소리에도 와락, 무섬이 밀려들곤 했다. 앉은뱅이책상 위에 다시 책을 펼쳤다. 야간대학에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예비고사 전날 기다렸다는 듯 감사반이 뜨는 게 아닌가. ‘서정쇄신 운동’이 한창이라 풀잎도 떨 만큼 서슬이 시퍼런 때였다. 공직사회는 바짝 긴장해 있었고 암행 반이 불시에 들이닥치기도 했다. 하필 그날이라니. 서류를 안고 감사장을 드나드는 사이 내 꿈은 흩어져버렸다. 나목의 꽃눈에도 살이 오르듯 내 작은 꿈이 영글던 곳. 임곡에서의 담금질은 분명, 나의 우듬지를 키우는 거름이 되었으리라. 때론 인내하고 때론 성취하며 열정을 쏟았던 시간이 쌓여 서울시에서 공직을 마무리했고 대학에의 열망도 성취해냈으니 말이다. 임곡역을 지난다. 임곡역은 내 인생의 디딤돌이자 긴긴 공직 생활의 출발역이 아니던가. 그 옛날의 임곡역에서는 여전히 한옥 청사가 보인다. 스물한 살의 내가 무성한 벚나무길을 욜랑욜랑 걸어가는 모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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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임곡역을 지나며' 는 배공순 선생님의
수필입니다.
문예지 <에세이포레>에 실렸던 수필입니다.
첫 발령지가 임곡이었나봅니다. 스물한 살의 배선생님을
상상해봅니다.^^
예쁘장하고 앳된 모습이 그려지는군요.
수필은 나를 소녀시대로, 청년시대로 데려다 줍니다.
정감이 가는 글입니다.
글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문님, 감사드립니다.
소개글을 정겹게 써주시고
공감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임곡역' 에 내리는 앳된 배 선생님을 그려봅니다.
그제나 이제나 열심히 사는 배 선생님!
굽이굽이 돌아 이렇게 만났군요.
배공순샘의 맛깔나는 글 그리웠는 데,
고문님께서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