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1. 26. 주일예배설교
골로새서 3장 1~4절
우리는 이 세상에서는 이미 죽은 자
■ 오늘 설교 제목이 섬뜩하신가요? 아니면, ‘뭐지?’라는 생각이 드시나요? 아마 이 두 개의 반응은 “우리는... 죽은 자”라는 말 때문일 것입니다. 이렇게 버젓이 살아있는데 죽었다고 하니, 섬뜩한 마음이 들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마음이 들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반응과는 상관없이 이것은 사실입니다. 3절이 말씀하고 있죠? “너희가 죽었고” 장차 죽을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미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버젓이 살아있는데, 이미/진즉에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절에서는 살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이라고 분명히 하셨음에도, 이미 죽었다고 하시니 도통 이해가 어렵습니다. 혹시 우리는 살았으나 죽은 것일까요, 죽었으나 산 것일까요?
오늘은 설교 제목을 중심으로 본문이 말씀하시는 바를 이해하도록 하겠습니다.
■ 우리의 정체성은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얻게 된 영광스러운 호칭입니다. 세상 그 어떤 호칭보다도 값지고 자랑스러운 호칭입니다. 이 말은 최고의 호칭일 뿐만 아니라 최고의 지위이기도 합니다. 회장, 이사장, 대표, 왕, 대통령 등과 같은 지위보다 최고의 지위입니다. 그렇기에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에 대해 거룩한 자부심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이 거룩한 자부심은 새로운 영적·윤리적 삶을 요청합니다. 그리스도인 이전의 삶의 내용과 태도가 아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내용과 태도를 요청하십니다.
이러한 요청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1절 상반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무슨 이유인가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님 덕분에 거듭났습니다. 이를 ‘중생’이라고도 하고, ‘부활’이라고도 합니다. 이렇게 다시 살아난 인생이기에 “위의 것”-“천상의 것들”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이는 죽음에서 구원받은 것이니 더 이상 이전의 삶이었던 죽음의 삶의 내용과 태도를 찾아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2절입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땅의 것은 죽음을 향해 가는 것들입니다. 위의 것은 생명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부터 찾고 추구해야 하는 것은, 죽음의 삶이 아니라, 생명의 삶이어야 합니다. 생명인 하나님 나라의 가치고 의미고 관점이어야 합니다. 교회에서든, 시장에서든, 가정에서든, 직장에서든,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의미와 관점을 추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혹시 땅에 사는 동안에 어찌 완벽하게 위의 것을 추구할 수 있느냐고 이의를 제기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보면, 이해할 수 있는 이의제기입니다. 우리의 존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기에 불완전하고 불안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의 본의는 변명입니다. 사실이지만 변명입니다.
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유로, 하지 않겠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계 안에 있기에 실수와 실패는 불가피합니다. 그렇더라도 매일 매순간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의미와 관점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렇기에 한계를 말하는 것은 맞지만, 못하다고 하는 것은 변명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예 하지도 않겠다는 의도라면, 이는 변명입니다.
본문은 이러한 변명을 3절에서 “이는 너희가 죽었고”라는 말씀으로 차단하십니다. 이는 우리의 옛 삶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땅의 것을 찾고, 죽음의 것을 좇던 옛 삶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대신 우리의 삶은 새 삶이 시작됐고, 바로 이 새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3절은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분명 우리의 옛 삶은 죽었고, 새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참된 삶은 새 삶입니다. 이 새 삶은 죽음을 향해 가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입니다. 분명 구경꾼들에게는 이 사실이 잘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새 삶의 참여자에게는 자신의 삶이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인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새 삶을 살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은 변명입니다.
■ 그런데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에는 한 가지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3절의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를 보시면,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요?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 안에 있기에 하나님 안으로 들어온 사람이 아니면 이 사실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우리가 새 삶, 새 생명을 가졌음을 볼 수 없기에,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4절을 더 읽고 나면, 이것의 의미에 또 하나의 의미가 더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3절은 우리의 생명이 감추어졌다는 것이고, 4절은 우리의 생명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감추어졌던 것이 나타나는 시점이 “그 때”입니다. “그 때”는 이 땅의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의 날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우리의 참 모습, 우리의 영광스러운 모습은 “그 때”가 오면 드러난다는 의미입니다. 그전까지는 우리의 모든 것이 감추어져 있고,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시 우리가 유명한 자로, 인기를 받는 자로, 명예를 얻은 자로 살고자 할 수 있는데, 이것에 연연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에게 드러나고 유명세를 타는 것보다, 새 삶, 새로운 생명 가운데 사는 것이 더 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무명하고, 주목받지 못한다고 안타까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이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때까지는 그리스도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에 만족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땅의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위의 것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위에는 정말 중요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과 연관된 일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가치로도, 의미로도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가치와 의미가 벌어지는 곳이 바로 위의 하나님 나라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새 삶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 그러므로 위를 바라보는 여러분은 발을 질질 끌며 땅만 쳐다보고 다니거나, 바로 눈앞에 있는 것들에 관심을 빼앗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땅의 것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물론 필요할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필요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그렇기에 명예나 지위가 관심의 대상일 필요가 없습니다. 혹시 주님의 영광을 위해 명예와 지위를 부여하신다면, 순종하십시오. 그러나 이 또한 순종의 차원이지 자랑거리여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지향하신 삶의 자세는 ‘낮아짐’이고, ‘무명’이셨습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의 제자인 그리스도인은 당연히 ‘낮아짐’과 ‘무명’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교회나 노회, 총회, 연합회 등에서 강사를 찾을 때 기준이 높은 사람과 유명한 사람입니다. 물로 검증된 강사를 찾는 것이 필요하지만, 인기와 지위와 유명세를 우선적으로 고려한다는 것은 안타까움 그 자체입니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느라 유명해지고 싶어 방송과 출판에 심혈을 기울이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만납니다. 예수님이 지향하신 ‘낮아짐’과 ‘무명’에 비추어보면 낯뜨거운 일입니다.
물론 저의 이러한 비판에 논의의 여지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원칙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지향하신 ‘낮아짐’과 ‘무명’을 추구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1절)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위를 바라보십시오. 땅의 것이 아니라 위의 것을 추구하십시오. 이는 그리스도 주위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주목하는 것입니다. 그곳에서만 벌어지는 정말 중요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무엇인가요? 생명의 역사입니다. 평화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역사입니다. 이 땅 위에서 벌어지는 죽음-분쟁-미움의 역사와는 전적으로 대비되는 역사입니다. 혹시 이런 죽음과 분쟁과 미움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이것은 인간 세상에서는 어쩔 수 없기에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데 수정을 요청합니다.
혹시 ‘나는 위의 것에만 관심이 있소.’라고 생각하신다면 이것도 수정하시길 요청합니다. 우리가 위의 것을 추구한다는 것이 땅의 것에 무관심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위의 것을 추구한다는 것은 땅의 것의 잘못을 수정해야 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역사를 생명의 역사로, 분쟁의 역사를 평화의 역사로, 그리고 미움의 역사를 사랑의 역사로 바꾸기 위해 수고하는 것이 위의 것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의 책무입니다. 참으로 거룩한 책무입니다.
■ 그런데 우리의 이 거룩한 책무는 십자가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책무는 훗날 영광이 될 것입니다. 4절입니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잠시 잠깐 누리는 영광을 고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게 될 그 날의 영광을 고대하는 사람입니다. 영원한 하늘의 영광을 고대하는 사람입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는 이미 죽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 호칭이 영광스럽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이 호칭에 맞는 영광스러운 삶을 추구하시길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이 늘 자랑스럽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