淸朝가 중국 25왕조 가운데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淸朝는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168 0~1780) 팍스 시니카(Pax Sinica)를 이룩했습니다. 이러한 평화와 번영은 1670년대에 1억50000만이었던 인구를 1850년대에는 4 억3000만으로 증가시켰습니다. 또한 내몽골, 외몽골, 신장(투르키스탄), 서장(티베트 )을 정벌하고 효율적으로 통치하여 역대 어느 왕조보다 광활한 영토와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多민족국가를 오늘날의 중국에 유산으로 물려주었습니다. 국토와 민족 구성 등의 면에서 현대 중국의 모양을 결정한 왕조가 바로 淸朝입니다』 ―淸朝가 소수민족이 건립한 왕조임에도 불구하고 다수 漢人을 장기간 통치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입니까. 『明朝의 정치제도와 사회질서를 계승하면 서 만주족 고유의 전통과 제도를 보완하는 뛰어난 컴플러마이즈(절충)의 능력입니다. 청조는 정치, 사회세력간에 견제와 균형 (check and balance)을 이룬 중앙집권적 전제국가를 수립하여 유연성 있게 체제를 운영했습니다』 ―만주족은 우리 삼국시대 때 고구려에 복 속된 민족으로서 말갈이라고 불렸습니다. 통일신라 시기에 말갈은 고구려 유민들과 함께 발해를 세웠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발해를 민족사에 포함시키고 있는 만큼 말갈족의 후신인 만주족이 세운 淸을 우리 민족사에서 어떻게 다뤄야 할지, 앞으로 연구되어야 할 대목입니다. 『수렵민이었던 만주족은 오랜 옛날부터 백 두산과 흑룡강 사이에 생활터전을 잡고 살아왔는데, 先秦(선진) 때는 肅愼(숙신), 兩漢(양한) 때는 邑婁(읍루), 魏晉南北朝(위진 남북조) 때는 勿吉(물길), 수-당 때는 말갈, 宋代 이후에는 女眞(여진)이라고 했고, 17세기에는 스스로를 滿洲族이라고 불렀습니다. 퉁구스족 계열로서 우리 민족과 인종적 친연성도 깊습니다』 ―일본의 사료에 따르면 발해의 지도층은 고구려 유민이었지만, 다수 민족은 말갈족입니다. 따라서 발해를 우리 민족사에 포함시키면서 淸을 민족사에서 배제하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 아닙니까. 淸은 우리 민족사에서 外史로라도 다루어야 한다는 국내 일부의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중국 학계의 일부에서는 발해는 물론 고구려까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이번 淸史연토회에서 제가 「청조는 정복국가」라고 말하자 어느 중국인 학자는 「중국의 소수민족이 세운 청조를 어떻게 정복국가라고 규정할 수 있느냐」고 반론을 폅디다. 희안한 억지 논법이지만, 어떻든 中原을 침략해 들어온 온갖 민족을 모두 다 중국인이라고 포용한 결과가 오늘의 중국을 56개 민족의 多민족국가로 만들 수 있었던 까닭입니다』 ―여진족은 조선왕조의 창업 당시 李成桂( 이성계) 휘하에서 상당한 역할을 담당했지요. 이성계 자신은 全州李氏(전주이씨)라고 하지만, 그의 4대조가 동북면으로 이주 한 이후 오랜 세월이 흘렀던 만큼 그 家系에도 여진족의 피가 섞여 있었다고 해야 자연스럽지 않겠습니까. 『고려 말기 한반도의 동북지역, 즉 함경도에는 여진인과 고려인들이 혼거했으므로 그럴 개연성이 높습니다. 특히 이성계의 私兵 집단에는 여진족들이 다수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예컨대 지금의 함경북도 북청지역은 여진족 추장 퉁두란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그가 함경남도 함흥 지역의 토호인 이성계에게 굴복하고 의동생이 되어 李之蘭 (이지란)이란 이름을 받았지요. 나중에 그는 조선왕조 개국공신이 되어 建州衛(건주위)를 정벌하기도 했습니다. 이성계의 휘하에는 이밖에도 斡朶里族(오도리족)의 만호 猛哥帖木兒(몽거테무르), 火兒阿(할아) 의 만호 阿哈出(아하추) 등이 종군하고 있었습니다. 일개 지방군벌에 불과한 이성계가 중앙정계에서 강력한 실력자로 떠오를 수 있었던 것은 여진족이라는 배후세력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淸太祖 누르하치의 家系
―누르하치의 선조는 누구입니까. 『建州左衛(건주좌위)의 開祖(개조) 몽거테무르가 바로 누르하치의 직계조상입니다. 아하추는 建州本衛(건주본위)의 개조가 되었지요. 태조 이성계는 조선왕조 창업 후 여진족의 대소 추장들에게 만호, 천호의 직첩을 새로 주었습니다. 이리하여 창업 초기의 조선왕조는 두만강 하류 孔州(공주 )에서 상류 甲山에 이르기까지 통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태조는 여진족에 대한 동화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습니다』 ―그러던 여진족이 조선왕조와 등을 돌리게 된 배경은 무엇입니까. 『왕자의 난을 거쳐 태조 이성계의 제5자 方遠(방원: 태종)이 등극하자 안변부사 趙思義(조사의)가 태조의 계비 康(강)씨와 그 소생인 태자 方碩(방석)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목으로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 반란에 여진족이 가담함으로써 조선조와 여진족은 적대관계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태종은 오늘날의 회령에 자리잡고 있었던 몽거테무르를 회유하여 만호의 지위를 보장하고 입조를 시켰습니다. 그러다 태종 5년( 1405) 몽거테무르가 明朝에 입조하자 조선조는 이에 대한 보복조처로 慶源(경원)에 설치되어 있던 무역소를 폐쇄했습니다. 태종 10년(1450)에 몽거테무르는 오도리 부족을 이끌고 압록강 북쪽 鳳州(봉주)로 이주했으며 건주좌위를 개설했습니다. 그후 그는 세종의 허가를 얻어 6500명의 오도리 부족을 이끌고 다시 회령으로 돌아왔는데, 세종 15년(1433)에 楊木答兀(양목답월)과 嫌眞兀狄哈(우디케)의 습격을 받아 피살되고 그를 따르던 오도리족은 건주본위로 도망을 쳤습니다』 ―그후 건주본위도 조선과 明의 협공을 받아 풍비박산이 되지요. 『세조 13년(1467)에 건주본위의 제3대 지도자 李滿住(이만주)가 康順(강순)과 南怡 (남이) 장군의 조선군와 싸우다가 패사했습니다. 李滿住가 바로 아하추의 손자입니다』 ―그러면 건주본위로 도망쳤던 몽거테무르의 잔당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몽거테무르의 死後에 明朝는 그의 동생 凡察(범찰)을 건주위의 지휘사로, 그의 차남 董山(동산)을 건주좌위의 지휘사로 삼았습니다. 董山의 5대손이 바로 누르하치입니다』 ―누르하치의 흥기 과정은 어떠합니까. 『누르하치는 청년시절 明의 요동총병 李成梁(이성량)의 공격으로 조부와 부친을 잃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후일을 기약하며 이성량에게 온갖 충성을 다 바쳤습니다. 그는 25세가 되던 1583년 5월에 琿河(혼하 ) 상류 허투알라(興京: 요녕성 신빈)를 거점으로 삼고 起兵(기병)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비교적 멀리 있는 부족과는 선물과 결혼을 통해 화친을 맺고, 가까운 부족은 무력으로 정복하는 遠交近攻(원교근공)의 전략을 구사했습니다. 또한 明朝에는 친히 여러 차례 조공을 하는 등 종속적인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明 조정이 그의 세 력확장을 경계하지 않도록 했습니다. 특히 明의 요동총병 이성량에게는 뇌물을 많이 먹였다고 합니다. 1588년에 明 조정은 누르하치에게 건주좌위 도독첨사의 지위를 내렸습니다』 ―이성량은 평안도 위원(渭原) 사람으로 살인죄를 범하고 압록강을 넘어 요동으로 도망쳐 군에 입대, 공을 쌓아 明의 장군이 되었던 인물입니다. 그는 만주 전역의 군사권을 쥐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교역과 상권에 개입하여 막대한 재물을 축적했습니다. 지금도 요녕성 錦州(금주) 인근의 廣寧城(광녕성)에 가보면 이성량의 공적을 기리는 牌樓(패루)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또한 그는 신흥세력인 누르하치와도 그 이익을 나누어 먹었는데, 그러는 동안 누르하치의 세력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진 겁니다. 결국 1591년 11월, 이성량은 누르하치의 팽창을 막지 못한 데 대한 책임을 지고 요동총병직에서 해임당했습니다. 다만 寧遠伯(영원백)이라는 작위는 그대로 유지하고 나이가 많아 퇴임한다는 형식이 취해졌습니다.
임진왜란 틈타 建州여진을 통합
『明 조정에서 이제는 누르하치의 세력을 꺾어버려야 하겠다고 작심했을 때 공교롭게도 임진왜란이 발발한 것입니다.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하여 明이 조선에 원군을 파견하자 누르하치도 출병을 자청했습니다. 당시 4만여 명의 明軍을 이끌고 조선으로 들어온 제독 李如松(이여송)이 바로 이성량의 아들입니다. 누르하치의 요청은 朝-明 양국 모두에 의해 거절당했지만, 그 무렵엔 그가 그만큼 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누르하치는 明 조정의 견제가 소홀해진 임진왜란 기간 중에 그 권력을 굳히기 위한 정복전쟁을 감행하여 海西(해서)여진과 조선의 6진에까지 세력을 확장했지요. 그러면서도 그는 계속 明 조정에 조공사를 파견하여 공물을 바쳤고, 1595년에는 明 조정에서 여진 수령에게 부여하는 최고의 명예직인 龍虎將軍(용호장군)의 지위를 받았습니다』 ―그 무렵, 조선 조정에서는 누르하치에게 사신을 파견하여 여진족의 허실을 탐색하게 했던 일이 있었지요. 『1595년 선조 임금의 命을 받은 申忠一(신 충일)이란 무관이 누르하치가 거주하던 허투알라성을 방문하고 귀국하여 「建州紀程圖記」(건주기정도기)라는 보고서를 썼지요. 이 보고서에는 여진의 산천, 군사, 풍속과 관련한 97개 조의 기사와 정밀한 지도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첩보활동을 했던 신충일이 귀국해서는 곧 파직을 당하고 말았지요. 건주에 가서 누르하치가 준 호복을 입고 그에게 다섯 번 절하고 세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함으로써 조선국왕의 사신으로서 국위를 손상시켰다고 탄핵되었던 것입니다. 아무튼 조선왕조에서는 그때까지도 여진을 한 단계 아래의 나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야 어떻든 세력을 확장한 누르하치는 1599년 몽고문자를 차용한 만주문자를 제정함으로써 만주 고유의 문화를 유지하고 민족의식을 함양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합니다. 이어 1601년에는 일사불란한 전투집단 八旗를 확보하였고, 1610년에는 寧古塔(영고탑: 길림성 지역)을 점령함으로써 건주위 관할을 넘어 장거리 원정까지 수행할 수 있는 군사력과 노동력을 갖추게 됩니다. 그러니까 1583년 起兵 당시 10만에 불과했던 만주족은 이 시점에 이르러 40만~50만의 인력을 확보하게 되는 것입니다. 드디어 1616년 정월 초하루 누르하치는 汗(한)에 올라 국호를 金(금), 연호를 天命이라고 일컫습니다. 누르하치의 金은 12세기에 阿骨打(아골타)가 세워 중국의 화북지방을 차지한 金과 구별하기 위해 역사에서 後金(후금)이라고 서술하고 있지요』 ―누르하치와 新羅金氏(신라김씨)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누르하치의 姓이 愛新覺羅(애신각라)인데, 만주어에서 애신은 「金」, 각라는 「族」을 뜻하지요. 『황해도에 살던 新羅 金氏가 여진 지역으로 넘어가 아골타의 조상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기는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한 후 만주황족의 다수가 자신들의 성을 金씨로 삼았던 일입니다. 저는 金씨 성을 가진 중국사람을 만나면 으레 「만주족이냐」는 질문을 하는데, 「그렇다 」고 말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디다』
光海임금의 이중외교
―1618년 누르하치는 開戰문서인 이른바 七大恨(7대한)을 발표하고 요동의 군사거점 撫順(무순)에 선제공격을 가한 다음 약탈을 감행합니다. 요동군의 대패에 놀란 明朝는 10여만명의 원정군을 보냈으나 다음해인 1619년 3월, 무순 부근의 사르후에서 궤멸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때 조선은 1만5000명의 군사를 파견하여 명군을 돕습니다만, 전세가 불리하자 재빨리 후금군에게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조선군을 지휘한 姜弘立(강홍립)이 출병 전에 광해군을 독대하여 「대세를 관망하여 대처하라」는 밀명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르후 싸움은 후금과 명조에게 있어서는 요동 통치권의 향방을 결정하는 중요한 전투였습니다. 이 결전에서 압승한 누르하치는 이후 開原(개원)과 鐵嶺(철령)을 점령하여 명군의 방위선을 돌파하는 한편 여진의 葉赫(예허)부족을 정복하여 요하 동부 전역을 수중에 넣게 되었습니다』 ―사르후 전투의 명군 최고지휘관인 요동경략 楊鎬(양호)와 요양총병 劉綎(유정) 등은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쟁쟁한 장수들입니다. 하지만 유정은 전사했고, 양호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처형되었습니다. 어떻든 임진왜란 때 明의 도움을 받은 조선으로선 明 조정의 원병 요청을 거절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불같이 일어나는 후금과 등을 돌릴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강홍립의 항복은 국가이익 추구를 위한 광해군의 2중 외교였던 것입니다. 항복 후 강홍립은 곧 누르하치를 만났는데, 조선의 입장을 설명하여 양해를 얻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누르하치는 항복한 조선군을 모두 조선으로 귀환시켰습니다. 다만 강홍립 등 지휘부만 억류시켰는데, 이는 조선이 明 조정의 의심을 받지 않게 하려는 누르하치의 배려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조선의 2중 외교는 1623년 仁祖反正(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퇴위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사르후 전투 후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明 조정은 명장 熊廷弼(웅정필)을 요동 전선에 파견하여 패잔부대를 재편하고 방어를 강화, 누르하치의 공세에 일단 성공적으로 대처합니다. 그러나 얼마되지 않아 웅정필은 환관으로서 세력가인 魏忠賢(위충현)의 모함을 받아 억울하게 처형당함으로써 요동의 최후 방어선이 무너지고 맙니다. 누르하치는 파죽지세로 심양과 요양을 점령하고 1625년에는 심양으로 천도하여 盛京 (성경)이라고 개칭했습니다』 ―누르하치가 요동에서 明 세력을 축출할 수 있었던 것은 滿洲八旗(만주팔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任교수께서는 미국 일리노이 대학에서 만주팔기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으셨고, 1993년에는 중국의 세계적 출판사인 三聯書店(삼련서점)에서 「淸朝八旗駐防興衰史」(청조팔기주방흥쇠사)라는 연구서를 중국어로 출판한 이래 만주팔기에 관한 한 세계적 권위자가 되셨습니다. 만주팔기를 쉽게 설명해 주십시오. 『팔기제도는 1601년 누르하치가 창설한 만주족의 독자적인 행정제도인 동시에 국민개병제적인 군사제도로서 중국 정복과 통치과정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누르하치는 처음에 자기 휘하의 부족을 4개의 니루로 재편했습니다. 300명으로 구성되는 니루는 여진 사회에서 전투나 수렵을 할 때 조직되는 전통적인 기본단위였지요. 니루의 총령은 니루어전이라고 불렀습니다. 전시가 되면 니루의 구성원들은 스스로 식량, 갑옷, 투구, 병기, 군마를 마련해야 했습니다. 5개의 니루는 하나의 잘란으로 조직되어 잘란어전이 지휘하고, 5개의 잘란은 다시 하나의 구사로 조직되어 1명의 구사어전이 통솔했습니다. 구사는 8가지 깃발 색깔에 따라 정황기, 정백기 등의 8旗로 조직되었습니다. 구사어전은 7500명을 지휘했으므로 八旗는 이론상 6만의 장정으로 조직되었던 것입니다』 ―만주팔기에는 조선인 출신들도 참여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만주팔기에는 병력 3000의 朝鮮營(조선영)이 소속되어 있었는데, 「滿洲八旗氏族通譜」(만주팔기씨족통보)에 의하면 팔기에 편입된 조선의 성씨가 72姓에 달했습니다』 ―누르하치는 후금을 세운 후 정복사업을 계속 추진하던 과정에서 귀순한 漢人과 몽골인의 숫자가 급속히 증가함에 따라 군사력의 규모가 더욱 확대되지 않았습니까. 팔기는 초창기에 어떤 지도체제로 운영되었습니까. 『누르하치는 1615년 아들과 조카들 가운데 4명을 호소이버얼러(和碩貝勒)로 삼아 1旗씩 지휘하게 한 뒤 각기 휘하 旗의 군사와 민사를 맡겼고, 얼마 뒤에 4명의 버얼러를 추가로 지명하여 군정을 논의하는 의정회의에 참석토록 했습니다』 ―누르하치가 거느린 만주팔기는 승승장구하여 요하를 건너 遼西(요서) 지방을 공격합니다. 외가닥 통로인 遼西走廊(요서주랑 )을 달려 山海關(산해관)만 돌파하면 바로 명나라의 수도 北京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산해관은 北京의 최후 보루로서 난공불락의 요새였을 뿐만 아니라 그 100km 전방에는 名將(명장) 袁崇煥(원숭환)이 지키는 寧遠城(영원성: 요녕성 금현)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영원성 공성전에서 누르하치는 서양식 대포인 홍이포의 파편을 맞아 중상을 입고 말가죽에 싸여 후송되던 중 1626년 9월30일 만 67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홍타이지의 조선 침략
―누르하치의 아들 15명 가운데 하필이면 제8자인 홍타이지(皇太極: 태종)가 후계자가 되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누르하치는 8명의 버일러(패륵: 王) 중 누구도 독재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면서 8王이 다함께 국정을 논의하여 처리하라는 유지를 남겼습니다. 누르하치가 사망하자 여러 버일러들이 홍타이지를 汗으로 추천했는데, 즉위 초 홍타이지는 大버일러에게 소속된 旗에 대한 지휘권이 없었기 때문에 한동안 명목상의 汗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누르하치 못지않은 영웅의 풍모를 갖춘 지도자로서 요동 지배를 굳히는 동시에 국가조직을 군정과 민정으로 분리하여 버일러들의 권한을 축소 제한함으로써 전제군주 관료국가체제를 확립해 갑니다. 홍타이지는 버일러로부터 旗의 행정권을 박탈하는 과정에서 중국식 행정기구를 설치하고 明朝의 유능한 관리들을 대거 흡수했습니다. 이 무렵 그 수가 부단히 증가한 漢人 투항자들은 노복이 아닌 자유민으로 편입되었는데, 이는 중국본토로 영토를 확장해 나가고 자 하는 그의 전략적 판단에 따른 것입니다』 ―홍타이지는 우리 민족에게 최대의 수모를 준 인물입니다. 그는 즉위 다음해인 162 7년 丁卯胡亂(정묘호란)을 도발합니다. 도발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홍타이지는 조선으로 출정하는 阿敏(아민 : 누르하치의 조카) 등 장수들에게 東征(동정) 목적의 하나는 조선을 항복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압록강 하구에 위치한 조선령 假島(가도)에 조선의 지원을 받으면서 군영을 개설한 明의 장수 毛文龍(모문룡)을 토벌하는 것임을 상기시켰지요. 아민은 만주팔기 가운데 양남기를 중심으로 편성된 3만병을 이끌고 의주를 공략했고, 동시에 일부 병력은 모문룡의 근거지인 鐵山(철산)을 공격하여 그를 가도에 고립시켰습니다. 조선에서는 광해군이 1623년의 쿠데타에 의해 쫓겨나고 인조가 집권하고 있었는데, 인조 조정은 親明排金(친명배금) 정책을 명확히 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淸史」에는 『아민이 평양을 함락시키자 강화도로 피신했던 조선의 국왕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제의했고, 이에 아민은 부장을 파견하여 정묘강화조약에 조인했다. 조약의 내용은 明朝와 국교를 단절하고 후금과 동맹을 체결하며, 조선왕의 동생 原昌君을 후금에 인질로 보내고, 매 년 공물과 재물을 바친 것이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사료를 근거로 한 것입니까. 『淸史稿(청사고) 太宗本紀(태종본기)의 기록에 따른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과 練藜室記述(연려실기술)에 의하면 화친 조건의 골자는 다음 두 가지입니다. 즉, 조선은 후금과 형제지국이 되고, 금나라와 화친하는 동시에 명나라와도 우호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明과 패권을 다투는 상황에서 후금 軍이 조선 깊숙이 침략하기 어려웠다는 점으로 미루어보면 저는 우리쪽 사료가 史實에 부합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민은 압록강을 도강하고부터 줄곧 인조 조정에 화의를 먼저 제의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정묘호란을 일으켰겠습니까. 당시 후금은 경제사정도 비교적 양호하여 약탈 등의 경제전을 감행해야 할 필요성도 별로 없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청사고의 기록을 조금 더 취신합니다』 ―조선이 중립 정도만 지켜주어도 좋다는 것이 후금의 희망사항이 아니었겠습니까, 고려의 경우 송나라-금나라 양국과 동시에 조공책봉 관계를 갖기도 했습니다. 『조선과 후금 양측 모두가 화의 내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기록했던 측면도 있을 수 있겠지요. 이런 부분은 앞으로 관계사 연구를 통해 해명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조선의 위협을 제거한 후금은 한동안 수비가 철저한 산해관을 공격하지 않고 遵和(준화)와 通州(통주) 등 화북 북방지역을 수차 약탈하다가 서쪽 내몽골 방면으로 진격했다. 내몽골 차하르部의 추장 林丹汗(임단한 )이 명조에 의존하여 후금의 서쪽 진출을 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629년 후금은 차하르部를 공격하여 1만여 명의 포로를 획득했다. 홍타이지는 동서로 양 날개를 이루고 있던 조선과 몽골을 정벌함으로써 북방으로부터 명조를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朝鮮 정복은 가능해도 통치는 불가능
―1633년, 싸우지는 않고 私利(사리)만 도모하던 모문룡이 원숭환에게 주살당한 후 그 부장인 孔有德(공유덕)과 炅仲明(경중명 )이 명군 1만4000명을 이끌고 후금에 투항하여 도원수와 총병관으로 중용되었습니다. 이때 조선측에서 공유덕과 경중명의 투항을 방해했다고 홍타이지에게 트집을 잡히고, 이것이 또 1636년 丙子胡亂(병자호란)의 도발 이유 중 하나가 됩니다. 『연전연승을 한 홍타이지는 1635년 자기 민족의 칭호였던 여진을 폐지하고 대신 만주를 사용할 것임을 선포했습니다. 이어 1636년 5월15일, 그는 나라 이름을 大淸으로 바꾸고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습니다』 ―황제 즉위식에는 각국의 朝賀(조하)사절단이 참석하여 예물을 바치고 배례를 올렸으나 조선 사신 羅德憲(나덕헌)과 李廓(이곽)은 藩臣(번신)으로서의 배례를 한사코 거부했습니다. 조선 사신이 홍타이지에게 배례를 올린다는 것은 明과의 조공책봉 관계를 폐기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홍타이지의 측근들은 조선 사신들의 목을 벨 것을 주장했지만, 홍타이지는 「원망을 사는 구실이 되는 것을 짐은 바라지 않는다」면서 조선 사신을 석방하여 귀국시킬 것을 명했습니다. 그 대신 귀국하는 사신 편에 조선국왕을 책망하고 아울러 조선왕 자를 인질로 보내라는 내용의 국서를 부쳤습니다. 나덕헌과 이곽은 이런 국서를 가지고 가면 문책을 받을 것이 뻔했기 때문에 귀국길에 통원보의 여관에 묵으면서 국서를 슬쩍 내버리고 내용만 베껴 쓴 것을 가지고 왔습니다. 조선 조정에서는 청나라의 요구에 대해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갑론을박을 거듭한 끝에 묵살하기로 하고 회답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해 12월 홍타이지는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조선 親征(친정)에 나섰습니다. 조선 조정에서 좀 융통성을 보였다면 병자호란은 예방할 수도 있었던 전쟁이었습니다』
<청군의 선봉장인 馬夫大(마부대)는 기병 6000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자마자 속도전을 감행했다. 마부대 軍은 산성 중심으로 방어진을 친 조선군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의주-안주-평양-황주-평산-개성을 잇는 당시의 제1대로를 질풍같이 달려 불과 1주일만에 한성을 바로 찔러왔다. 仁祖는 강화도로 몽진하려 했으나 마부대 軍에 의해 길이 끊겨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농성을 했다. 남한산성은 청군의 주력부대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었다. 지방에서 올라온 근왕병들은 청군에 의해 모두 격퇴되었고, 고립무원의 농성군은 식량 부족과 추위 때문에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었다. 남한산성에 들어간 신하들은 척화파와 주화파로 나누어져서 치열하게 대립했다. 항전을 계속할 경우 내부 반란이 벌어질 상황에 빠졌다. 결국 주화파 崔鳴吉(최명길)의 제의에 따라 인조는 1637년 1월30일 남한산성을 출성하여 삼전도(송파나루)에서 홍타이지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항복의 예를 올리고 말았다>
―(仁祖조정의 남한산성 농성시기의 행적을 기록한) 南漢日記(남한일기)를 보면 仁祖로부터 항복을 받은 직후 홍타이지는 受降壇(수항단) 아래로 내려가 바지를 내리고 오줌을 찍 갈깁니다. 그것은 禮(예)나 숭상하는 조선조에 대해 모욕을 주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그런데도 조선을 직할 식민지로 삼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홍타이지도 조선은 정복할 수는 있어도 통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조선의 大義名分論(대의명분론)과 자존심이 그만큼 치열했던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한반도가 56개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국가 中國에 편입되지 않고 독자성을 지킬 수 있었던 배경입니다』 ―조선을 굴복시킨 홍타이지는 본격적으로 明朝를 공략하게 되지요. 『1638년 홍타이지의 동생 도르곤이 北京 북방 密雲城(밀운성)을 돌파, 계속 남하하여 山東까지 진격했습니다. 이 침공 작전에서 청군은 50城을 공략하고 8城을 항복시켰으며 46만명의 포로를 획득하는 대전과를 올렸습니다. 청군이 만리장성 이남 화북지역에서 연전연승을 하면서도 철수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명나라에 산해관이라는 철옹성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설사 산해관 이남의 땅을 점령하더라도 산해관의 명군에게 퇴로를 차단당할 우려가 있었던 것입니다』
<청군이 산해관을 함락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산해관의 外城에 해당하는 錦州(금주), 松山(송산), 杏山(행산), 塔山(탑산)의 4 개 城을 먼저 제압해야 했다. 1640년 淸의 대군은 금주성을 포위했다. 明의 구원군이 금주성으로 달려오다 청군에 의해 진로가 막히자 송산성에 집결했다. 明 조정은 송산성을 사수하기 위해 洪承疇 (홍승주)를 총독으로 임명하고 오삼계 등 8인의 총병을 비롯한 13만명의 병력을 지휘하도록 했다. 홍타이지는 명군이 송산성에 집결했다는 보고를 받자 심양에서 급히 송산성으로 달려왔다. 송산성은 청, 명 두 나라의 명운이 걸린 일대 격전장이 되고 말았다. 홍승주는 우선 굳게 지키며 청군이 피로하기를 기다리는 작전을 세웠다. 하지만 北京 조정의 병부상서 陳新甲(진신갑)은 지구전에 따른 군사비의 가중을 염려하여 속전속결을 재촉했다. 결국 홍승주는 본의 아니게 청군에 대한 정면전을 벌이지 않을 수 없었다. 송산성 전투는 명군의 대패로 끝나고 말았다. 송산성뿐만 아니고 산해관의 외성 모두가 청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 전투에서 명군 5만3000여 명이 섬멸되고 홍승주는 포로가 되었다. 그럼에도 北京 진입의 관문인 산해관만은 건재했다. 홍타이지도 산해관을 정면 공격으로 돌파할 수 없었다. 이런 교착상태에서 홍타이지는 1643년 9월 盛京에서 급사했다. 왕족회의에서는 여섯 살 난 아홉째 황자 福臨(복림)을 황제로 추대했고, 누르하치의 열네 번째 아들 도르곤을 섭정왕으로 삼았다. 명나라는 농민반란군에 의해 무너졌다. 1643년 3월 李自成(이자성)은 서안을 점령하고 大順이란 이름의 나라를 세워 스스로 王이라 칭했다. 이어 1644년 4월25일에 그가 北京을 함락시키자 明의 마지막 황제인 崇禎帝(숭정제)가 황궁 뒤 경산에서 목을 매 자살함으로써 明朝는 294년만에 멸망했다>
모택동의 李自成 평가
―재미있는 것은 모택동이 중국의 전통적 영웅들인 한무제, 당태종, 송태조 등을 평가절하한 반면 이자성을 크게 평가했다는 점입니다. 산해관 서쪽 角山(각산)의 만리 장성에 올라가 보니까 이자성의 石像(석상 )까지 세워 놓았습디다. 이자성의 평균주의가 마오이즘과 통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공산 중국의 역사가들은 「이자성의 반란이 성공했다면 1789년 프랑스혁명과 마찬가지로 새로 출현한 부르주아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권력을 만들어 낼 수도 있었다」거나 「오삼계 등 봉건세력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 만주 오랑캐와 손잡고 이자성 밑에 모인 진보적 세력을 제거함으로써 자본주의 맹아의 성장이 반세기 이상 지연되었다」는 등의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주장에 대해 任교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자성의 군대는 北京을 점령하면서 약탈 , 살인, 강간 등으로 백성들을 괴롭혔습니다. 이자성에게는 새로운 세상을 열겠다는 비전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그의 무리는 流賊(유적)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1644년 봄, 明의 대군 중 망국의 비극을 막을 수 있었던 장수는 산해관 총병 오삼계 뿐이었다. 오삼계는 李自成의 北京입성을 저지하기 위해 대군을 거느리고 北京으로 올라가던 중 숭정제가 자살하고 北京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일단 산해관으로 철수했다. 이런 오삼계에게 北京에 있던 그의 아버지로부터 한장의 편지가 당도했다. 「나는 闖王(틈왕:이자성)에게 항복했다. 너도 항복하는 것이 좋겠다」 이자성은 오삼계와 손잡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오삼계는 이자성의 부장이 그의 애첩 陳圓圓(진원원)을 납치했다는 소식을 듣고 淸의 섭정왕 도르곤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항복의사를 전달했다. 당시 도르곤은 14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산해관으로 진군하던 중이었다. 이자성 또한 오삼계가 항 복할 의사가 없음을 간파하고 산해관으로 진격해 왔다. 오삼계는 내부의 적부터 토벌한다는 구실로 도르곤에게 항복하고 청군을 산해관 안으로 끌어들였다. 도르곤은 오삼계의 정병 4만을 포함한 18만 명의 대군을 휘몰아 이자성 軍을 격파하고 北京으로 진군했다. 이자성 軍이 6월4일 北京을 포기하고 섬서 방면으로 도주하자 6월6일 청군은 北京에 입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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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황해도에 살던 新羅 金氏가 여진 지역으로 넘어가 아골타의 조상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기는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한 후 만주황족의 다수가 자신들의 성을 金씨로 삼았던 일입니다. 저는 金씨 성을 가진 중국사람을 만나면 으레 「만주족이냐」는 질문을 하는데, 「그렇다 」고 말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디다』
만주팔기에는 조선인 출신들도 참여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만주팔기에는 병력 3000의 朝鮮營(조선영)이 소속되어 있었는데, 「滿洲八旗氏族通譜」(만주팔기씨족통보)에 의하면 팔기에 편입된 조선의 성씨가 72姓에 달했습니다
중국 25사가 아니라 대륙 25사가 정확한 표현이겠지.
任교수께서는 천하쟁패전에서 승자를 결정짓는 것은 인구수나 경제력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라는 사실을 강조하신 것으로 이해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