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Wiki의 반기문 유엔사무 총장입니다.
http://ja.wikipedia.org/wiki/%E6%BD%98%E5%9F%BA%E6%96%87
참고) 영문판 Wiki '반기문'
http://en.wikipedia.org/wiki/Ban_Ki-moon
혐한 입장에서 어떻게든 헐뜯으려는 내용 뿐입니다.
이렇게 비열할 수가 있습니까?
일본Wiki의 김연아 선수도 마찬가지.
특히,'고득점에 대한 의문'이라는 란을 만들어 온갖 가십거리 기사를 인용.
(번역기 포함)
http://j2k.naver.com/webtrans.php/korean/ja.wikipedia.org/wiki/%E9%87%91%E5%A6%8D%E5%85%92
우리나라Wiki의 '아사다 마오'
http://ko.wikipedia.org/wiki/%EC%95%84%EC%82%AC%EB%8B%A4_%EB%A7%88%EC%98%A4
객관적인 사실만 나열.
이런 것은 '국민성'입니까?
도저히 이해가 안되네요.
반기문
반기문 ??? Ban Ki-moo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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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 |
취임 2007년1월1일 | |
부총장 | 아샤=로즈·미기로 |
전임자 | 코피·아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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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 2004년1월17일 - 2006년11월10일 | |
대통령 | 노무현 |
수상 | 고건 리해 장 한덕수 한명숙 |
전임자 | 윤영? |
후임자 | 송민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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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44년6월13일(67나이)[1]![]() |
국적 | ![]() |
모교 | 서울 대학교 하버드 대학 |
신앙 | 프라이버시[2] |
서명 | ![]() |
반기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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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표기 | |
한글: | ??? |
한자: | 반기문 |
히라가나: (일본어 요미가나) |
(은)는 ·기분 |
가타카나: (현지어 요미가나) |
빵·김, 밴·김 |
라틴 문자 전사: | Ban Ki-moon |
반 기문(빵·김[3],한글: ???,라틴 문자 전사: Ban Ki-moon,1944년6월13일 - )(은)는, 제8대국제연합 사무총장.대한민국출신.제33대대한민국 외교 통상부장관.
목차 |
충청북도음성군행치촌(으)로 태어난다.그의 가족은충주시가까이의 마을에 이주해, 거기서 자란다.부친은 대도매상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가게가 도산해, 일가는 중류적인 생활수준을 잃는다.
1970년2달에서울 대학교외교 학과를 졸업해, 같은 달 고등 외교관 시험에 합격,3달에 외교부에 입부했다.1972년의 주인도한국대사관부영사를 처음,1974년동2등 서기관등 주로 해외 근무밭을 걸어,1980년에 외교부 국제 조직 조약국 유엔 과장으로 취임했다.
그 후 외교부 파견에 의해하버드 대학케네디 행정 대학원에 유학해,1985년4달에 수료, 석사호를 취득했다.1985년4달에수상외교 의례 담당 비서,1987년7달에는 주미대사관총영사,1990년6달에 외교부 미주국 국장,1992년2달에 외상 특별 보좌관,1992년7달에 주미 공사,1995년2달의 외교부 부장관을 거치고,1996년11달에는김영삼의 외교 안전 보장 담당 대통령 특별 비서가 되었다.
그 후2000년1달에 외교 통상부 부장관,2001년5달에 유엔 대사,2002년2달에 무임소 대사를 거치고,2003년2달, 대통령노무현(당시 )의 외교 정책 보좌관,2004년1달부터는외교 통상부장관(외무 대신)으로 임명되고 있다.
노무현 정권하에서는, 대통령부 주도로 정책 결정을 하고 있기 때문에, 반기문은 대통령부와 외국 정부가 양퇴진곡에 빠져 많이 고생했다.햇살정책 진전에 진력했지만, 스스로의 발언의 몇일후에 그 발언과 반하는 내용의 대통령 발언이 있는 등의 사건도 있었다.
2006년2달, 유엔 사무총장 선거에 입후보 하는 것을 표명했다[4].다른 유력 후보에는인도인의 유엔 사무차장(홍보국장)샤시·타르르,타이인의 부수상스라키앗트,스리랑카의 모토쿠니련사무차장(군축 국장)쟈얀타·다나파라의 이름을 들 수 있었지만,7월24일에 행해졌다국제연합 안전 보장 이사회의 각 이사국에 의한 예비 투표에 대해 반은 가장 많은 표를 획득해, 유력 후보의 한 명이 되었다[5].
2006년10월2일,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4번째의 예비 투표를 실시했다.이 결과, 거부권을 가진다상임이사국5개국이 일치해 반을 지지해(안보리 전체에서는14개국의 지지), 당선이 확실이 되었다[6].
반은 어려운 일한 관계 중(안)에서도, 일본의 외무 대신아소 다로(당시 )(와)과의 회담에서 신뢰 관계를 양성한 점 등, “외교의 프로”라고 해져서 일본 외교 당국의 평가도 높았다[6].유엔 대사의오오시마 켄조(은)는 「아시아가 뛰어난 후보로부터 선출한다고 하는 목적에 따른 방향으로 사태는 움직이고 있다.일본 정부로서의 태도를 최종결정한 다음, 정식 투표에 임한다」라고 말했다[7].
반은아메리카 합중국(와)과 인연이 깊고, 미국 정부와의 관계도 양호라고 볼 수 있다.10월3일, 반의 당선이 확실이 된 예비 투표의 결과를 받고, 미국의 유엔 대사존·볼튼(은)는 「미국은 이 결과를 환영한다」라고 말했다[8].
2006년10월20일,서울(을)를 방문한 아소 다로는, 반이 차기 유엔 사무총장으로 당선했던 것에 대해 「우리도 아시아라고 해도 몹시 자랑스럽다」라고 축복했다.이것에 대해서 반은 「일본은 유엔에서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는 중요한 나라다.안보리 의장국으로서 노력하고 있는 것을 평가한다」 「사무총장으로 취임하면, 일본과 긴밀히 제휴, 협조해 나가고 싶다」라고 말했다 [9].
2006년10월14일, 유엔 사무총장으로 당선한다.2007년1월1일(으)로부터5연간, 사무총장직을 맡는다.
2007년8월12일 이른 아침, 유엔의Web사이트하지만크래커보다 외부로부터크래킹되었다고 하는 명목으로 반기문의Web사이트를 고쳐 쓸 수 있어 「미국(와)과이스라엘하아이들이나 사람들을 살해하지 말아라.영원의평화(을)를.전쟁반대」라고 하는 내용이 기재되었다.반나절 후에 이쪽의 문장은 삭제되었다[10].
2007년9월7일, 반기문이대만의 유엔 가맹 문제에 대해 「대만은중화 인민 공화국의 일부」라고 하는 견해를 나타냈던 것에 대해서, 일본, 미국,오스트레일리아정부가 「이 견해는 부적절하다」라고 신청했던 것이 밝혀졌다[11].반기문은, 유엔은 「하나의 중국」을 승인하고 있지 않고, 가맹 문제는 안보리의 전결사항이며, 조선은 두 개에도 불구하고, 대만의 유엔 가맹 신청을 「중국은 하나」라고 신청을 각하 했다.
모토쿠니련대사의최영진(을)를 주코트디부아르 특별 대표로 임명하는 등, 유엔의 주요한 포스트에 자국민을 기용한 것으로부터연고 주의이다고 하여, 반에 대해 유엔 내부로부터 반발이 생기고 있다[12].이것에 대해서 반은, 원래 유엔에의 재정 부담에 비해 극단적으로 직원수가 적었던 한국인 직원의 수가 증가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라고 반론하고 있다[13] .다만, 한국은 국제연합분담금중,10개국제기관 분담금1100억원(1억1600만US달러)(을)를 체납 있어,2007년에387억원(4100만US달러),2008년에713억원(7500만US달러)를 투입해 체납을 모두 해소할 계획을 나타내고는 있었지만, 이 발언의 시점에서는 완제하고 있지 않다.이 경향은 서서히 높아지고 있어2007해에는 반의 사위의 인도인이국제연합 이라크 지원 미션 (UNAMI) 의 관방장에 발탁 되어 유엔 직원 조합은 「친척 친척이나 친구를 의지한 구직」을 비판하는 문서를2007년12달에 채택하는 사태가 되고 있다[14].
유엔 사무총장은 복수 국가가 대표로 해 직무의 중립성이 요구된다.그러나, 반은 사무총장 취임 이래, 상기의 연고 채용 문제의 외, 자주 사무총장으로서의 중립성이 유지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찢고 있다고 지적되는 사건을 일으키고 있다.
2007년10월24일의 「유엔의 날」에 대해서는, 매년 이 날에 항례 행사로서 유엔 본부에서 행해지는 사무총장 주최의 콘서트가 개최되었다.가맹192개국의 대사나 외교관등 약1600사람이 출석했다.이 날, 반의 의향에 의해서 모국의 서울·필하모니·오케스트라가 공연을 실시해, 서울시와 한국 유엔 대표부가 콘서트를 후원 했다.
이 콘서트의 장소에 있고, 한국 유엔 대표가 작성한 「Welcome to KOREA」라고 제목 되었다일본해(을)를 「토카이」라고 표기한 영문의팜플렛하지만 식순과 함께 배부되었다.사무총장이 주최하는 유엔 콘서트에서 한국측이 이러한 팜플렛을 배포한 것은 과거에 예가 없고, 유엔측은 그 자리에서 회수하는 등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한국측은 지명의 표기 방법등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하는 유엔 지명 표준화 회의에서, 일본해의 호칭을 「토카이」라고 병기 하도록 요구하고 있어 가맹국 대사들이 다수 출석하는 콘서트의 장소를 이용해 스스로의 주장의 정착을 노린 것으로 보여진다.다음날, 일본의 유엔 대표부는 유엔 사무국과 한국 유엔 대표부에 대해, 문서등에서 항의를 실시했다[15][16].
2008년7월3일, 사무총장 취임 후 처음으로 방한했을 때에, 방한의 감상이 추궁 당하고, 「한국인의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한국의 국력 신장에 공헌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라고 말했다[17].한편으로2008해가 되어, 한국 국내의 정치의 혼란, 또 국제사회에 대해 한국이 스스로 완수해야 할 역할의 규모가 너무 작다고 하는 현상에 대해 미디어등으로 고언을 나타내는 장면도 나와 있다.
역대의 유엔 사무총장들은, 외형에는 중요한 포스트인 것에 비교해 큰 실적을 올려 오지 않았지만, 반에 대해서는 「그 중에서도 두드러져 무능」이라는 평가를 재임중부터 받아 왔다[18].
뉴스 위크지(은)는, 한국 외상으로부터 사무총장으로 변했다2년반의 사이에 큰 실패를 범한 것은 아니지만,핵문제(이)나난민 문제에도 관심을 나타내지 않고, 「온 세상에서명예 학위(을)를 수집해 걸어, 훌륭할 정도로 아무것도 기억에 남지 않는 성명을 발표해, 사무총장으로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귀중한 기회를 낭비하는 것에 소비하고 있다」라고 평가했다[18].
또 미 잡지 포린·폴리시에 대해도 역대 사무총장중에서도 특히 지도력이나 존재감이 부족해 「유엔을 무의미한 조직으로 했다」라고 혹평되어 영지에코노미스트로부터도 반의 관리·조정 능력 부족이 지적되어 자신이 최대중요 과제로 든 지구 온난화 문제도 포함해 큰 실적은 없고, 구미제국의 지지를 잃고 있다고도 되었다[19].
2009년7달에는 「아웅산 수지(와)과의 면회」를 위해 갑자기미얀마들어가 세계를 놀래켰지만, 사전에 어떤 하 교섭을 하지 않고, 결국 수지와의 면회를 완수하지 못한 채 미얀마를 떠났다[20].
오슬로 합의체결에 진력했다노르웨이의모나·유르(당시 차석유엔 대사, 남편의 라센은 반아래에서레바논문제 특사를 맡고 있었다)는, 본국 정부앞의 공전에 대해 「불명확으로 카리스마성이 부족하다」 「울화통 소유로 주위의 어찌할 도리가 없다」라고 헐뜯었다[20].이 기사를 계기로, 이전부터 존재한 반에 대한 절망적인 불안감이나 비판이 분출하고 있다.뉴스 위크지에서는 「용기가 없고」 「매력이 부족해」 「무능」이라고 판단할 수 있어 즉각 퇴임하는 것이 세계이기 때문에 라고 단언해졌다[21].반은 유르의 공전에 대해, 동국 노르웨이에 있어 「우리는 모두 다른 백그라운드와 다른 리더쉽의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라고 반론했다[22].
휴먼·권리·워치하2011년1월24일에 발표한 연차보고서에 대하고, 반에 대해서, 「인권침해를 반복하는 나라들에 대해서, 국제적인 지위가 그만큼도 아닌 나라들에 대해서는, 강한 비판을 말하지만, 중국과 같은 대국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라고 지명에서 통렬하게 비판했다[23][24].
유엔 내부 사찰실톱의 인과 소총탄·아레니우스 사무차장은2010년7달의 퇴임시에 반기문사무총장에50페이지에 걸치는 보고서를 제출해, 그 중에 「유엔은 활동의 투명성도 설명 의무도 이루지 못하다」, 「사무총국은 부패하고 있어, 전략없는 무책임한 운영은, 유엔의 개혁을 가져오지 않기는 커녕 유엔의 약체화를 부르고 있다」라고 말해 「그의 행동은 한심스러울 뿐만 아니라 어렵고 비난 당해야 한다」라고 반기문을 정면으로부터 비판했다[25].동보고서에서는, 반사무총장이 회계감사 보고의 공개나 범죄로 보여지는 행위의 고발을 거절하거나 공석 상태가 계속 되는 조사 부문 책임자의 인사를 각하 하거나 업무를 막는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고 지적하고 있다.이2이름의 확집은 이전부터 알려져 있어 조사 부문의 인사를 둘러싸고, 아레니우스 사무차장이, 미 검찰관 로버트·애플 톤을2번추천 했지만, 반사무총장은 온전히 서로 빼앗지 않았다고 한다[26].이것에 관해서 로버트·애플 톤은 반사무총장이 본래 중립이어야 할 감찰실의 인사에 정치적인 개입을 실시해, 부당하게 채용을 방해되었다고 해서, 유엔 불복 심판소에150만달러 상당한 손해배상등을 요구하는 호소를 일으키고 있다[27].
반은 외교 통상 부장관 취임 후, 노무현 정권의 대일 강경 노선에 따라서 일본에의 엄격한 비판을 반복했다.매스컴과의 회견에 대해서는,코이즈미 수상의야스쿠니 신사의 참배 강행, 일본 정부의 「역사왜곡」이나타케시마에 대한 영유권 주장 등에 의해서일한 관계하지만 차가워지고 있다고 주장, 일한 관계 개선에는 일본이 역사 문제를 올바르게 인식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28].
한편, 반은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수상 시대의 야스쿠니 신사에의 참배로 일한 관계가 차가워진 가운데도 관계 개선에 노력하고 있던 점으로부터, 일본의외무성에도 좋은 인상을 주고 있는 것 같다.북한의 핵문제등을 둘러싼 교섭으로 지기를 얻은 아시아 대양주 국장의사사에 켄이치로우(은)는, 「밸런스를 잡혀 잘 생각하는 사람이다.무엇보다 일본에의 편견이 없는 것이 좋다」라고 평가한다[29].
2006년10월20일에 서울을 방문한 아소 다로와의 회담에서, 반은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문제에 접해 「납치 문제에서는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특별한 관심을 지불하고 싶다.협력해 나가고 싶다」라고 말했다[30].반은11월6일에 일본 방문해, 다시 아소와 회담, 일본인 납치사건에 대해 「납치 문제에 관한 일본의 관심은 누구보다 알고 있다.사무총장으로서 할 수 있는 협력을 하고 싶다.도움이 되는 일이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말했다 [31].
한편,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미국 하원의 결의안(을)를 지지하는 자세를 견지 하거나 자신 주최의 유엔 본부 개최로의 콘서트상에서일본해(을)를토카이(으)로 변경해야 한다고 하는 팜플렛을 내장자에게 배포했던 것이 발각되어 일본 정부로부터 강하게 항의되거나[15]라고 현재의 일본 정부의 입장과는 호환없는 부분도 있다.
이상의 일본에의 대응으로부터, 일부에서는 「그가 사무총장인 동안은 일본의 상임이사국들이는 실현되지 않는다」라고도 되고 있다.다만 반자신은, 유엔 안보리의 확대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는 일본으로부터의 지지를 얻고 싶기 위한 아첨의 감이 부정할 수 없다.[32].
2010년8월6일, 히로시마에서 개최되었다히로시마 평화 기념식전에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처음으로 출석했다.또, 거기에 앞선다8월5일에는 나가사키를 방문해, 피폭자와의 면회나 폭심지 공원에서의 연설을 행했다.나가사키에의 방문도 역대 유엔 사무총장에서는 처음이다.
한국내에서는, 상사가 말하는 것은 뭐든지 (듣)묻는 「예스맨」(한국 경제 신문), 「미국 찰삭」(아시아 외교 당국), 「본심을 내지 않고, 무색 무취로 살아 남았다」(한국지 일본 특파원) 등의 매운 맛의 평가도 있는 것 같다.[29]한국에서는 「대답하는 것이 어려운 섬세한 질문이 많이 되어도 잘 빠져 나온다」라고 하는 의미로 「기름을 찌른 뱀장어」라고 하는 닉네임이 있었다[33].
첫댓글 아사다의 고득점에 의혹을 품는건 전 세계이고....연아의 고득점에 의심을 품는건 일본 뿐이지요...얘네들은 뭔가 거꾸로 가고 있는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