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버티게 해준 시 – 윤동주의 「서시」
네이버블로그/ 윤동주- 서시(序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서시」 전문
내 인생에 문학은 의도치 않은 일상의 사건으로 왔다. 문학이 나에게 온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당시에는 개교기념일을 전후로 학교를 개방하는 행사들이 있었는데 그때 시화전이 있었다. 나는 그때만 해도 시나 문학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중학교 때부터 늘 같이 붙어 다니던 이두엽이라는 친구가 시화전에 같이 시를 내자고 하였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그때 친구들끼리는 어떤 일이든 가리지 않고 누가 하자면 바로 같이 하던 때였다. 시화전은 교문을 들어서면서부터 중앙 건물 현관까지 운동장 옆으로 한 100미터 정도의 진입로에 있는 아름드리 히말라야시다 나무들 아래 전시되었다.
그때 어느 날 시화전을 같이 하자고 제안했던 친구가 새로운 소식을 가지고 왔다. 그때 시화전에 참가했던 학생들 몇몇이 모여 시동인을 만들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동인’이 무엇인지도 잘 몰랐고 다만 국어시간에 「백조」 동인이며 「폐허」 「창조」 등의 동인지가 있다는 것만 들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일제강점기에나 있었던 옛날 일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어쨌든 친구 녀석을 따라 가보니 한 대여섯 명이 모여 있었던 것 같다. 이병천(소설가), 이두엽(문화기획사업), 이재형(번역가·저술가), 하재봉(시인·교수), 은경표(프로덕션) 등이었다. 우리는 「글네(詩川)」라는 시동인을 결성하였다. 당시 이병천이 자기 동네 이름 ‘시천(詩川)’을 따서 지은 것이지만 매우 신선했고 우리의 활동 또한 매우 신선(?)했다.
그때 나는 시를 교과서에서만(당시 교과서 시는 모두 일제강점기의 시인들뿐이었다.) 접했지 현재 활동하고 있는 기성시인들의 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친구들은 이미 현재 문단에서 활동하는 기성시인들의 시집을 읽으며 습작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동서양의 고전들을 섭렵해나가는 중이었고 그들의 기성시인들을 흉내 낸 시들을 보면 나는 그야말로 젖비린내 나는 동시(?) 수준의 시를 쓰는 편이었다. 우리는 도내에 있는 백일장을 다니며 장원을 휩쓸었지만(주로 이병천이 장원을 했다.) 나는 한 번도 장원을 하지 못했다. 그 당시에는 장원을 하면 우승컵 같은 것을 주었는데 우리 동인들은 한별당(전주천 근처의 식당가)의 식당 구석진 방에서 그 장원컵에 막걸리를 따라 마시며 돌리곤 했다. 기성문인들을 흉내 내어 술에 취하고 기행(?)들을 저지르고 설익은 성인시를 쓰며 한껏 센티멘탈한 동인시절을 보냈다. 나는 친구들에 대한 문학적 열등감 같은 것이 있어서 학교 공부는 작파하고 당시 시성 문인들이 펴낸 문학 서적을 읽으며 습작에 전념했다. 나는 3학년 때에야 겨우 친구들 수준에 이를 수 있었는데 그것도 친구들이 대학 진학에 힘쓰고 있을 때 나는 죽어라고 문학만(?) 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우리는 「글내(詩川)」 동인지를 2권 만들고 졸업했다. 김익두(시인·교수), 이강래(역사학자) 등 후배들 몇 명을 동인으로 맞이했는데 우리가 졸업하고 나서 몇 년 후에 「글내(詩川)」 동인지는 바로 없어진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나는 대학에 실패했고 재수생활에 들어갔다.
막 스무 살 청년이 된 그 재수시절 몇몇 친구들은 종로학원 대성학원 등을 찾아 서울로 갔지만 나는 가정형편 상 내소사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대입 공부는 뒷전이고 시집이나 소설집을 읽으며 하루를 보냈다. 그때 제대로 나에게 꽂힌 시인이 윤동주였다. 많은 시인들의 시를 섭렵하던 때였지만 유독 윤동주가 나에게 온 것은 그의 시가 나의 문학적 성정머리에 맞춤옷처럼 딱 맞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서정주나 고은, 오규원, 정현종 등을 흠모했지만 윤동주는 꼭 친구처럼 혹은 나 자신처럼 느껴졌고 당시 어느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깊은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다면 윤동주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당시 그의 평전도 없었고 그의 살아온 내력도 모르던 때였는데도 그의 시를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훗날 그의 평전을 읽었을 때 나는 아, 하는 탄성이 나왔다. 그의 삶의 이면을 흐리는 그의 성정이 나의 그것을 보는 것처럼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의 시는 화려한 수사가 없는데도 화려하다. 그것은 언어의 화려함이 아니라 진정성의 아우라에서 오는 화려함이다. 그의 짙은 서정성은 진정성의 바탕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약간의 생(生)의 긴장감이 있는 서정을 좋아한다. 아니 시의 서정성이라는 것은 이래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살다 간 것 같다. 그는 일본 유학의 학창시절을 보내지만 내면의 정신세계는 당시 북만주의 독립투사들보다도 더 엄정한 삶을 살았던 것 같다. 나는 그의 이런 면이 너무 좋았던 것이다. 다른 시들도 그렇지만 제목조차도 「서시」인 이 시가 그것을 가장 잘 보여준다. < ‘그 시를 읽고 나는 시인이 되었네, 내 영혼을 뒤흔든 41편의 시(이종민, 모악, 2021.)’에서 옮겨 적음. (2023.10. 3. 화룡이) >
첫댓글 그의 시는 화려한 수사가 없는데도 화려하다.
공감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