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전쟁 역사는 물류의 역사와 함께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인류가 '역사'라는 것을 남길 수 있을 즈음부터 전쟁은 있어 왔고, 그중 큰 전쟁들을 보면 거의 물류권을 놓고 벌인 전쟁입니다. 대규모의 전쟁 몇 개만 상기해 봐도 그렇습니다. 지중해의 교역권, 물류권을 놓고 로마와 카르타고가 벌인 포에니 전쟁을 비롯, 알렉산더의 동방길 원정도 페르샤와의 국지전에서 승리한 후 물류권 확장을 위해 벌어진 것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현대전은 여기에 '에너지 물류'가 가세하면서 더욱 무서워지고 거칠어집니다. 세계 제 2차대전, 특히 태평양전쟁은 석유의 원활한 공급을 놓고 위기감을 느꼈던 일본이 미국을 선제공격함으로서 일어났고, 가장 근래에는 드러내놓고 말은 안 하지만, 부시가 일으킨 이라크 전쟁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물류의 공급 확장이 꼭 전쟁을 불러일으킨 것은 아닙니다. 물류의 확대로 인한 인간의 탐욕, 갈등이 전쟁을 일으킨 원인이 됐겠지요..
미국이 크게 발전할 수 있었던 첫 단추는 미 대륙 횡단 철도의 완성이었습니다. 이 거대한 역사를 이루고자 수많은 중국인 계약노동자, 이른바 '쿨리'들이 미국으로 건너왔습니다. 19세기, 미국은 이민의 시대였고 쿨리들은 마치 지금의 라티노들처럼 이곳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은 철도 건설이 완공된 이후, 극우적 백인들이 주도가 되어 이곳에 정착하기 시작한 중국인들을 대놓고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같은 상황에서 중국인들은 굳건히 싸웠고, 자신들이 여기에 살 권리를 찾습니다. 그들이 집단으로 거주하기 시작한 곳이 바로 지금의 '차이나타운' 들입니다. 미국의 철도 노선에 따라 그 종점인 샌프란시스코, 시애틀 등에 세워진 차이나타운은 당연히 그 역사가 그만큼 길고 규모도 작지 않습니다.
우편배달 일을 마치고, 우리 우체국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차이나타운에 갑니다. 일 끝나고 이곳에 들르는 이유는 보통은 월남국수 한 그릇 먹고 다시 가게로 일 갈 준비를 하는 데 있지만, 오늘은 제가 이곳에 있는 일본계 백화점 안에서 샌드위치 샵을 찾아왔습니다. 이 가게를 운영하는 분은 제 옛날 직장 상사입니다. 신문사에서 일할 때 총무부장님이신데, 결국 이 분도 신문사를 그만두고 자기 비즈니스를 여셨습니다.
시애틀의 차이나타운은 미국의 여타 차이나타운과는 좀 다른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이곳엔 일본계 노동자들도 꽤 많았고, 그래서 차이나타운 한 축에 일본타운이 형성돼 있습니다. 또 여기에 월남계며 다른 동남아시아계들이 가세, 나름으로 '샐러드 보울'을 이루고 살고 있습니다. 일본계 자본들은 자신들의 재력을 내 놓아 공개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데 비해, 중국계 자본들은 그냥 숨어 있는듯한 그런 인상을 주는 것도 재밌습니다. 아무튼, 어느 늦여름 또는 초가을 저녁, 차이나타운을 걸으며 저는 온갖 상념에 젖었더랬습니다.
암튼 그 분을 만나뵙고 나오는 길에 '우와지마야'라고 하는 그 일본계의 대형 식료품점을 걸어 나오다가 문득 와인 섹션에 눈이 갑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버릇입니다. 응? 이게 뭐래. 매그넘의 대형 이태리 와인인데... 몬테풀치아노 다부르쪼라. 시트라? 이름도 들어본 적 없고. 응? 가격이 $5.99? 그럼 일반 병 사이즈로는 병당 3달러밖에 안한다는 말인데? 이게 말이 되냐?
몬테풀치아노 포도로 만들었다니 일단 마셔볼까... 다부르쪼란 '아부르찌 지역에서 생산된'이란 뜻일 것이고.
일단 눈길이 갔으니, 한 병을 집어 듭니다. 그리고 다른 콜럼비아산 밸리 와인도 한 병, 세일해서 사고... 흐뭇한 마음으로 가게로 가서 일을 하고 저녁 늦게 집으로 와선 와인을 땁니다.
일주일이 어떻게 갔는지를 모를 정도로 힘들고, 다리는 무겁고... 하지만, 집에 오니 아내는 맛있는 육개장을 끓여 놓고, 여기에 빈대떡을 부치고 있었습니다. 흠, 이러면 안주도 괜찮겠다 싶어서 그 큰 병을 과감하게 따 버립니다.
일단 한 잔을 따르고 시음. 얼라? 얼랄라? 이게 뭐래. 색깔은 선홍빛 루비, 이렇게 값싼 와인에서는 느낄 수 없는 우아함, 고상함. 향기에선 체리와 붉은 베리류 과일의 향기가 물씬. 한잔 입안에 담았더니 블랙 체리, 약간 스모키한 맛도 느껴지면서 자두 등을 씹을 때 입에 팍 터지는 그 순간 느낄 수 있는... 그런 느낌. 아니 이렇게 저렴한 이태리 와인이... 이런 맛을 내다니.
그냥 먹기엔 좀 뭐하다 해도, 음식과의 어울림이 너무나 좋을 와인입니다. 육개장과는 환상의 궁합. 꼭 김치국물 사이드에 두고 먹는 것처럼. 녹두빈대떡도 이 다부르쪼와는 괜찮은 궁합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없어서 그렇지만, 아마 오징어와 홍합을 넣고 여기에 토마토 소스와 마리나라 소스를 부은, 해물 스파게티 만들어 함께 하면 죽이는 궁합을 보여줄 듯 합니다. 아니면 Costco 에서 파는 로티체리 통닭과도 잘 어울릴 듯 합니다.
이탈리안 와인의 강점 하나는 정말 음식과의 대역이 넓다는 점이겠지요. 왜 자꾸 이런 생각이 드는 지 모르겠으나, 이 와인 반 병(실제로는 한병이지요. 매그넘 사이즈니까)을 마시고, 남은 나머지 반 병은 짜장면, 짬뽕과 함께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와인잔 테두리가 꺼멓고 뻘개질라나? 풋...
이런 와인이 이 가격에 나온다는 게 너무너무 궁금하여 이 와인에 대한 정보를 인터넷에서 찾아봤더니, 유럽에서는 가장 저렴하면서도 인기있는 와인으로 꼽히고 있다고 합니다. 그럴 만도 하겠습니다. 치즈와도 궁합이 죽일 것 같습니다. 그만큼 산도의 받쳐줌이 괜찮습니다.
아마 이 와인 때문에, 앞으로는 저도 더욱 저렴하며 괜찮은 이태리 와인들을 찾아나서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러고 보면, 한인들보다 먼저 이민 온 다른 많은 이민자들은 우리 한인 커뮤니티보다 훨씬 더 많은 고생들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일궈 놓은 열매를 즐기고 있는 저로서는, 이들에게 감사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백인우월주의가 엄연히 상존하고 있는 미국에서, 그나마 아시안들과 공존하며 이들의 문화를 존중할 줄 아는 시애틀 지역의 백인들의 모습은, 결국 그 옛날 선배 아시안 이민자들이 온갖 어려움을 겪으며 쟁취해 낸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 오늘과 내일은 노동절 연휴로 계속 쉬겠군요. 화요일날 일거리가 장난 아니겠지만, 그날 부서지더라도... 오늘 저는 한 잔의 와인을 더 마시렵니다... 마실 와인들이 줄을 서 있군요.
건승하셔요.
시애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