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은 책상 위에 놓여있는 명판을 보고서 하얀 얼굴에 까만안경을 쓴 의사가 신
경외과 과장이란 사실을 알았다. 의사는 까만 안경테 너머로 영민해보이는 눈을
재빨리 굴리며 빈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는 빈의 증상을 걱정하기보다는 흥미로
워하는 게 눈치였다.
"코마상태에 빠지게 되면 뇌가 손상을 받기 쉽지. 기억상실은 종종 일어나는 현
상이야. 하지만 이빈 학생처럼 기억이 통째로 사라져버리는 경우는 흔치 않아.
내가 보기에 이빈 학생의 경우는 물리적 손상보다는 심리적인 쇼크가 기억상실의
직접적 원인인 것 같아."
"쇼크요? 제가 무엇때문에 쇼크를 받는단 말씀이에요?"
"흠.....이빈 학생을 코마상태로 빠트렸던 사건."
"사...건? 어떤?"
의사는 약간 뜸을 들이더니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조용히 대답했다.
"이빈 학생이 유리양의 자살을 목격했던 일."
선연한 죽음의 영상이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빈은 마른 침을 삼켰다.
"그 것도 생각나지 않는데요."
"유리양은 학교 옥상에서 뛰어내렸어.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이빈 학생은 눈앞에
서 유리양의 머리가 깨지는 걸 목격했지."
"기억안나요."
빈은 호흡이 가빠지고 있었다.
"기억이 안난다고? 그 걸 보고 학생은 그대로 눈을 까뒤집고 기절했어. 그 후로
육개월 동안 우리 병원 중환자실에 꼼짝않고 누워있었지."
깨진 유리처럼 날카로운 기억의 조각들이 빈의 정신을 아프게 찔러댔다. 빈은
자신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따뜻한 액체를 손가락으로 닦았다.
"전 유리가 누군지 몰라요. 하지만 그 애가 죽었다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이상하
네요."
"인간의 육체와 정신은 스스로를 보호하는 능력이 있어. 정신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사실은 부정하거나 회피하려고 하지."
"무슨 말씀이에요?"
"유리는.....네 여자친구였다."
빈은 머릿속이 진공상태가 된 기분이었다. 그 어떤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의
사는 촛점없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빈을 보고 불안해졌다. 아직 예민한 상태
의 환자에게 또 다시 자극을 준 게 아닌가 싶었다.
"이빈 학생? 괜찮아?"
"..............."
"이빈 학생? 말좀 해봐. 이빈 학생?"
그는 손바닥을 빈의 눈 앞에서 딱딱 부딪쳤다.
"이빈! 정신좀 차려봐! 빈아!"
의사가 어깨를 잡고 흔들자 빈은 제정신이 돌아와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
다.
"선생님, 전 유리가 누군지 몰라요."
의사는 안도하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자신의 의자로 돌아왔다.
"퇴원하면 바로 등교하지 말고 좀 쉬도록 해. 몸이 제대로 기능하려면 시간이 걸
리니까 충분한 휴식을 취하면서 서서히 환경에 적응해야 돼. 몇 가지 검사를 더
해봐야 하니까 당분간 통원치료를 받도록 하고."
진료실에서 나오자 병실에서 빈을 껴안고 울었던 중년여성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도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이 아줌마가 나의 엄마란 말인가?
그녀에 얽힌 어떤 기억도 떠오르지 않았다.
"빈아, 괜찮은 거냐? 엄마는 네가 이렇게 두 발로 다시 걸어다니는 게 정말 꿈만
같구나. 그 동안 아빠랑 엄마는 살아있어도 사는 게 아니었다."
빈은 낯선 여자에게 '엄마'라는 말을 꺼내기가 어색해 잠시 동안 망설이다가 입
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전 지금 아무 것도 기억할 수가 없어요. 가족들 얼굴도 생각나지 않
아요. 제가 다니던 학교 이름도 의사 선생님한테 듣고서야 알았는 걸요."
빈의 모친은 아들의 팔짱을 끼며 일어섰다.
"엄마 얼굴도 몰라봐서 많이 속상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다시 깨어난 게 어디냐.
집에 가서 안정을 취하면 모든 게 다시 기억날꺼야. 암....그렇게 될거다."
병원 밖으로 나오면서 빈은 자신에게 바싹 기대고 있는 중년 여자에게서 팔을
뺐다. 엄마라고 생각해도 역시 창피하고 어색했다. 빈의 모친은 섭섭한 표정을
지었지만 빈은 애써 그녀를 외면했다.
"빈아,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엄마가 주차장에서 차 빼올께."
그녀는 빈을 세워두고 종종걸음으로 뛰어갔다. 빈은 푹 퍼진 몸매에 옷을 아무
렇게나 걸친 아줌마의 뒷모습을 보고 얼굴을 찡그렸다. 저 여자가 내 엄마라고?
빈은 자신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집안에서 태어났을 거라고 추측했다. 하지만 세
련되지 못한 외모와는 달리 그녀는 고급 세단을 몰고 빈의 앞에 다시 나타났다.
"빈아, 많이 기다렸니? 어서 타. 아빠가 집에서 기다리고 계실거야."
차에 타고 집에 오는 동안 빈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모친은 쉴새없이
입을 놀렸다. 그녀는 그저 다시 살아난 아들에게 못다한 이야기를 쏟아내는 것이
었지만 빈은 그녀를 통해 많은 정보를 얻었다. 빈의 아버지는 대기업 건설회사의
중역이었고, 빈의 집은 부유층들이 많이 사는 고급 아파트 단지에 있었다. 그리
고 빈이 다녔다는 선문고등학교는 명문대 진학률이 높은 신흥 사립고인데, 강압
적 주입식 교육과 돈 밝히는 교사들로 악명높았다.
"빈아, 더러워도 다녀야지 어쩌겠니? 일단 대학에만 붙으면 그런 인간들 다시는
볼 일 없으니 넌 아무 생각말고 공부만 하면 돼. 그리고 너 기절하기 전에 수학
과외하던 박선생있지? 너 깨어났다는 소식 듣고 연락이 왔더라. 내가 한학기 빠
져서 졸업못할까봐 걱정했더니, 다 방법이 있으니까 일단 학교로 오라는 거야.
교장 선생님이랑 이사장한테 이야기만 잘하면 문제도 아니라고 하더라구. 그런
뒷처리는 엄마 아빠가 다 해결할테니까, 넌 다음달 모의고사나 잘 보면 돼. 그
동안 공백기간이 있기는 했지만 우리 빈이는 워낙 명석하니까 금방 따라잡을거
야. 그렇지? 엄만 우리 빈이를 믿는다. 암....믿고 말고."
빈은 병원에서 느꼈던 혐오감의 근원이 후줄근한 외모가 아니라 그녀의 속물근
성과 이기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모친이 쉴새없이 수다를 떠는 동안 차는 어느
새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빈의 모친은 고급 차량이 즐비한 지하
주차장에 익숙한 솜씨로 차를 댔다.
"아빠가 우리 빈이 깨어났다고 조퇴를 하셨어. 아빠가 너한테 거는 기대가 얼마
나 컸었는데....보면 큰 소리로 인사해라. 아빠 안심하시게."
빈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안개섬에 대한 생각을 했다. 빈이 다니는 학교는 서울
강남의 명문학군에 있었다. 도대체 무엇때문에 그런 끔찍하고 기괴한 학교를 꿈
속에서 보았던 것일까. 빈의 마음 속에 깔려있는 수험생활의 압박감이 안개섬 기
숙학교를 만들어냈다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자그마치 육개월 동안
꾸었던 안개섬의 꿈은 너무나도 생생했다. 분명 그 것은 꿈이라기보다는 현실에
가까웠다.
빈의 부친은 깡마르고 신경질적인 인상의 남자였다. 그는 빈을 보자 웃을듯 말
듯한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괜찮은거냐? 아빠는 그 동안 회사에서도 네 생각만하면 통 일이 손에 안
잡혔단다."
빈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 말로는 기억상실이 심각하다던데, 아빠이름도 기억 안나니?"
빈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부친의 미간에 세로로 주름이 갔다.
"그거 참 큰일이구나. 뭐 가족들 일이야 엄마 아빠가 천천히 말해주면 될 거
고....그런데 그 동안 공부한 걸 잊어버렸으면 큰일인데. 네가 병원에 누워 있는
동안 다른 아이들은 맹렬하게 공부했단 말이다. 기절하기 전에 공부했던 것들까
지 까먹었으면...."
지금 이런 상황에서 저런 걱정을 하다니. 빈은 자신의 아버지라는 자의 말에 어
처구니가 없었다. 그 때 모친이 끼어들었다.
"여보 걱정말아요. 얘가 당신 닮아서 머리가 좀 좋아요. 금새 따라잡을 거에요."
빈은 하얀 얼굴에 까만 안경을 쓴 의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저기요.....의사 선생님이 당분간 학교에 가지 말라고 했어요."
부모의 얼굴이 동시에 굳어졌다. 부친의 가느다란 목에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
"그게....무슨 소리냐? 학교에 가지 말라니?"
"아직 몸이 좋지 못하다고요. 회복되려면 좀 쉬어야 된다고...."
"의사 말 들을 거 없다!"
부친의 갑작스런 고함에 빈은 위축되어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다. 고급스러운
원목 마루 위로 냉정한 부친의 모습이 어룽거렸다. 모친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빈의 팔짱을 끼었다.
"그래 빈아. 육개월이나 뒤쳐졌는데 또 쉴 수는 없어. 힘들더라도 이 악물고 다
녀라. 엄마가 보약지어줄께. 은행나무 한의원이라고 알지? 거기 원장님이 고삼
수험생들한테 맞는 맞춤 보약을 지어준다더라. 아래층 수진이도 신경이 예민해져
서 맨날 배탈나고 조퇴하고 그랬는데 거기서 약먹고 많이 좋아졌대. 그렇게 하자
빈아? 학교는 내일부터 나가는거다?"
빈은 모친의 팔을 홱 뿌리쳤다. 이 아줌마 왠지 싫다. 가능하다면 엄마로 삼고
싶지 않다. 모친은 빈의 반응에 적이 당황하는 눈치더니 이내 쌀쌀하게 돌변했
다.
"그럼 엄마는 저녁 준비할테니 넌 네 방에 가 있거라. 네 방은 저기 문간방이
다."
빈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소리나게 문을 닫아버렸다. 저런 사람들이 내 부모
라니. 최악이다. 안개섬으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밖에서 부친과 모친이 나지막한
소리로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빈은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고 자신의 방을 둘러보았다. 방의 구조는 안개섬의
우등반 기숙사와 비슷했다. 벽지는 차분한 아이보리색이었고 고등학생에게는 과
분한 듯한 원목 책상과 가구가 보기좋게 배치되어 있었다. 책장에는 다양한 종류
의 참고서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다. 빈은 참고서 몇 권을 빼내 책장을 넘겨보았
다. 놀랍게도 안개섬에서 공부했던 내용들이 전부 생각났다. 꿈 속에서도 공부했
던 것일까? 내일 당장 등교해도 수업 내용을 따라가는 데는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빈은 어느새 수첩을 꺼내어 학습계획을 짜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26. 안개섬의 기억
학교 정문을 지나 교정에 들어선 빈은 우뚝 서서 한참 동안 주위를 둘러 보았
다. 선문 고등학교는 안개섬의 기숙학교와 너무나도 흡사한 모습이었기 때문이
다. 뒤틀어진 재단 건물과 기숙사 동이 없다는 걸 빼면 건물 배치가 정확하게 일
치했다. 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흉물스러운 외벽과 우중충한 실내 분위기도 안개
섬 기숙학교를 닮아 있었다.
'세상에....여기 강남 팔학군에 있는 학교 맞아?'
빈은 부유층 학부모들이 이런 열악한 환경에 대해 학교측에 항의하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등교하는 학생들의 얼굴에서도 기숙학교와 비슷한 점이 발견됐다. 하
나같이 생기없고 우울한 표정들을 짓고 있는 아이들은 발목에 무거운 쇳덩이라도
매단 듯이 힘겨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몇몇 아이들이 빈을 보고 수군대거나
아는 척을 했지만 빈은 그 아이들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이 많은 사람들
중에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자가 한 사람도 없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고독감
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빈이 군중속의 고독을 실감하며 교실에 들어서는데 누군
가 큰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야! 이빈!"
빈은 우뚝 그 자리에 멈춰섰다. 자신의 눈 앞에서 싱글싱글 웃고 있는 학생은
분명 빈이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가.....강수?"
"자식! 깨어났구나! 하하하하!"
강수는 장난스럽게 한쪽 팔로 빈의 목을 껴안으며 호탕하게 웃었다. 빈은 안간
힘을 써서 강수의 헤드락에서 벗어났다.
"너....정말 강수구나."
"왜 그래? 육개월 동안 잠만 자더니 맛이 갔냐?"
"으응...사실...."
기억상실증이야. 머릿속에서 있던 모든 게 깨끗하게 사라졌어. 하얗게 지워진
화이트보드처럼. 빈은 속으로 말을 삼켰다. 강수에 관한 기억은 안개섬 기숙학교
에서의 일뿐이다. 강수 자신은 전혀 알지 못하는 빈의 주관적 기억인 것이다. 하
지만 빈에게는 지금 친구가 필요했다.
"반갑다. 그 동안 잘 있었어?"
"그럼! 덕호가 널 얼마나 보고 싶어했는데."
"덕호? 지금 덕호라고 했니?"
"그래 육덕호."
"덕호는 지금 어디 있니?"
"화장실 갔어. 어 저기 온다."
강수의 손끝이 큰 덩치에 순한 인상을 하고 느리적느리적 걸어오는 학생을 가리
켰다. 빈의 입가에 편안한 미소가 번졌다. 덕호도 빈을 알아보고는 역시 싱긋 웃
어보였다. 덕호가 토실토실 살찐 손으로 빈의 팔을 툭 쳤다.
"빈이 왔냐?"
"응....너...그대로구나. 똑같다."
"네가 기절했을 때하고? 그래. 다이어트는 여전히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
아니. 안개섬에서 보았을 때하고 말이야. 빈은 또 다시 말을 삼켰다. 놀라운 일
이었다. 강수와 덕호 뿐 아니라 안개섬에서 보았던 많은 아이들이 그대로 교실에
서 목격되었다. 지하감옥에서 빈을 골탕먹였던 상철은 빈에게 눈길도 주지않고
공부에 열중했다. 안개섬에서 삥을 뜯던 휘경은 여기서도 험상궂은 얼굴로 아이
들을 윽박지르고 다녔다. 기숙학교 교장실 금고를 털었던 규석은 음울한 표정으
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안개섬에서 겼었던 일들이 모두 꿈이라면, 이 아이들
은 빈으로 하여금 꿈을 꾸게 만든 현실 속의 인물들이었다.
미닫이 교실문이 요란하게 열리면서 와이셔츠 차림의 남자가 들어왔다. 웅성거
리던 소음이 뚝 그치고 아이들은 황급히 자리를 찾아갔다. 빈은 교탁을 짚고 선
그 남자를 보고 소름이 끼쳤다. 저 남자는!
분명히 빈의 열등반 담임이었던 고진원이었다. 안개섬에서처럼 그로테스크한 복
장을 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한없이 냉정한 표정만은 변함없었다. 그는 빈을 알아
보고는 차갑고 희미하게 웃었다.
"이빈. 오랜만이구나. 그 동안 많이 뒤쳐졌으니 분발해라."
육개월 동안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돌아온 제자에게 하는 인사치고는 너무 간단
했다. 반장이 벌떡 일어나 구령을 붙이자 아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고진
원은 싸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떡여 인사를 받았다.
"다들 알겠지만 모의고사가 코 앞으로 다가왔다. 요즘 학교가 안팎으로 어수선하
지만 여러분은 신경쓰지 말고 성적 향상에 매진토록. 이번에도 전교석차가 떨어
진 만큼 매를 맞는다."
빈은 조회시간 내내 고진원의 소매를 힐끔거렸다. 아이들의 살을 뜯어먹는 검은
채찍이 낼름거리며 소매 바깥으로 모습을 드러낼 것만 같았다. 고진원은 짤막하
게 조회를 마치고는 냉랭한 바람과 함께 교실문 밖으로 사라져버렸다. 빈은 한숨
을 내쉬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현실과 안개섬의 기억들을 구분하지 못하면 곤란
하다. 여기는 채찍으로 학생들을 때리는 담임도, 철퇴로 기합을 주는 학생주임
도, 아이들의 피를 빨아먹는 이사장도 없다.
1교시가 시작되고 빈은 다시 한 번 놀라게 되었다. 안개섬에서 빈의 반을 가르
쳤던 수학교사가 교실문을 열고 들어왔던 것이다. 가지런히 정돈된 머리나 빳빳
하게 깃을 세운 와이셔츠도 안개섬에서 보았던 그대로였다. 군더더기없이 진행되
는 수업방식이나 그가 전수해주는 독특한 속성 풀이비법도 안개섬에서와 똑같았
다. 마치 안개섬에서 배운 내용을 복습하는 기분이었다.
2교시에 들어온 물리교사도, 3교시에 나타난 고문선생도 안개섬에서 매일같이
보았던 사람들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선문고등학교는 안개섬 기숙학교와 놀라
도록 대칭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빈의 머릿속에 어딘가에서 읽은 문장 하
나가 지나갔다. 꿈은 현실을 반영한다- 선문고등학교에서의 경험과 느낌들이 안
개섬 기숙학교라는 공간이 되어 빈의 꿈속에 나타났던 것이리라. 빈은 그렇게 생
각했다.
앞으로 수개월 동안 빈의 통원치료를 담당할 주치의는 새파랗게 젊은 정신과 전
문의였다. 그는 빈의 차트를 꼼꼼하고 신중하게 살폈다. 무테안경이 형광등 불빛
을 받아 차갑게 빛나고 있다.
"그래, 이제 기억이 좀 돌아오니? 사람들 이름도 조금씩 생각나고?"
"저.....그게......"
빈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입을 살짝 비틀었다. 의사는 차트에서 눈을 떼
고 힐끔 빈의 표정을 읽었다.
"기억이 점진적으로 돌아오는 케이스도 있고, 어떤 계기로 인해 한꺼번에 모든
걸 기억해내는 경우도 있어. 너무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 내가 판단하기엔 기억
이 돌아오는 걸 방해나는 심리적 장애물이 있는 것 같은데......"
"장애물이요?"
"이를테면 유리양의 자살같은....."
빈은 의사의 시선을 회피하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유리가 누군지도 몰라요."
"그래. 그 이야기는 그만 두자."
의사는 괜스레 환자를 자극하는 이야기를 꺼냈다 싶어 화제를 돌렸다.
"기억을 되살리려고 의식적으로 너무 애쓸 필요는 없어. 스트레스는 오히려 증세
를 악화시킬 수 있단다. 일상생활 속에서 과거의 단초를 하나씩 찾게 될거야."
"육개월 전의 기억은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육개월 동안 꾸었던 꿈속의 기
억들은 아주 생생해요."
"꿈을 꾸었다고?"
"네."
젊은 의사는 차트를 내려놓고 의자를 바짝 끌어당겨 앉았다. 그의 얼굴에 호기
심이 가득 피어올랐다.
"자세히 좀 말해봐라. 어쩌면 네 기억상실을 치료하는데 큰 도움이 될 수도 있겠
구나."
빈은 그 자리에서 안개섬에서 겪었던 일을 젊은 의사에게 모두 털어놓았다. 기
숙학교의 강압적인 교육방식과 끔찍한 체벌, 지하감옥, 성적에 근거한 철저한 차
별, 공포의 규율단, 흡혈하는 재단 이사장.....
두 시간에 걸쳐 끈기있게 빈의 이야기를 들어준 젊은 의사는 매우 놀라워하는
눈치였다.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치밀하고 논리적이야. 게다가 그 걸 다 기억하고 있다
는 점이 놀라워. 꿈은 의식과의 괴리로 인해 비논리적이고 비현실적이며 꿈에서
깨어나면 금새 잊혀지고 말지. 육개월에 걸쳐 그렇게 꼼꼼하게 꿈을 꾸었다는 게
이상해."
"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아니. 그런 게 아니다."
"그럼 제가 미쳤다고 생각하시나요?"
"빈아. 혼수상태는 고도의 의식장애로 인간이 가장 죽음에 가까이 간 상태란다.
혼수상태에 빠진 사람들이 가끔 임사체험(臨死體驗)을 하곤 하지."
첫댓글 그런데....코마 상태가 되면 아주 잠시 동안 만 그러구 그담 부턴 풀리면서 죽지안나여??(코마해제 약이 있긴하지만 말예여..)
우와, 이거 재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