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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입후보?
그거 아무나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나 해서는 결코 안되는 것 또한 정치인데...
처음 입후보 한다길래 걱정을 많이했습니다.
대구에 처음 올라오자마자 한반을 했기에
또한 지난해 4월 교통사고시 도움을 받은 변호사 친구이기에...
출마전부터 알았지만
제 직업상 선거를 도울 수 있는 입장이 아니기에
또한 우리 카페에 옮길수도 없었습니다.
이 친구는 돈이 없어 대영학원의 장학생으로 재수를 하여
4년간 전면 장학생 조건으로 성균관대에 진학하여
육군병장 제대 후 고시에 붙은 입지전적인 친구입니다.
소개가 길면 내용을 읽어 보고 싶지 않겠죠?
직장에서 교육 받으러 수원에 와 있는데
한양대법대 교수로 있는 동기가 교수로 출강했네요?
이 친구에게 아는체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여 집니다.
시간 나시는대로 함 읽어 보세요
어려웠던 우리 젊은 시절 이야기 입니다.
18대 총선 출마에 붙여.. 변호사 박헌경 1. 성장과정 소나무처럼 푸르른 것이 있습니다. 하늘입니다. 하늘처럼 넓은 것이 있습니다. 바다입니다. 하늘과 바다처럼 푸르고 넓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으로 하늘의 해를 바라봅니다. 해는 빛나고 고맙고 아낌없이 주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하루도 빠짐없이 열심히 움직이며 세상을 위해 정열적으로 자신을 태워갑니다. 저는 햇볕의 고마움을 중학교 시절 겨울방학때 공장에 다니면서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70년대의 열악한 공장에는 못먹고 햇볕을 보지 못하여 얼굴이 백지장같이 희고 노랗게 핏기조차 없는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몇 평 안되는 컴컴한 공장 실내에서 추위에 언 손을 ‘호호’ 녹여가며 형광등 불빛 아래 하루종일 미싱 기계를 돌렸습니다. 그때 동상이 걸린 손은 아직도 추운 겨울이면 손마디가 시립니다. 그 당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은 공장안을 나와 밖에서 소변을 볼 때였습니다. 나의 어깨 위에 보석같이 따뜻이 내려앉는 햇살들! 그 포근하고 밝은 햇볕의 고마움을 저는 그때 그 나이에 벌써 가슴 속 깊이 감사하며 느꼈습니다. 그런데 방학이 끝나고 개학할 때가 되어 공장을 그만 두고 나올 때 공장에서 같이 일하던 친구들과 형들이 저의 두손을 꼭 잡고 부탁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생생합니다. “헌경아! 너는 우리들과 달리 학교를 다니고 있으니까 꼭 성공해서 우리같이 못 배우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하여 일해다오!” 저는 꼭 그렇게 하겠다고 맹세하였고 그 약속은 아직도 저의 가슴에 부채로 남아 있습니다. 저는 1960년에 경북 칠곡군 왜관읍에서 태어났습니다. 저의 증조할아버지(고 박명원)께서는 현재의 구미시 진평동에서 3.1 만세운동을 주도하셨다가 투옥되어 1년간 옥고를 치루셨고 나중에 고문 후유증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해방 후 정부에서는 증조할아버지께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저는 왜관읍에서 동아일보 지국장으로 일하셨던 아버지와 조그만 가게를 하셨던 어머님 밑에서 3남 1녀의 셋째로 태어나 어릴 때는 고생 모르고 자랐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미군부대의 물자와 장비를 이용하여 왜관에서 최초의 근대식 주택을 지으셨고 벽지 초등학교에 미끄럼틀을 비롯한 놀이기구를 마련해 주는 등 지역사회에 헌신 봉사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저가 초등학교 1학년 때 병환으로 37세의 나이로 돌아가시게 되자 32세의 꽃다운 나이에 홀로 되신 홀어머니 밑에서 3남 1녀의 저희 가족들은 고생의 대장정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친척들과 이웃들의 재혼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3남 1녀를 훌륭하게 키우겠다고 맹세하셨다고 합니다. 저의 외할아버지(고 이우영)는 일제시대에 경북 울진에서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日警에 의해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수시로 日警에게 끌려가 고문을 당하셨습니다. 저의 어머니가 기억하는 외할아버지는 햇볕이 따뜻한 날 웃옷을 벗고 고문으로 생긴 상처를 말리시던 모습이라고 합니다. 왜관읍에서 초등학교 3학년을 마치고 저는 가족들과 함께 대구로 이사를 나왔습니다. 대구로 이사를 나오던 날 어머니께서는 저희들을 데리고 대구 동촌유원지로 가셨습니다. 동촌유원지의 구름다리를 저희들과 함께 건너시면서 어머니께서는 “앞으로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 구름다리를 우리 가족이 함께 건너던 때를 생각하고 꿋꿋하게 이겨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저희 가족들은 가난을 이불삼아 고생스러운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집에서 기계 1대로 편물을 짜서 번 돈으로 어렵게 생계를 꾸려갔고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초등학교 6학년이던 장남인 저의 형님은 그때부터 家長의 역할을 맡아 중학교때부터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밤이면 학생들을 가르치는 과외교습을 하여 생계에 보태었습니다. 둘째인 누나는 제일여상 야간부에 다니면서 주간에는 양초공장에서 일하였습니다. 저도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초등학생들을 가르치는 과외교습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당시 저희 가족들의 삶은 내일이 보장되지 않는 생활이었습니다. 정부미 1되와 연탄 2장을 사게 되면 다행이었고 정부미를 사지 못하면 빵으로 해결하든지 굶어야 했고 연탄을 사지 못하면 형님과 저는 두꺼운 이불을 덮고 부둥켜 안은 채 서로에게 온기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책을 열심히 읽었고 꿈을 잃지 않고 살았습니다. 다행히 저는 학창시절 훌륭한 선생님을 많이 만나게 되어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저의 형님은 현재 대구시 교육청 연구관으로 계시는데 교직의 일선에 계실 때는 절대 공납금 독촉을 한 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형제들의 그 어려웠던 시절을 떠올리시기 때문에....... 그러한 훌륭한 은사 선생님과 어머님을 비롯한 가족들의 덕분으로 저는 한양대학교 법학과를 등록금 전액 면제에 그당시 월 10만원의 생활비 보조를 받으며 기숙사 생활을 하며 다녔습니다. 대학을 마친 뒤 육군 병장으로 제대한 후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검사로서 10년간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1998년에 검찰총장께서 뛰어난 실적을 남긴 검사에게 수여하는 모범 검사상을 수상하였고, 법무부 장관상도 2회에 걸쳐 수상하는 등 검찰생활 동안 상복이 많았습니다. 저는 2005년 5월에 검사직을 사직하고 대구에서 변호사를 개업하였습니다. 2년 8개월 동안 변호사 업무를 수행하면서 억울한 사람들을 위하여 변론하였고 無辯村인 칠곡군과 장애인복지재단에서 무료법률상담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대구지방검찰청 형사조정위원과 국민고충처리위원회 전문상담위원으로도 활동해왔습니다. 2. 노블레스 오블리주!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말입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즈는 초기 로마시대에 왕과 귀족들이 보여 준 투철한 도덕의식과 솔선수범하는 공공정신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초기 로마 사회에서는 사회 고위층의 공공봉사와 기부·헌납 등의 전통이 강하였고, 이러한 행위는 의무인 동시에 명예로 인식되면서 자발적이고 경쟁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근대와 현대에 이르러서도 이러한 도덕의식은 계층간 대립을 해결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특히 전쟁과 같은 총체적 국난을 맞이하여 국민을 통합하고 역량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도층의 솔선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비록 가진 것은 많지 않지만 그래도 이만큼 자라고 공부하여 변호사라는 명함을 가지고 있음은 나라와 국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권리와 신분이 있는 만큼 의무가 따르는 것이고 의무는 반드시 실천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자리”는 누리라고 있는 것이 아니고 책임을 다해 베풀고 희생하기 위해 있는 자리입니다. 저가 18대 총선에 출마하는 것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투철히 실천하기 위한 것입니다. 힘없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등을 어루만져 주고 그들이 자립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나가고,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기반 위에서 선진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며, 외세에 의존하지 않는 자주국방의 기초 위에 통일한국을 앞당기기 위하여 제반 여건을 갖추고, 대한민국이 세계화, 개방화의 물결 속에서 차별없는 일등 국가가 될 수 있도록 저의 책무를 다하여 국가와 사회에 보답과 희생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꽃은 웃어도 소리가 없고 새는 울어도 눈물이 없습니다.’ ‘벼는 익을수록 머리를 숙이고 깊은 강물은 소리가 없습니다.’ 항상 나를 낮추는 겸손한 자세로 초지일관 성실하게 일하며 깊은 강물처럼 소리 내지 않으며 선량으로서 묵묵히 책무를 다할 것입니다. 3. 변호사 박헌경 프로필 - 1960년 경북 칠곡군 왜관읍 출생 - 왜관초등학교 입학(왜관초등 58회) - 대구 남산초등학교 졸업(남산초등 36회) - 대구 심인중학교 졸업(심인중 21회) - 대구고등학교 졸업(대구고 19회) - 한양대학교 법학과 졸업 - 육군 병장 제대 - 제 34회 사법시험 합격 - 사법연수원 24기 수료 - 창원지방검찰청, 전주지방검찰청 정읍지청, 대구지방검찰청, 서울북부지방검찰청, 대전지방검찰청 등지에서 10년간 검사 -2005년5월 변호사 박헌경 법률사무소 개업 - 2007년 4월 변리사 박헌경 특허사무소 겸업 - 카톨릭특수대학원 최고지도자 과정 수료 - 대구지방검찰청 형사조정위원 - 국민고충처리위원회 전문상담위원 - 한나라당 조직확대위 부위원장 - 수상 경력 : 모범 검사상 수상, 법무부 장관상 2회 수상 변호사 박헌경 법률사무소 (대구수성구범어동법무빌딩(농협)7층 704호 T. 746-34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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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친구를 많이 둔다는건.... 인생에 큰 재산 아니겠는가! 평생 그 우정 또한 변치않게 자~알 가꾸어 가시게나.......
큰 재산? 물론이지! bible에 부자가 천국에 들어 간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어렵다고...친구는 절대로 어느날 갑자기 가꾼다고 되질 않습니다. 4월초 바닷가를 다녀온 산우회 친구들처럼 평소에 챙기세요. 물론 함께 할 수는 없었지만 함께 한 것 이상 보기가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