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香蘭(山口淑子)&潘淑華
Chinese Arts
2020. 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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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야래향(夜來香)>을 부른 일본인(山口淑子) 중국 가수(李香蘭)
이향란 李香蘭
(리샹란, 리코란, LEE HSIANG LAN)
萝莉时期的李香蘭 (山口淑子) ,当时李香兰才16岁。
리샹란은 1920년 滿洲國 만주, 푸순에서 태어난 중국의 배우.가수로
중일전쟁 당시 리샹란(李香蘭)이란 중국 예명으로 만주국 톱스타로 올랐던 인물이다.
일본인 신분을 속인 완벽한 중국인 여배우로 시작해 일본 TV 진행자를 거쳐 18년간 참의원까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일본 여배우 야마구치 요시코(山口淑子·사진) 씨가 2014년 09월 7일 도쿄(東京)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숨졌다. 향년 94세.
14일 일본 언론에 따르면 그는 1920년 일본인 양친에게서 태어나 중국 만주에서 자랐다. 13세 때 부친의 중국인 친구에게 입양돼 ‘리샹란(李香蘭)’으로 개명했다. 18세 때는 중국 영화계에 배우로 입문했다. 특히 일본이 만주를 장악했던 1930, 40년대에 중국인으로 일본 선전영화에 출연하며 큰 인기를 끌었다.
‘야래향(夜來香)’ ‘소주야곡(蘇州夜曲)’ 등 중국 대중 가요사에 남을 노래를 부르며 가수로도 활약했다. 중국 가요사 및 중화권 노래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빼놓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영향을 남겼다.
종전후 중국에 의해 1946년 본국으로 추방된후 배우 .가수로 연예활동을 게속했으며 TV 진행자를 거쳐 18년간 참의원을 역임하기도...
90대 고령에 일본 채프린(Chaplin)협회 명예고문으로 활약하였으며 2014년 9월 7일 토쿄 자택에서 95세로 타계할 때까지 그 일생은 파란만장한 드라마였다.
이향란李香蘭 (리샹란, 리코랑) (1920년 2월 12일- 2014.9.7 ), 중국 옛 봉천성 북연태 (오늘의 요녕성 등탑시)에 태어났다. 본적지가 일본 사가 현. 본명 야마구치 요시코. 옛 상해 "7대 여자 가수왕"의 하나이고 유일한 외국인 가수였다.
20세기 30, 40년대 아시아에서 유명한 일본계 가수와 영화 배우이다. 1940년 후, 상해에 가서 연예 사업의 절정에 달하였다.
1944년, 상해에 여금광黎錦光 (리진광)과 협력하여 명곡 <야래향>을 발행하였다. 그 후, 주선周璿(저우쉬안)·요리姚莉(야오리)·백홍白虹(바이훙)·백광白光(바이광)·오영음吳鶯音(우잉인)·공추하龔秋霞(궁츄샤)와 같이 상해탄의 7대 가수 스타가 되었다.
1945년, 상해 대광명극장에서 첫 개인 콘서트 열었다.
1945년, 일본이 패전한후, 이향란이 "한간"의 죄명으로 체포되어, 일본인 신분으로 석방되었다.
1946년, 일본으로 추방되었다.
1947년, 본명 야마구치 요시코의 이름으로 연예 사업을 계속하였다.
1958년, 남편의 성씨에 따라 오타카 요시코로 개명, 정치계 진입하였다.
1974년, 참의원 의원 당선.
이향란은 정식적인 서양 성악 교육을 받은 적이 있다. 대표작 <야래향> 등. 나중에 이향란의 이야기를 토대로 한 노래·무대극·드라마도 많다.
2014년 09월 7일 도쿄(東京)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숨졌다. 향년 94세.
참의원 당시의 山口 淑子(야마구치 요시코.)
기본 정보
일본명: 야마구치 요시코 (山口淑子 やまぐちよしこ /Yamaguchi Yoshiko)
중국어명: 이향란李香蘭 (예명), 판숙화潘淑華
영어명: Shirley Yamaguchi (셜리 야마구치)
성별: 여
경력: 20세기 30-40 년대 중국에서 유명한 일본인 여 가수
국적: 일본
생년월일: 1920년 2월 12일
출생지: 요녕성 등탑시 (옛 봉천성 북연태)
본적지: 일본 사가현 키시마군 키타가타무라 (현재 타케오시)
직업: 가수, 배우, 참의원 의원, 후지TV 엠시
언어: 중국어, 일본어, 영어
배우자: 노구치 이사무 (1952년-1957년), 오타카 히로시 (1958년-2001년)
이향란, 본명 야마구치 요시코 (山口淑子), 집안 애칭 두두豆豆(더우더우), 일본인.
1920년 2월 12일, 중국 요녕성 봉천 부근의 북연태 (현재 요녕성 등탑시)에 태어났다. 출생 후, 온 가족이 무순 (푸순)으로 이사하였다.
야마구치 요시코의 가족은 한학 세가이다. 아버지 야마구치 후미오는 1889년 일본 사가현에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사족 출신이고 중국 역사에 대해 연구가 많았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여러 해 전, 중국에 배우러 와서 만주철도회사에 근무하였다.
어머니 이시하시 아이, 1894년 일본의 후쿠오카현에 태어났다. 가운이 중도에 쇠퇴되어 온가족이 경성 (현재 서울)에로 이사하였다. 나중에 각지를 걸쳐 중국 무순에 쌀공장을 운영하는 숙부에게 의탁하러 갔다.
리샹란(李香蘭)은 1920년 랴오닝성(遼寧省) 펑톈(奉天, 오늘의 심양(瀋陽))에서 태어나 12살까지 탄광지대인 푸순(撫順)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만주(滿洲)에서 태어나고 성장해 문화적으로는 전형적인 만주인이었지만 본명은 야마구치 요시코(山口淑子), 혈통상으론 완전한 일본인이었다.
심양과 푸순에 살아본 적이 있는 야마구치 요시코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잊기 어렵다. 1932년, 매인 중국인 몇 명이 일본 헌병에 의해 살해된 현장을 직접 자기의 눈으로 봤다. 나중에 그 사건이 평정산참사 (3000 명 중국인 평민이 일본군에 의해 학살된 사건)와 관련이 있다고 알았다. 평정산 사건 때, 아버지 야마구치 후미오가 한어를 잘 할 수 있고 무순에도 친구와 아는 사람이 많아서, 중국의 항일 인사와 연계가 있다고 일본 헌병대에서 의심하였다. 이 때문에, 아버지가 "이적 행위"로 구속되었다. 일이 끝난 뒤, 야마구치 요시코 온 가족이 심양으로 이사하였다.
*핑딩산 사건(平頂山事件)은 1932년 9월 16일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 성 북부 푸순 시에서 일본군이 게릴라 토벌작전을 벌인다며 핑딩산(平頂山) 부락의 주민을 다수 학살한 사건을 가리킨다. 희생자 수에 대해서는 3천명(중국)이라는 설과 400~800명(일본 학자)이라는 설이 엇갈리지만 일본군이 민간인을 다수 학살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이는 없다.
무순에서 심양으로 가는 기차에서, 요시코가 같은 연령의 러시아계 유태인 류바와 만났다. "류바는 내 가장 진귀한 친구다. 제가 노래하는 이향란이 된 이유는 바로 류바이다; 제가 살아있는 이향란이 된 이유는 바로 류바이다. 류바는 신이 내게 준 호신부와 같아, 어떤 때 태양과 같고, 어떤 때 달과 같아, 영원히 나와 함께 있었다."고 요시코는 말했다. 바로 류바의 추천을 통하여 요시코가 유명한 소련 가극 배우 포도레소프 부인을 스승으로 모셔, 음악의 길을 밟았다.
13살 때 푸순을 떠나 펑톈여고에 전학했다. 이때부터 리샹란이라는 이름을 썼다.
야마구치 요시코는 아버지의 중국인 친구, 그 때의 친일파 심양은행 총재인 이제춘 李際春과 의녀·의부 관계를 맺었다. 이 때부터 요시코도 고운 중국어 이름 "리샹란(李香蘭)"을 받았다.
1934년, 소녀 리샹란이 북평北平 (현재 북경)으로 갔다. 판숙화潘淑華의 이름으로 북평 익교翊敎여자중학에서 공부하였다. 성씨 "판潘"은 요시코의 다른 의부, 아버지의 결의 형제로, 그 때 톈진(天津)시장인 친일정객 판유구이(潘毓桂)의 성씨이다. "숙淑"은 야마구치 요시코의 "요시淑" 이다. "화華"는 중국에서 태어난 것을 뜻한다.
펑톈을 떠날 때 부친은 중국인 전용 열차표를 사주며 “오늘부터 중국인으로 행세해라. 중국인들의 생활습관을 익혀라”고 말했다. 판씨의 집은 100여 명의 가족이 함께 사는 대저택이었다. 일본인이라곤 구경도 할 수 없는 천안문 서쪽의 전형적인 북경 골목에 살며 리샹란은 점점 중국인이 되어갔다. 음식도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오리구이보다 동라이순(東來順)의 양고기를 더 좋아했고 인사를 나눌 때도 고개만 까딱하고 마는 영락없는 중국인이었다.
북평 익교여자중학은 초등·고등 학교가 다 있는 여자중학교이다. 이향란이 이 곳에서 좋은 교육을 받아, 나중의 연예 사업에 좋은 기초를 닦았다.
"저는 동북에서 친척에 의탁하여, 중국인 (판씨의 의녀)으로 익교여자학교를 들었다. 이름이 판숙화이다... 등교 때는 세 사람이 함께 가다. 학교가 파할 때는 나만 혼자 남았다. 그 때, 저는 늘 가다 오는 길에 북해공원에 가서, 사람이 없는 작은 섬 위에서 한어의 발음을 연습하고 자전을 찾아. 먼 태묘에도 가본적이 있다." 李香蘭이 자서전 <내 전반생 - 李香蘭전> 속에 그 때 학습의 상황을 기재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했다.일본 군부의 괴뢰정부인 만주국 국무원은 만주영화협회설립법안을 통과시켰다. 만주국과 만철이 반씩 출자해 신징(新京, 오늘의 長春) 황롱(黃龍)공원 건너편에 만주영화제작소(만영)를 설립했다. 약 160만㎡에 달하는 동양 최대의 영화제작소였다. 만주인이 보는 영화를 만주인이 만든다고 했지만 일본군의 중국 침략을 선전하고 일본의 식민정책을 미화하는 것이 설립 목적이었다. 정확한 중국어와 일본어를 구사하고 노래와 연기에 뛰어난 스타가 필요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미모와 유창한 한어 (중국어), 그리고 아름다운 목소리에 의해, 이향란의 천부적 예술성과 특별한 출신이 일본인이 조종하는 "만주영화협회"의 눈에 들었다. 만주영화협회가 이향란을 입회시켜, 대대적으로 포장하여 , 중국 가수 스타로서 내놓아, 침략정책의 선전으로 이용하였다.
만영의 첫 번째 영화에 주연으로 발탁된 리샹란은 ‘백란의 노래(白蘭之歌)’와 ‘지나의 밤(支那之夜)’에 연달아 출연했다. 일본의 중국 침략을 미화하는 애정물들이었다. 주제가를 직접 불렀고 부르는 노래마다 크게 유행했다. 80년대 대만가수 덩리쥔(鄧麗君)이 불러 대륙을 열광시킨 ‘임은 언제 다시 올까(何日君再來)’와 ‘밤이 오는 향기(夜來香)’를 처음 부른 것도 리샹란이었다.
夜来香~(李香兰唱)~好歌听出好心情。
夜来香~(李香兰唱)~好歌听出好心情。 (youtube.com)
李香蘭이 일본 봉천방송국의 새 프로 <만주신가곡滿洲新歌曲>에서 "어가녀漁家女" "소군원昭君怨" "맹강녀孟姜女" 등 중국 노래를 불렀다.
더욱 "야래향(夜來香)" 한곡으로 명성이 자자해졌다. 그래서 "스타 가수 李香蘭"이 무대 앞쪽으로 밀어져, 급히 음악계와 영화계에 유명하게 돼어 집집마다 다 아는 "슈퍼스타"가 되었다. 인기를 받은 후, 李香蘭은 계속적으로 일본군의 선전 영상물에 출연하였다. 위문공연에도 수시로 동원돼 일본 군인들의 향수를 달랬다.
어디를 가나 중국인 리샹란으로 소개되었다. 나무랄 데 없는 중·일 친선의 상징이었다.그 때 李香蘭이 중국인이다고 대중은 생각하였다. 이 오해도 나중의 불행을 초래하지만...
일본이 패망하자 중국 국민당 정부는 상해에서 리샹란을 체포해 일본에 부역한 한간(漢奸) 혐의로 기소했다.
조국반역죄로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재판 도중 일본인이란 것이 밝혀져 추방형식으로 석방되었다.그 가 일본인이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벌어진 촌극이었다. 부모가 호적등본을 제출했다. 풀려난 리샹란은 고국을 떠나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조국과 고국이 달랐다.
일본으로 건너간 李香蘭(山口淑子)은 초혼에 실패, 외교관과 재혼했다.
그녀는 일본 참의원에 당선되기도 했고 고이즈미 총리에게 신사참배 하지 말것을 권유하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山口淑子는 남편 오다까씨가 주한 일본대사관 참사관으로 발령받아 서울에서 살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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