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대마도가 우리나라 땅이었다는 것을 인정한 내용의 일본이 작성한 고지도가 1996년 발견됐다는 kbs 보도가 있었다.
이 지도는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신하들에게 명령해 만든 것으로 독도와 대마도가 우리 영토로 포함돼 명기되어 있다. 서지학자 이종학 씨가 일본 공립 공문서관에서 찾아낸 것으로 앞으로 이 문제 해결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와 더불어 마산시의회는 2005년 임시회 본회의에서 이종무 장군이 대마도 정벌을 떠난 6월 19일을 대마도의 날로 지정한다는 조례를 제정했고, 이를 "철회하라"는 일본 정부의 항의에 "우리 땅이므로 철회할 수 없다"라고 거절했다.
대마도는 일본에서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지역으로 섬 전체가 쓰시마시(對馬島市)에 속한다. 시 아래 이즈하라(嚴原町), 미쯔시마(美津島町), 도요타마(豊玉町), 미네(峰町), 가미아가타(上縣町), 가미쯔시마(上對馬町)) 등 6개 읍이 있고, 제일 큰 읍인 이즈하라에 근래 시(市)로 승격된 쓰시마시청(對馬島市廳)이 있으며, 섬 전체는 중앙부의 아소만(淺茅灣)과 조선을 침공하기 위해서 인공적으로 굴착된 만제키세토(萬關瀨戶:瀨戶는 水路)에 의해 상·하 두 섬으로 나뉜다. 섬 전체가 해발고도 400m 내외의 산지이고, 산지의 계곡들은 곡벽(谷壁)이 험준하다. 농경지는 총면적의 4%에 불과하고 계단식 밭이 많으며 최근까지 화전 (火田)경작을 했다. 특히 대마도에는 멧돼지가 많아 에도(江戶)시대에 멧돼지 퇴치를 담당하는 번사(藩使)를 두기도 하였다. 산촌에서는 숯제조와 표고버섯 재배가 주업이었기 때문에 산림의 벌채가 심했으나 이후 조림이 이루어져 지금의 울창한 숲을 이루었다. 섬이라는 특성상 바다장어·오징어·도미잡이와 전복·소라·성게·천연김 채취를 하고, 아소만에서는 한동안 진주조개 양식이 성행하여 질 좋은 진주를 대량 생산하기까지 했었다. 이같은 탓에 이즈하라항은 대마도의 주요 어항으로 오래전부터 번성하였으며 식당, 술집(게이샤 상주) 등 번화가를 형성하였다. 하지만 어획고가 줄고 진주 수요가 줄어들면서 상업적인 활기도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해마다 8월에는 조선통신사를 소재로 한 아리랑 축제가 열린다.
(조선침략용 물자수송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인이적으로 조성하여 대마도를 남,북으로 갈라놓은 만제키세토)
대마도는 예로부터 한국과 일본 열도 사이의 중계지로서 한,일간의 가교(架橋)가 되어 대외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특히 부산에서 약 49.5km의 거리에 있어 우리와 관계가 깊었는데, 고려 말부터 조공을 바치고 쌀·콩 등을 답례로 받는 관계에 있었고, 몽고의 고려침입 시에는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 몽골군이 일본 본토 정벌을 위해 대마도에 상륙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대마도는 왜구의 본거지가 되어서 대마도를 근거지로 조선의 서,남해안으로 출몰하는 왜구의 폐해가 막심했기에 조정에서는 이들을 퇴치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실패하였고 굶주린 왜구들에게 쌀을 제공하는 회유책과 벼슬을 하사하는 귀화정책 등의 정책을 구사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효과를 거두지 못하게 되자 결국 세종 1년(1419년) 6월 19일 이종무(李從茂) 장군이 한산도와 연결된 추봉도의 곡용포를 전진기지로 삼은 후 삼남의 병선 227척과 삼도수군 17,000명을 이끌고 대마도 원정(遠征)에 나서 쓰시마 도주(島主)의 항복을 받아냈고, 그 이듬해인 세종 2년(1420년) 대마도 도주(島主) 소(宗) 사다모리가 신하를 보내 조선의 한 고을로 삼아달라는 주청(奏請)을 올리자 이를 받아드려서 경상감사 휘하의 한 고을로 편입시킨 후 대마도주(對馬島主)에게 '태수(太守)'라는 직함을 내리면서 부터 대마도는 우리 땅이 되었다. 현재 쓰시마섬 이즈하라(Izuhara)에 있는 '하쓰만구'신사(神社, 註1)의 도리이(鳥居, 신사의 상징물로 입구문형태의 기둥) 돌기둥에 새겨져 있는 '태수(太守)'라는 글씨가 그 증거(證據)다.
*주(註)1, 신사(神社): 일본 왕실의 조상이나 국가에 공로가 큰 사람을 신으로 모시고 기리는 사당
이와 같은 연유로 현재 대마도의 지명 중에는 신라와 고려의 영향을 받은 지명들이 많이 남아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즈하라에 있는 '시라기야마(新羅山)'와 북섬에 있는 '고마야마(高麗山)' 등이다.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침공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사용되었던 와니우라 내해는 이제 진주 양식장으로 변했다)
대마도는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일본의 전국시대(戰國時代)를 통일한 후 골치덩어리로 남아 후환(後患)의 우려가 있는 전업무사(專業武士) 즉 소위 '사무라이(武士)'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명나라를 치기 위한 길을 빌린다(征明借道)"라는 명분으로 일으킨 '일본 내 사무라이 소탕용' 침략전쟁인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는 일본 수군의 중요한 전초기지였었는데, 당시 대마도주(對馬島主) 소 요시토시(宗義智)의 장인이 조선(朝鮮)침략군의 선봉장이였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였다. 이들은 1592년 임진년(壬辰年) 대마도 오우라항에 왜선(倭船)을 집결시킨 후 아침 9시 오우라항을 출발해서 선발대로 부산포로 쳐들어왔는데, 오후 5시 부산포에 도착하면서 부터 우리 역사상 그 치욕적인 임진왜란의 서막이 올랐던 것이다. 임진왜란의 서곡을 울렸던 이곳은 10년 전까지만 해도 로밍없이도 자유롭게 한국전역으로 핸드폰 통화가 되어 자연스럽게 우리땅이라는 사실이 증명되었지만, 이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일본정부에서 이를 방지하기 위해 이곳에 자위대 해군기지를 건설한 후 방해전파를 쏘아 이제는 로밍으로 국제통화를 해야만 되는 외국이 되었다. 임진왜란 후 번(藩) 으로 바뀐 대마도의 대마도 번주(藩主) 소우지(宗氏)의 간청(懇請)으로 조선이 삼포(三浦: 부산포·염포·제포)를 개항하자, 대마도는 에도(江戶)시대 말기까지 대(對)조선무역이 활발했다. 1906년 구한말에는 조선의 마지막 선비이자 항일의봉장이였던 애국지사 최익현이 왜인들에게 잡혀 이곳으로 유배와 사망한 곳이기도 하며, 현재 그를 추모하는 비석이 슈젠지(修善寺)에 세워져 있다. 또한 이즈하라 가네이시성(金石城) 유적지에는 환갑이 지난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高宗)이 낳은 마지막 딸 덕혜옹주가 왜인들에 의해 대마도 도주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강제적인 정략결혼 후 이 두사람의 결혼을 기념하는 치욕스러운 '이왕가종가백작어결혼봉축기념비(李王家宗家伯爵御結婚奉祝記念碑)'가 세워져 있기도 하다.
[대마도주 관사로 출입문인 옛 가네이시성 누문(樓門)]
대마도의 중심지인 이즈하라는 13세기 중엽 이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에 이르기까지 대마도를 지배해온 소씨(宗氏) 일족의 거성(居城)인 가네이시성(金石城)이 있던 곳으로 조선 국왕이 하사한 장식물을 소장한 쓰시마번주 소 요시토시 가문 묘역인 반쇼인(萬松院)등이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통신사가 일본으로 건너갈 때 대마도를 거쳐갔었기에 사절단 일행이 머물렀던 유적과 숙박지였던 세이산지(西山寺)가 남아 있다. 또한 대마도 번주의 관사로 들어가는 출입문은 고려문(高麗門)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는 바, 이것만 봐도 대마도는 우리땅이라는 것이 명확하게 증명된다. 부근에 대마도 민속자료관과 향토사료관이 있어 이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조선 초 통신사로 대마도에 건너가 계해약조(癸亥約條)를 체결한 이예(李藝)의 공적비가 대마도 미네초(峰町)에 소재한 엔추지(圓通寺)라는 사찰에 세워져 있기도 하며 신라국사 박제상공 순국비(新羅國使朴堤上公殉國碑)가 있다. 그는 볼모로 잡혀간 신라의 왕자를 구출하고 자신은 일본에서 처형되었다. 또한, 조선 숙종 때인 1703년에는 대마도의 제3대 번주 종의진(宗義眞)의 죽음을 애도하고, 또 신번주 제5대 종의방(宗義方)의 습봉(襲封)을 축하하기 위해서 파견된 국가외교사절단인 위문행역관사(慰問行譯官使) 108명과 대마도에서 파견된 영접번사 4명 등 총 112명을 태운 선박이 대마도 와니우라(鳄浦)로 입항(入港)하다 폭풍을 만나 와니우라 앞바다의 암초에 좌초되어 침몰되면서 애석하게도 사절단 전원이 사망하는 참사가 일어났을 때 정사 한천석(韓天錫)과 부사 박세양(朴世亮) 등 일행 총 112명 전원이 사망하였는데, 현재 그들의 넋을 기리는 조선역관순난지비(朝鮮譯官殉難之碑)가 그들이 순국(殉國)한 바다를 내려다 보는 절벽 언덕에 망향(望鄕)의 서러움을 달래도록 세워진 한국전망대 옆에 세워져 있다.
(와니우라해안을 굽어보고 서 있는 한국전망대 옆에 세워진 조선역관사순난지비)
(경주 감은사지와 똑같게 본전에 모셔진 신들이 타고 바다로 나갈 수 있도록 본전 우측 수로에 준비되어 있는 목선으로 감은사지의 복사판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살아 있는 증거다)
(1) 가는 방법
가까운 만큼, 가는 방법도 쉽다. 부산 등 남해안뿐 아니라 수도권 주민들도 당일 여정이 가능하다. 대마도를 가는 여객선은 부산항 국제여객터미널(www.busanpa.com)에서 출발하므로 서울역에서 부산행 첫 KTX를 타면 오전 7시 52분 부산역에 도착하기에 대마도까지 가는 대부분의 배편을 이용하는데 지장이 없다(註6, 여객터미널 이용방법 참조). 다만 새벽부터 서둘러야 하는 데다, 관광 명소 부산을 건너뛰어야 하는 단점이 있다. 따라서 부산에서 하루를 묵고 이튿날 대마도를 다녀오는 여정이 좀더 합리적이다. 각 항공사별로 비행기편이 있듯이 이곳도 각 해운사별로 배편이 있는 바, 부산에서 대마도 가는 배편은 코비호, 비틀호, 니나호, 오션플라워호(작은 배 순서임) 등이 운항(하루 4회)하며, 대아고속 오션플라워호의 경우 주중 번갈아 1회씩 히타카쓰와 이즈하라까지 운항하고, 주말이나 공휴일에는 2회 운항한다. 자세한 운항 일정은 대아고속 홈페이지(intlkr.daea.com)나 대마도 여행 사무소 홈페이지(www.tsushima-busan.or.kr)에서 운항정보 및 대마도 여행 정보(숙박,교통,날씨등)등을 확인할 수 있고, 특히 대마도 여행 사무소 홈페이지(www.tsushima-busan.or.kr)에서 대마도 지도 요청을 하면 대마도 지도를 무료로 우송해주기에 대마도 여행을 계획 중이라면 꼼꼼하게 살펴보는 게 좋겠다.
(히타카쓰항에 정박 중인 대마도를 운항하는 쾌속선 나나호)
*주(註)6, 여객터미널 이용방법: 부산역에서 부산국제여객터미널(www.busanpa.com)까지는 불과 700m 거리다. 걸어서 20분이면 닿는다. 택시를 타려면 꼭 ‘선상주차장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택시로 5분이면 여객터미널에 도착한다. 승용차로 부산까지 갈 경우 여객터미널 주차장에 주차시키면 된다. 짐은 크기별로 다양한 로커가 마련돼 있는 부산역 유료 로커에 넣어 두면 편하다. 면세점은 한국 쪽(대마도내 면세점에는 물품의 다양성도 없기에 살게 없다)에만 있으며 선박내에서도 면세품을 판다. ‘면세 쇼핑’이 목적이라면 참조하시면 된다.
(히타카쓰항에 정박 중인 페리호)
(2) 여행정보
여행에 앞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게 있다. 여권과 국제운전면허증이다. 반나절의 짧은 여정이지만 엄연히 국경을 넘나드는 여행이라 여권을 지참했는지 거듭 확인하는 게 좋다. 국제운전면허증은 렌터카를 빌릴 때 필요하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대마도를 돌아보는 건 쉽지 않다. 차를 빌리는 게 훨씬 효율적이다. 히타카쓰 등 항구 주변에 렌터카 업체들이 많다. 대부분 한국말이 통해 어렵지 않게 빌릴 수 있고, 렌탈요금은 차량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대개 하루 6000엔(약 6만 6000원)을 넘지 않는다. 대부분 경차이기에 기름값은 하루 1000엔이면 충분하다. 자가운전시 섬 내 도로폭이 좁아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382번, 39번 등 대표적인 도로들은 왕복 2차선이지만 나머지 도로들은 교행해야 하는 구간이 많기 때문이다.
자전거여행도 가능하므로 자전거를 가져가도 된다. 그래서 자전거를 가져가는 이들도 제법 많다. 선사에 따라 다르지만 오션플라워호의 경우 2만원 안팎의 추가 요금을 내면 배에 실을 수 있다. 또한 현지에서 자전거를 렌탈할 수도 있다.
기타, 여행사 여행박사(tourbaksa.com)가 대마도 여행상품을 판다. 1박2일 기준 자유여행 11만4300원부터, 패키지여행 22만4000원부터(부두세 포함). 070-7012-5961.
최근에는 한국인 관광객을 위해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는 카페(‘친구야’)가 생겼다. 대마도에는 카드 결제가 되지 않는 곳이 많으니 미리 엔화를 환전해 가는 것이 좋다.
*정보 문의처
부산항 국제여객터미널(www.busanpa.com)
여행정보: 쓰시마 부산사무소(www.tsushima-busan.or.kr)
첫댓글 우리의 땅도 제대로 못지키고 또 쌩땅 독도도 빌미가 되어있다니...
우리의 땅 대마도를 반드시 찾아야만 하겠습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왜놈들이 독도 주장할때 맞불놓았음 될터인데
@심산(深山) 우리의 정보력이나 국력이 그렇게도 낮을까요?
왜 여태껏 그런것조차도 모르고 이렇게 처절하게 농락당하고만 있어야 했을까요?
정녕 앞으로라도 확고한 주장을 펼수나 있을까요?
사실이라면 참 안타깝고 답답합니다.
@바쿠스(가짜솔로몬) 예. 일본에 비하면 형편없지요.
그래서 앞으로도 어렵다고 봅니다.
저게 만약 일본이였다면 벌써 국제사법재판소로 갔을 겁니다.
빨리 찿아 와 하는뎅 ~~~~
그렇지요. 한시가 급합니다
일본놈들 독도 주장을 무마 시키고 대마도는 꼭 찾아 와야 합니다..
.우리 시대에ㅡ이루어 질수 있을런지...ㅠㅠ
맞아요, 꼭 찾아와야 됩니다요.
감사합니다.
신나는 한주 시작하세요
대마도에 관한 정보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신나는 한주 시작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