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래 대답하고 혼자 웃어요
안주철 비가 내리고 있어요 언젠가 한 번 서로 알아본 것 같기도 해요 맑은 눈과 지친 눈이 만나서 함께 캄캄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비가 내리고 있어요 어깨였을까 이마였을까 손등이었을까 털어내지 않았던 밤도 있었어요 빗방울들이 지붕에 플라스틱 차양에 내리면서 손바닥을 펼치고 있어요 손바닥을 펼치자마자 수많은 손끝들이 흩어지면서 사라지는 소리는 듣지 못해서 아쉬워요 마음을 조금 꺼내서 비가 내리는 창밖으로 내밀었어요 손바닥과 손가락이 흩어질 때까지 빗방울들의 손바닥과 손끝이 어디까지인지 모르지만 캄캄해서 부끄럽지 않은 밤이에요 비가 내리고 있어요 내리고 내리고 내리고 있어요 이런 밤에는 마음이 다 풀어져서 내가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없어도 될 것 같기도 해요 너 뭐해? 나를 부르는 소리는 아니지만 몰래 대답하고 혼자 웃어요
—월간 《현대시》 2023년 7월호 재수록, 《생명과 문학》 2023년 여름호 ---------------------- 안주철 / 1975년 강원 원주 출생. 배재대 국문학과 졸업,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2002년 〈창비신인시인상〉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 『다음 생에 할 일들』 『불안할 때만 나는 살아 있다』 『느낌은 멈추지 않는다』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