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은 붉게 물들고 강가에 시체가 겹겹이 쌓여
낙동강은 남한 제1의 大河(대하)로서 태백산맥에서 발원하여, 장장 525km를 흘러 부산 서쪽에서 남해 바다로 흘러든다. 유역면적은 2만 3000 평방 킬로미터를 적셔 沃土(옥토)로 만들었다. 북한군의 거의 모든 사단이 이 강 연안에 집결하여 도하작전을 경쟁했다.
도하에 앞서 부대마다 회의를 열고 도하의 의의를 설명하고 각개 병사들에게 목숨을 아끼지 말고 도하한다는 결의를 밝히게 했다. ‘탈취 문서’에 의하면 敵 제3사단의 한 병사는 다음과 같은 결의를 밝혔다.
<이번 낙동강 도하에 있어 소대장의 명령을 1초도 어기지 않고, 분대장의 명령을 즉시 실천하고, 전투대열을 이탈하지 않고, 적의 포탄과 탄환이 날아오더라도 겁내지 않고, 목숨을 아까워하지도 않고 낙동강을 도하할 것입니다.
또 도하 때는 동지를 돕고, 적에 발견되는 바 없이 도하하고, 38선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전투에서 승리해 온 완강성과 전투에서의 많은 경험을 이번 낙동강에 있어서 용감하게 발휘하여 도하하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조국과 인민을 위해 싸운다고 맹세한 군인선서를 생각하면서 최후의 피 한 방울도 아끼지 않고 싸우겠습니다. 도하에 있어 나는 중대의 모범이 될 것을 서약합니다.>
북한군의 주력 10만은 空爆(공폭) 등에 의한 30~40%의 전력 損耗(손모)에도 불구하고 최후의 사력을 다해 도하를 결행했다. 도하용의 舟艇(주정)은 애시당초에 없었고, 야음을 틈타 드럼통을 띄운다든지, 나룻배 및 急造(급조) 뗏목, 徒涉地(도섭지)에 흙을 채운 가마니 및 돌을 쌓아서 포를 운반한다든지 하는 수법을 구사했다.
그러나 이들은 기다리고 있던 아군의 포격 및 空爆(공폭)에 의해 많은 사상자를 냈다. 낙동강은 붉게 물들고 강가에는 시체가 겹겹이 쌓여갔다. 그 처참함은 미 육군의 公刊史(공간사) 《남은 낙동강, 북은 압록강까지》에도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어느 하나의 전쟁터만 해도 2000여 명의 북한군 유기사체가 뒹굴고, 강바닥은 북한군의 시체로 덮혀, (중략) 엄청난 파리떼로 시계를 막고 있었다.>
하기와라 씨의 저서 《조선전쟁》에 따르면, 워싱턴의 ‘탈취 문서’ 중에 ‘희생자 등기표“라고 하는 14매의 手記(수기) 메모가 있다. 전사한 북한군 병사의 매장장소와 간단한 경력, 매장지의 지도가 기록되어 있다. 장소는 경상남도 창녕군 南谷面 詩南里(남곡면 시남리). 여기에 14명의 북한군 전사자가 묻혀 있다는 메모이다. 한 사람 한 사람 現 주소, 입대연원일, 사망에 이르는 경과 등이 기재된 것이다.
영산전투- 적 최정예 제4사단의 소멸
倭館(왜관)에서 靈山(영산)을 거쳐 南旨(남지)에 이르는 낙동강 本流(본류)는 방어에 유리한 자연적 조건이다. 낙동강 강폭은 400~800m 이며, 물이 흐르는 부분은 300~400m, 수심은 1~1.5m. 낙동강의 동·서 兩岸(양안)에는 깎아세운 듯한 벼랑이 많다. 지도상에서 보면 낙동강의 영산 돌출부는 女人의 긴장한 유방처럼 탐스럽다. 처절한 전투가 전개된 이 돌출부에는 아이러니하게도 詩南里(시남리)·月下里(월하리)·大谷里(대곡리) 등 매우 로맨틱한 이름의 마을이 많다.
부산 교두보의 방어선 중에서 미 제8군이 가장 걱정했던 곳은 바로 이 정면이다. 강이 S자로 蛇行(사행)해 도하하기 쉽고, 또 서부 경남에서 東進(동진)하는 북한군은 우선 이 정면에 부딪치게 되어 있는 데다 경부선 철도와도 가까웠다. 더욱이 이 정면을 담당한 부대는 大田전투에서 북한군에게 패했던 미 제24사단이었다.
이러한 걱정은 현실화되었다. 8월6일 심야, 북한군 제4사단은 낙동강 돌출부에 은밀하게 도하, 東岸에 교두보를 확보했다. 미 제24사단은 제1선 대대에 이어 예비의 제19연대를 투입했지만, 모두 저지되었다. 이에 제34연대와 제19연대를 竝列(병렬)해 공격했지만, 북한군 제4사단의 반격을 받아 격퇴당했다. 7일에는 중간 요지인 클로바고지 및 오봉산 능선도 적에게 점령되었다.
북한군은 水中橋(수중교)를 가설하여 평균 수심 1.5m의 낙동강에서 도하작전을 감행했다. 수중교는 강바닥에 암석과 목재 혹은 가마니에 모래를 채워 수면 아래 30cm 높이로 水中假道(수중가도)를 만들어 탱크·대포 등 중장비까지 도하시키는 것으로, 소련군이 獨蘇(독소)전쟁 때 자주 이용했던 秘藏(비장)의 방식이다.
8일, 미 제24사단은 미 본토로부터 막 도착한 미 제9연대(제2사단 예하)를 투입, 총력을 들어 반격했지만, 그때 이미 북한군 제4사단은 主力의 도하를 끝내고 있었기 때문에 반격 역시 실패했다. 낙동강 돌출부 동쪽 15km지점의 靈山(영산) 시가지까지도 점령되었다.
12일, 미 제8군은 軍예비인 제27연대를 영산전투에 증파했다. 다음 날인 13일 아침, 미 제27연대는 영산 남쪽인 咸安郡(함안군) 漆西面(칠서면) 방면으로부터 낙동강을 逆(역)도하, 배후로부터 북한군을 습격, 격파하고 南旨(남지)를 거쳐 영산읍(지금은 영산면)을 회복한 후 다시 軍(군) 예비가 되어 대구로 돌아갔다. 대구 북방 多富洞(다부동)·왜관 전선이 심상찮았기 때문이었다.
제24사단은 14일부터 총공격을 개시, 낙동강 돌출부에 위치한 박진지구(영산면에서 직선거리로 15km)를 회복하려 했지만, 또다시 북한군에게 저지되었다. 워커 중장은 격노하여 미 제1해병여단을 제24사단에 배속시키고 조기 탈환을 엄명했다.
영산전투는 17일 미 제8군 예비인 미 제5해병연대가 투입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미군의 반격에 쫓긴 敵 제4사단은 영산읍에서 클로비 고지 및 오봉산 능선으로 퇴각, 여기서 최후의 저항을 시도했으나 다음날까지 계속된 미군의 맹렬한 공중폭격과 과감한 지상공격에 지리멸렬, 간신히 살아남은 적병은 낙동강 西岸의 宜寧(의령) 방면으로 퇴각했다. 19일, 미 제24사단은 드디어 잔적을 소탕하고 낙동강돌출부를 회복했다. 이로써 서울을 함락시킨 직후 김일성이로부터 ‘서울근위사단’이라는 칭호를 받았던 북한군 제4사단은 궤멸했다.
호국의 高地 옆에 나부끼는 ‘통일일꾼’의 從北 강연회 플래카드
영산전투의 격전지는 낙동강 돌출부와 5번 국도 사이에 펼쳐져 있다. 필자는 함안군 칠서면에서 5번국도를 타고 낙동대교를 건너 영산면에 진입했다. 영산은 6·25 때 邑(읍)이었지만, 그 후 인구가 줄어 이제는 面으로 되어 있다. ‘영산호국공원’부터 찾아갔다. 호국공원 앞 좁은 샛강인 南川 위에 조선 正祖 때(1780년) 영산 백성들이 만든 무지개다리인 萬年橋(만년교)가 걸려 있다. 아담하고 소박하지만, 그 위로 걷기가 죄송한 보물 제564호이다. 이번 봄에는 다리 양쪽에 개나리·철죽 벚꽃이 한꺼번에 피어 수면 위의 무지개다리, 물속의 무지개 그림자와 어우러져 한 폭의 수채화처럼 가슴에 와 닿았다.
靈山舊邑(영산구읍)의 만년교는 漢陽(한양)-東萊(동래) 간 嶺南大路(영남대로)의 右路(우로), 즉 추풍령-星州(성주)-昌寧(창녕) 등지를 경유하는 도로 상의 교량이었다. 영남대로는 통일신라 이후 조선왕조 때까지 우리 역사상 가장 중요한 도로 중 하나였다.
만년교를 건너 호국공원을 들어가 임진왜란 호국충혼탑과 3·1운동기념비에 참배했다. 그런데 ‘6·25 전적비’가 보이지 않았다. 마침 이곳에서 만난 촌로가 전적비는 공원 동쪽 가파른 고지(235m) 위에 있다고 손가락으로 가리켜 주었다. 이 촌로의 회고에 따르면 ‘이 평지에 돌출한 235고지의 기슭에는 감나무가 많이 자라나 있었는데, 미군의 포격에 의해 四肢(사지)가 찢어진 적군의 시체가 감나무 위에 무수히 널브러져 있었다”고 한다.
235고지에 오르면 釜谷(부곡)온천지-密陽(밀양)으로 연결되는 도로, 그리고 창녕읍으로 달리는 5번국도가 손바닥 안처럼 빤히 내려다 보인다. 밀양·三浪津(삼랑진)은 경부선 기차가 경유하는 주요 역이다. 적이 만약 밀양이나 삼랑진을 점령했다면 부산교두보는 남북으로 두 동강이 나버리게 되어 있었다.
부곡 쪽으로 답사하기 위해 235고지(남산)을 내려와 79번 국도로 향했다. 그 진입로에 수상한 플래카드 하나가 나붙어 있었다. 거기엔 “창녕이 낳은 통일일꾼 강정구 교수의 국제정세와 한반도의 선택과 평화협정 강연회”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통일일꾼’ ‘평화협정’ 따위는 시대에 가장 뒤떨어진 從北(종북)들의 상투어이다.
79번 국도는 이제 6차선 고속화 도로가 되어 자동차들이 무서운 속도로 달린다. 원앙고개(100m)를 넘어 부곡온천지까지 갔다가 되돌아와 5번 국도를 타고 창녕읍에 닿았다. 북한군 제4사단· 제9사단이 궤멸한 창녕·영산 지구를 일주하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창녕읍까지 와서 ‘신라 眞興王 拓境碑(진흥왕 척경비)’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창녕읍사무소와 창녕경찰서 바로 뒤 만옥정 공원에 가면 진흥왕 척경비가 있다.
서기 561년, 진흥왕은 새로이 영토로 편입된 比火伽倻(비화가야)의 터전인 이곳 창녕까지 몸소 행차하여 확대된 영토에 대한 새로운 정책을 신하들 앞에서 선포했다. 이 사실을 돌에 새긴 것이 척경비다. 서울의 北漢山碑(북한산비), 함경남도의 마운령비· 황초령비와 더불어 진흥왕의 4대 巡狩碑(순수비) 중 하나이다. 순수비는 모두 험준한 군사요새지에 서 있다. 比斯伐(비사벌)이라고도 불렸던 창녕의 경우 신라가 낙동강 서쪽의 평야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전진기지였다. 신라는 한강과 낙동강의 富(부)를 차지함으로써 삼국통일의 길로 나아갈 수 있었다.
진흥왕 척경비 앞에서 사진을 찍으면 그 배경으로 잡히는 것이 火旺山(화왕산·757m)이다. 화왕산성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郭再祐(곽재우)가 웅거했던 곳이다. 곽재우는 임진왜란 때 적의 병참로를 차단함으로써 북상한 왜군을 굶주려 패퇴하게 만든 南溟(남명)학파 제1의 병법가였다. 남명의 원래 뜻은 ‘남쪽에 있는 큰 바위’이지만, 여기서는 무학을 숭상하여 칼을 차고 제자를 가르친 대학자 曺植(조식)의 아호이다.
백절불굴의 투혼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것이니…
창녕읍에서 1080번 지방도로를 6km 쯤 西進(서진)하다보면 우포늪을 만나게 된다. 국내 최대 규모의 천연늪으로 1억 4000만 년 전의 自然(자연) 늪이 그대로 간직되어 있는데, 현재 360여종의 희귀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는 生態寶庫(생태보고)이다. 이곳 소목에 올라 우포늪을 조망했다. 우포늪을 뒤로 하고 다시 1080번 지방도로로 3km 달려 梨房面(이방면)에 이르면 1080번 지방도로가 끝난다. 여기서 67번 지방도로를 타고 낙동강변으로 5km쯤 내려오면 陜川郡(합천군)으로 건너가는 赤布橋(적포교)가 걸려 있다. 이곳 兩岸(양안) 일대가 모두 낙동강 방어전 당시의 격전지다.
적포교를 건너면 합천군 靑德面(청덕면) 적포3거리. 여기서 20번 국도를 타고 서남쪽으로 10km 쯤 내려가면 낙동강 돌출부 점령에 命運(명운)을 걸었던 북한군 제4사단과 제9사단의 사령부가 들어섰던 의령군 富林面(부림면) 新反里(신반리)이고, 낙동강 西岸(서안)의 이름없는 좁은 길을 따라 18km 쯤 남진하면 의령과 창녕을 잇는 박진교에 와 닿는다.
박진교를 건너면 바로 낙동강 돌출부인 창녕군의 대곡리. 강가의 무명고지에 ‘박진지구 전적비’가 세워 있다. 이곳은 1950년 여름 두 차례의 혈전 끝에 적의 공세를 막아낸 피의 전적지이다. 비문에는 “이곳에서 미 제24사단, 제2사단, 그리고 해병 제5연대가 보여준 百折不屈(백절불굴)의 투혼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것이니…”라고 쓰여 있다. 다음은 ‘박진전투기’ 碑文(비문)의 발췌이다.
<(전략) 이곳 박진지역은 부산을 점령하기 위해 낙동강을 도하하여 최후의 공세를 벌이던 적과 미군이 2주간 사투를 벌였던 현장이다.
당시 북한군 최정예 부대인 제4사단이 8월5일 야간에 나루터를 이용, 은밀히 기습 침투함으로 강변을 방어하고 있던 미군과 치열한 전투 끝에 8월11일에는 영산읍까지 침공했다. 북한군은 일거에 부산을 함락시키기 위해 박진나루터에 가마니 등으로 水中橋(수중교)를 만들고 각종 차량과 병력 등 주력을 침투시킴으로써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기에 처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