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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야고보서의 말씀 3,1-10>
1 나의 형제 여러분,
많은 사람이 교사가 되려고 하지는 마십시오.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2 우리는 모두 많은 실수를 저지릅니다.
누가 말을 하면서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면, 그는 자기의 온몸을 다스릴 수 있는 완전한 사람입니다.
3 말의 입에 재갈을 물려 복종하게 만들면, 그 온몸을 조종할 수 있습니다.
4 그리고 배를 보십시오.
배가 아무리 크고 또 거센 바람에 떠밀려도, 키잡이의 의도에 따라 아주 작은 키로 조종됩니다.
5 이와 마찬가지로 혀도 작은 지체에 지나지 않지만 큰일을 한다고 자랑합니다.
아주 작은 불이 얼마나 큰 수풀을 태워 버리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6 혀도 불입니다.
또 불의의 세계입니다.
이러한 혀가 우리의 지체 가운데에 들어앉아 온몸을 더럽히고 인생행로를 불태우며, 그 자체도 지옥 불로 타오르고 있습니다.
7 온갖 들짐승과 날짐승과 길짐승과 바다 생물이 인류의 손에 길들여질 수 있으며 또 길들여져 왔습니다.
8 그러나 사람의 혀는 아무도 길들일 수 없습니다.
혀는 쉴 사이 없이 움직이는 악한 것으로, 사람을 죽이는 독이 가득합니다.
9 우리는 이 혀로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미하기도 하고, 또 이 혀로 하느님과 비슷하게 창조된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10 같은 입에서 찬미와 저주가 나오는 것입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이래서는 안 됩니다.
✠ 복음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9,2-13>
그때에
2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3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4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5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6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7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8 그 순간 그들이 둘러보자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다.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10 그들은 이 말씀을 지켰다.
그러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
11 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 학자들은 어째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하고 물었다.
12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과연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는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많은 고난과 멸시를 받으리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이겠느냐?
13 사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엘리야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제멋대로 다루었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오늘 복음은 장차 있을 예수님의 영광된 모습을 미리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수난을 앞두고 예루살렘으로 떠나기 직전에 세 제자와 함께 산에 오르시어 기도하던 중에 변모를 이루셨습니다.
그런데 변모하신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시는데, “구름이 일더니 그들을 덮었습니다.”(마르 9,7)
이 구름에 대해 암브로시우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구름은 빗물이 되어 우리를 적시거나 비바람을 쏟는 검은 구름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느님의 음성에서 비롯하는 믿음의 이슬로 사람의 마음을 적시는 빛나는 구름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변화를 이루시는 거룩한 영이 그들을 덮었습니다.
이토록 우리도 변화의 힘을 입었습니다.
이미 그 힘을 입었기에 우리는 변화될 것입니다.
마치 구름이 시나이 산을 덮고서 모세를 영광된 모습으로 변화시켰듯이 말입니다(탈출 24,15-16).
그렇게 구름이 그들을 덮었습니다.
그것은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마리아를 덮었을 때처럼 우리를 덮습니다.
주님의 천사가 마리아에게 말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루카 1,35)
이토록 우리도 이미 하느님의 힘에 덮인 이들입니다.
이미 빛나는 믿음의 구름에 덮인 이들입니다.
아버지의 그 크신 자비의 구름에 덮인 이들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단지 그 힘만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더하여 더 큰 선물을 선사하십니다.
이제 그 영광된 모습으로 변화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그것을 뒤덮은 구름 속에서 울려오는 음성으로 가르쳐주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
이는 단지 아들의 신원을 밝혀주신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변화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십니다.
곧 그분 앞에서 “그분의 말씀을 들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내가 있어야 할 곳은 그 분 앞에, 말씀 아래에 머무는 일입니다.
들려오는 말씀이 내 안에서 성취도록 말씀께 승복하는 일입니다.
말씀께서 나를 맘껏 쪼물딱거릴 수 있도록 말씀께 자신을 허용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초막이 되어 드리는 일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그야말로 말씀이 이루어져야 할 공간이요 장소로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오로가 말한 것처럼, ‘이 건물(초막)은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나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게 됩니다.’(에페 21-22 참조).
그것은 말씀의 힘을 수락하는 일이요, 변화의 힘이신 말씀께 자신을 건네 드리는 일입니다.
자신이 아니라 말씀을 주인 되시게 해 드리는 일이요, 주님을 주님 되시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변모할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처럼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의 모습으로 바뀌어 갈 것입니다.”(2코린 3,18)
오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진정 변모되기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내 아들의 말을 들어라!
진정 거룩해지기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그의 말을 믿어라!
하느님 되기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그의 말에 순명하라.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마르 9,7)
주님!
말씀 아래에 머물게 하소서.
말씀께 제 자신을 건네 드리게 하소서.
맘껏 쪼물딱거릴 수 있도록 제 자신을 허용하게 하소서.
말씀이 제 안에서 성취되도록 저를 승복하게 하소서.
제 자신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세치 혀로>
믿음의 실천을 얘기하는 야고보서는 이제 혀를 잘 다스려야 함을 얘기합니다.
"혀는 쉴 사이 없이 움직이는 악한 것으로, 사람을 죽이는 독이 가득합니다."
(야고보서 3,8)
우리말에도 말을 잘해야 함을 얘기하는 뜻으로 말 한마디에 원수도 되고 천량빚도 갚는다고도 하고, 혀를 굳이 '세치 혀'라고 하여 혀의 짧음을 얘기하며, 그러나 그 세치 혀로 큰일을 내기도 하고 이루기도 하니 세치 혓바닥을 잘 놀려야 한다고 얘기하고는 하지요.
그런가하면 중국말엔 '口是禍之門 舌是斬身刀 閉口深藏舌 安身處處宇'라는 말이 있는데, 입은 재앙이 들어오는 문이고 혀는 제 몸을 베는 칼이기에 입을 닫고 혀를 깊이 감추어 두면 가는 곳마다 몸이 편안하리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혀는 세치밖에 안 되지만 그 위력이 대단하여 우리는 세치 혀로 한 사람에게 치명상을 입히기도 하고, 뒷담화로 한 사람을 매도하거나 매장하기도 하며, 감언이설로 남을 속이거나 이간질로 공동체가 쪼개지게도 하고, 다된 밥에 코빠트리듯 기껏 잘해놓고 말 한마디에 일을 망치기도 합니다.
그래서 말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입단속을 잘해야 한다고 하는데, 제 생각에 말 실수라는 것이 단순히 입이나 혀의 실수가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의식의 표출이고 그의 됨됨이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기에 고작 입과 혀를 단속한다고 될 문제가 아닙니다.
본래 단속이라는 말이 새나가거나 흐트러지지 않도록 묶는다는 뜻인데, 그러므로 혀를 묶을 것이 아니라 바른 생각이나 의식이 안에 차게 하고, 더 근본적으로는 올바른 정신을 차린 다음 흐트러지지 않게 해야겠지요.
그것은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오기 때문이며, 안에 있는 것은 아무리 단속해도 새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안을 무엇으로 채우고 존재를 어떻게 갖추느냐가 중요합니다.
안이 미움과 악과 독과 썩어빠진 정신으로 가득차 있는 사람은 무엇을 먹어도 남을 해치는 독을 뿜어내는 뱀처럼
독설과 저주와 감언이설과 온갖 쓰레기같은 말을 쏟아내겠지요.
그러나 안이 사랑과 선과 거룩한 정신으로 가득차 있는 사람은 무엇을 먹어도 남에게 이로운 젖을 주는 소처럼
위로의 말, 격려의 말, 치유의 말, 올바른 말, 칭찬의 말, 감사의 말, 축복의 말, 일치의 말로 한 개인과 공동체를 살릴 것이고, 하느님께는 찬미와 감사와 흠숭의 기도를 바쳐드릴 것입니다.
"우리는 이 혀로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미하기도 하고, 또 하느님과 비슷하게 창조된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같은 입에서 찬미와 저주가 나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3,9)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약속된 미래를 희망하라>
살아가면서 과거에 연연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는 좋은 일이든 그렇지 않은 일이든 이미 지난 일입니다.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그를 교훈 삼아 오늘을 살아야지 거기에 매여 있으면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선물로 주어진 오늘을 살아갑니다.
물론 오늘의 어려움이 없었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도 있지만 오늘의 기쁨을 즐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이 아무리 좋아도 좋은 이 순간은 이미 지나가고 있습니다.
과거에 묻히고 맙니다.
그러므로 오늘을 견디고 즐기되 앞을 볼 줄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미래를 살아갑니다.
아직 오지 않은 신비의 세계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삽니다.
그런 사람은 지금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하기 때문에 수고와 땀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허황된 꿈으로 말미암아 희망이 절벽인 사람도 있습니다.
따라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연계성을 올바로 인식해야 하겠습니다.
오상의 비오신부님은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미래는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고, 오늘을 사랑으로 살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에게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마르 9,5)하고 말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왜 초막을 만들고 싶어 하였을까요?
지금 순간이 너무도 좋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는 체험하지 못하였던 황홀함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모습을 보여주신 것은 당신의 수난을 앞두고 당신의 진면목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잘 견디라는 위로입니다.
사실 제자들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미래를 희망하며 사는 사람이요, 약속된 미래가 있었기에 목숨을 걸고 주님의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께 대한 좋은 기억을 가지고 ‘거기에 머물렀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좋은 순간이라고 거기에 안주해서도 안 되겠지만 성경이나 신심서적을 읽으면서 느꼈던 마음, 성체조배를 하거나 성체를 모시면서 지녔던 귀한 마음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하는 데 힘이 되어야 합니다.
등산을 하면서 산에 대한 아름다움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정상에 오른 사람과 오르지 않은 사람이 분명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의 체험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기도하면서 얻은 좋은 기억과 체험이 신앙생활에 활력소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헛된 환상을 추구하지는 마십시오.
기도하는데 촛불이 변하였다든지 성모님 얼굴이 나타났다든지…그래서 다음에 기도할 때는 그 이상한 현상이 또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어리석음에 빠져 마음을 집중하지 못하고 분심에 빠져 기도 아닌 기도를 한다면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부활의 영광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우리도 부활의 영광을 희망하는 만큼, 이 지상에서 이미 부활의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부활은 미래의 일이지만 오늘 여기서 미래를 살지 않으면 영광의 미래는 없습니다.
오늘 여기서 미래를 희망하고 살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필리 1,29)
이제 영광의 특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변모할 수 없을까?: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높은 산에 오르시어 당신의 모습이 변모하시는 내용입니다.
이 변모의 핵심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야기의 흐름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처음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이 누구라고 여기느냐고 묻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셔야 한다는 말씀을 하실 때 베드로는 그러면 안 된다고 해서 사탄이라고 혼쭐이 납니다.
그러시며 목숨을 구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복음 때문에 목숨을 버리는 사람은 다시 얻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가 되는 데 필요한 것은 복음을 위한 십자가 죽음입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주제는 ‘하느님의 나라’로 바뀝니다.
예수님은 그곳에 있는 사람 중에 하느님의 나라를 볼 사람이 있을 것이라 하십니다.
그러며 오늘 변모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변모는 하느님 나라가 되시기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거쳐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되는 것이 인간의 모습에서 하느님의 모습으로 변모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느님 나라가 될 수 없고 변모할 수 없을까요?
당연히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는 이유는 바로 모세와 엘리야를 당신 제자들에게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베드로는 천막 셋을 짓겠다고 말하는데, 이는 삼위일체의 구원 신비를 나타냅니다.
혼자 세상을 창조하시거나 혼자 구원하실 수 없습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마치 모세와 엘리야처럼 양손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모세는 율법을 주었기에 진리인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엘리야는 하늘에서 불, 곧 은총을 불러 내리고 그 불에 휩싸여 하늘로 갔기에 성령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오늘 그리스도께서 마치 아버지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은총과 진리를 제자들에게 쏟아 부어주시는 삼위일체 상징을 보는 것입니다.
내 안에 이 삼위일체 신비가 이루어질 때 내가 하느님의 나라가 되고 하느님의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기적은 당신 안에 있습니다』는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 재활학과 의사인 이승복 씨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여덟 살 때 부모님을 따라 미국에 이민을 와서 열한 살 때부터 배운 기계체조로 모국에 대한 그리움을 극복하고 있었습니다.
매우 놀라운 속도로 기량이 향상되어 올림픽 금메달을 바라볼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고난도 기술을 연습하다 턱이 먼저 바닥에 떨어져 척추 신경조직이 손상되어 사지 마비라는 죽음과도 같은 선언을 받습니다.
그는 9개월 동안 병원에서 겨우 손가락 구부리는 훈련만 받았습니다.
재활 훈련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인생의 꿈이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한 선교사가 “하느님은 각자의 사람에게 각자에게 맞는 계획을 세우고 계십니다”라고 하는 말을 듣습니다.
그는 “이 시련도 그 계획의 일부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겨낼 수 없는 시련은 주시지 않습니다”라고 말해줍니다.
분명 그에게서 말뿐이 아닌 진심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는 ‘그렇다면, 지금 주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은?’이란 생각을 품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돕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습니다.
‘그래, 이 시련은 나와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을 도우라고 주님께서 주신 메시지야. 나는 의사가 되어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돕겠어!’
부모님은 그런 몸으로 어떻게 의사가 되겠냐며 말렸지만 그의 확신은 누구도 꺾을 수 없었습니다.
휠체어를 타고 몇 개만 움직일 수 있는 손가락으로 끊임없이 재활을 병행하며 그는 다트머스 의대를 수석으로 졸업합니다.
하버드 의대의 인턴과정도 수석으로 마치고 미국 최고의 존스홉킨스대 병원 재활의학과 수석 전문의가 됩니다.
그는 의사가 되어 겨우 눈만 깜빡일 수 있는 절망적인 아이에게 자신이 터득한 진리를 이렇게 나눕니다.
“너 내가 휠체어에 있는 것 보이지?
나는 체조 선수였어.
예전에 한국 대표로 세계에서 뛰었어.
올림픽을 위해 연습하다가 넘어져서 목이 부러졌어.
그렇다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못 하고 그러고 싶진 않았어.
나는 너 같은 사람들을 돕고 싶어.
그래서 내가 네 앞에 있는 거야.
너도 똑같이 할 수 있어.
하느님과 널 사랑해주는 가족과 많은 사람이 네 곁에 있고 세상에서 제일 좋은 의사 선생님들이 너를 돕고 있어.
계속 믿음을 가지고 열심히 해나가자. 알았지?”
오늘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당신 죽음으로 터득한 십자가 진리를 모세라는 상징으로 제자들에게 보여주는 것과 같습니다.
진리는 먼저 죽지 않았다면 나올 수 없는 진실입니다.
이승복 씨가 먼저 그 고통의 길을 가지 않았다면 그가 하는 힘내라는 말은 진리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도 먼저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셨기 때문에 당신이 말씀하시는 십자가의 길이 우리에게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한 번은 꽃게를 생으로 무쳐 먹었다가 식중독에 걸려 간 이식 수술을 받고 왼쪽 다리까지 잘라내어 절망에 빠져있던 한 한국인 아주머니를 만납니다.
김치를 조금만 먹으면 속이 시원해질 것 같겠다는 그 아주머니의 말 한마디에 다음날 어머님께 부탁한 김치볶음밥을 도시락으로 싸 와서 아주머니에게 전달해 줍니다.
아주머니는 이렇게 말합니다.
“수술 이후로 ‘어떻게 하면 빨리 죽어버릴까?’ 그 생각만 했는데, 김치볶음밥을 먹고 나니, 이 맛있는 걸 두고 내가 왜 죽나 하는 생각이 드네. 이제 안 죽을래요.
닥터 리도 휠체어 타고 이렇게 멋지게 살고 있는데, 나도 그렇게 살아봐야지!”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환하게 웃었습니다.
몇 주 후 아주머니는 한쪽 다리에 의족을 하고 씩씩하게 퇴원했습니다.
퇴원하는 날 아주머니는 닥터 리를 찾아와서 어머니께 갖다 드리라며 찹쌀떡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닥터 리가 내어준 은총입니다.
은총은 죽어서 흘려주는 피와 같습니다.
그는 굳이 어머니를 괴롭히며 김치볶음밥을 얻어냅니다.
그리고 그것을 꼭 필요한 누군가에게 내어줍니다.
그 안에 담긴 것은 사랑입니다.
마치 엘리야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준 것과 같습니다.
사랑과 결합하지 않는다면 어떤 말이 진리라고 할지라도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합니다.
이런 면에서 십자가의 길로 나아가시는 예수님의 변모는 곧 아버지의 모습을 닮아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당신과 성령으로 우리를 구하시는 것처럼 이제 당신이 아버지의 모습으로 모세와 엘리야를 통해 우리를 살리십니다.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나왔는데, 피는 예수님의 살과 함께 진리를 상징하고 물은 성령의 은총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모두가 죽어서 옆구리가 찔려야만 나오는 창조의 두 은총입니다.
우리는 은총에 은총을 입어야만 재창조됩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하는데,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빛나게 하는 일은 아버지의 일이 옳았음을 증명해내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내가 아버지처럼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은총과 진리를 흘려보내 주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아버지의 명예가 회복됩니다.
그리고 나의 변모는 그런 삶을 살았을 때 주님께서 부활시켜 주실 때 완성됩니다.
그럼으로써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까지 이 모든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신 것입니다.
오늘 하필 왜 세 명을 데리고 올라가셨을까요?
그들이 또한 아버지와 아드님과 성령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사도 중 첫 순교자입니다.
아버지의 첫 피 흘림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복음을 쓴 사람입니다.
아버지의 피 흘림으로 오시는 진리를 상징합니다.
베드로는 하느님 나라 열쇠, 곧 죄를 용서하는 권한인 성령을 상징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이 세 명이 또한 삼위일체 신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도 십자가의 신비로 은총과 진리를 내어주어 변모를 기다리는 신비를 살아갑시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제 특기는 상처받는 것입니다. 제 취미는 그 상처를 극복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마르코 복음 9장 2~3절)
타볼 산 위에서 제자들이 목격한 예수님의 변모 사건을 묵상하며, 오늘 우리에게도 그러한 변모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합니다.
그냥 변모가 아니라 예수님처럼 ‘거룩한 변모’입니다.
변모, 변화, 성장과도 같은 부담스런 개념 앞에 우리는 너무나 쉽게, 그리고 빨리 포기합니다.
뿐만 아니라 지극히 회의적이고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원판불변의 법칙’을 굳게 믿으며, 인간은 죽었다 깨어나지 않는 이상 안 바뀐다고 부르짖으며, 자신은 물론 이웃들의 변화, 교회와 세상의 변혁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합니다.
이런 우리 앞에 예수님의 생애는 참으로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는 평생토록 변모, 변화, 성장, 이동을 위한 노력을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공생활 기간 내내 절대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않으시고, 떠나고 또 떠나셨습니다.
권능에서 무능으로. 강함에서 약함으로, 창조주에서 피조물로, 위대함에서 작음으로, 자립에서 종속으로, 이러한 하느님의 이동은 아들 예수님의 이 세상 육화강생을 통해서 결정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한계와 제약을 지닌 나약한 인간인지라, 쉽게 우리 자신에게 씌워진 굴레를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마치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열심히 움직이지만, 늘 제자리를 맴돌고 있습니다.
상처와 고통을 온몸에 지고 말입니다.
어느 영화 명대사가 오래도록 제 마음에 남아있습니다.
“제 특기는 상처받는 것입니다. 제 취미는 그 상처를 극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지상에 두 발을 딛고 사는 이상 어쩔 수 없이 안고 가는 갖은 상처와 고통, 좌절과 실망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변화와 성장, 또 다른 한 걸음 내딛기를 결코 포기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거룩한 변모는 그 사건 자체를 뛰어넘어 마지막 부활을 향하여 나아감을 상징적으로 가리킵니다.
그때에는 하늘나라에서 정화된 신자들이 눈처럼 하얗게 될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의 옷인 교회를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에서 깨끗하게 해주시고 더 나아가 영원한 축복과 육과 영의 빛으로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존자 베다)
- 살레시오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늘 새로운 삶의 시작 - 끝은 시작이다>
어제로서 4박5일의 제주도 성지 순례 여정은 끝났고 오늘 2월19일부터는 또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끝은 시작입니다.
어제 순례 여정 끝날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강정마을 평화센터를 떠나기 전 예정에 없던 그 유명한 민주투사로서 명망을 떨쳤던 문규현 신부의 형인 문정현 신부를 만났습니다.
1940년생 83세 백발의 머리에 하얀 긴 수염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우렁찬 목소리에 쾌활하고 순수한 청년처럼 느껴지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라 즉시 함께 사진도 찍었습니다.
소문에 듣던 바와는 달리 강인하면서도 45각도로 인사할 만큼 부드럽고 겸손한 분이었습니다.
귀한 손님인 수도자들이 왔다고 참 반가워하였습니다.
이어 오전 순교복자 수도회 면형의 집에 잠시 들렸습니다.
뒤에 병풍처럼 한라산을 배경으로 한 수도원이었고 안내한 강홍림 사도 요한 형제는 여기가 제주도에서 최고의 명당이라 극찬했습니다.
인상적인 것은 약 250년 수령의 한국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나무로 추정되는 거대한 녹나무였습니다.
척박한 땅이나 바위틈에서도 잘 자라는 녹나무는 제주도민의 기질과 신앙을 닮았다 했습니다.
이어 성전에서 본 제주도 천연의 바위 제단이 신비로웠습니다.
눈덮인 설경을 배경으로 한 한라산을 드라이브 하며 한라산을 감상했습니다.
입춘을 지난 제주도에서 눈덮힌 잡목 우거진 한라산의 설경이 참 정답게 느껴졌습니다.
제주도 중심에서 사방으로 넓게 완만한 경사로 펼쳐진 거대하게 자리잡고 있는 한라산(해발1947m, 불암산508m)은 남한에서 제일 높은 산이라는 가이드의 설명이었습니다.
한라산을 감상으로 4박5일의 순례 여정을 끝내고 무사히 수도원에 귀원했고, 하느님께서 함께 해 주셨음에 감사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산위에서의 영광스러운 변모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 도상에서 최측근 제자들인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따로 데리고 산에 오르시어 특별 피정 지도를 하십니다.
당신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부활의 영광을 앞당겨 체험케 하심으로 사기를 붇돋워 주심을 의도했음이 분명합니다.
흡사 4박5일의 제주도 성지 순례 피정 분위기와 흡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제주도 순례 피정이 좋다해도 평생 머물수는 없고 내 삶의 제자리로 돌아와야 하듯 제자들 역시 예수님의 변모 신비 체험에 집착하지 않고 십자가의 길, 제자리로 돌아왔어야 했지만 베드로는 순간 착각하여 이에 집착했음이 분명합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의 간청에 앞서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눴다는 장면에서 ‘아. 예수님은 시공을 초월하여 이분들과 영적친교를 나누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실 베네딕도 16세 교황도 성 아우구스티누와 성 보나벤투라를 스승으로 모시고 영적 친교중에 산다는 내용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습니다.
잠시 뜻밖의 황홀한 신비 체험에 흥분한 베드로에게 천상에서 들려 오는 하느님의 음성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다시 십자가의 길, 제자리로 돌아가 주님 말씀에 순종하며 새롭게 살라는 말씀이겠습니다.
예수님은 물론 나머지 세 제자들은 분명 하느님의 특별 은총으로 산상에서 신비로운 부활의 영광을 앞당겨 체험함으로 용기백배했을 것입니다.
이런 피정을 통한 신비 체험이,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 신비 은총이 우리를 알게 모르게 정화하고 성화합니다.
특히 수도원 입회 후 40년만에 처음이었던 이번 수도형제들과 함께 한 제주도 성지 순례 여정 피정 은총은 알게 모르게 수도 공동체를 정화하고 성화했음을 믿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이 우리의 모든 수행을 통한 주님의 정화은총, 성화은총이요, 이런 은총이 우리의 말도 글도 행동도 습관도 공동체도 정화하고 성화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야고보 사도의 말조심, 혀의 절도에 대한 열렬한 말씀이 깊은 울림을 줍니다.
“누가 말을 하면서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면, 그는 자기의 온몸을 다스릴 수 있는 완전한 사람입니다.
말의 입에 재갈을 물려 복종하게 만들면, 그 온몸을 조종할 수 있습니다.
혀도 불입니다.
혀가 우리의 지체 가운데에 들어앉아 온몸을 더럽히고 인생행로를 불태우며, 그 자체도 지옥 불로 타오르고 있습니다.
사람의 혀는 아무도 길들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혀로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미하기도 하고, 또 이 혀로 하느님과 비슷하게 창조된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같은 입에서 찬미와 저주가 나오는 것입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이래서는 안됩니다.”
이래서 혀끝, 손끝을 조심하라는 말도 있습니다.
혀를 다스려 말 잘 하기는 얼마나 힘든지요!
이래서 아가톤 사막교부는 침묵을 배우기 위해 3년동안 입에 재갈을 물고 살았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마음이 좋아야 말도 글도 행동도 좋습니다.
혀의 말에 앞서 우선적인 것이 마음의 정화와 성화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말씀을 사랑하여 맛들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요!
주님 말씀을 사랑하여 맛들일수록 우리 마음과 말의 정화와 성화도 저절로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매일의 미사 신비 은총으로 우리의 마음을 정화하시고 성화하시어 우리 모두 깨끗하고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다음 화답송 시편 말씀이 적절하고 은혜롭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순수한 말씀, 흙도가니 속에서, 일곱 번이나 정제된 순은이어라.
주님, 당신이 저희를 지켜 주시고, 이세대로부터 영원히 보호하소서.”
(시편 12,7-8)
아멘.
- 성 베네딕토회 성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마르 9,5)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며 때론 천국체험도 하고, 때론 연옥체험도 하고, 때론 지옥체험도 합니다.
제가 수도원에 들어와서 첫 한두 해는 그야말로 천국이었습니다.
너무 좋아서 정말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수련기부터 가끔씩 연옥이 보이기 시작하더라구요.
유기서원기가 되니 그 연옥이 더 자주 보이더니, 급기야 종신서원을 하고나서는 연옥만이 아니라 가끔씩 지옥체험도 하게 되더군요.
하지만 이 수도여정을 계속할 수 있음은 여전히 그 때의 천국체험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겠지요.
오늘 예수님은 애제자 셋에게 타볼산에서 천국체험을 하게 해주십니다.
그곳에서 마냥 머물고 싶은 게 그들의 바램이겠지만 그들은 연옥과 지옥이 뒤범벅된 삶의 현장, 수고와 수난이 점철된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만 하지요.
예수님께서 오늘 이런 영광스러운 천국체험을 하게 해 주신 것은 미구에 스승을 잃게 되는 지옥체험을 하게 될 때 이 천국체험을 기억하여 믿음을 잃지 않고 항구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시켜 주심이겠지요.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이 험난하고 어려운 인생여정, 수도여정이지만 언젠가 우리가 체험했던 그 잊지못할 천국체험 때문에 믿음 가운데 한 발자국 발자국 걸어가게 되지요.
우리가 한적한 피정의 집에 머물며 세상걱정 잊어버리고 하느님 말씀을 듣고 묵상하고 성체 앞에서 기도하다보면, 매일 이렇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또 아주 오랜만에 특별한 기회를 얻어서 멋진 해외여행을 하면서 맛갈진 음식과 잘꾸며진 호텔에서 귀빈 대접을 받게 되면, 평생 이렇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짧은 경험은 우리가 누리게 될 천국의 맛뵈기 체험일 뿐입니다.
현실로 돌아와서 일상의 희로애락을 열심히, 치열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아무리 삶이 고달프고 힘들어도 우리가 잠시 경험한 그 하늘나라 체험이 우리를 꿋꿋이 살게 해 줍니다.
실제로 이 타볼산 체험은 제자들로 하여금 산을 내려와 열심히 십자가의 희생을 감내하도록 해준 동력이었답니다.
오늘 벗님 여러분은 언제 이런 타볼산의 천국 비슷한 체험을 하였던가 한번 떠올려보십시오.
자, 이제 오늘 말씀 안으로 한걸음 더 들어가 볼까요?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종종 몇몇 제자만 데리고 다니실 때가 있는데 이번에도 애제자, 즉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십니다."(마르 9,2)
그 선택의 기준에 대해서 동행하는 이들이나 뒤에 남는 이들이 충분히 이해하고 잡음 없이 받아들이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가끔 누가 가장 높으냐의 문제로 말다툼을 하거나(마르 9,33-37 참조) 다른 제자의 미래도 알고 싶어 슬쩍 질문을 던지는 모습(요한 21,21 참조)을 보면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랑 받고 싶은 욕구와 시기 질투 경쟁심은 대동소이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꼭 편애나 차별 불평등은 아닐 겁니다.
어제 복음에서 보았듯 우리가 각자의 삶에서 인격적으로 만나고 체험한 하느님의 이름은 온 세상에 존재했고 존재하고 존재할 영혼의 수만큼 다양한 것이기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하실 때에도 각 사람에게 맞는 거리와 자리를 존중하신 배려라고 보여집니다.
이번에는 아마도 미래적으로 제자들 중에서도 당신의 죽음 이후에 다른 이들에게 힘이 되어주고 더 희생해야 할 그런 믿음직한 제자들만 데리고 가신 것은 아닐까 생각됩니다.
다른 제자들을 못믿어워하거나 차별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져야할 십자가의 무게를 쓰러지지 않을 정도로만 지워주시려는 자애깊은 배려는 아니었을까 느껴집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마르 9,7)
지금 이곳에 삼위 하느님께서 함께하십니다.
소리로 당신을 드러내신 성부 하느님과 그들을 덮은 구름으로 현존하시는 성령, 그리고 예수님.
삼위일체 하느님의 영광스런 현존의 자리에서 제자들은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시나이 계약 때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목소리를 두려워하여 직접 듣기를 피했었지요.(탈출 20,19 참조)
이 말씀 내용에 머무르다 보면, 거기 담긴 하느님 아버지 마음이 얼마나 자상하고 자부심 가득한지 느끼게 됩니다.
당신과 아드님의 사랑 관계를 먼저 밝히시고, 당신의 '말씀'이신 성자 예수님의 "말"을 들으라고 당부하십니다.
이 말씀은 어제 우리가 마태오의 증언을 통해 들은 베드로의 고백,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는 내용을 확증합니다.
베드로가 하느님의 영감으로 자신도 모르게 고백한 내용을 직접 하느님의 입을 통해 들은 것이니까요.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히브 11,1)라고 이야기합니다.
과연 믿음은 은총으로 주어지는 선물이지 인간 편에서 값을 지불하고 얻어낼 수 있는 대가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 믿음이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고 자라고 있는지 스스로 곰곰이 생각해 보면 느낄 겁니다.
믿음은 단순히 기분이나 감정이 아닙니다.
믿음은 존재적이고 인격적인 결단의 행위입니다.
믿음의 대상과 믿는 주체가 서로에게 동시에 갖는 바람이고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수난을 앞두고 세 제자는 예수님의 거룩하고 영광스런 모습을 마주합니다.
이는 그들의 나약한 믿음을 보증하고 확증해 주는 놀라운 신비 체험입니다.
그런데 이 체험은 믿음의 단계에서 이제 시작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오늘의 영광을 체험했으면서도 스승의 수난과 죽음 앞에서 갈팡질팡하게 될 겁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과정이니까요.
은총으로 씨뿌려진 토양 위에 우리가 들은 것, 배운 것, 머리로 아는 것, 몸으로 체험한 것, 그리고 영혼이 감지한 것, 이 모든 것 통합되어 가면서 믿음은 자라납니다.
흔들리면서 넘어지면서 커갑니다.
그러니 믿음을 두고 우리가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겸손만이 믿음을 보증할 것입니다.
아멘.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영화는 우리에게 감동을 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는 것은 영화를 통해서 삶의 또 다른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영화에는 멋진 장면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연인의 극적인 만남, 찬란히 떠오르는 태양, 거센 폭풍우를 헤쳐가나는 배, 비극적인 죽음, 안타까운 이별, 가슴이 벅차오르는 승리, 실패를 극복하고 얻는 성공, 친한 친구의 배신, 이웃을 위한 희생이 영상으로 전해집니다.
어릴 때 ‘혹성탈출’을 보았는데 바닷가에 잠긴 자유의 여신상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군대를 제대하고 보았던 ‘사랑과 영혼’도 기억납니다.
애틋한 사랑과 이별이 주인공의 눈빛에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명량’도 재미있었습니다.
마을을 모두 불태우고 죽으면 살리라며 배에 오르는 모습이 기억납니다.
‘7번방의 선물’도 진한 감동을 주었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교도소로 간 장애인 아버지와 어린 딸의 이야기였습니다.
저의 삶에도 영화 같은 장면이 몇 번 있었습니다.
어릴 때 길을 잃어버렸고, 파출소에서 하루 밤을 지냈었습니다.
다음 날 아버님께서 저를 찾아 오셨습니다.
그때는 몰랐지만 잃어버린 아들을 찾아온 아버지가 고마웠습니다.
잃어버린 아들 때문에 마음 졸이셨을 어머니께 미안했습니다.
동네 아이들과 연탄재 던지는 놀이를 하다가 눈가에 연탄재를 맞고 병원에 갔던 일도 있습니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처음으로 병원에 갔던 기억입니다.
하위권에 머물던 성적이 칭찬과 격려로 상위권으로 올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선생님들도 인정해 주셨고,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던 때였습니다.
신학교에 지원을 했고, 합격자 명단에 있는 저의 이름을 보았을 때입니다.
요즘은 인터넷으로 확인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학교에 가서 벽에 붙어있는 명단을 확인해야 했습니다.
10년간의 신학교 생활을 마치고 사제서품을 받았을 때도 기억납니다.
본당에서 첫 미사를 하였고, 31년 시간이 지났습니다.
여러분의 삶에도 영화 같은 순간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하루 그 날과 장소를 떠올려 보면 어떨까요?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마치 영화와 같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을 데리고 산으로 오르셨습니다.
산의 이름은 타볼 산입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의 모습은 거룩하게 변모하셨습니다.
구약의 위대한 예언자인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습니다.
저도 성지순례를 가면 타볼 산엘 오르곤 합니다.
분지 위에 우뚝 솟은 산입니다.
그곳에 주님의 거룩한 변모를 기념하는 성당이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얼마나 좋았으면 그곳에 천막을 3개 만들고 지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가 영광스러운 모습이라면 주님의 십자가는 고통의 순간들입니다.
세상의 죄를 대신해서 지고 가는 십자가입니다.
나의 허물과 잘못을 대신해서 지고 가는 십자가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조롱하였고, 침을 뱉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야유하였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안타까워하셨습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지고 갔습니다.
베로니카는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수건으로 닦아 드렸습니다.
지금 내 앞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다면 나는 어떤 모습일지 생각해 봅니다.
오늘 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말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사람을 죽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말은 천 냥 빚을 갚기도 하고, 우리의 말은 싸움을 부추기기도 합니다.
우리의 말은 용기와 위로를 주기고 하고, 우리의 말은 증오와 분노를 자아내기도 합니다.
오늘 하루, 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주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거룩한 선포가 되면 좋겠습니다.
“배가 아무리 크고 또 거센 바람에 떠밀려도, 키잡이의 의도에 따라 아주 작은 키로 조종됩니다.
우리는 이 혀로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미하기도 하고, 또 이 혀로 하느님과 비슷하게 창조된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같은 입에서 찬미와 저주가 나오는 것입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요즘 고등학교 다니는 남학생 중에는 이마에 여드름이 나면 학교가 아니라 피부 관리숍에 간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만큼 외모에 신경을 쓴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가 자신을 온전하게 볼 수 없습니다.
즉 일부러 거울을 보지 않는 한 자기를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결국 외모에 신경 쓰는 것은 모두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자기를 위해 피부를 가꾸고 멋진 옷을 입는다고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다시 말해 남을 위해서 하고 있을 뿐입니다.
군대에 있을 때, 또 신학교에서 기숙사 생활할 때 거의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남에게 보여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훨씬 자유롭게 살 수 있었습니다.
이타적인 사랑은 필요합니다.
그런데 단순히 보여주기 위한 사랑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보여주기만을 위한 것은 사랑인 척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짜 이타적인 사랑은 다른 사람의 시선보다 주님의 시선에 집중합니다.
사랑의 실천 자체에 기쁨을 얻지, 남의 평가에 기쁨을 얻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어떠하십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영광스러운 변모 장면을 보여주십니다.
이를 마르코 복음에서는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라고 전합니다.
태양과 빛의 찬란한 광채는 하느님의 현존을 반영하는 것으로,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 얼굴이 너무나 빛나서 사람들이 쳐다볼 수가 없었다는 기사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복음의 예수님 모습은 옷조차도 새하얗게 빛났다고 표현하면서 더 영광스러운 하느님의 광채가 빛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가득한 곳, 그런데 여기에 이스라엘이 가장 존경하는 모세와 엘리야도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베드로가 여기에 지내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예수님 왜 이 땅에 오셨는지를 잊은 것입니다.
인간 구원을 위해 오신 주님의 사명을 잊고, 그냥 영광 안에만 머무르시길 바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였던 세상에 대한 사랑을 완전히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개입하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마르 9,7)
예수님의 사랑은 편한 곳에 머무는 사랑이 아닙니다.
또 보여주기만을 위한 화려한 사랑도 아닙니다.
진짜 사랑은 그들을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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