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저우 아시안 게임과 남북한 스포츠 대결의 역사>
연휴 기간 아시안게임 남북대결을 가끔 보면서 여러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여자탁구복식에서 금메달을 딴 한국선수와 동메달리스트는 서로 기쁘게 인사하는데, 은메달은 딴 북한 선수와의 거리는 적대적이지는 않지만 멀어보였다.
농구가 끝난 후에도 상당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선수들은 성장을 하면서 국가정체성을 내재화하게 되고, 체제간의 관계에 상당한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스포츠는 비정치적이어야 한다고 하지만, 정치와 독립적일 수도 없다. 마침 지나가는 길에 <스포츠로 보는 동아시아사/다카시마 고 지음. 장완철 이화진 옮김 AK>가 눈에 띄었다.
이 책은 전쟁과 분단, 체제 대결로 얼룩진 남북 중국과 일본, 타이완의 대립과 연대가 어떻게 스포츠에 투영되었는가를 분석한 최초의 스포츠 통사이다.
이 중에서 남북의 스포츠 대결과 연대를 정리해보았다.
분단으로 갈라진 남과 북의 스포츠는 이산가족 이슈로 조명을 받았다.1964년 도쿄올림픽에서 신금단 부녀의 상봉 , 1971년 북한 스케이터 한필화 남매의 전화상봉은 국내외적으로 큰 관신을 끌었다.
1960년대 인도네시아, 중국을 중심으로 미국과 소련 중심의 올림픽 주도권에 반대하고, 일본 타이완 한국 필리핀이 주도하는 아시안게임에 반대하여 가네포(Games of the New Emerging Forces)가 만들어졌다.가네포는 스포츠와 정치가 분리된 것이라는 올림픽의 비정치주의가 위선적이며 실제로는 더 차별적이고 정치적이라고 비난했다. 1963년 자카르타에서 제1회 대회가 열렸는데 51개 국가와 지역에서 2,700여명의 선수단이 참가했다. 가네포는 헌장에서 ”우리 신흥세력의 인민은 스포츠가 인간과 민족을 형성하고, 국제적 이해와 선의를 창출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의식하고, 모든 형태와 표현에서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로 부터 자유로운 세계를 구축하기를 열망하며…..“라고 하여 스포츠와 정치가 별개가 아님을 분명히 했다.
1964년 도쿄올림픽. 국제육상연맹과 국제수영연맹은 가네포에 출전한 선수들의 올림픽 참가를 불허하겠다는 방침을 갖고 있었는데,단거리 중거리 세계 최강자인 북한의 신금단이 가네포에 참가해서 출전 금지라는 징계조치를 받았다. 신금단(1938-)은 선반공으로 일하다가 육상의 재능을 인정받아 1958년 육상선수로 발탁되었다. 1960년대 초반부터 400m 800m 종목에서 11번의 공인 비공인 세계 신기록을 수립했고 금메달 28개 은메달 1개를 획득했다. 1963년 자카르타에서 열린 제1회 가네포 대회에서 육상 200m 400m 800m를 석권하며 3관왕을 차지했는데, 400m에서는 51초4, 800m에서는 사상 최초로 2분대를 돌파하는 1분 52.1초의 경이로운 세계신기록을 달성했다. 그녀의 공인기록은 400m에서 1964년에 수립한 51초2, 800m에서 역시 같은 해에 수립한 1분 59.F로 알려졌는데, 기록은 이후 30년 이상 깨지지 않았다.
1986년 아시안게임에서 육상 3관왕을 달성하며, 제2의 신금단으로 불렸던 임춘애 선수의 800m 최고 기록이 2분 05.72였으니, 신금단이 수립한 당시 기록들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알 수 있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1965년을 제외하고, 400m에서 1959-1967년, 800m에서 1960-1967년 동안 최강자로 군림했다. 가네포와 관련된 정치적 이유로 그녀의 올림픽 출전 자격이 박탈되자 이에 반발한 북한 선수단은 전원 철수를 결정했다. 그런 과정에서 1.4후퇴 때 월남했다가 신문에 실린 딸의 사진을 보고서 도쿄로 달려온 부친 신문준과 그녀는 도쿄 조총련계 회관에서 7분 동안 극적 상봉을 하고, 철수하는 북한 선수단이 기차를 타는 우에노 역에서 다시 짧게 해후했다. 부녀가 해어지는 마지막 순간에 그녀가 외쳤다는 ‘아바이 잘 가오'라는 말에 영감을 받아 ‘눈물의 신금단’, ‘부녀의 슬픔’등의 노래 및 관련 영화가 만들어졌다.
북한은 1964년 동계올림픽에 처음 참가했다.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에서 천재 스케이터 한필화가 은메달을 획득했다. “한필화는 평양체육대학 3년에 재학 중이다. 신장이 165센티미터, 뚱뚱한 몸집에 눈이 째진 살짝 곰보로 여성다운 점은 찾아볼 수 없는데…(〈동아일보〉 1964년 2월20일자).”라고 하여 질투의 시선을 보냈다. 그때까지 한국은 동계올림픽에서 단 한개의 메달도 따지 못했다.그런데 한필화 선수의 오빠 한필성씨가 북한 선수단 사진에서 동생을 알아보았고 7년 뒤 삿포로 동계올림픽 프레올림픽 참석차 일본에 온 한필화 선수와 전화 상봉을 했다. 한필성은 6.25 전쟁 도중 월남하였는데, 1971년 일본 아사히 신문의 주선으로 대회 참가차 일본에 머물던 한필화와 전화 통화를 했으며, 전화로 남매가 확인되자 곧 한필성은 한필화를 만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거부로 만남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한필화는 1990 삿포로 동계 아시안 게임에 임원으로 참가했으며, 이 때 다시 한필성이 일본을 방문하여 이들 남매는 극적으로 상봉했다.
올림픽에서 메달 경쟁은 북한이 1972년 뮌헨 하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면서 불붙었다. 사격에 처음 출전한 이호준이 금메달을 획득했다. 손기정 이후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을 북한에서 먼저 딴 것이다. 이호준은 회견에서 “나는 원쑤의 심장을 겨누는 심정으로 쐈습니다. 수령님은 적을 대하는 심정으로 싸우라고 교시하셨습니다”라고 하여 충격을 주었다. 여기서 적은 한국을 가르키는 것이라고 원저자 다카시마 고는 <스포츠로 보는 동아시아사>에서 강조했는데 역자들은 북한 측 자료를 찾아서 ”저는 과녁을 조선인민의 철천지 원쑤인 미국놈의 털가슴으로 보고 쏘았습니다“고 주석을 달았다.
여하튼 북한은 처음으로 참가한 올림픽에서 10개 종목 65명의 선수를 출전시켜 금메달 1개(사격) 은메달 1개(남자 유도) 동메달 3개(유도 여자배구 레슬링)으로 종합순위 22위를 기록했고, 남한은 8개 종목 46명이 참가하여 은메달 1개(유도)에 그쳐 종합 순위 33위를 기록했다. 1966년 태능선수촌을 건립했고 1972년 메달리스트 연금제도를 도입한 남한 정부는 큰 충격을 받았다.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은 차원이 다르다. 체제 경쟁 차원에서 엘리트 스포츠 육성에 박차를 가했으며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레슬링의 양정모가 첫 금메달을 따 온 국민을 흥분시켰다. 한국은 금1 은1 동4로,금1 은1 동2인 북한을 올림픽에서 처음으로 앞서기 시작했다. 아시안 게임에서는 1974년 첫 남북대결에서 우여곡절 끝에 북한을 앞지르기 시작했다.(북한이 금메달 18개, 은메달 14개, 동메달 17개였고 한국은 금메달 16개, 은메달 26개, 동메달 15개였는데 북한 역도 3관왕 김중일이 도핑테스트에서 양성 반응이 나와 결과적으로 한국이 앞섰다. 한국은 나이 마흔에 가까운 역도선수 출신 황호동 국회의원 까지 선수로 참가했다)
이에 앞서 남북간의 축구대결도 체제경쟁이었다. 1954년 5회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는 처음 한국 일본 중화민국이 출전했으나 중화민국이 기권하면서 한국 일본 만이 출전했다. 홈앤드어웨이방식인데 모두 일본에서 경기를 치렀다.이승만 대통령이 일본 선수의 입국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아예 일본과의 경기를 반대하고 나섰다. 그는 대한축구협회 이사에게 “틀림없이 이길수 있느냐”, “만일 시합에서 패배하면 현해탄(대한해협)에 몸은 던져라”는 식으로 거듭 다짐한 뒤에야 비로소 출전 허가를 내주었는데 한국이 1승1무로 본선 진출권을 획득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일 국교정상화에 반대했다. 당시 미국은 타이완을 시작으로 하여 동남아시아 국가와 일본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도록 압박했다. 소련과 중국에 대한 아시아전략의 일환으로 일본의 가치를 중시했다)
한국의 월드컵 본선 성적이 비참한 가운데 1966년 북한이 잉글랜드 월드컵 16강에 올랐다. 한국은 북한과 경기에서 질까봐 페널티를 내고 지역 예선에 불참했다. 8강전에서 포르투칼에 패배하기는 했지만 전 세계를 놀라게 했고 특히 충격을 받은 것은 박정희 정권이었다. ‘북괴에게만은 질 수 없다’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해결책을 찾기 시작했다. 1967년 3월 중앙정보부가 직영하는 축구단 ‘양지’가 출범했다. 중앙정보부가 육해공군에서 복무하던 선수들을 전출시켰는데 대부분이 국가대표급 선수들로 구성된 초호화 드림팀으로 꾸려졌다. 1967년 국가대표 23명 중 11명이 양지축구단 소속일 정도였다. 김형욱의 실각 이후 1970년 해체되었는데 막상 북한과 경기를 하지는 못했다. 스포츠의 실미도 부대라고 비유되었다.
남과 북은 올림픽 참가, 국가의 명칭을 갖고도 오랜 동안 다투었다. 올림픽헌장은 한나라 한지역에 하나의 NOC만을 허용했으며 중국 독일 같은 분단국에 대해서는 단일팀을 결성하도록 권고했다. 이에따라 1958년 북한 올림픽위원회는 로마올림픽(1960)년 참가를 위해 남북단일팀 결성을 협의하자고 한국올림픽위원회에 제안했으나 한국 측은 “국제범죄조직으로 딱지가 붙은 집단을 신성한 스포츠맨의 전당에 들이는 것을 허락하는 행위와 마찬가지”라면 단호히 반대했다. 196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IOC총회에서는 한국에 대해 북한과 단일팀을 결성할 것을 권유하고(한국이 단일팀 국기로 태극기를 사용하자고 해 결렬되었다), 만약 KOC가 이를 수용하지 않을 경우에는 북한이 단독으로 참가하는 것으로 해서 북한의 잠정적인 IOC가입을 승인했다.결국 1963년 북한이 한국NOC에서 분리된 독립NOC자격을 인정받고 1964년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동계올림픽 부터 독자적으로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
북한은 도쿄올림픽(1964년)에 신금단 선수 출전정지 조치로 결국에는 보이콧을 했으나 이 당시만 해도 북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즉 정식 국호가 아닌 북한 North Korea(지역명)라는 명칭으로 참가할려고 했다. 정치와 스포츠는 불가분의 관계라고 생각하는 북한은 그 후 정식 국호와 국기를 사용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는데 1968년 멕시코시티올림픽 까지 지역명 북한으로 출전하고, 그 다음 대회 부터는 북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호로 출전하게 되었다. (북한 선수단은 1968년 쿠바까지 날아갔다가 국호 문제가 1972년으로 미뤄지자 항의의 표시로 돌아갔다) 이번 항저우 아시안게임 남북여자축구경기를 마친 후 기자회견장에서 한국 기자가 ‘북측’으로 부르며 질문을 하자 ”북측이 아니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으로 시정하고 ‘조선’ 팀으로 불러달라. 그렇지 않으면 답하지 않겠다“고 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아시안게임에 출전한 국가의 이름을 불러달라고 했는데 이런 역사적 과정이 배경에 있다. 그런데 막상 이 경기를 중계한 조선중앙TV 아나운서는 ”여자 축구 우리나라 팀과 괴뢰 팀 사이의 준준결승 경기가 9월30일에 진행되었다“고 설명하고 화면에도 ‘괴뢰’라고 표기했다.
1974년 테헤란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은 북한을 포함해 중국 몽골등 공산권 국가가 처음 출전했던 아시안게임이다. 남북한의 대결도 심각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1974년 8월15일 육영수 여사가 총에 맞아 사망했는데 8월17일 선수단은 육영수 여사를 향해 일동 묵념을 하고 테헤란으로 날아갔다. 승무원들은 가슴에 ‘이기고 돌아오라’는 리본을 달았다.
“38도선을 사이에 둔 남북한의 삼엄한 정세는 그대로 테헤란으로 옮겨졌다. 개막 전 호텔과 프레스센터에서 몇 차례 남북 기자들이 서로 웃는 얼굴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과 마주쳤다. ‘역시 같은 민족이구나. 어쩌면 대회를 통해서 대화가 재개될 수도 있겠지….’ 이런 기대감을 막연히 품게 되었다. 그러나 경기가 시작되자 대립은 모습을 드러내었다…. 복싱 경기장에서 있었던 일. 한국을 꺾고 우승한 북한 선수의 시상식에서 북한 국가가 연주되자 한국 측 응원단은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아이들까지도 같은 행동을 하는 것으로 보고서 마음이 아팠다”(아사히 신문 1974년9월18일)
그러던 것이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서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은…’으로 시작하는 북한 애국가가 시상식, 경기전 행사등에서 연주되었다. 우리 관중은 아무런 저항감을 보이지 않았으며 일어나 경의를 표했다. 북한 아시안게임에서 최대 관심사는 미녀군단으로 불리며 선풍적 인기를 모았던 북한 여자 응원단이었다.
남과 북의 스포츠 대결은 남북의 대립과 국제정세에 영향을 받았다. 1973년 모스크바 유니버시아드 대회에는 한국이 참가했다. 구 소련에서 열린 국제경기에 한국이 처음으로 참가했는데, 이는 그해 박정희 대통령이 ‘평화통일외교선언’(6.23선언)을 통해서 남북한의 UN 동시 가입과 공산권 국가에 대한 문호개방을 표방한 차원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북한은 소련이 우리 선수들을 받아 준 것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선수 파견을 하지 않기로 했다.
남북한 대결의 절정은 86아시안게임 88올림픽, 그리고 북에서 열린 1989년 세계청년학생축전이었다.한국은 1970년 아시안게임 주최권을 1.21사태와 푸에브로호 나포 사건을 들어 반납한 바 있는데 1980년대 들어서 두개의 국제대회 동시 유치전에 나섰다. 과거 대규모 종합 국제스포대회를 개최해 본 경험이 없는 서울은 아시안 게임을 통해 역량을 쌓아 올림픽까지 성공시키겠다는 명분을 제시했지만 속내는 유치 가능성이 낮은 올림픽 보다는 아시안게임 유치에 사활을 걸었다고 한다. 그래서 경쟁지인 나고야와 만나 아시안게임 개최 지원을 약속받고, 올림픽은 나고야를 밀어주는 협상을 벌였으나 확답을 받지 못했다. 다카시마 고가 지은 ‘스포츠로 보는 동아시아사’에서는 당시 서울이 올림픽 유치에 성공한 배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유력한 경쟁 상대는 서울이었지만 나고야가 압도적으로 유리하다고 알려져 있었고, 개최지 결정투표를 앞두고서 나고야 쪽 관계자는 마치 따 놓은 당상인 듯이 승리를 전제로 한 발언을 일삼았다. 실상 서울 쪽 유치 관계자들은 자신감을 잃었고, 대한체육회 이사 김집 등은 기요카와에게 '만일 아시안게임 개최권 획득과 관련해서. (일본이) 지원해 준다면, 서울은 올림픽 개최 희망을 접겠다‘라고까지 제안했다. 만일 기요카와가 그러한 제안에 응했더라면 나고야 올림픽은 실현되었을지도 모른다.
1981년 9월 30일 IOC 총회(서독 바덴바덴)에서 개최지 투표가 실시되어, 52표 대 27표로 서울이 압승을 거두었다. 나고야의 패인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나고야에서는 대규모의 올림픽 반대 운동이 일어났고, 반대파 인사들은 바덴바덴으로 몰려가 활발하게 유치 반대 운동을 펼쳤다.유치 관계자는 반대 운동이 끼친 영향에 대해서 부정적이었지만, 언론인 데이비드 밀러David Miller는 '나고야에서 온 환경보호 운동가들이 조용한 라인란트Rheinland의 온천가에서 반대행진을 벌인 탓에 I0C위원들의 생각이 바뀌었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라고 주장했다. 나고야의 울림픽 유치는 행정부와 재계가 주도하고 시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비판이 그때까지도 종종 제기되었다. 만약 시민의 이해를 구하는 일에 더욱 힘을 쏟았다면, 반대파가 바덴바덴에 몰려가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 결과도 달라졌을지 모른다. 나고야는 지역의 민심조차 추스르지 못했지만, 서울은 정부가 주도하고 국력을 동원해서 올림픽 유치를 위한 총력전을 폈던 것이다. 한국의 I0C 위원 김운용은 당시 벌어진 유치전이 서울 대 나고야의 경쟁이 아니라 한국 대 나고야의 싸움이었다고 총평했다.
경기장 시설 건설도 서울이 나고야보다 우위에 있었다.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패인은 일본이 이미 동. 하계올림픽을 개최했다는 사실이었다. 기요카와 부위원장은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투표 전에 열렸던 올림픽 콩그레스에서, 그리스를 올림픽 영구 개최지로 고정시키는 방안이 검토되었으나 ‘되도록이면 지구의 곳곳을 돌면서 개최하는 편이 좋겠다’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때에 '앞으로 올림픽
은 지금껏 한 번도 울림픽을 개최한 적이 없는 나라에서 하는 게 좋겠다‘라는 생각이 일종의 모토가 되어서 투표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한반도의 정치적 불안정이야말로 서울의 최대 약점이었다. 나고야는 서울의 그러한 약점을 파고들며 유치 연설에서 나고야의 정치적 안정을 부각시켰지만, 도리어 그러한 전술이 '대국 의식을 지나치게 드러낸다'는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반면에 서울은 유치 연설에서 불안한 안보 정세를 솔직히 인정하고,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라도 서울올림픽을 개최함으로써 자신들이 세계 평화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을 주장했다. 1년 전 모스크바올림픽(1980년)에서는 서방 국가의 집단 보이콧을 목격했다. 3년 뒤 로스앤젤레스올림픽(1984년)에서는 공산권 국가들의 집단 보이콧이 예상되었다. 냉전의 최전선인 서울에서 올림픽을 개최할 수만 있다면, 올림픽을 위기에서 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진정한 세계 평화에 공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러한 역할을 맡는 것은 나고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IOC 위원들은 서울의 가능성에 승부를 걸기로 했던 것이다”
북한은 1986년 9월1일 서울아시안게임 불참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2주 후에 김포공항에서 폭탄테러가 일어나 5명이 사망하고 30명이 부상했다. (1987년에는 대한항공 858편 폭파사건이 일어났다) 1986년 10월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고르바초프 서기장을 만나 “소련이 서울올림픽에 참가해서는 안된다. 서울올림픽은 한반도 분단을 고착화하려는 국제적 제국주의 음모”라고 지적하며 보이콧을 설득했으나 거부당했다.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을 개최하려는 중국도 한국 편이었다. 북한은 50대50 공동개최안을, IOC는 일부 경기를 평양에서 여는 분산개최안을 제시했으나 타협점을 찾지 못했다. 단일팀 구성도 합의 하지 못했다. 86아시안게임 88올림픽을 계기로 남북의 스포츠 국력 차이는 극대화되었다.
북한의 대응은 평양에서 열린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이었다. 1985년 7월 소련에서 열렸던 12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서 다음 대회 유치에 성공했다. 반제국주의와 국제평화를 기치로 하여 세계 177개국에서 2만2천여명이 참가했다. 북한은 정치축전 경제축전 예술체육축전등으로 나눠 정치토론 예술행사 스포츠대회등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면서 체제선전을 도모했다. 북한은 이 행사를 위해 순안공항 확장, 릉라도 경기장, 동평양대극장, 량각도 축구경기장등 대규모 건설공사를 많이 해서 경제적으로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 덴마크 대표단은 개막식에서 김일성 주석이 연설하는 동안, “북한에도 인권을‘ 이라고 적힌 깃발을 흔들어 일시 억류를 당했다. 한국의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도 대표를 파견했다. 북한은 1986년 삿포로에서 처음 열린 동계 아시안게임을 1994년 삼지연으로 유치했으나 환경보호를 이유로 반납했다.
1989년 냉전이 종식되면서 남북관계도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1990년 10월 11일 평양에서 남북통일축구대회 1차전이, 23일에는 서울에서 2차전 시합이 개최되었다. 분단 이후 최초의 직접적인 스포츠 교류로 ‘역사적 제전‘이었다는 의미를 부여받았다. 남북한은 1991년 2월 체육회담을 통해 그 해 4월 일본 지바현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 6월 리스본에서 개최되는 세계청소년 축구선수권대회에 남북단일팀을 파견하기로 합의했다. 단일팀 명칭은 ’코리아‘로, 국기는 한반도가 그려진 한반도기로, 국가는 아리랑으로 합의했다. 1958년 12월에 북한이 로마올림픽(1960년) 참가를 위해 단일팀 구성을 협의하자고 제안하고,1963년 첫 접촉을 한 이래 33차례의 회담 끝에 이룬 성과이다. 1970년 미중간의 핑퐁외교 숨은 조력자로 알려진 오기무라 이치로 국제탁구연맹회장이 기여했는데 한국을 20회, 북한을 15회 방문하면서 단일팀 구성을 도왔다. 탁구 단일팀의 단장 김형진 북한NOC위원장은 “한 핏줄로 맺어진 민족이 스포츠계에서 벌이는 대결은 이로써 마침표를 찍었다”고 했지만 마침이 되지는 않았다. (남북 단일팀은 총 9번 구성되었다)
한국정부가 북한에 유화정책을 펼치던 시기에 남북의 스포츠도 돈독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한반도기를 들고 ‘Korea’라는 이름으로 공동 입장을 한 이후 2007년 까지 동하계올림픽 아시안게임에서 공동입장을 하였다. 2007년 제2차 남북정상회담에서 베이징하계올림픽(2008년) 남북 공동응원단 구성에 합의했지만 이후 정권이 바뀌면서 무산되었고, 평창동계올림픽(2018년)에서 다시 공동 입장을 했다. 이 때 여자아이스하키 단일팀이 구성되었는데 일부 선수들이 출전 기회 박탈에 반발하고, 젊은 세대들도 공정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반대하여 남북교류와 협력에 대한 세대간 인식 차이를 나타냈다.
얼어붙은 남북 관계의 현주소가 2022 항저우아시안게임에서 드러났다. 남북 대결의 풍경은 5년 전 대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북한 선수들은 냉랭했다. 탁구 여자 복식 결승에서 신유빈-전지희 조가 북한의 차수영-박수경 조를 꺾은 뒤 시상대에서 북한 선수를 향해 1위 단상으로 올라오라고 해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지만 북한 선수들은 웃지 않았으며 애국가가 연주될 때 한명은 시선을 돌리지 않았고,시상식 이후 기자회견에도 불참했다. 여자농구는 2018년 자카르타 팔렘방 대회 때 단일팀 ‘코리아’로 출전했는데 경기가 끝난 뒤에도 친분이 있는 선수들이 인사를 나누지 않았다.
분단 이후 서로 다른 체제를 만들고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북한은 국토완정, 한국은 북진통일을 외치던 시기가 있었다. 이승만과 김일성 시대의 적대감은 1960년대에 들어 베트남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격화되었다. 북은 베트남전쟁을 간접 지원하면서 국토완정을 하려는 전략목표를 갖고 도발을 했고 한국은 월남전에 참전하면서 휴전선을 지켜야 했기에 남북간 충돌이 잦아서 휴전선에서 한 해 최대 400회까지 크고 작은 충돌이 있었다. 북한은 소련식 계획경제도입, 한국은 대미원조경제로 경쟁을 했는데 1970년 전후까지 북이 경제적으로 더 나은 성과를 만들었고 이는 스포츠 대결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북의 국제대회 성적이 더 좋았다. 1970년대 중반이 되면서 경제가 역전되는 것과 함께 스포츠대결도 역전되었다. 88올림픽과 89세계청년학생축전으로 스포츠가 전면적인 체제대결을 하면서 한국이 일방적인 우위를 차지하기 시작했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남북대결에 임하는 선수단은 “이기라면 이기고,죽으라면 죽어라”(축구 양지팀 모토)는 자세로 임했다. 승리해서 돌아가면 영웅이 되었고, 패배해서 귀국하면 죽음이라는 생각으로 경기에 임했다.
제1차 남북정상회담에서 남북의 정상과 관계자들이 손을 잡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면서 남과 북이 힘을 합치면 세계적인 스포츠 강국이 될 것이라는 꿈을 가졌던 시기도 있었다. 북한의 선전을 한국의 선전인 양 응원하던 사회심리적인 분위기도 있었으나, 지금은 그냥 다른 나라의 성적 보다 더 관심을 갖는 정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2023년 7월 북한의 김여정 부부장이 담화문을 통해 미국의 공군기가 자국의 EEZ(경제수역)을 침범한다고 비판할 때 남조선, 남한 괴뢰군부라고 하지 않고, 겹화실 기호를 사용하여 <<대한민국>>이라고 두차례 호칭했다. 8월에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한미일 캠프데이비드회담 관련, “미국과 일본, 대한민국 깡패 우두머리들이 모여앉아….”라고 비판했는데 ’깡패‘라고 했지만 대한민국 국호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대한민국이라는 호칭이 ’Two Korea’ 정책으로 전환하는 것을 시사한 것 아니냐는 분석도 있지만 겹화살 구호를 사용한 것은 조롱의 의미가 담겨있다는 지적이 더 설득력을 얻었다. 이번 아시안게임 남북여자축구 대항전 녹화중계에서는 괴뢰팀으로 표현을 했다. 지금 남북의 스포츠 대결은 ‘특별한 이웃국가’의 경쟁으로 우리에게는 인식되지만 남북관계의 변화에 따라 죽기살기게임에서 단일팀 까지를 앞으로도 넘나들 것이다.
민병두님 글 옮겨왔습니다
첫댓글 항저우 아시안 게임과 남북한 스포츠 대결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