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첨단 제품만 찾지 마라”…틈새시장서 기회 찾는 K방산 무기들 [박수찬의 軍]
박수찬입력 2023. 6. 23. 06:06수정 2023. 6. 23. 08:15
미·중 전략경쟁과 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세계 무기 수요가 급증하면서 국내 방위산업도 수출에 호조를 보이고 있다.
K2 전차와 K9 자주포, 천무 다연장로켓, FA-50 경공격기 등이 폴란드와 말레이시아 등에 수출됐지만, ‘K방산’이 세계 시장에서 한 단계 더 도약하려면 새로운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와 관련해 주목받는 것이 시장 세분화다. 거대한 세계 무기 시장이 하나의 단일 마켓으로 존재하지는 않는 법. 그 안에는 수많은 틈새시장이 자리를 잡고 있다.
이같은 틈새시장을 잘 파고든다면, 선진국보다 뒤진 기술력이나 세부 장비 포트폴리오 등에 관계 없이 상당한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HD현대중공업이 2022년 필리핀 국방부로부터 수주한 원해경비함 조감도. HD현대중공업 제공
◆원해경비함이 주목받는 이유
HD현대중공업은 부산 벡스코에서 지난 7~9일 개막한 국제해양방위산업전(MADEX)에서 수출용으로 개발한 원해경비함(OPV) 모형을 공개했다.
지난 2016년과 2021년 필리핀으로부터 호위함과 초계함을 수주한 HD현대중공업은 지난해 7449억 원 규모의 OPV 6척 건조 계약을 필리핀 정부와 체결했다.
기존에는 호주가 수주할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으나, 호주 측이 제시하는 비용이 늘어나면서 HD현대중공업이 계약을 맺게 됐다.
필리핀에서의 성과에 힘입어 HD현대중공업은 성능이 강화된 원해경비함을 적극 홍보해 함정 수출을 견인한다는 계획이다.
이번에 MADEX에서 전시한 OPV는 배수량 2450t에 76㎜ 함포와 근접방어무기체계(CIWS) 등을 갖췄다. 헬기나 무인기가 뜨고 내릴 수 있는 갑판도 있다.
HD현대중공업이 지난 7~9일 개막한 국제해양방위산업전(MADEX)에서 공개한 원해경비함. HD현대중공업 제공
HD현대중공업 측은 남미나 아시아 등에 있는 잠재적 구매자로부터 제기될 다양한 요구를 충족할 수 있도록 OPV를 모듈화하는 방안을 추진한다.
대잠수함 작전 소요를 감안, 예인소나 장착 능력 등을 갖춰 필리핀에 수출된 것보다 성능을 높인다는 방침이다. 이후에는 무인기술을 대폭 반영한 OPV도 제안할 예정이다.
조선업계에서는 OPV가 호위함보다 수출 전망이 더 높다고 분석한다.
해적 소탕·마약 단속·배타적경제수역(EEZ) 경비 등의 수요가 급증하고 있으나, 고가의 첨단 해군 함정을 투입하는 것은 비용 대비 효과가 낮고 군사작전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호위함을 추가 건조해서 이같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쉽지 않다. 척당 수천억원에 달하는 고가의 전투함 구매는 획득 절차가 복잡하고 소요기간도 길다.
탑재 무기와 장비를 외국에서 조달하면, 무기·장비 제조국 수출 허가나 제작사 일정 지연 등의 문제가 발생할 경우 호위함 건조 및 납품 계획에 지장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 비용 상승을 억제하기도 쉽지 않다.
반면 OPV는 함포와 레이더 등 기본적 장비만 갖춘다. 대공·대함미사일과 첨단 감시장비, 전투체계 등 전투함 가격에서 많은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없어 체계통합 비중이 낮다. 이는 도입가격을 대폭 낮추고, 수요를 끌어올린다.
OPV는 첨단 장비 장착 여부보다는 장거리 항해에 필요한 선체를 만들고 설계하는 능력이 더욱 중시된다.
한국은 함대공미사일이 이제야 개발을 진행하는 등 호위함 탑재 무장이나 전자장비 등의 개발 및 판매, 사용 실적은 선진국보다 앞서지 못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 이스라엘이 함대공미사일과 대함미사일, 전자전 장비, 전투체계 등을 다양하게 개발해서 전투함에 적용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반면 선박 제조 능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한국 해군이 운용중인 호위함보다 수출용 OPV가 해외 시장에서 실적이 더 좋을 것이라는 기대가 나오는 대목이다.
해결 과제도 있다. OPV 수요는 많지만, 구체적인 요구조건은 구매국마다 크게 다르다. 주문에 따라 OPV를 설계하고 제작하는 것은 비용 등의 측면에서 비효율적이다.
신속하고도 신뢰성이 높으며 소요비용은 낮게 유지할 수 있도록 모듈화 기술 등을 적용, 다양한 요구조건을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
브루나이 해군의 다루살람급 원해경비함. 개발도상국을 중심으로 원해경비함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개발도상국 시장에 진출한 유럽 업체들의 진입장벽도 넘어야 할 장애물이다. 영국 BAE시스템스나 네덜란드 다멘 조선소를 비롯한 유럽 업체들은 선진적인 설계 개념과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동남아시아 등에 OPV를 판매해왔다.
이를 뛰어넘어 세계 함정 시장에서 비중을 확대하려면, 저렴하고 우수한 OPV를 설계해 구매자들에게 제안하는 한편 범정부적 차원의 절충교역 패키지를 제시하는 등의 지원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전투기 대신 훈련기 시장 진출
군용기 시장에서 대표적 아이템은 전투기다. 강력한 공격력 또는 스텔스 성능을 앞세운 유럽과 미국의 각종 전투기들은 지금도 세계 각국에서 주문이 끊이지 않는다.
한국도 KF-21 초도양산을 눈앞에 뒀다. 하지만 선진국의 진입장벽을 뛰어넘기가 쉽지 않다.
빈약한 국산 항공무장 체계는 이같은 문제에 대한 부담을 더한다. 프랑스는 라팔 전투기를 판매하면서 자국산 항공무장을 패키지로 공급한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지난달 9일 경남 사천 한국항공우주산업(KAI) 본사 격납고에서 FA-50이 나오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반면 KF-21에 쓸 수 있는 국산 항공무장은 정밀유도폭탄(KGGB) 정도다. 장거리 공대지미사일을 비롯한 다수의 미사일 개발이 추진중이지만, 빨라야 2030년대에야 실전배치될 전망이다.
구매국 입장에선 미국산이나 유럽산 항공무장을 별도로 구해야 한다. 이는 비용과 행정적 소요를 증가시킨다. KF-21에 탑재되지 않은 무장을 사용하려면, 체계통합 비용이 추가되어 가격 경쟁력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훈련기 수출은 이같은 제약에서 자유롭다. 조종사를 양성하고 공중전 능력을 높이는데 쓰는 훈련기는 첨단 공격 무기를 실제로 장착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항공무장과 기체간 체계통합 난도가 낮다.
우수한 기동성, 전투기 조종에 필요한 교육 훈련 체계를 제대로 갖추기만 하면 세계 시장에서 주목받는 훈련기를 출시할 수 있다.
훈련기는 세계 군용기 시장의 ‘빈틈’이다. 냉전 시절에는 미국과 유럽에서 다수의 훈련기가 개발됐다.
하지만 미국이 F-22, F-35 스텔스 전투기 개발에 주력하면서 훈련기 개발은 늦어지다가 최근에야 T-7A가 등장했다. 유럽도 타이푼과 라팔, 그리펜 등의 전투기를 먼저 만들었다. 이탈리아 M346 계열 등이 개발된 정도다.
한국의 T-50 계열 항공기는 2005년 양산이 시작된 이래 한국과 동남아에서 많은 운용실적을 쌓았다. T-50을 중심으로 구성된 한국 공군의 조종사 훈련체계는 FA-50, KF-16, F-35 조종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공군 제20전투비행단 소속 KF-16 조종사가 야간 임무에 나서기 전 기체 외부를 점검하고 있다. 공군 제공
제작사인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이 구현한 기체 성능과 한국 공군의 경험이 합쳐지면,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춘 훈련기를 잠재적 구매자들에게 제안할 수 있다.
T-50 계열 항공기 판매 확대는 장기적으로 KF-21 수출의 토대를 쌓는 역할도 한다.
같은 국가와 회사가 만든 무기를 지속적으로 도입하면 구매국은 후속군수지원 분야에서 효율성이 높아진다. 제작사는 장기적 관점에서 시장을 확보하고, 경쟁자들의 진입을 저지해 지속적인 매출을 얻게 된다.
프랑스산 미라지 전투기를 샀던 아랍에미리트(UAE)와 카타르 등이 라팔 도입을 결정하고, 필리핀이 HD현대중공업에서 국산 호위함을 구매한 이후 또다시 OPV 구매를 결정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T-50 계열 항공기 수출국이 늘어나면, 기체 특성과 정비에서 유사한 KF-21은 해당 국가에서 비용과 조종 효율성에서 경쟁 기종보다 우위에 설 수 있다. T-50 수출국에 쉽게 진출할 수 있다. 정비와 성능개량까지 더해지면 수십년 동안 수출 실적을 내는 것도 가능하다.
지난달 9일 경남 사천 한국항공우주산업(KAI) 본사 고정익동에서 KAI 직원들이 TA-50을 점검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KAI는 현재 미 공군과 해군의 3개 훈련기 사업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500여대에 달하는 사업을 수주한다면, 이를 발판으로 세계 시장에서 비중을 확대할 수 있다. 향후 수년간 미군 훈련기 사업을 놓고 국내 업체와 군, 정부의 수주 노력이 치열하게 전개될 전망이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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