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빈 시인>>
<<이서빈 시인의 양력>>
* 영주 출생.
* 옥대초등학교와 방송통신대 국문학과를 졸업.
* 201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문학시대》 신인문학상 수상,
* 계간 마네르바작가회 이사, 한국문협 인성교육위원, 국제펜클럽 회원.
* 중랑문화원 ‘남과 다른 시 쓰기’ 창작교실 강사.
*시집 『달의 이동 경로』, 『바람의 맨발』, 『함께, 울컥』 민요시집 『저토록 완연한 뒷모습』.
<<이서빈 시인의 대표 시>>
오리시계/이서빈
겨울, 오리가 연못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저녁이면 다시 걸어 나온다.
연못으로 들어간 발자국과 나간 발자국으로 눈은 녹는다. 시침으로 웅덩이가 닫히고, 방수까지 되는 시간들.
오리는 손목이 없는 대신 뭉툭한 부리의 시간을 가지고 있어 무심한 시보(時報)를 알린다. 시침과 분침이 걸어 나간 연못은 점점 얼어간다.
여름 지나 가을 가는 사이 흰 날짜 표지 건널목처럼 가지런하다.
시계 안엔 날짜 없고 시간만 있다.
반복하는 시차만 있다.
오리 날아간 날짜들, 어느 달은 28마리, 어느 달은 31마리
가끔 붉거나 푸른 자국도 있다.
무게가 덜 찬 몇 마리만 얼어있는 웅덩이를 보면
손목시계보다 벗어 놓고 간 시계가 더 많을 것 같다.
결빙된 시간을 깨면
수 세기 전 물속에 스며있던 오차들이
꽥꽥거리며 걸어 나올 것 같다.
웅크렸던 깃털을 털고
꽁꽁 얼다 풀리다 할 것 같다.
오늘밤 웅덩이는 캄캄하고
수억 광년 연대기를 기록한 저 별빛들이 가득 들어있는 하늘은
누군가 잃어버린 야광 시계다.
함께, 울컥 / 이서빈
함께라는 말에는 따뜻한 체온이 숨 쉬지
자음모음의 합계는 자음모음이지만
자음모음의 함께는 어떤 글자도 다 만들 수 있지
함께는 숨결이고 물이고 햇빛이지
함께라는 이 짧은 음절은 울컥이란 神이 사는 신전이지
세평 구둣방서 21년 동안 구두 5천 켤레 고치고 닦아 평생 번 3만3천 평 땅
코로나로 힘든 이웃 위해 써달라고 기부한 울컥씨
4년간 모은 10원 5백원짜리 코 묻은 저금통 기탁하면서 도움주고 싶다는 7살 최울컥
어려운데 써 달라고 1백원 5백원짜리 전달한 취약계층 울컥독거노인
행정복지센터 찾아와 1백만원 내놓으며 이름 밝히지 않은 무명울컥
꼭 필요한 곳에 쓰이길 바란다며 곰팡이 핀 지폐를 내 놓은 폐지 줍는 굽은등울컥
바자회 열어 수익금 1백 59만원 전한 울컥고등학생
개인 병원 문 닫고 코로나 치료 위해 대구로 달려가는 울컥의료진
이 위기 잘 넘기자고 각 체인점에 힘 한 가마니씩 지원해주는 프렌차이즈 울컥사장
임대료 면제해 주는 울컥주
위험 무릅쓰고 밤낮 코로나 환자들 돌보는 울컥의사 울컥간호사
함께 울컥, 눈물을 제조해
가나다라마바사
가나다라마바사
슬픔 찢고 나온 푸른휘파람
울컥나라 국기에 울컥울컥 희망을 펄럭이고 있네
구口 / 이서빈
저 조그만 네모 하나에 모든 도형들이 다 빨려 들어간다.
먹다 ⸱ 굶다가 한통속으로 들어가거나 나간다, 밥먹고 욕먹고 일도 시켜 먹는다. 녹을 먹고 나라를 말아먹는다.
먹는 것 입 꾹 다물면 굶는 것도 끝난다.
때론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굴레를 쓰고 사람을 가두어 수인囚人이 되게도 하는 口. 하루의 끝이 꾸역꾸역 모여 잠을 볼모로 잡고 있는
조금 먹은 놈은 도둑이라 하고 많이 먹은 놈 영웅이라 하는 저 口. 끝내 삼킨 것 다 뱉어내 저 조그만 관속 들어가 꽝꽝 못질 당하는
살도 뼈도 수식어도 없는 막대기 네 개 저것 안에 4주가 들어있고 4방이 들어있고 온갖 사연 다 들어있어 죽음까지도 4망이라 한다면 저 ㅁ는 모든 비밀 다 틀어쥐고 있는 것 아닌가.
우리 모두 저 네모안에 들어가기 위해 오늘도 꽃도 새도 나비도 끊임없이 태어나 날고 있다.
달의 이동경로/이서빈
첫 이마를 숙인 밤하늘에 생채기난 달 하나가 떠있다. 고원의 순례자들은 출발할 때 이마에 달 하나를 챙겨간다. 그 밝기로 험로를 오체투지로 간다.
이마가 땅에 닿을 때마다 신들은 따끔따끔거릴 것같다. 이마가 헐고, 조금씩 상처가 나 오래된 표시로 딱지가 앉는다. 거뭇한 이마에 굳은살로 뜬 붉은달.
티벳 여행길에서 오체투지를 하며 가는 순례자를 만났다. 몇 달 며칠을 이마에 달띄우며 간다. 달은 언제나 찬란한 가난을 닮았다. 한동안 배고프고 또 한동안 배부르다 다시 배고픈 달. 장엄한 사육제다. 태어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거듭나기를 한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바닥을 함께 기는 그림자 푸른밤. 살 다 내리고 채우기를 몇 번 함께 기는 그림자의 눈이 푸른밤. 지순한 보름달에 세상이 환하다. 지나가던 차를 멈추고 순례하는 사람들에게 푸르스름한 지폐 몇 장을 보시한다. 고개 하나를 넘을 때마다 붉은 피가 나고, 딱지가 앉고, 또 넘으면 붉은 피가 나고, 딱지가 앉고 마지막 사원 앞에 가서야 남루한 달 하나가 뜬다.
거뭇한 이마를 밝힐 평생의 달 하나 얻는다.
소금사막길/이서빈
낙타들, 지루한 행렬로 소금사막 건넌다
낙타몸엔 경적이 흘러나오지않는다
무릎꿇어 소릴 내거나 기다릴 뿐
스스로 창을 닫은 긴 눈썹과
발굽닿는 자리에 소금 부서지는 소리가 짜다
푸른바람 걸린 나뭇가지 위를 지나다보면
흰소금 쌓인 지점을 지나가게 된다
어느새 끼어든 제설차가 염화칼슘 뿌려대며 지나간다
흰사막인 듯 눈천지가 돼버린 길
가끔 낙타울음같은 경적이 끼어들어 미끄러운 길
닭들이 득실거리는 트럭 저만치 앞서가고
파란술병든빨간치마와 야자나무그늘이 느리게 지나가는 길
깊들은 순간 자기를 다스리지 못하는 일이 종종 생긴다
그 옛날 소금길은 좁아터져 정체되었지만
오늘 이 길은 넓어서 더 엉킨다
갓길표지도 없이
서로서로 위험 속도 내며 지나갈 뿐이다
터널을 지나 저물어가는 산 돌아가
저녁대문을 향해가는 후미등 붉은 행렬들이 흐른다
모래언덕은 속도를 잠그고 바람을 풀어놓는다
처음보는 겨울 그림자 한 폭이
길 한복판에 걸려있다
긴장한 낙타의 귀들이 허공에 펄펄 살아서 걸려있다
다 쉬테캐비르 사막, 그 어디쯤 지나가고 있는 걸까
지구공소금사막길혹속에 남은 연료양은 아무도알지못한다
카츄사 오빠/이서빈
어디실까?
주말마다 미제 초컬릿을 주고 사랑방 사탕을, 여학생 잡지를, 일기장을 사주고, 미제 휘파람으로 나의 사춘기를 공갈빵처럼 부풀려놓은 하얗게 잘 생긴, 토요일 오후면 통기타를 치며 팝송을 불러 주던
주말하늘은 구름 한 알갱이 없이 푸르고, 빛들은 물비늘처럼 뛰어다니고 바람을 솜털을 날리며 춤췄네. 늦잠이 사리지고, 안 하던 청소를 하고, 돌돌 말린 하루살이양말을 치우고 뒤집어 벗어놓은 으뜸부끄럼가리개를 치웠네. 내가 게으름을 피우면 카츄샤 오빠 온다는 말로 부지런으로 길들였네. 오빠가 사온 분홍벙어리장감은 한여름에도 덥지않았네. 벙어리가 아니었네. 방긋방긋 분홍스럽게, 내 손이 물들었네. 이 다음에 너 다 크면 너랑 결혼하고 싶다는 빨간말 들으면서 덜 큰 내가 싫었네. 비행기처럼 빨리 날아가서 크고 싶었네
친오빠는 불친절했고, 카츄샤 오빠는 친절했네. 주말은 왔고, 카츄샤는 안 왔고. 아침은 자라서 점심이 되고, 저녁이 되고, 밤중이 되고, 통금 사이렌이 지랄스럽게 울리고, 별빛이 글썽이고, 달빛은 뒤안뜰 대나무숲에서 흐느끼고, ‘목마와 숙녀’가 울고 대신 ‘밤을 잊은 그대’가 밤마다 찾아왔네
별빛도 자라고, 달빛도 자라고, ‘목마와 숙녀’도 자라 졸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는데도 카츄샤는 오지않았네. 벙어리 장갑 끈은 너무 짧았고, 이별의 끈은 너무 길었네
친오빠를 졸랐네, 친오빤 속 다 보이는 하얀 말만 했네. 그 토요일은 어느 먼 지구별에 홀로 손 한 번 잡지않은 그 카츄샤 오빠가 따뜻한 온돌방처럼 그립네
메밀베개와 구름베개/이서빈
어릴 적 동생은 메밀베개를 베고 나는 구름베개를 뱄다
동생은 서걱거리는 훗날에 대해 얘기하는 걸 좋아하고, 달밤에 피는 꽃말을 많이 하고 빨간눈금달린 3각자 모으는 게 취미였다
난 아찔하거나 뜬 구름잡는 꿈을 많이 꾸고 늘 젖어있는 구름을 베고잤다
구름속에서 걸어나오는 얼룩무늬에 새잠 들었다
밤마다 눌린 귀근처엔 새잠이 하얗게 쌓였다
가위눌림을 골라낸 부드러운 깃털구름과 눈썹먹 올린 속눈썹이 충돌할 때마다
동생과 나 사이에서는 놀란 새들이 날아나왔다
동생은 메밀국수를 좋아하고, 나는 부글거리는 메밀거품을 좋아했다. 동생은 아들이었고, 나는 물소리가 요란한 우렁각시였다. 동생은 사막에서 피라밋을 지키는 스핑크스 직업을 갖고 싶어했다
나의 베개속엔 솜이 아닌 흰눈이 가득 들어있다. 자고나면 녹아있는 흥건한 울음, 한여름에도 머릴 털면 흰눈이 나비나비로 쏟아졌다
밤이 어두운 건 밤마다 눈을 감기 때문이란 말 들었다. 인증이 길면 베개를 더 오래 베고 잘 수 있다는 말 들었다. 지금도 눈이 내리면 친정․ 시댁가는 두 길의 발자국을 훔쳐볼 수 있다. 동생은 처가․친가․외갓길이란 세 곳의 집합 지점을 남달리 챙기고 있어 역시 뒷꼭지에 피어있는 매화꽃도 잘 살펴보지 못했다
잠은 두 눈을 뜬 채 베개를 베고 연연하다가, 새소리와 꽃베개와 꿀잠은 서로서로 샐녘까지 기대기만 한다.
뒷모습/이서빈
거울에 비친 글귀
‘호444층4원병 양요 품명’
현대판 고려장의 또 다른 이름
사유의 경쾌함과 성찰적 지성으로
감각 세계를 탐닉하던 젊음이
아직 뚜껑을 닫지않은 관에 누워있다
멋진 환상과 흥미로운 발상법의 리얼리스틱한 문장
허리 굽혀 젊을 줍던 힘마저 다 방전되어
지금은 현실의 문제점들에 대한
사유와 성찰만이 교직되고 있다
주제와 소재마저 구분되지않는
헐렁한 문장
이상과 직관이 잘 결합된
꽃과 벌의 눈물처럼
영롱하고 부드럽던 살결문장
윤기 잘잘 흐르던 감정은 물기가 제거되고
살 다 내려 뼈만 앙상한 문장엔
가혹한 서러움만 말줄임표를 찍고 있다
젖빨던 아기가 엄마 쳐다보듯
씨익, 웃는 난해한 상형 문자
시집을 베고자다 문장을 통째 삼켜
손톱밑도 땀구멍도 혀도 입술도 모두
시가 되어 누워있는
재현 불가능한 아들과 딸은 객관적 상관물이 되고
며느리는 자신의 독특한 언어와 색채감 풍부하고
화려한 무늬들을 직조해내 일상의 평범함을
생생한 감정의 공간으로 만들어주었다
대중 친화적인 필연성을 보여준 것이다
입술을 달싹이며 며느,며느,…꼬리 잘려
토막난 말로 며느릴 부른다
가랑가랑 숨 몰아쉰다
주위가 휘고 있다
감성적 문장이 낡아 뼈까지 구멍 숭숭 뚫렸다
단어마다 바람소리 새어나온다
섣부른 변신은 금물이다
각주도 없이 해석이 불가능한 우리의 모순된 삶을
비판적 문장으로 연설하고 있다
숙성된 문체로 비린 산소를 공급하는 푸른 줄
아무리 닦아도 선명해지지 않는 유리창같은
저4차원의 뒷모습 그 앞에 누가 있는 것일까
적막의 두께를 뚫고
사이렌 소리가 불경스럽게 달려온다
박제된 신전/이서빈
누구나 하나씩 가지고 있으면서
누구도 직접 볼 수 없는 머릿속 가마
간혹 쌍가마를 가진 이도 있다
가마는 머리꼭대기서 밥을 짓거나 누룽지를 만들어
가난한 영혼의 끼니를 짓는다
화기가 너무 강해 펄펄 끓어오르면
수시로 뚜껑을 열어 김을 날리고
화기를 식혀 체온 조절을 한다
열 못 식혀 손을 부르르 떠는 것은
손가락마다 가마의 부족장인 지문 하나씩을
수문장으로 배치해 놓았기 때문이다
조그만 일에도 뚜껑을 들썩이는 인내
부글부글 끓을 때마다
무쇠도 녹이겠다며
가마위에 똬리 하나 동그랗게 틀어올리고
맑은 샘물 찰랑찰랑 길어
가마솥을 채우는 지혜 서로 사용했다
우주를 끓이고 있는 저
무쇠가마솥 하나
그렇다면 머리통은 얼마나 뜨거운 곳인가
평생 딱 한 번 불이 꺼진다는
보이지 않는 신전이다
知慧書/이서빈
물빠진 갯벌에 새발자국이 어지럽다.
물렁한 이론처럼 앞 뒤가 없다.
취약한 꽁지와 작은 구멍 속에 사는 것들에겐 섞이고 섞여 어지러운 문자가 제격일 것이다
물이 차면 풀어지는 空紙가 되는
물렁한 내용들
가장 불안한 곳에 지혜서를 꽂아두는 것같지만
한때 밟고 지나치는 곳마다 족적은
불안이 불안을 일깨울 뿐인 不立文字다.
새발자국은 세 개의 방향이고
갯지렁이는 두 개의 방향이므로, 새는 한 개의 방향을 더 숨겨놓고 있다.
납작하게 압축된 발자국들
돌에 박혀 상형문자가 되기도 한다.
문자를 읽으면 돌틈새로 새의 비명소리가 날아오른다.
계절의 순환이 여러 번 돌아오면 반지의 안쪽 두께가 얇아지고,
호미가 밭고랑 속에서 줄어들고 공원 입구 청동상의 손가락이 남몰래 가늘어지듯.
현혹의 문자이고, 어지러운 문자
지혜서를 통달한 물부리들은 문장을 냉큼 통째 삼킨다.
하나의 흔적이 여럿의 흔적을 부른다.
먹과 각이 필요없는 문자
좌표도 없이 매일 새로 쓰이고, 허물어지며 물의 허기를 채우는 문자
그러므로 읽는 사람도 없고, 읽을 수도 없다.
밀물 한 장이 펄럭, 넘어간다.
먹지/이서빈
파란눈의 귀머거리고양이 사뿐사뿐 천궁을 관찰 중이다. 흰몸에 검은줄 몇 개 얻은 사뿐한 생이다. 지난해 담장밑에 있던 나무가 올해는 담장을 넘겨다보고 있다. 분명 달없는 밤에 누군가 먹지를 대로 미리 그어놓은 궤적을 따라 자랐을 것이다.
이 집을 지을 때도 그랬다. 먹줄을 튕기고, 벽이 생기고, 고양이가 새겨지고 나무들의 예상치가 높이 자랐다.
민둥산같은 눈썹을 가진 하현달 젖꼭지를 오물대며 깃털구름을 베고 잠들었다. 청둥빛별 글썽인다는 말에서 떨어진 반짝이는 빛들이 눈을 알알하게 찌르는, 그늘 몇 장 주운 바람, 덜컹거리며 먹장 하늘 길을 닫아건다.
낡은 혓바닥으로 더듬거리는 낱말이나 귀와 귀 사이로 저장되는 수천 개의 소리줄이 먹지에 음각되고있다. 한밤중 나무들을 보면 검은먹지를 따라 열심히 흔들린다. 그려진 대로 이리저리 댓잎처럼 자란 푸른먹지에서 점점이 영근 문장들이 풀씨처럼 쏟아진다.
똑같은 밤이 계속되고 있다.
나무를 더듬거나 검은줄무늬고양이를 쓰다듬으면 손이 검다.
아침이면 팔랑, 종이가 날아간다.
하늘 세탁소/이서빈
먹구름․ 흰구름 분리해 세칵기에 담고
달빛과 별빛 한 스푼 넣고 전원 누르면
물고기는 드럼을 돈다.
버튼은 모든 금기 사항 뒤 끝에 있다.
구름들은 쭈글쭈글하거나 녹아버릴 수 있어 조심한다.
소나기 쏟아지는 탈수를 사람들은 비내린다고 한다.
그때 비린내나는 건 물고기 때문
가끔 욕설 분노도 한 줌씩 섞는다.
이때 회오리 일고, 번개 일고 물고기는 펄럭인다.
빗물 밍밍한 맛
가벼운 물맛
한 줄 긴 비행운에 걸리는 흰구름
할아버지와 죽은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입고 올라간
수의가 펄럭거린다.
절릴 것같은 비행운으로 흩어지는 빨랫줄.
부드러운 울샴푸로 실크빛 노을과 새털구름을 세탁하고 헹구면
아기기저귀가 뽀송뽀송 휘날린다.
노동은 여전히 손목과 목덜미와 바짓단을 더럽힌다.
침대 시트 위에 널브러진 잠
가위눌림에 걸려들어 빙빙 돌다보면
수선을 한 구름에서 구멍이 뚫린다.
폭언한 얼룩이 그대로 남는다.
무지개빨래하는 날은 하늘이 온통 파랗고도 높아
손가락으로 찌르면 쪽빛물이 주루룩 흐를 것만 같은
하늘 한 켠 먹구름자락 할머니의 목소리
‘빨래 걷어라’, 소리가 들릴 듯한 날씨다.
종소리에 달린 귀/이서빈
종소리엔 귀가 있다.
얇은 귀 두꺼운 귀 수억 년을 횡단하는
무수한 기도들이 손 모으고 있는 귀
합장한 손가락 기슭마다
간절한 염원 꽃피는 소리 붉다.
허공의 껍질을 뚫고나오는 비명은
파란촉을 틔운다.
종소리엔 신들의 웃자란 말이 있다.
‘천기 하강하고, 지기 상승하고’
죄없는 세상을 만든다.
이어폰의 푸른이끼 낀 귀에서 곰팡내가 난다.
날선 말과 습기찬 말로
비극적 신화가 울릴 때마다
새 한 마리씩 날아오르고 물고기가 튀어나온다.
흩어지기 위해 흘러가는
양떼구름처럼 종을 치는 일은
공중을 푸르게 하는 일이다.
방울뱀의 방울소리도 세상에 그 어떤 소리도
종소리만큼 귀가 크지는 않을 것이다.
아침 종은 새빛을 쏟아내고
저녁 종은 긴 그림자를 삼킨다.
귀씻는 소리,
한 귀로 흘리며 귀를 틀어막아
중이염을 앓는 귀가 너무 아프다.
쓸모없는 것의 쓸모/이서빈
전철안 앞자리 서너 살쯤 된 아기가 한 손에 딱지를 들고 밤벌레 같은 손가락으로 꼬물꼬물 코딱지를 후비더니, 나를 빤히 쳐다본다.
풋내기시절 오빠와 남동생이 딱지를 다 잃고 오면 내가 나서서 다시 따왔다. 딱지에 별이 많을수록 계급이 높은 동그란 별딱지는 수백 장씩 따서 5성 장군이라도 된 양 까만봉지에 담아들고 오면 할머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짓 한다며 혀를 찼다. 몰래 의자를 갖다놓고 천장을 칼로 죽 긋고 그 속에다 딱지를 감춰놓고 자면, 밤새도록 별빛이 우수수 쏟아져 꿈을 밝히던 시절.
내 속내를 읽었는지 나를 쳐다보는 아기눈망울에 별빛이 총총하다. 대낮에 별구경하다 내릴 역을 놓쳤다.
쓸모없는 것의 쓸모,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딱지는 하나에 몇억이 왔다갔다라고, 붉은딱지는 집과 자동차에 붙어 하루아침을 공중 분해시키기도 한다. 그놈의 딱지는 사람을 억,억,피토하게 하고 공중을 날게도 한다.
딱지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말, 딱지 좋아하지 말라는 말, 딱지치기를 잘 못하는 오빠와 동생들은 잠잠하게 살고, 딱지치기 잘하던 나는 딱지바람이 불 때마다 볕이 기울 듯 그쪽으로 기운다. 덕분에 코딱지만 한 집에 코딱지 후비던 손가락으로 딱지치기를 하는 두 아들과 귀에 딱지가 지도록 딱지소리를 들으며 산다.
딱지라는 말을 자꾸 듣다보니, 덕지덕지란 말이 입안에서 맴돈다. 은밀한 포식자 이빨같은 딱지….
징/이서빈
그때도 울고 있었어, 하필
귀는 그 소리들을 훔치고 있었고
까닭모를 길고 슬픈소리를 쏟아내며
눈물은 비릿한 바람에 휘었지.
울음을 뭉쳐만든 징,
살짝만 건드려도 우르르 떨어지는 천지 간
구타만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운명
징징징 퍼지는 저 시퍼런 結氣
발가벗은 소리는 페르세포네의 눈물
빛보다 빠른 속도로 흩어졌지.
사라지기 위해 태어나는 둥근소리
별귀고리가 달랑거렸지.
우주에 미아로 떠돌 저 울음 속엔
먼저 간 인류의 염원이 가득했어.
바닷속 통발이 육지로 올아오던
45억 년 전 지구엔 아무 생명도 없었어.
처음 육지로 올라와 홀로 소용돌이 친 목숨줄에
햇살 몇 그램 공기 몇 포기 물방울 몇 수를 주는
神의 보시로 소리를 기를 수 있었어.
작은 멧새 한 마리도 없는 적막한 육지
암울한 적막을 감치며 울었을 징.
저 징 우는 소리는
수십억 년 전과 지금이 하나로 겹친
不二問열리는 소리야.
물고기 화석/이서빈
꼬드득, 꼬마가 물고기꼬리를 깨문다.
어느 물고기가 오래되면
꼬리에서부터 머리까지 달달한 맛이 될 수 있을까.
달고빛나는 화석 속에 세월은 썩지 않는다.
파도가 출렁이는 돌속에서
금빛비늘 반짝이며 비린내 풍기던 물고기
회전판을 돌리면
어지럽게 헤엄치던 물고기가 뽑혀나와
아이의 손으로 옮겨간다.
해탈한 물고기는 맛이 밍밍하다.
도통, 도통 맛을 모르겠다.
비릿한 냄새도 가시도 없이 화석이 될 수 있는지
파란 지느러미와 금빛비늘, 뻐끔대던 아가미
고스란히 화석이 되었다.
저 딱딱한 몸속으로 바람불고, 햇살이 비치고
수많은 시간도 지나갔을 것.
저 어린 표정은 어느 옛날을 뽑아들고 저리 좋아할까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입속에서 녹아 사라질 물고기의 지루한 연대
회전판이 몇 바퀴 돌고나면 또 어느 시대를 내놓을까.
모두 빙빙 도는 회전판에
화석으로 돌고있는 까마득한 과거가 있다.
꼬리없는 금빛화석을 들고 어린이가 뛰어간다.
와락, 어미에게 안긴다. 즐거운 화석이다.
회전판은 계속돌고.
길/이서빈
뱀 한 마리가 새를 삼키고 있다.
구불구불 새의 발가락이 사라지고 있다.
뱀의 뱃속엔 얼마나 많은 발들이 있는 것일까.
발도 없이 빠르게 지나가는 뱀
분실한 발자국이란 없지만
돌아보지 않은 발자국들 주워먹는
짐승들이 길에 살고
머리와 발까지 먹어치우는 일은 고행이다.
발자국들은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가 먹어치우는 것이다.
방금 찍힌 족적을 맛있게 먹고 있는
진창은 알고 있을 것이다.
모든 발들은 질척한 아가리 근처를 지나간 것이라고.
풀벌레들 꺼졌던 목청을 켜 꿈틀거리는 벌레울음과 풀잎처럼 날선 바람의 힘줄과 빗새가 떨어뜨린 연녹색 휘파람조각을 삼키며 꿈틀 몸을 키운다.
발자국 먹으며 따라오는
기척을 느낀 적 있었다면, 돌아보았다면
발자국은 모두 캄캄하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 긴 세월 동안의 발자국은
발이 없는 뱀의 뱃속에 고스란히 저장되었다.
꿈은 초침속에서 걸어나온다/이서빈
수없이 돌기를 계속하는 초침,
햇빛․ 달빛은 둥근모습을 가졌을 것이다.
둥근고리 체인돌로 밤낮은 이어져 계절이 되고
바퀴는 앞으로만 굴러간다.
수시로 몸을 포개는 동그라미들
초․분․시침한자리 머문 잠깐의 시간 서로가
같은 소리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때 맺은 약속은 뒷걸음질 치지 않는 것
늘 내딛는 숨소리다.
시침․ 분침을 움직이는 저 초침 알고보면
할딱거리는 숨이다.
물의 뒤척임이다.
쉽없이 어딘가로 가고있는 행보다.
내 어머니를 데려간 그곳이고
초조한 찰나다.
가끔 바람을 어루만지듯
흘러간 시간을 만지고 싶을 때가 있다.
꿈을 접어 유리벽에 걸어둔다.
지친 뻐꾸기가 둥지로 드는 밤
시계추 늘어진 하품을 하며 자명종소리 속으로 들어간다.
조각으로 나눈 하루는 자정으로 되돌아오고
결국 자정 끝에 하나로 뭉쳐 떨어진
하루의 스위치를 켜고끈다.
짧고 분명한 손길이
내 손목을 꽉 잡고있다.
無/이서빈
없을 ‘無’자 하나를 벽에 걸어놓고 보면
훤한 빈곳들은 더 잘 보인다.
많고 넘치는 것들 컴퓨터 바탕화면 휴지통에
문서를 버리고 확인해보면
없을 ‘無’자 하나가 비좁게 들어앉아있다.
비우라고 있는 현혹, 정말 없다면 無자도 없을 것인데
자신은 턱 버티고 나머지만 없다 한다.
가끔 虛자로 보이기도 한다
다리가 네 개나 달려있는 ‘無’자는 다리 뻗을 곳 봐가며 방향을 정한다.
이때 쥐털소리 찍찍거리다,
다리 하나를 더 달아 허둥대기도 한다.
모든 것을 일시에 사라지게 하는 망각
포근한 눈을 덮고 겨울잠을 자는 봄에 입김을 불어넣어
황무지에 무지가 돋고 검은 등걸에
삐죽삐죽 눈을 돋아나게 하는 ‘無;
분명 있으면서 없는 ‘無’
이름없음을 無名이라 한다면
그것은 또 얼마나 광활한 범위인가.
‘無’자 이전에 ‘有’자가 살았다는 기록은 본 적 없다.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는 구름같은 ‘無’
밤새도록 ‘無’자를 생각하다 ‘無’자에게 침식당한 밤
새벽까지만 해도 없던 아침이 환히 떠오른다.
‘無’는 돌아보면 무수히 많다.
아무것도 없다는 말.
그처럼 큰말도 없지싶다.
밤이 풀려나왔다/이서빈
어디서 풀려나왔는지
애벌레 한 마리가 꾸물거린다.
필시 집안 어딘가가 풀려있을 것이다.
상형문자를 그리고 손발없는 문장으로 구불구불 기어다녔을.
자정쯤에는 애벌레가 풀어놓은 틈으로 비가 내렸다.
숲을 부풀리던 여름밤이 접힌다.
견고한 나무의 옆구리를 뚫던 싱싱한 집중력은
주름의 힘.
세상을 주름잡는 사람도
무릎과 팔꿈치, 목과 이마까지 접고 펴기를 반복하며
와이셔츠와 바지에 칼주름을 만들었다.
애벌레는 주름이 많다.
저 징그러운 주름으로 꿈틀거리고, 문을 여닫고 수축과 팽창을 하며 딱딱한 나무속을 파고든다.
전위의 촉수
오래전 할머니도 주름으로 잠을 뚫고 멀리 가셨다.
꿈틀거리는 머리맡을 두고 잠을 잤다.
잠의 껍질을 뚫고 아기를 꿈속에서 깨우는 꿈틀.
애벌레가 밤새 풀어놓은 통로를 못 찾겠다.
주름을 잡느라 평생을 바친 감침질에도 어딘가 풀린 곳이있어 그곳으로 전기세가 새고, 수도세가 새고, 자동차 기름이 새고, 끝내 마음까지 새고야 말 저, 쭈글쭈글한 주름.
우리가 모르는 무량한 틈으로 들어가고 나오는 꿈틀.
쉬와, 쉬와, 쉬/이서빈
할미가 손주바지를 내리고 쉬-하자, 쉬라는 말줄기따라 따듯한 김 모락모락 나는 쉬가 포물선을 그린다.
먹다남은 생선토막에 쉬 한 타래 슬어놓고는 휘 날아가 하얗게 쉬어버린, 쉰내나는 할미 머리카락 위에 앉는 파리아가씨 한 마리.
손주는 검지손가락 입술 위에 새로다지로 세우며 쉬쉬-한다. 할미도 덩달아서 검지손가락 입술에다 갔다대며 쉬쉬-한다. 꼬마는 까치발을 세우며 살금살금 다가가서 팍, 순간 파리아가씨는 쉬-날아가고, 손주는 쉬 파릴 못 잡아 쉬할미를 빤히 쳐다보며 곰스럽게 꽁꽁거리며 못내못내 아쉬워한다.
쉬할 수 없는 일은 쉬이 쉬이빠져 쉰내가 난다.
쉬할미가 쉬를 보러가면 쉬할미를 따라가 쉬-오줌을 뉘는 쉬손주. 오늘따라 쉬파리는 덤벼들지 않는다.
쉬라는 말조차 쉬쉬하면, 쉬는 쉬이 해결될 일도 진짜진짜 어려워진다. 쉽게도 어려워진다.
오늘도 쉬라는 말이 하루 종일 쉬지않고 쉽게도 따라붙을 것같은 고런고런 하루다.
여름조차 다 갉아먹는 중동호흡기 증후군인가 뭔가 고놈 메르스 창궐들 쉬 물러감 딱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