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로 본 고전 ‘質的 공리주의’로 자리이타 세상 꿈꾸다 /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

[백우]

              ‘質的 공리주의’로 자리이타 세상 꿈꾸다

                    불교로 읽는 고전-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

허남결 동국대 교수 | motp79@hyunbul.com

승인 2014.09.26 21:22:11 현대불교

벤담의 <입법론>에 대해 감명받고
공리주의 매료돼 새롭게 보완·수정
자기 헌신통한 공공 행복 창출 강조
밀의 ‘사회적 감정’, 동체대비와 유사

▲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 ~ 1873)의 사진. 그는 19세기 영국의 철학자이자 경제학자로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와 구분되는 질적 공리주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이를 통한 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 정치사상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19세기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Utilitarianism)>는 그의 또 다른 작품인 <자유론>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는 저술이다. 후자가 자유주의 사상의 영원한 고전으로 일찌감치 자리매김했다면, 전자는 책의 제목과는 달리 밀의 공리주의적 정통성이 의심받는 다양한 빌미들을 제공한 책으로 처음부터 비판의 대상이었다.

그가 말년에 쓴 <자서전>에서도 <자유론>에 대해서는 여러 페이지에 걸쳐 자세하게 소개하면서도 <공리주의>에 관한 언급은 “세 번에 걸쳐 <프레이저즈 매거진>에 연재했던 것을 한 권으로 묶은 조그만 책”이란 서술이 전부일 정도로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어쩌면 그가 한평생 존경하고 사랑했던 부인 하리엣 테일러와의 공동저술인 <자유론>에 대한 찬사가 너무 길어지다 보니 이어지는 <여성의 예속>과 <공리주의>에 대해서는 무심결에 소홀하게 다룬 것이 아닌가라는 추정을 해본다.

그러나 밀의 <공리주의>는 이후의 사태전개과정에서 그 자신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공리주의적 가능성을 풍부하게 함축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서 오늘날에는 제레미 벤담의 <도덕과 입법의 원리서설>과 함께 고전 공리주의를 대표하는 텍스트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그가 1873년 5월 8일 67세의 나이로 숨지기 직전 양녀 헬렌 테일러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은 “나의 일은 끝났다”였다고 한다. 한 시대를 풍미한 지식인으로서 자기의 몫을 다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떠날 수 있게 되었다는 안도의 목소리였다.

공리주의의 호위무사

벤담의 <입법론>을 감명 깊게 읽은 밀은 ‘공리성의 원리’를 지식과 신념들을 하나의 체계로 묶는 근본원리이자 가장 바람직한 의미에서 일종의 종교로 받아들이게 되었음을 자랑스럽게 고백한다. 나아가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주고 또 널리 확산시키는 것을 향후 자기 삶의 주요 목표로 삼을 것도 굳게 다짐했다. 말 그대로 열렬한 공리주의자가 된 것이다.

이런 밀에게 당시 ‘돼지에게나 어울리는 철학’으로까지 폄하되고 있던 벤담의 공리주의는 물에 빠진 아이와 같은 긴급구조의 대상이었다. 일단 건져 놓아야 했다. 그가 서둘러 세 편의 다른 논문들을 엮어 <공리주의>라는 책을 펴낸 것은 이와 같은 저간의 사정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공리주의에 대한 세간의 오해를 불식시키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사실 밀의 트레이드 마크로 알려진 ‘질적 쾌락주의’는 이 과정에서 파생된 지적 부산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밀에 따르면 세상 사람들은 거의 혹은 전혀 공리주의를 모르고 있으며 이러한 무지야말로 공리주의를 삐딱하게 바라보는 첫 이유로 작용했다. 그들은 기껏해야 ‘공리주의’라는 이름만 들어 봤을 뿐 그것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틈만 나면 공리주의를 헐뜯기 바빴다. 따라서 공리주의를 둘러싸고 있는 편견들 가운데 몇 가지만 제거한다면 상황은 훨씬 더 나아질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는 먼저 공리주의의 정식을 새롭게 가다듬고 나선다. 밀에 의하면 유용성과 최대행복의 원리를 도덕의 기초로 삼고 있는 공리주의 이론은 어떤 행동이든지 간에 행복을 증진시킬수록 옳은 것이 되고, 행복과 반대되는 것을 산출할수록 옳지 못한 것이 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행복’이란 쾌락 혹은 고통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쾌락의 결핍과 이에 따른 고통은 ‘행복에 반대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고통으로부터의 해방과 쾌락이야말로 목적으로서 바람직한 유일한 것이며, 바람직한 모든 것은 그 자체에 들어 있는 쾌락 때문에 혹은 고통을 방지하고 쾌락을 증가시키는 수단이 되기 때문에 바람직하다는 것이 공리주의의 핵심명제가 되는 것이다.

이와 함께 어떤 종류의 쾌락이 다른 것보다 더 바람직하고 가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해서 공리주의의 원리와 어긋난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인식을 공유하자고 제안한다. 다른 모든 것을 평가할 때는 양뿐만 아니라 질도 고려하면서 쾌락에 대해 말할 때는 오로지 양만 따져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한마디로 말해 어불성설 내지는 자기모순에 불과할 것이란 지적이다.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낫다

그렇다면 우리는 밀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도대체 쾌락의 질적 차이란 무엇인가? 양이 많다는 것을 제외하고 어떤 쾌락을 다른 쾌락보다 더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그의 답변은 명쾌하기 그지없다. 예컨대 두 가지 쾌락이 있는데, 이 둘을 모두 경험해본 사람들의 전부 혹은 거의 전부가 도덕적 의무와 같은 것과 관계없이 하나를 망설임 없이 선호한다면, 바로 그것이야말로 더 바람직한 쾌락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라고 반문한다.

그 두 가지 쾌락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 커다란 불만족이 수반될 수 있음을 예상하면서도 그리고 비록 쾌락의 양이 적더라도 어떤 하나를 확실하게 더 원한다면 우리는 그와 같은 방식으로 선호되는 즐거움을 가리켜 양의 많고 적음을 떠나 질적으로 훨씬 우수한 쾌락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성을 가진 상식의 소유자라면 짐승이 누리는 쾌락을 마음껏 즐기게 해준다고 해서 지금 당장 저급한 동물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 때 필요한 덕목이 바로 인격체적 의미를 갖고 있는 ‘품위감(sense of dignity)’이다.

그런 점에서 “만족한 돼지보다 불만족한 인간이 낫고, 만족한 바보보다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낫다(It is better to be a human being dissatisfied than a pig satisfied; better to be Socrates dissatisfied than a fool satisfied)”는 밀의 질적 쾌락주의 명제에 누구나 쉽게 동의한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아직도 품위감을 잃지 않았다는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전자보다 후자를 선호하는 삶은 위험을 감수하거나 고통을 동반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양적 쾌락주의자의 삶이 아니라 질적 쾌락주의자의 삶을 선택하려고 노력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추구해야 할 도덕적 삶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동물적인 삶을 사는 대신 고상한 원천에서 나오는 고급능력을 발휘하는 삶을 영위하는 것은 도덕적 존재로서의 기본자세와 직결된다. 일반적으로 이성을 가진 인간은 자연적 본성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짐승들의 삶을 선택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최대행복의 원리를 삶의 지표로 삼고 있는 공리주의자들은 가능한 한 고통이 없고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도 최대한의 즐거움을 향유할 수 있는 존재환경을 궁극적 목적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목적 이외의 다른 모든 것들은 그것의 달성에 도움이 될 때에만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질 따름이다. 공리주의에 따르면 이와 같은 삶의 유형은 행위의 목적임과 동시에 도덕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인간행위를 위한 규칙이자 지침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태도를 잘 유지한다면 최대한 많은 인류가 방금 기술한 것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밀은 여기서 인간뿐만 아니라 사물의 본질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감각을 가진 모든 피조물 역시 그런 존재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공리성의 원리는 행복을 추구할 뿐만 아니라 불행을 방지하거나 완화시키는 일도 동시다발적으로 수행하게 된다.

벤담을 넘어 자리이타의 공리주의로

공리주의를 위한 밀의 항변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에 의하면 공리주의자들은 스토아학파나 초월주의자들에 못지않게 자기헌신의 도덕성을 강조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공리주의의 도덕률에서는 인간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에게 소중한 것마저 기꺼이 희생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다만 그와 같은 희생이 그 자체로서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공리주의는 기본적으로 결과주의이기 때문이다. 공리주의의 정식에서는 행복의 총량을 증대시키지 않거나 증대시킬 경향이 없는 희생은 한마디로 말해 낭비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본다.

공리주의는 다른 사람들, 즉 집단적 의미로서의 인류 또는 인류의 집단적 이해관계에 의해 설정되는 한계 속의 개인적 행복 내지는 그 행복에 이르게 하는 수단을 위해 헌신하는 자기부정만을 상찬하는 것이다. 그런데 공리주의를 공격하는 사람들은 인간행위의 옳고 그름에 관한 공리주의적 판단기준의 관건이 되는 행복은 행위 당사자 자신뿐만 아니라 관련되는 모든 사람들을 포함한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만일 행위자 본인의 행복과 다른 사람들의 행복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 사람에게 아무런 사심도 없는 선의의 구경꾼처럼 엄격하게 중립적인 입장을 취할 것을 요구받는다. 우리는 나사렛 예수와 공자의 황금률에서 그러한 공리주의 윤리의 정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불편부당한 관점에서의 행복계산은 공리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이다.

반복되는 말이지만 개인의 행복 또는 이익은 전체의 행복이나 이익과 가능하면 최대한 조화를 이룰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법과 사회제도의 정비가 필요할 것이다. 아울러 사람들의 성격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교육과 여론의 환기를 통해 모든 개인은 자신의 행복과 전체의 이익 사이에서, 특히 보편적 행복을 달성하기 위해 요구되는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행위양식과 자신의 행복이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분명하게 자각할 수 있도록 계몽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비로소 우리는 공공의 이익과 상반되는 행위를 계속해서는 완전한 의미의 행복을 느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또한 그렇게 해야만 공공의 이익을 증진시키고자 하는 직접적인 충동이 각자의 습관적인 행위동기 중의 하나가 되고 더 나아가 이런 과정에서 발생하는 감정이 모든 사람의 일상생활 속에서 크고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밀은 이를 ‘사회적 감정(social feeling)’이라고 불렀다. 사회적 감정은 곧 불교에서 말하는 동체대비의 마음이자 자리이타행의 원리와 부합하는 행위동기에 다름 아니다.

공리주의 도덕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이런 핵심적인 성격을 꼼꼼하게 살펴본다면 과연 공리주의가 다른 도덕이론에 비해 특별히 부족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가? 아니 인간본성을 고양시키는데 이것보다 더 아름답거나 더 고차원적인 윤리체계가 있단 말인가? 공리주의에서는 결코 찾아 볼 수 없는 탁월한 행위원리를 갖춘 윤리체계가 과연 존재하기나 할까? 이런 물음들에 대해 밀은 단호하게 “NO”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도 복잡다단한 인간사의 예측불가능성 때문에 공리주의이론 역시 일정한 한계와 결함을 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을 솔직하게 인정하기도 했다.

밀은 대승공리주의자였다

밀의 공리주의는 벤담과 같은 뿌리를 공유하고 있으면서도 그와는 또 다른 빛깔의 매력을 발산한다. 어떤 의미에서 밀은 벤담의 공리주의를 수정, 보완하는데 그치고 있지만 그것 자체만으로도 이미 독창적인 것으로 비쳐지고 있다는 말이다.

모두 33권으로 구성된 <밀 전집>의 서문에서 프리스틀리(F. E. L. Priestly) 교수는 벤담과 밀의 공리주의를 가리켜 각각 소승불교(the Hinayana)와 대승불교(the Mahayana)라고 성격을 규정한 바 있다. 그것의 의미는 두 가지 불교입장에 대한 우리의 상식적 이해만으로도 충분히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밀의 공리주의는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관계를 언제나 대승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이기적임과 동시에 이타적이고 이타적임과 동시에 이기적인 차원을 함축한다. 그의 공리주의는 자리이타행의 원리와 동체대비의 품성을 함께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 프리스틀리 교수의 평가는 밀 공리주의의 이런 측면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

글쓴이가 보기에 밀의 공리주의는 확실히 불완전했지만 충분히 따뜻하기도 했던 휴머니즘, 즉 대승공리주의였다.

<허남결 동국대 윤리문화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