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2. 10. 대림절 두 번째 주일예배설교
빌립보서 2장 5~8절
예수님의 자릿값
■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절반은 맞는데, 절반은 그렇지 않더군요. 하기 싫다는 사람 반강제로 자리에 앉혔더니, 언제 사양했느냐 싶게 자릿값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 앉히기에는 좀 부족하다 싶었지만, 대안이 없어 앉혔는데, 웬걸, 안 앉혔으면 어쨌을까 싶게 자릿값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반대의 결과도 있습니다. 적임자다 싶어 앉혔는데, 기대와는 달리 자릿값을 못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히려 겉멋만 늘고 영 아니다 싶은 경우가 생깁니다. 그러니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은 반만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릿값의 개념과는 전혀 다른 자릿값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자릿값’입니다. 일반적인 자릿값이 등급을 올리고, 경제적 값어치를 올리는 것과 관련이 있지만, 예수님의 자릿값은 오히려 이와는 반대입니다. 등급을 낮추고, 경제적 값어치는 아예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자릿값은 상상할 수 없는 가치와 힘이 있습니다. 그 어떤 경제적 값으로도 매길 수 없는 가치가 있습니다. 그 어떤 물리적 힘으로도 상대할 수 없는 힘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것에 대해 알아보려고 합니다.
■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하나님이십니다. 6절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라는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신 예수님께 과업이 부여되셨습니다. 인류를 구원하는 과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과업은 ‘너 이리와, 구원받자.’라는 말로 이루어지는 과업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되셔야 했고, 죽으셔야 했습니다. 그것도 가장 허름한 곳에서 사람으로 태어나셔야 했고, 가장 극악의 고통을 주는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습니다. 인간으로서도 가장 치욕스러운 일인데, 이 과정을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겪으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를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기꺼이 감당하셨습니다. 물론 마지막 과정에서 “이 잔을 받지 않을 수 있다면 받지 않게 해주옵소서!”라며 고통을 호소하신 일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는 이 고통이 얼마나 큰지를 인정하신 것이지, 중단하시겠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은 이 엄청난 과업을 감당하시기 위해 사람이 되셔야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리에서 사람의 자리로 내려오셔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의 심경으로 이해하자면,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셨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의 심경일 뿐, 예수님은 다르셨습니다. 6절과 7절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하나님이 사람의 자리로 내려오신다는 것은 우리의 머리로는 이해 불가입니다. ‘왜 그 좋은 자리에서 내려오셔?’ 그런데 예수님은 기꺼이 내려오셨고, 이를 전혀 억울해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연한 듯, 오히려 잘하셨다는 듯 행동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신이 아니면, 인간의 구원은 없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낮춰지는 것에 대해 이의가 없으셨습니다. 아예 스스로 낮추셨습니다. 8절입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사람이 되신 것, 죽으신 것, 이 모든 것이 그 어떤 강제에 의한 것이 아니셨습니다. 자발적이셨습니다. 자발적 낮아짐이셨고, 자발적 순종이셨습니다. 참으로 스스로 한없이 낮아지셨고 낮아지셨습니다. 이 낮아짐이 예수님의 자릿값입니다.
■ 그런데 예수님의 이 자릿값을 세고 있는 우리를 향해 청천벽력의 말씀이 떨어집니다. 5절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오, 세상에!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무엇인가요? 그렇습니다. ‘자발적 낮아짐’, ‘자발적 순종’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품으라고 하십니다.
이 마음은 예수님만 품을 수 있는 마음이 아닌가요? 감히 우리가 어찌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이 마음을 품기가 어려우셨습니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뭐가 아쉬우셔서 낮아지셔야 하고, 죽으셔야 하겠습니까? 아쉬울 것 하나도 없으신 분입니다. 아쉬운 쪽은 오히려 우리 인간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쉽고, 예수님은 아쉬울 것이 없으십니다. 그런데 낮아지셨고, 죽으셨습니다.
낮아질 이유는 오히려 우리에게 있습니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낮아지고, 죽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하신 말씀에 당황은 할 수 있어도, 이의를 제기해서는 안 됩니다. 기꺼이 ‘네’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 이에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품어야 할 예수님의 마음을 정리해야 합니다. 무엇인가요?
첫 번째, 예수님의 마음은 당신이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신 것입니다.(6절)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슨 마음을 가져야 할까요? 우리도 근본 인간이지만 인간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아야 합니다.
그럼, 동물의 입장을 가지면 될까요? 아니면 식물의 입장을 가질까요?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겸손과 겸허의 태도를 지니고, 이 겸손과 겸허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겸손(謙遜)은, 상대방/남을 존중하고 자신은 낮추는 태도입니다. 그렇다고 비굴하게 굴고 비참하게 여기는 태도가 아닙니다. 당당하지만 자신을 낮추는 것이 겸손입니다. 겸허(謙虛)는, 잘난 체하지 않고 겸손한 태도입니다. 그렇다고 옳지 않은 것에 의사 표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바르되 예의 바른 것이고, 품위가 있는 태도가 겸허입니다.
이처럼 상대방을 존중하고, 잘난 체하지 않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태도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신 예수님의 마음이기에 우리가 품어야 할 마음입니다.
두 번째, 예수님의 마음은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신 것입니다.(7절) 예수님은 사람이 되셨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결단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종의 형체(모습)을 가지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으니 하나님에게 속한 존재로 가져야 할 마땅한 자세를 이해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해에는 ‘순종’과 ‘섬김’의 개념을 담고 있습니다. 순종은, 하나님께 대한 겸손한 태도입니다. 섬김은, 사람에 대한 겸손한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게 하신 하나님께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인 우리를 섬겨주셨습니다. 매사가 섬김이셨고, 이를 볼 수 있는 대표적인 것이 소위 세족식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배우고자 주목하는 예수님의 마음은 ‘섬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섬김에서 놓쳐서는 안 될 것이, 통치자가 섬김의 삶을 사셨다는 것이고, 주인이 섬김의 삶을 사셨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예수님의 섬김은 지배의 개념을 무색하게 하셨고, 굴복의 개념을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배와 굴복의 개념을 넘어서신 섬김의 개념을 붙잡고, 이를 살아내야 예수님 마음을 품은 것이 됩니다. 한없이 낮아지신 모습으로 기꺼이 종으로서의 삶, 섬김의 삶을 사셨던 대로 사는 것이, 우리가 품어야 할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세 번째, 예수님의 마음은 십자가에 기꺼이 죽으신 것입니다.(8절) 예수님은 죽기 위해 사람이 되셨습니다. 사람이 되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죽으시는 것이 목적이셨습니다. 그렇기에 죽음에 비하면 자기를 낮추고, 죽기까지 복종하는 것이 그렇게 두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습니까? 더욱이 죄도 없는데 가장 악랄한 죄인 취급을 받으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이 십자가를 기꺼이 지셨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 고단한 일을 기꺼이 담당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기꺼이 죽으신 것이 ‘사랑’ 때문이었기에, 이 사랑을 살아내는 것이, 우리가 품어야 할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 오늘은 성탄절을 앞두고 지키는 대림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예수님의 오심과 다시 오심을 묵상하는 두 번째 주일에 만난 말씀은, 예수님의 자릿값은 셈할 수 없는 가치이자 셈해서는 안 되는 가치임을 알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자릿값이 셈할 수 없는 가치이자 셈해서는 안 되는 가치인 이유는 예수님의 마음이 <겸손>과 <섬김>과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셋, <겸손>과 <섬김>과 <사랑>은 세상이 결코 감당 못 하는 가치입니다. 세상은 겸손이 아닌 교만을 추구하고, 섬김이 아닌 지배를 추구하고, 사랑이 아닌 경쟁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만과 지배와 경쟁은 망하는 길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바르게 잡기 위해서는 반드시 작동해야 할 가치요 행위가 <겸손>과 <섬김>과 <사랑>입니다. 이를 성탄절을 맞고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요구하십니다. “너희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바라기는 금번 대림절을 계기로 우리 안에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의 마음을 제대로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겸손>과 <섬김>과 <사랑>의 행위가 365일의 신앙 행위로 작동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