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이 만난 사람] 독학성공 신화 작가 이윤기 (2002.06.04)
작가 이윤기가 내 집 소파에 턱을 괴고 앉아 물끄러미 나를 보다가 말했다. “내 생애를 통털어 두달 동안 다섯번 연속으로 만난 사람은 형님이 처음입니다.” 그래서 좋다는 건지 싫다는 건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은둔자’라고 알려진 인물의 얘기라서 인상적이었다.
개인 사정이지만, 나는 이윤기를 존칭없이 불러도 무방하다. 그가 아무리 여러 나라 언어에 능통하고, ‘희랍인 조르바’‘장미의 이름으로’ 같은 명저를 기막히게 우리 말로 옮긴 번역의 일인자이고, ‘숨은 그림찾기’‘두물머리’같은 소설로 동인문학상을 받고, 최근엔 ‘그리스·로마신화’붐을 일으킨 대단한 인물이라도 내가 그보다 두해 먼저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형, 동생을 가린 것은 아니다. 보기와 달리 그는 나보다도 성격이 급하다. 처음 얼굴을 맞댄지 10분도 지나지 않아 그가 먼저 말했다. “형님으로 부르겠습니다!”그리하여 나는 얼떨결에 이 나라를 통털어 가장 똑똑한 동생을 얻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그의 사랑하는 안사람이 들으면 펄쩍 뛸 일이지만, 동생이 더 늙어보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우리끼리 있을 때는 내가 형이고, 다른 사람들 앞에선 네가 형으로 하자”고 했고, 쓸 데 없이 남들을 혼란시키지 말자는 내 제안에 서로 동의했다.
이윤기와의 첫 만남은 캐나다에서 종교철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예수는 없다’같은 명저를 낸 오강남 교수 주선으로 이루어졌다. 이윤기가 지금의 과천 집으로 옮기기 전 경기도 양평 쪽에 살 때였다. 오 교수와 나는 산골짝 논밭 한가운데 무인도처럼 덩그렇던 그의 집으로 간신히 차를 몰고 갔다.
나는 처음 만난 이윤기 부부와는 인사를 나누는둥 마는둥 하고 뜨락의 허름한 테이블에 차려진 자연산 군밤을 걸신들린 것처럼 까먹기 시작했다. 산책삼아 주변 산 언덕을 돌아다니며 주워온 것이라 했는데, 나는 야생밤이 그토록 오묘한 맛인지 생전 처음 알았다. 그날 저녁 이윤기와 나는 식탁에 앉자마자 초대된 몇몇 친지 앞에서 형, 동생의 인연을 자축하는 술잔을 들었다. 정성껏 저녁을 차려내 수발을 드는 그의 아내는 철저하게 이윤기화되어 있었다.
은둔자! 얼마나 얻어듣기 힘든 멋진 별칭인가. 여기저기 사람 만나고 다니거나 일 만드는 것을 즐기지 않는 그런 류의 인물한테선 흔히 고리타분한 냄새가 풍기는 법이다. 하지만 이윤기는 도무지 고리타분한 구석이 없다. 외국어 연마와 외국 책 번역에 문학 창작도 모자라서 최첨단 시대를 거스르는 고대신화 붐마저 일으킨 그가 무슨 힘이 남았는지 조용필, 조영남이 언제 어디서 어떤 노래를 불렀나 훤히 꿰고 있어 놀랐다.
나는 아직도 그가 그 많은 지식을 어떻게 터득했는지, 왜 검정고시를 치렀는지, 미국 미시간대학 초빙교수는 무슨 연줄로 갔다왔는지 도통 모른다. 웬 외국어를 그토록 폭넓게 파고 들었나 물어봐도 “번역서로 저자의 뜻을 헤아리는 데 성이 차지 않아 원어를 상대했다”는 대답이 고작이었다. 방구석에 틀어박혀 혼자 꾸물꾸물 독학한 게 못내 쑥스러운 모양이다. 그러나 이윤기의 모든 위대함은 단연 독학의 결실이다. 그는 독학으로도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는 산 표본인 셈이다.
우리가 불과 두달 동안 다섯 차례 만남을 가졌다는 것은 그가 말해 알게 된 사실이다. 나는 그런 걸 헤아릴 줄 아는 사람도 아니고, 무엇보다 대미는 항상 술로 장식됐기 때문에 나는 매번 제 정신이 아니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첫 만남에서부터 세상 형편 돌아가는대로 ‘놀멘 놀멘’ 살자는 나의 3류 개똥철학에 전적으로 동의해줬다. 마치 니코스 카잔자키스가 희랍인 조르바를 이해했듯 말이다.
소설 ‘희랍인 조르바’는 어쩌면 그와 나 사이에 숙명처럼 놓인 존재의 근원이다. 나보다 매사에 치밀하고 한 아내와 행복하게 살아가는 그는 카잔자키스로, 나는 상대역 조르바로 역할 분담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또 만나 건 안 만나 건 상관없이 나는 계속 안소니 퀸처럼 못 생긴 형이고, 그는 멜 깁슨 뺨치게 잘 생긴 최고의 동생이다.
( 조영남/ 가수 )
첫댓글 어쨋거나 타고난 쟁이들입니다,,,, 고맙게 잘보고갑니다, 팔방 님!!,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