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가 전부가 될 때까지
옛날에 보물을 찾아 돌아다니는 어떤 부유한 상인이 있었다. 그는 보물들을 팔아 많은 이윤을 남기려고 보물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하루는 어떤 마을을 지나가다가 무엇이든지 다 알고 있는 아주 현명한 사람이 그 마을에 살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상인은 진귀한 보석을 아주 싼 값에 구할 수 있는 곳을 물어보리라고 생각하고 그 현자를 찾아갔다.
상인을 보자 현자는 상인이 묻기도 전에 말했다. “물론 잘 알고 말고. 히말라야 산으로 가게.” 그리고는 가야 할 산봉우리 이름까지 가르쳐 주었다. “그 산꼭대기에 올라가 그 위에서 사흘 동안 앉아 있게. 사흘이 지나면 전혀 보지 못했던 어떤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때 그대는 돌아오라.” 신이나서 가장 빨리 달리는 말을 구해 그 산꼭대기로 올라간 그는 단식하고 기도하면서 사흘 동안 보물이 어디에서 나타날 것인가 고대하고 있었다. 그는 오로지 보물에 대해서만 몽상하고 꿈꾸었다.
그의 눈에는 고요히 흘러가는 아름다운 시냇물과 계곡도 보이지 않았다. 아침에 지저귀는 새 소리도 들을 수 없었고, 아름다운 황혼도 볼 수 없었다. 사흘이 지났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화가 나서 달려 돌아와 따지는 상인에게 현자는 말했다. “그대는 결코 그것을 찾지 못할 것이다. 그 시냇가에 있는 돌은 모두 다이아몬드였다. 그러나 그대는 부에 대한 생각으로 꽉 차서 그것을 보지 못했다!”
진정한 회개
우리의 마음과 눈은 늘 무엇인가로 꽉 차 있다. 마치 보석들이 가득 널려 있는 시냇가에서 그 다이아몬드를 보지 못했던 상인처럼, 우리의 마음과 눈은 이 세상의 것들로 가득 차 있어 정말로 보아야 하는 것을 보지 못한다. 진정으로 보아야 하는 그것을 보기 위해 우선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눈에 묻은 세상의 때, 소유욕, 탐욕, 분노, 교만의 때를 다 씻어내야 한다. 즉 마음과 눈이 침례를 받는 진정한 회개를 경험해야 하는 것이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이 말씀은 침례 요한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다. 히브리어로 회개의 원뜻은, “테슈바흐”, 즉 “돌아옴”과 “응답”이다. 그리고 그 당시 쓰이던 아람어로 “회개”란, “돌아감”, “원천으로의 귀향”을 뜻하는 말이었다. 회개란 돌이키는 것이다. 하나님께 응답하고 원래 하나님과 하나 되었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엄마가 부르면 하던 모든 일을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처럼,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과거에 하던 죄된 일과 행동을 모두 버리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는 것이 회개이다. 회개는 외적으로 이것과 저것을 고치는 표면적인 변화가 아니다. 회개는 내적 혁명이다. 죄된 모든 것을 비우고 장사지내고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다.
진정한 죽음
죄가 없으셨지만, 그 당시의 결례를 따라 침례를 받으셨던 예수님의 행위에는 심오한 뜻이 담겨 있었다. 그분의 행동은 언제나 말이 없이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는 영적인 교훈이었다. 요한에게 침례 받기를 간청하시고 물 속에 잠기셨던 그날, 예수께서는 죽으셨다. 요단강의 물살을 타고... 예수께서는 영원한 생명의 강에 잠기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 죽음의 행동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그리고 물로부터 다시 일어나는 행동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자아의 “절대적인 없음”의 완전한 죽음을 통과해야만이 하나님과의 완전한 연합인 새로운 부활, 거듭남을 이룰 수 있다고... 우리가 새로운 다른 세상을 맛보기 원한다면, 우리의 이전 생애에 대하여 완전히 죽는 죽음을 경험해야 한다.
십자가에서 비취는 하나님의 사랑의 빛은 우리를 그분께로 이끈다. 우리가 마음을 비우고 모든 것을 철저히 포기하는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으로 돌아갈 때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으신다. 만일 이 이끄심을 저항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십자가 밑에서 주님의 고귀한 피를 흘리게 한 우리의 죄에 대하여 울며 회개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눈물은 새로운 삶의 장을 약속하는 아름다운 생의 전주곡일 뿐이다.
진정한 거듭남
회개하라고 하면, 사람들은 가지를 치고 전정해내기에 바쁘다. 자신의 이러 저러한 잘못된 행동들을 뉘우치고 사과하고 용서 받기에 급급하다. 그러나 진정한 회개와 거듭남이란 가지를 잘라내는 것이 아니다. 나무 전체가 변하는 것이다. 접붙여진 가지가 그 나무가 되듯이... 진정으로 회개하는 것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방식 전체에 대해 회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전의 방식 - 과거의 사고방식, 과거의 생활태도, 과거의 판단, 과거의 관념 - 을 다 버리고 전체가 새로운 사람으로 바뀌어 전혀 새로운 방식의 삶을 사는 것이다.
마음의 냇물이 맑게 되려면 먼저 마음의 샘이 정결하게 되어야 한다. 찌꺼기가 갈아앉았다간 그것을 휘젖는 어떤 무엇이 오면 다시 확 일어나 예전처럼 되는 그런 표면적인 변화가 아니라, 가라앉은 찌꺼기조차 찾아볼 수 없는 철저한 죽음을 거쳐야 진정한 거듭남이 이르러 올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옛 것을 변경하고 개량하는 것이 아니라, 옛 것이 완전히 죽고 새로운 본성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자신과 죄에 대하여는 죽고 전적으로 새로운 생명이 나오는 것, 그것이 거듭남이다.
거듭난 사람의 삶
애벌레가 나비처럼 전혀 다른 피조물이 되듯이,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난 내적인 혁명은 우리의 생애를 전혀 다른 것으로 변화시킨다. 죄악적인 생각은 사라지고 악한 행위와는 인연을 끊게 된다. 사랑과 겸손과 화평이 분노와 시기와 분쟁을 대신한다. 기쁨이 슬픔을 대신하고 우리의 얼굴은 깊은 하늘의 평화와 사랑의 빛을 반사한다. 어떻게 이런 변화가 이루어졌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마치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흔들리는 꽃에서 향기가 발하여지듯이,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하늘의 능력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새로운 피조물을 창조하여 그 사람의 삶을 향기롭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이 사람의 심령에 새 새명을 지어 준 것이다. 그것은 심령에 역사하시어 사상과 욕망을 그리스도의 뜻에 순종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의 결과인 것이다. 그때에 우리 마음과 생각에 하나님의 사랑의 법이 쓰여지게 되고,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 나이다”(시 40:8)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가 전부가 될 때까지
새롭게 태어나면,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마음에 잠기고, 우리의 눈동자는 예수님의 눈동자의 일부가 된다. 세상은 그대로이지만 우리의 눈이 바뀌었기 때문에 온 세상도 바뀌어 버린다. 처음에는 우리 가슴의 적은 부분이 그리스도로 되지만, 그 작은 부분은 곧 빨리 자라나 가슴 전체가 그리스도가 된다.
우리는 매일 우리 자신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부분을 깊이 살펴 보아야 한다. 그리고 모든 것을 바쳐 그 가슴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부분을 보호하고 자라나도록 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가슴에서 전부가 될 때까지... 영적인 요단강 물결에 매일 우리 자아를 장사지내고, 그 요단강 물로부터 매일 새롭게 부활하는 경험을 아주 철저히 할 때, 우리의 가슴과 마음은 온통 전부가 그리스도로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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