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3일
큰돌개혁장로교회 주일예배 ▣주일경독시간 인도: 안기철 집사 ▶시편찬송 시편89편(제네바) 다같이 ▶경 독 시편89편 고린도후서8장 다같이 ▶합심기도 다같이 ① 성령과 말씀의 예배 / 설교자와 회중을 위해 ② 성찬의 예배/ 은혜언약 안에서의 하나님의 영광 과 성도의 교제가 풍성하게 드러나는 예배를 위해 ③ 믿음과 순종의 예배/ 배움(교리)과 실천(삶)이 있는 예배를 위해 ▶목사;“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갈1:3) ▶회중;“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121:1-2) * 예배부름과 송영 시편118편(제네바) *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 다함께 * 하이델베르그요리문답 제25주일 * 십계명낭독 다함께 * 참회기도 다함께 * 시편찬송 시편5편(1-8)연합 헌 상 안기철 집사 목회기도 담임목사 말씀의 강설 요일2:24-29② 요한일서 강해(45) 주의만찬 신28:15-19 다함께 * 찬 송 찬송가188장 다함께 * 강복선언 설교자 * 교제의 인사 다함께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롬12:10) * 표는 기립해주시기 바랍니다. ☞ 헌금은 미리 준비해 미리 봉헌함에 넣어주세요. *주일 오후 모임: 성경과 교리”(69) 교리와 함께 읽는 야고보서 본문연구 |
제25주일 거룩한 성례에 관하여 제65문: 당신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그의 복에 참여하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그 믿음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답: 성령께서 거룩한 말씀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믿음을 넣어 주시며 거룩한 성례를 사용하시어 그 믿음을 강하게 하십니다. 제 66문: 성례란 무엇입니까? 답 : 성례란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거룩한 표시이며 날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세우셔서 그것을 집행하는 우리들로 하여금 복음의 약속한 것을 보다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하셨을 뿐 아니라 친히 자신의 약속을 보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음은 이것입니다. 즉,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십자가에서 영원한 속죄를 드림으로써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영생을 주시는 것입니다. 제67문: 그러면 말씀과 성례는 우리의 믿음을 구원의 유일한 근거로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수행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로 향하게 합니까? 답: 그렇습니다. 성령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치실 뿐 아니라 거룩한 성례를 통하여 우리의 구원이 전적으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께 달려있다고 확신시켜 줍니다. 제68문: 신약성경을 통해서 볼 때 그리스도께서는 몇 가지 성례를 제정하셨습니까? 답: 두 가지입니다. 즉, 세례와 성만찬입니다. |
▣성찬본문 / 신28:15-19
『 (신28:15-19)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를 것이니 (16)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17) 또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18)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소와 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19)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 』
▣설교본문/ 요일2:24-29②
『 (요일2:24-29)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 (25)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26) 너희를 미혹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28)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29) 너희가 그가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
사도요한은 영생이란 삼위하나님과의 생명적 사귐(koinwniva, 코이노니아)이라고 정의합니다.
▶바울이 구원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어지는 의로움(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신자의 법적신분이나 지위를 강조하는 반면에 요한은 생명자체이신 그리스도와 맺는 사귐(교제)을 강조합니다. 이를테면 요한은 그리스도를 ‘믿음’을 그리스도를 ‘영접함’(요1:12)이라는 독특한 개념과 교호적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영접하다’는 말과 ‘믿는다’라는 말은 동일한 구원을 설명하는 다른 표현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은 항상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동반하거나 수반하는 관계로 설명되어야 합니다. 적어도 그리스도를 믿는다하면서 그와의 사귐이 없는 신자를 요한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이것은 야고보서, 베드로서신서, 유다서등 공동서신서의 공통적인 관심사이다.)
☞ 사도요한은 이런 류의 거짓신자를 영지주의 기독교로 전향한 배도 자들의 세 가지 초상으로 묘사한 바 있습니다.
① 위선(요일1:6/ 악인의 꾀,시1:1상)
② 기만(요일1:8) 죄인의 길,시1:1중
③ 왜곡(요일1:10) 오만한 자의 자리,시1:1하)
기름부음, 삼위하나님과의 사귐의 모든 것
그렇다면 그리스도와의 생명적 사귐을 가능하게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요한은 그것을 주의‘기름부음’(cri'sma27절)이라고 말합니다.
‘기름부음’이라는 용어는 요한의 독특한 상징언어입니다. ☞기호언어로 쓰여진 글은 항상 명확한 한 가지 개념을 설명하는 반면에 시(詩)나 잠언(箴言)에 쓰인 상징언어(그림언어)들은 한 가지 대상에 대한 다층적이고 다면적인 의미를 풍성하게 담아냅니다. 그래서 요한의 신학적 상징주의는 어렵다는 느낌이 있는 반면에 진리에 관한 더 풍성하고 총체적인 의미를 담아내는 장점이 있습니다.
▶기름부음이란 1차적으로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성부로부터 보내신 ‘성령자신’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신자를 중생하게 하시는 성령의 내적인 사역이며 동시에 우리의 구원을 지속적으로 보존하고 강화시키는 성령의 외적사역을 포함합니다. 다시 말해 ‘기름부음’이란 제3위격이신 성령의 존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를 적용하시는 그 사역과 방식, 그 효과까지 망라하는 총체적인 의미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에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라는 의미와 통용되는 다양한 표현들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말씀’이 거한다’고 말하기도 하고(요일1:10;2:14), ‘진리가 거한다’고 표현되기도 하며(요1:8;2:4), ‘영원한 생명이 거한다’고 하며,(요일5:12-13), ‘하나님’(요일4:1-2), 혹은 ‘하나님의 사랑’(요2:5;4:12), ‘하나님의 영’(요일4:1-2), ‘진리의 영’(요일4:6)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요컨대‘기름부음’이란 그 인격적 대상이 성령이시고, 그 수단과 내용이 ‘말씀’이며, 그 결과가 하나님과의 교제의 총체적 국면(방식과 효과와 목적을 망라하는)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기름부음’이란 그 성격이 철저히 삼위일체적입니다.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사역이며, 진리의 말씀을 통한 성령의 사역이며, 그 내용과 효과로서의 하나님의 사랑을 내용으로 하는 성부하나님의 사역입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그러므로 ‘기름부음’을 요약한다면 ‘성령’에 의한 ‘말씀’의 사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여인과의 대화 속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특징을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요04: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성령과 진리’는 실상 교호적인 의미로 ‘성령 곧 진리’로 읽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성령과 진리의 말씀을 분리시키지 않으시고 의도적으로 묶으십니다. 주님은 성령을 ‘진리의 성령’(요15:26)이라고 부르셨고, 그분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실 것’(요16:13)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심’은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의 결과(요03:34)라고 하심으로 성령과 말씀의 긴밀한 관계를 입증하셨습니다.
또한 오실 성령은 이미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모든 말씀을 깨닫게 하고, 생각나게 하실 것입니다.(요14:26)
▶우리 개혁파 신앙고백서는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지상의 교회를 모으시고 양육하시며 다스리시고 보존하시는 일관된 방식에 관한 일치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1)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제54문: “거룩한 공회(교회)에 관하여”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
답 : 하나님의 아들께서 성령과 말씀을 통하여 태초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전 인류 가운데 영생을 얻도록 선택된 성도를 참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된 공동체로 모으시며 보호하시며 보전하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물론, 나도 이 공동체에 속해 있으며 언제까지나 그 일원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123문참조)
그러나 현대 복음주의 교회 안에서 남용되는 이 ‘기름부음’이라는 표현은 전혀 다른 의미의 이교적인 개념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성령을 삼위하나님으로서 위격적 위치로부터 분리시키고 마치 독립적인 대상으로 그의 사역을 수단적이고 물질화시키는 왜곡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지주의자들이 가르친 오류와 유사합니다. 마치 성령을 영적세계의 저편, 곧 그 순수한 영의 최상층부로부터 파생되거나 유출된 영적인 빛이나 에너지정도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오류를 분별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요한의 공동체를 위협하는 이 새로운 영지주의 기독교는 기독교적 신앙을 초월과 신비와 탁월성으로 장식하지만 역설적으로 물질중심적 가치와 그 체계로서의 세상을 추구한다는 점을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영지주의자들을 경계하면서도, 동시에 세속화의 위협을 함께 경계하는 이유입니다. 요한은 적그리스도의 출현과 그들의 헛된 가르침을 맹렬히 반박하면서도 동시에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속한 세상성에 대한 강력한 경고를 하는 이유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단과 사이비 운동을 평생 연구하신 허호익교수님이 이단과 사이비성을 구분하는 가장 쉬운 기준이 그 교회의 재정의 투명성의 정도라고 말한 것은 매우 현실적으로 통찰력이 있는 말씀입니다. 항상 사도적 복음과 정통교회의 신앙에서 일탈한 불건전한 신앙은 예외 없이 맘몬숭배(mammonism)귀결되는 ‘세상 사랑’(요일2:16)을 지향한다는 점입니다. 정말로 신비와 초월을 추구하는 모든 불건전한 사조들은 이상하게도 기독교신앙을 신비의 영역으로 비약시키면서도 동시에 기독교적 가치들을 세속화시키는 이중성을 보입니다. 항상 말씀드리지만 신비주의는 이성주의는 한배에서 태어난 쌍둥이와 같습니다. 왜냐하면 영성주의와 세속주의는 모두 ‘자아중심적’ 세계관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2)
한국교회의 부흥기를 선도했던 교단들이나 지도자들을 보십시오. 방언, 예언, 신유, 입신, 천국간증, 그리고 시한부 종말론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도약의 신앙과 아래로부터의 영성을 추구하던 일단의 신앙이 이상하게도 기복적이고 현세적인 삶에 천착한다는 사실은 역설적이지 않습니까? 그 영성신앙의 현대적 부활이라고 할 수 있는 신사도주의의 교리들은 항상 부와 성공을 복음과 신앙의 이름으로 맞바꾸는 이른바 ‘에서의 복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3) 가장 영적이며 종말론적 신앙인 것처럼 선동하면서도 이 모든 것은 가장 세속적인 가치들로 환원시킵니다. 돈과 명예와 권력이 하나님의 나라운동의 주된 가치가 됩니다. 이전의 은사주의와 기복신앙은 ‘영원한 것을 추구하라, 그러면 세상을 얻으리라!’고 선동했지만 요즘 신사도주의와 여타의 영성운동은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 세상을 소유하라!’고 선동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세상과 정욕을 추구하는 것이며, 모두 지나갈 것에 대한 욕망일 뿐입니다.(요일2:17) 이것이 사도 요한이 열렬하게 반대하고 정죄하는 적그리스도의 복음인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신자는 ‘그 말씀’ 곧 사도적 복음을 듣고 깨달아 믿음으로 내면화 된 자들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외부로부터 오는 진리의 빛이 초월적이고 영적인 지식을 가져다 준다고 주장하지만, 요한은 반대로 그들이 사도들로부터 받은 바 역사적 예수에 관한 증언들(요일1:1-2)을 듣고 알고 믿었다고 말합니다. 진리는 저 위에 있는 어떤 낯선 지식이 아니라, ‘처음부터 들었던’(요일2:24) 그 사도적 교회의 유산으로서 수납된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사도는 이 기름부음을 반복적이거나 연속적으로 받아야 하는 것처럼 묘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께서 ‘주께 받은 바(과거능동형)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현재능동)’(27)이라고 말합니다.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지상의 교회(신자)를 향하여 보내시어 내주하게 하신 성령의 존재는 결정적이고 단회적입니다. 물론 성령의 사역의 충만함은 지속적이고 반복되어야 하지만, 그것은 신자 안에 항구적으로 내주하시는 성령의 내주를 전제한 개념입니다.
어떻게 성장하는가
두 번째로, 요한이 가르치는 ‘기름부음’은 ‘지속적 성장에 관한 유일한 방식’으로 제시됩니다.
신자가 처음 듣고 믿은 그리스도의 ‘기름부음’ 곧 ‘생명의 복음’ 안에서 성장합니다. 이 성장은 곧 성령과 말씀 안에서 신자가 아들과 아버지와의 생명적 사귐을 통해 경험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 삼위하나님과의 사귐은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신비적이고 초월적인 어떤 방식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배웠습니다. 요한은 그런 특이하고 주관적인 사귐을 독려하지 않습니다.
자, 본문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요일2: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현재능동)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ejdivdaxen,과거능동)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이 말은 복음의 신비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즉 성령과 말씀으로 중생한 신자는 이미 그 안에 생명의 원리가 이미 내재되어 있습니다. 신자의 지성은 거듭난 새로운 지성의 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골3:10) 그리고 말씀에 따라 순종하려하는 의지의 경향성을 갖습니다. 이 생명의 총체적 경향성은 신자 안에서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중생자의 존재 안에 내재된 생명의 경향성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행하신 중생의 사역임으로 신비롭습니다.(요03:6-8) 반면에 이 새로운 생명을 자라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은 매우 상식적이고 일상적이며 인격적인 방식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바빙크는 이런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을 ‘재창조는 창조에 적응한다’라고 묘사한다)
예컨데, 생명이 태어날 때 우리는 이 생명의 신비는 해명되거나 규명되지 못합니다. 잉태의 수고와 해산의 고통을 경험한 어머니도 모르고, 의사도 모릅니다. 그러나 탯줄을 끊고 자라가는 아이의 성장과 성숙의 과정은 누구나 이해하고 있고, 예상하며 관여합니다. 어떻게 양육하고 훈련해야하는지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가르침과 양육이라는 보편적인 성장원리가 개입됩니다.
중생한 신자 안에 생명의 원리를 심기신 성령께서 이제 중생한 신자를 말씀이라는 객관적인 수단을 통해 지속적으로 자라가게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장이란 새로운 어떤 생명의 원리를 반복적으로 공급받는 것이 아니라 그 ‘기름부음’의 본질(성령세례)이 진리의 말씀을 통하여 인격과 삶안에서 지속적으로 갱신되고 지배력을 확장시켜가는 과정(성령충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성장을 새로운 비기나 도약의 차원으로 이해하는 신기루 같은 방황을 멈춰야합니다. 개혁파 신자는 영성이라는 모호하고 이교적인 용어보다 ‘경건’이라는 성경적인 용어를 사용해야 합니다.(딛2:12;약1:27;히12:28등)
▶날개있는 새라도 자동적으로 날게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속적인 날개짓을 배우고 바람을 타는 법도 체득해야합니다. 어찌 훈련없이 나는 새가 있단 말입니까? 그래서 사도는 말합니다.
▶(딤전4: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우리의 신앙고백서는 신자의 날개 짓이 무엇인지 가르쳐줍니다. 그리스도의 모든 구원의 은덕을 소유하는 유일하고도 통상적인 방편이 ‘말씀과 성례와 기도’라는 보편적 수단으로 주셨다고 말합니다.(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154-155문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천국비유를 하시면서 지상의 하나님의 백성의 운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어떻게 경청하는 가’에 달려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눅08:18)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흥미롭게 이 말씀이후에 예수의 모친과 형제들의 방문 사건이 이어지고 하나님의 가족에 대한 정의가 이어진다. (눅8:19-21)
▶오늘날 교회의 미래에 대하여 수많은 담론이 있고, 대안이 제시되지만, 역사적 그리스도의 교회는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떠나는 마지막 여행을 떠나면서 밀레도에서 에베소장로들에게 행한 마지막 당부 외에 다른 대안을 알지 못합니다. 사도는 여러 가지 당부와 권면의 말씀을 주며 이렇게 말합니다.
“(행20:32)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그는 교회의 운명을 사람들에게 맡기지 않습니다. 그의 수고와 사심 없는 헌신에 호소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아무 일 없이 안전할 것이라고 낙관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교회는 교회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선한 목자가 부재한 자리에 ‘사나운 이리’가 올 것이고,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자들’이 올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행20:29-30) 교회는 항상 위기와 시험, 거짓과 온갖 오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교회의 운명을 ‘주와 그의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기름부음안에서 그의 회중의 운명을 확신하는 사도 요한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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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스위스 신앙고백서 제14장 “...회개란 죄인이 복음말씀과 성령에 의하여 각성됨으로 신앙으로 말미암아 올바른 마음을 회복하는 것인데....” ▶17장 “교회란 말씀과 성령으로 구주이신 그리스도 안에 계신된 참 하나님을 참으로 인식하고, 옳게 예배하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냥 제공된 모든 은혜에 신앙으로 동참하는 사람들의 교제이다.” ▶도르트신경 제1조 7항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시고 죄에서 벗어나게 하셔서 말씀과 성령으로 그 분과 교통하도록 하시고 그들에게 참 믿음을 주시어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다.” ▶5조 견인 7항.하나님께서는 죄악으로 멸망에 빠져 있는 이 세상 중에서도 결코 썩지 않는 마음의 씨를 보존해 주신다. 다시 말해서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그들이 회개하여 새롭게 되고, 그들이 지은 죄로 인하여 마음속에 탄식하도록 함으로 중보자의 보혈로 죄사함을 얻고 나아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여 믿음으로 그 은혜에 감사하며 두려운 마음과 수고로써 그들 자신의 구원에 이르도록 부지런히 역사하신다.
▶웨민8장8절,(중보자) “....자기 성령으로 말미암아 효력 있게 설득하시어 그들이 믿고 순종하게 하시며, 말씀과 성령으로 그들의 마음을 다스리시며, 그들의 모든 원수들을 전능하신 권세와 지혜로, 자기의 기이하고 측량할 수 없는 경륜에 지극히 잘 상응하는 방식과 방도로 정복하신다”
▶웨민10장1절.(소명) 하나님께서는 생명으로 예정하신 모든 이들, 그리고 이들만을 자기가 정하시고 용납하신 때에 이들이 본성적으로 처해 있는 죄와 사망의 상태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와 구원으로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효력 있게 부르기를 기뻐하신다.
▶웨민13장1절(성화)“...그들 속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능력 덕분에 죄의 몸이 주관치 못하며..”
2) 현대성을 특징짓는 자유주의는 계몽주의와 초월적 신비주의의 변증법적 동반관계로 구성된다. 프린스톤 신학교의 B.B. 워필드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비주의자는 뜨겁고, 합리주의자는 차갑다. 합리주의자에게 따스한 온기를 불어넣으라. 그러면 기필코 신비주의자를 얻을 것이다. 신비주의자를 싸늘하게 식혀 보아라. 그러면 합리주의자가 나타날 것이다.... 이 양자는 모두 자아를 사고의 중심에 두고 있다!” ‘자기숭배’는 모든 ‘우성숭배’의 근저를 이룬다.
3)▶신사도주의의 주창자인 피터 와그너는 이 세상의 모든 영역을 하나님의 통치영역으로 정복하기 위한 변혁의 수단으로 두 기둥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그 하나는 ‘일터교회’요 다른 하나는 ‘돈’이다. 소위 그들이 주문처럼 선동하는 ‘거룩한 부의 이동’이나 ‘가난의 영 부수기’, ‘번영의 영’등은 맘모니즘의 노예가 되어 있는 현대인들의 신념을 지지하는 교리들로 환영받는데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 시키는 영적 과업의 수단이 다름 아닌 돈과 부라고 하는 이해할 수 없는 모순을 드러낸다. 이 부를 수단으로 종교, 가정, 교육, 정부, 미디어, 예술과 연예, 비즈니스등의 일곱 개 영역을 교회가 지배하고 정복해야 할 하나님의 나라 영역으로 간주한다. 이 영역들은 소위 그리스도인의 일터교회를 통해 전개되어야 할 비즈니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들은 이 일곱 개 영역에 대한 종말론적 미션을 수행함으로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촉진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말씀의 반추를 위한 생각들
▣ 시편으로 기도하기!(피터 버미글리)
시편91편
1. 오 전능하신 하나님,
당신에게 소망을 둔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위하여 당신의 신실하심의 그늘과 당신의 보호하심의 견고한 성채를 선택하였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원수들의 올무에서 무사히 벗어나며 각종 치명적인 파멸로부터 안전하게 거할 수 있습니다. 실로 마귀의 지체들이자 졸개들인 악한 자들이 그들에 대하여 어떤 악을 계획 할 때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도우심을 전혀 잃어버리지 않을 것인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마치 견고한 방패처럼 신속하게 그들을 보호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심각한 유혹들이 사방에서 창궐하는 것을 우리는 매일 체험합니다. 그리고 그런 유혹들 때문에 무수한 인생들이 영원한 저주에 빠져 들어갑니다. 그러나 마음이 굳건하여 “당신은 나의 하나님이시며, 나는 오직 당신께만 내 소원을 두었습니다.”라고 고백한 사람들을 악이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넘어지지만 그들은 견고하게 서게 될 것이며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천사들의 돌봄으로써 그들이 재난에서 벗어날 뿐만 아니라, 그들을 해칠 어떤 유독하고 두려워할 만한 야수들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탁드리니, 선하신 아버지여, 그런 큰 은택들을 우리에게서 거두어가지 마옵소서. 우리가 당신을 너무나 사랑하며 우리 자신을 완전히 당신께 맡기게 하셔서 당신 외에는 우리를 위한 그 어떤 피난처도 택하지 않게 해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