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강목 도 상 에서 최보(崔溥) 는 고구려왕들에 대한 평가를 이렇게 내렸군요!
당시 조선시대 정조대 문인들의 인식을 엿볼 수 있는 특이한 견해로 보입니다.
고구려 전세도(高句麗傳世之圖)
한 선제(漢宣帝 원제(元帝)의 잘못) 갑신년(B. C. 37)에 일어나서 당 고종(唐高宗) 무진(668)에 망하니
전세(傳世)는 28왕. 역년(歷年)은 7백 5년이다.
최씨는 이렇게 적었다.
시조는 영웅의 자질로서 금와(金蛙)의 여러 아들에게 시기를 받아 난을 피해 졸본(卒本)에 이르러
초목을 헤치고 나라를 세웠으니 예악(禮樂)을 마련할 겨를은 없었으나, 위엄과 덕이 날로 융성해져서
귀부(歸附)하는 자들이 많았다.
송양(松壤)에게 항복받고, 말갈(靺鞨)을 물리치고 행인(荇人)을 쳐서 빼앗고, 옥저(沃沮)를 멸하고서
한 지방에 웅거하여 삼한을 엿보았으니, 어찌 성공이 이다지도 쉬웠는가!
유리(琉璃)는 유복자(遺腹者)로서 타국에 있었으니, 그 위(位)를 이어받기 어려운 일이었으나,
다행이도 임금 자리를 이어받아, 선비(鮮卑)를 항복 받고 양맥(梁貊)을 멸하여 국토를 점점 넓혔다.
그러나 작은 허물을 분히 여겨 두 신하를 죽였고 태자가 용맹을 좋아한다 하여 죽였으니, 탄식할 일이다.
태무(太武)는 자질이 영명(英明)하고 뛰어났다.
괴유(怪由)를 미천한 데서 발탁하고 두지(豆智)에게 군국(軍國)의 대사를 맡겼으며,
구도(仇都)는 탐비(貪鄙)한 때문에 배척을 당하고 발소(勃素)는 지혜롭고 유능한 때문에 포상을 받았다.
개마(蓋馬)를 정벌하고 낙랑을 멸하였으며, 부여(扶餘)는 달아나서 스스로 피하고
구다(句茶)는 두려워서 항복하여 와서, 국토는 넓어지고 국세는 더욱 번창하였다.
애석한 일은 부인의 참소를 믿고 호동(好童)과 같은 훌륭한 아들이 있는데도,
스스로 해명하게 하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였으니,
그가 행한 일들을 따져 보면 진(晉) 헌공(獻公) 같은 유이다.
민중(閔中)은 상중(喪中)인데도, 잔치를 베풀고 사냥을 다녔으며, 향년도 길지 않다.
모본(慕本)은 포악하고 어질지 못해 간하는 신하를 죽였으니, 그가 명대로 살다 죽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태조(太祖)는 향국(享國)이 90여 년에 너무 늙고 부지런히 해야 할 때 게을렀으며 후사를 부탁함에
올바른 사람을 얻지 못하여 화가 충신과 사랑하는 자식에게까지 미쳤으니,
국토를 넓히고 나라를 강하게 한 공로는 있다고 하더라도, 무엇을 이를 만하겠는가ㆍ
차대(次大)는 왕의 사랑하는 동생으로서 왕위를 엿본 지 여러 해였고, 즉위하고도
오히려 뉘우치는 마음이 없이 주살(誅殺)을 자행하니, 천도는 되돌리기를 좋아한다는 말과 같이
그 화가 자신에게 미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신대(新大)는 난(難)을 피해 도망하여 나갔다가 국인(國人)의 마음이 그에게 쏠려 추대되었으니,
의당 먼저 답부(答夫)의 시역한 죄를 밝혀 대의를 펼 것인데,
그가 옹립한 공을 덕으로 여겨 도리어 총애하여 중임을 맡겼다.
고국천(故國川)은 영명한 자질로 경륜의 뜻을 분발하여 권간(權姦)을 주멸하고 숨은 인재를 찾아냈다.
파소(巴素)를 초야에서 초빙하여 국상(國相)을 삼아 국사를 위임하고 또 추천한 사람을 상주니,
진실로 쇠퇴한 세대에는 보기 힘든 성사(盛事)였다.
그러나 후사를 정하지 않아 죽은 몸이 식기도 전에, 우비(于妃)가 음란한 짓을 하여 궁궐을 탁란시켰다.
산상(山上)은 우비와 간통하여 나라를 얻었으니, 천륜을 어지럽힌 것은 말하기조차 더러운 일이다.
동천(東川)은 천성이 너그럽고 어질어 인군의 도량이 있었는데도, 어찌 충신의 간언을 듣지 않고
상국(上國)을 침범하여 한 번 승리하자 곧바로 교만해졌다가,
한 번 패함에 이르러서는 단신으로 도망가는 낭패를 당하여 거의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게 하였는가.
중천(中川)은 비록 칭찬할 만한 덕은 없으나, 총희(寵姬)의 무고(誣告)하는 말을 분별할 줄 알아
죽이기를 의심하지 않았으니, 어찌 그리 과단성이 있는가!
서천(西川)은 숙신(肅愼)을 막아내고 단로(檀盧)를 쳐서 빼앗으매, 여러 부족들이 벌벌 떨었으나
만년에는 시기하여 동기를 해쳤다.
봉상(烽上)은 포악함이 더욱 심해 숙부와 동생을 죽였고, 간언을 물리치고 제멋대로 방자하며
궁궐을 호화롭게 지어 백성들이 학정에 곤핍하게 되었으며, 마침내는 화에 미치게 되었다.
미천(美川)은 일찍이 초야에 도망하였으므로 간고를 골고루 겪어 은덕과 지혜가 있었을 것인데도,
칭찬할 만한 덕이 없고 한갓 상국을 침범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고국원(故國原)은 모용씨(慕容氏)의 변을 당하여 패배하여 달아났고 어머니와 부인은 포로되었으며
아버지의 시체도 발굴당하였고, 성곽과 궁실이 거의 다 분탕되었다.
늙은이와 어린이, 값진 보배가 약탈당해 남은 것이라곤 없었고 사직이 거의 보존되지 못할 정도로 되어,
무릎을 꿇고 칭신(稱臣)하며 볼모를 보내고 조공을 바치기에 이르렀으니,
이때는 와신상담(臥薪嘗膽)할 때이었는데도, 도리어 자기 원수를 잊고 순치(唇齒)를 이루고 있는 백제와
원한을 맺어 적군의 칼 끝에 피를 물들였으니 애석하다.
소수림(小獸林)은 태학을 세워 자제를 가르치니 자못 공업이 있는 듯하였으나, 이단과 사설에 현혹되어
동진(東晋)의 중을 맞아들여 불사(佛寺)를 창건하고 받들기를 더욱 삼가하니 동한(東韓)에서 부처에
아첨한 최초의 임금이다.
광개토(廣開土)는 영웅의 위의로 특출한 재주가 있어, 능히 싸우면 이기고 공격하면 취하였다.
장수(長壽)는 향년이 더욱 길었고 나라가 부강했다.
문자(文咨)ㆍ안장(安藏)ㆍ안원(安原)은 모두 중등(中等)의 자질로 범용(凡庸)한 군주이다.
양원(陽原)은 무략(武ㆍ)이 강하지 못하여 국운이 날로 쇠퇴하였다.
평원(平原)은 한재(旱災)를 만나매 공구하여 필요 없는 경비를 없애고 급하지 않은 업무는 줄이며
농상(農桑)을 권장하고 가난한 이들을 진휼하는 등 많은 일을 했다.
영양(ㆍ陽)은 즉위한 처음에는 안민(安民)에 뜻을 두었으나, 외천(畏天)과 사대의 의리를 몰라
말갈과 당(黨)이 되어 상국을 침략하자, 수(隋) 문제(文帝)가 장수에게 명하여 토벌하매
온 나라가 두려워하였으니, 마땅히 순리를 따르고 좌를 뉘우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하였을 것인데,
또 신라와 백제를 침략하여 전쟁을 좋아하고 화를 즐거워하여 다시 양제(煬帝)의 토죄하는 거사를
불러와 백만 대병이 요갈(遼碣)과 살수(薩水)를 건너 와서 분탕질 당할 위급이 조석(朝夕)을
기약할 수 없었다. 을지 문덕(乙支文德)의 응변과 양현감(楊玄感)의 반란이 없었더라면
국가의 존망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영류(榮留)는 혼암하여 적신(賊臣) 소문(蘇文)이
장차 〈도모〉하려는 마음을 가졌어도 일찌감치 분별할 줄 모르고 화를 더 다지기만 하였고
약한 나라로 강국을 제어 하려해도 거의 또 살피지 못하였으니, 화가 그치지 않았다.
보장(寶藏)은 소문(蘇文)이 세운 바니, 권세가 아래로 옮겨가고 정령이 자신으로부터 나오지 않아
나라는 모두 소문의 나라요 백성도 모두 소문의 백성으로, 정권을 오로지하고 제멋대로 방자하여
흉악한 짓을 못하는 것이 없었으며, 황제의 조칙을 어기고 왕인(王人)을 가두니 죄역이 꽉 차게 되었다.
당 태종(唐太宗)이 진노하여 육사(六師)를 거느리고 토벌하니, 친정(親征)한 전역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으나, 고구려의 형세는 위태롭게 되었다.
이는 비록 소문의 죄라고는 하지만 또한 보장이 임금답지 못한 때문이었다.
그 후 태종의 유감이 풀리지 않아 거의 해마다 장수를 보내어 토벌하고,
재차 거병하여 친정하려고 하였다.
이때는 바야흐로 군신이 협력하여 나라의 안존을 도모할 때이었는데도 임금은 위에서 혼암하고
신하는 백성들을 침학하여 사치가 한정이 없어 국사가 날로 그릇되어 가서 소문의 여러 아들들이
저희들끼리 다투어 중국에 호소하여 향도가 되기에 이르렀다.
비록 고종(高宗)은 중등 정도의 인물이었지만 1개 노장을 파견하여 일거에 썩은 나무 꺾듯 멸망시켜
고씨(高氏)의 7백 년 사직이 하루 아침에 폐허가 되었으니 슬픈 일이다.
이는 조선시대 최보의 견해이므로 당시 문인들의 인식을 간파하는데 참조만 하십시요!
다음에서 신라, 백제에 관한 것도 차례로 올릴 예정입니다.
그런 부분은 당시 조선이 사대를 표방하던 국가라 어쩔 수 없었던 부분 아닐까요?? 모화와 사대는 다른 의미인데, 모화는 어울리지 않고 사대는 어울립니다. 사대를 표방하던 국가에서 상국의 조상국가를 폄하하는 글은 당시로선 남기기 힘들었을 겁니다. 그건 뭐... "어쩔 수 없다" 쯤으로 넘어가도 될거 같습니다. 힘이 없어서 사대를 하는 조선이 싫은거야 뭐 개인 취향쯤으로 넘기더라도 무작정 모화니 사대니하며 비난하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고려와 조선이 처한 국제적인 환경이 다르니깐 고려와 조선의 대중국 외교방법이 다른 것이겠죠. 가령 고려가 존재했을 때는 송나라만이 킹왕짱이 아니었죠. 송나라 머리 위에 요나라(거란) 이후에는 금나라(여진)도 있었습니다. 송나라는 이들에게 눌려서 동양 전체에 강력한 영향력을 펼칠 수 없는 상황이었죠. 하지만 조선은 어떻습니까? 명나라의 강력한 힘에 이미 북원은 떡실신 당한 상황이었고 비록 요동까지 밖에 세력을 펼치지 못했다고는 하지만 당시 여진족들이 명나라에 견줄만하지도 못하고 한마디로 명나라만이 킹왕짱이 된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명이 킹왕짱으로 버티고 있었고 그 질서에 순응하며 사대하는것까지 욕하는게 아니죠 평화를 지키려는 어쩔수없는 그시대의 선택이니까요 하지만 조선은 실리적 사대가 아닌 정신적사대까지 한다는게 문제죠 단순히 명의 질서에 순응하는게 아닌 소중화자처하며 정신적 노예였다는게 문제 아닐까요
태종이 완전히 명에게 머리 숙인 것은 아닙니다. 가령 명나라가 일본 털려고 조선에 협조 구하려는 압력을 넣자 당시 세종의 섭정을 담당하고 있던 태종은 먼저 대마도 선수침으로써 이 압력을 뿌리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태종연간에 명과 조선의 동북방 경계가 어느정도 그어지기도 했습니다. 태종은 명에게서 최대한 얻어낼 것은 얻어내려고 노력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신단수님 과연 자주성이네를 외치면서 쓸데없는 전쟁 일으켜서 나라 초토화한 것이 과연 자랑스러운 자주성일까요? 조선 초기의 명과 조선의 외교는 오히려 칭찬할만합니다.
흠...글쎄요 무령왕님과 제가 역사를 판단하는 눈이 다르니....전 굴욕적인 평화보다 자주적인 전쟁이 났다고 보거든요 그저 평화를 지속하기 위해 자존심따윈 버리고 중국을 상국으로 모시면서 자신들 조상의 자주적인 노력과 생존을 위한 몸부림까지 순리에 역행한다거나 죄를 짓는다는 표현으로 써야하는 상황이 과연 제대로된 상황일까요 전 조선의 유가들처럼 사대주의와 모화사상에찌들어 노예근성으로 사는것 보단 죽더라도 자주적인 인간으로 당당하게 죽는게 났다고 보거든요
흠.. 어떠한 전쟁이든 결국 가장 괴로운 것은 민중들 입니다... 뭐 여력이 있거나 기회가 있다면 자주성을 지키려는 것도 나쁘지 않겠으나, 조선전기에 명이란 강대국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무작정 싸우고 보자는 것은 엄연히 자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조선전기의 외교는 꽤나 실리적이고 현실적이지 않았나요?
로마제국도 초기 도시국가 시절에는 이탈리아 중부의 강자 에트루리아 림하들에게 굽신굽신 거리며 많은 걸 얻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에트루리아 세력이 약해진 반면에 로마는 그 에트루리아로부터 많은 걸 얻어 강성해졌고, 결국은 로마가 에트루리아 세력을 집어 삼켜버리고 말죠. 현실을 외면한 채 뜨거운 가슴만으론 원했던 바를 얻을 수는 없다고 보는게 제 생각입니다.
예 맞습니다 저도 무작정 자주만을 외치며 전쟁을 하는게 옳다는게 아닙니다 조선건국초 명에 대한 사대또한 어쩔수 없는 측면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조선과 조선의 중추인 유가들은 그 기회를 잡을 노력조차 없었다는거죠 그저 현실에 대한 안주만이 있었을뿐 실리적인 사대를 하더라도 자주성을 지키려는 노력도 병행하며 발전을 모색해야 하건만 조선은 그저 현실질서에 안주하며 외부의 상황에 언제나 끌려다녔죠 명과 청에게 끌려다니며 그 질서에 편하게 편승하려고만 했죠 물론 자주성을 회복하려는 노력이 아주 없었던건 아니지만 그건 잠시의 해프닝으로 끝나고 현실에 다시 안주하죠
신단수님. 전근대시대의 조공책봉과 사대 개념은 근현대의 종속국 개념과는 다른 개념인데 둘을 동일시 해서 조선을 명의 종속국으로 생각하시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사대 개념은 근현대의 정치적 자주성과는 큰 관련성이 없는 종교, 정신상의 문제에 더 가깝습니다. 용어상의 정의는 굳이 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분명히 '조선전기' 이후라고 했습니다. 살아남기 위하여 전략적 사대를 하는 것을 누가 탓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살아남기 위한 사대가 아니라 남의 나라문화에 대한 무비판적 숭배에 따른 정신적 사대라면 분명히 문제가 되는거죠... 왜냐하면 다른 나라의 이념과 당위적 진리를 혼동하게 되니까요.
정신적 사대를 비슷한 의미로 모화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러나, 인조의 삼전도 굴욕에서도 보듯, 조선은 소중화사상을 가지고 조선이야 말로 이제 세상의 중심이라는 사상을 이미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힘이 딸려 청나라에 사대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전의 명나라는 아무도 대적할 수 없는 동아시아 최강국이자 질서를 짜놓고 그대로 실천하길 바라는 맨 꼭대기 위치였습니다. 고려와 조선의 대외관계는 일단 비교자체가 안됩니다. 모화를 표방했다면, 아방강역고나 세종의 한글창제등이 과연 출현할 수 있었을 까요?? 전 아니라고 봅니다. 중국것이 최고기 때문에 우리만의 한글 따위야 무슨 상관이었겠습니까???
저는 적어도 우리민족이 사대를 했을지 언정 중국의 수많은 민족이 사라졌듯... 모화는 절대로 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런 근거나 증거도 없지 않습니까?? 모화까지 했다면 이미 중국의 한개 주로 편입되었을지도 모르는 겁니다. 광해군의 쌍방외교도 없었을 테구요....
밀리님 조선 전기의 사대와 후기의 사대는 의미가 다릅니다. 성리학 전통에 대한 이해 차이로 인해서 양 시대의 사대는 그 의미가 다르다는 걸 인식하셨으면 합니다. 조선 전기에는 성리학 개념이 확실히 잡히지 않고 경학이 아닌 사장학 전통이 강해 일반이 생각하는 무의식적 사대의식은 그다지 강하지 않은 편이었습니다. 위의 분처럼 전략적 사대에 가깝죠. 하지만 사림에 의해 성리학 연구가 활발히 이뤄지고 사장학에서 경학중심으로 학문 접근 방식이 바뀌면서 결정적으로 임진왜란 후 중화에 의해 재조지은을 입으면서 후기의 사대주의는 무의식적인 사대로 전환되었습니다.
인조의 삼전도 굴욕...참으로 당시 대신이었던 김상현과 최명길 두분이 생각납니다. 특히 최명길은 병자호란시 굴욕적인 청의 강화조약문서를 찢고 통곡하는 반대파이면서 주전론자였던 김상현에 대해 조정에는 저와 같이 강화문서를 찢는분도 있어야 한다면서 선비가 절개를 지키며 목숨을 내어 놓는것은 쉬우나 종묘사직을 위해 굴욕을 견디는것이 더욱 어렵다고 말했다는 것이 기억납니다
근세 조선은 국가 규모로 보아 백제나 신라보다 큰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백제나 신라는 겉으로는 사대하는 척하면서도 대내적으로는 스스로를 천하의 중심으로 생각하며 실리를 챙긴 것에 비하면 조선은 소중화 의식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명의 속국처럼 여겼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윗 글에서 보듯 저런 개념들을 가지고 있었으니 용비어천가에서 이세민을 칭송하는 내용도 나오는 것이겠죠.
소중화사상은.... 명의 속국임을 자처하는게 아니라... 명나라란 하늘이 무너져 이젠 조선이야 말로 세계의 중심이다..라는 사상입니다. 그리고 이세민은 수백년간 성군으로 추앙받았었습니다. 용비어천가에서 이세민을 칭송하는거나, 신문에서 클린턴 대통령의 임기 8년을 황금시대로 표현하는거나... 잘한거에 대해서 잘했다고 하는건데 굳이 그걸 가지고 사대와 연관지을 필요가 있을까요?? 남이 잘한걸 인정한것 뿐인데???
ㅎㅎㅎ... 그렇죠. 혈육을 죽인것도 모자라 자살쑈~까지 하던 한심한 인간이 결국 "성군"으로 칭송받았습니다. 엄연한 사실입니다. 역사속 아이러니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작년이었나요? 한 국내 여성 역사학자 분께서 이세민이 왜 성군인지에 대한 인터뷰를 하셨었습니다. 아직도 그가 성군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존재한답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많이 모자란 이세민이란 사람이 성군으로 칭송받은건 엄연한 사실입니다.
첫댓글 정말 조선시대의 모화사상은 자신의 조상도 능히 욕할정도로 개념이 없다는걸 다시 뼈져리게 느끼게 되네요 난 이래서 조선이 싫어요
모화사상이라 불릴만한게 있었나요?? 모르겠군요. 정확히 지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가 보기엔 유학자의 시각으로 정확히 판단한거 같은데요.
고구려와 대치하는 중국왕조를 상국이라 칭하고 중국과 전쟁하는걸 순리에 역행하는것처럼 표현하는군요 중국의 질서와 의사에 따르지 않으면 죄를 짓는다는 표현이 아주 맘에 안드는군요
그런 부분은 당시 조선이 사대를 표방하던 국가라 어쩔 수 없었던 부분 아닐까요?? 모화와 사대는 다른 의미인데, 모화는 어울리지 않고 사대는 어울립니다. 사대를 표방하던 국가에서 상국의 조상국가를 폄하하는 글은 당시로선 남기기 힘들었을 겁니다. 그건 뭐... "어쩔 수 없다" 쯤으로 넘어가도 될거 같습니다. 힘이 없어서 사대를 하는 조선이 싫은거야 뭐 개인 취향쯤으로 넘기더라도 무작정 모화니 사대니하며 비난하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아 제가 표현을 잘못사용했군요 --;;;;
어쩔 수 없는 부분이야 십분 있겠지만, -_- 저도 그래서 조선이 더 싫어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전형적인 유학자의 시각입니다.
소수림은 동한(東韓)에서 부처에 아첨한 최초의 임금이다.
왜 고국양왕이 빠진거죠? 비록 업적은 적으나 광개토태왕을 훌륭히 키웠고, 소수림왕 이후 군사체제를 정비한 왕인데 말입니다.
minamjun님, 조선이 무조건 힘이 없어 사대를 했다는 님의 의견은 틀렸습니다. 적어도 조선 전기이후 조선은 정신적 사대에 깊숙히 빠져있었습니다. 이것이 고려의 사대와 조선의 사대가 다른 점입니다. 고려는 최소한 정신적 사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이건 순전히 개인적인 추측입니다만 조선은 건국초부터 신흥 명나라 라는 사대를 할만한 대국이 존재했었고, 고려는 망해가는 송나라에 의지할 수도 없고 마땅히 사대를 할만한 대국이 없는 환경차이 때문이 아닐런지요???
고려와 조선이 처한 국제적인 환경이 다르니깐 고려와 조선의 대중국 외교방법이 다른 것이겠죠. 가령 고려가 존재했을 때는 송나라만이 킹왕짱이 아니었죠. 송나라 머리 위에 요나라(거란) 이후에는 금나라(여진)도 있었습니다. 송나라는 이들에게 눌려서 동양 전체에 강력한 영향력을 펼칠 수 없는 상황이었죠. 하지만 조선은 어떻습니까? 명나라의 강력한 힘에 이미 북원은 떡실신 당한 상황이었고 비록 요동까지 밖에 세력을 펼치지 못했다고는 하지만 당시 여진족들이 명나라에 견줄만하지도 못하고 한마디로 명나라만이 킹왕짱이 된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명이 킹왕짱으로 버티고 있었고 그 질서에 순응하며 사대하는것까지 욕하는게 아니죠 평화를 지키려는 어쩔수없는 그시대의 선택이니까요 하지만 조선은 실리적 사대가 아닌 정신적사대까지 한다는게 문제죠 단순히 명의 질서에 순응하는게 아닌 소중화자처하며 정신적 노예였다는게 문제 아닐까요
그거야 조선이 중반기를 넘어서면서 나타난 일이고 조선 초기에는 명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고개를 숙이는 외교는 하지 않았습니다.
명나라가 아무리 중국 역사상 송나라 이래로 찌질한(?) 나라라지만, 영락제의 포스가 매우 컸던 것도 큰 작용을 한 듯 합니다.
제가 알기론 조선초 태종때부터 완전히 숙이고 들어갔다고 알고 있는데요 아닌가요?
태종이 완전히 명에게 머리 숙인 것은 아닙니다. 가령 명나라가 일본 털려고 조선에 협조 구하려는 압력을 넣자 당시 세종의 섭정을 담당하고 있던 태종은 먼저 대마도 선수침으로써 이 압력을 뿌리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태종연간에 명과 조선의 동북방 경계가 어느정도 그어지기도 했습니다. 태종은 명에게서 최대한 얻어낼 것은 얻어내려고 노력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신단수님 과연 자주성이네를 외치면서 쓸데없는 전쟁 일으켜서 나라 초토화한 것이 과연 자랑스러운 자주성일까요? 조선 초기의 명과 조선의 외교는 오히려 칭찬할만합니다.
흠...글쎄요 무령왕님과 제가 역사를 판단하는 눈이 다르니....전 굴욕적인 평화보다 자주적인 전쟁이 났다고 보거든요 그저 평화를 지속하기 위해 자존심따윈 버리고 중국을 상국으로 모시면서 자신들 조상의 자주적인 노력과 생존을 위한 몸부림까지 순리에 역행한다거나 죄를 짓는다는 표현으로 써야하는 상황이 과연 제대로된 상황일까요 전 조선의 유가들처럼 사대주의와 모화사상에찌들어 노예근성으로 사는것 보단 죽더라도 자주적인 인간으로 당당하게 죽는게 났다고 보거든요
흠.. 어떠한 전쟁이든 결국 가장 괴로운 것은 민중들 입니다... 뭐 여력이 있거나 기회가 있다면 자주성을 지키려는 것도 나쁘지 않겠으나, 조선전기에 명이란 강대국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무작정 싸우고 보자는 것은 엄연히 자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조선전기의 외교는 꽤나 실리적이고 현실적이지 않았나요?
로마제국도 초기 도시국가 시절에는 이탈리아 중부의 강자 에트루리아 림하들에게 굽신굽신 거리며 많은 걸 얻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에트루리아 세력이 약해진 반면에 로마는 그 에트루리아로부터 많은 걸 얻어 강성해졌고, 결국은 로마가 에트루리아 세력을 집어 삼켜버리고 말죠. 현실을 외면한 채 뜨거운 가슴만으론 원했던 바를 얻을 수는 없다고 보는게 제 생각입니다.
예 맞습니다 저도 무작정 자주만을 외치며 전쟁을 하는게 옳다는게 아닙니다 조선건국초 명에 대한 사대또한 어쩔수 없는 측면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조선과 조선의 중추인 유가들은 그 기회를 잡을 노력조차 없었다는거죠 그저 현실에 대한 안주만이 있었을뿐 실리적인 사대를 하더라도 자주성을 지키려는 노력도 병행하며 발전을 모색해야 하건만 조선은 그저 현실질서에 안주하며 외부의 상황에 언제나 끌려다녔죠 명과 청에게 끌려다니며 그 질서에 편하게 편승하려고만 했죠 물론 자주성을 회복하려는 노력이 아주 없었던건 아니지만 그건 잠시의 해프닝으로 끝나고 현실에 다시 안주하죠
조선의 문제는 중국중심의 질서에 매몰되 자주성과 발전에 대한 노력 자체가 매우 아주 매우 부족했던게 아닌가 합니다 고려도 현실에 순응하며 살았지만 최소한 고려는 자주성을 지키려는 노력을 했었고 또 발전하려는 꿈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죠
신단수님. 전근대시대의 조공책봉과 사대 개념은 근현대의 종속국 개념과는 다른 개념인데 둘을 동일시 해서 조선을 명의 종속국으로 생각하시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사대 개념은 근현대의 정치적 자주성과는 큰 관련성이 없는 종교, 정신상의 문제에 더 가깝습니다. 용어상의 정의는 굳이 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분명히 '조선전기' 이후라고 했습니다. 살아남기 위하여 전략적 사대를 하는 것을 누가 탓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살아남기 위한 사대가 아니라 남의 나라문화에 대한 무비판적 숭배에 따른 정신적 사대라면 분명히 문제가 되는거죠... 왜냐하면 다른 나라의 이념과 당위적 진리를 혼동하게 되니까요.
정신적 사대를 비슷한 의미로 모화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러나, 인조의 삼전도 굴욕에서도 보듯, 조선은 소중화사상을 가지고 조선이야 말로 이제 세상의 중심이라는 사상을 이미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힘이 딸려 청나라에 사대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전의 명나라는 아무도 대적할 수 없는 동아시아 최강국이자 질서를 짜놓고 그대로 실천하길 바라는 맨 꼭대기 위치였습니다. 고려와 조선의 대외관계는 일단 비교자체가 안됩니다. 모화를 표방했다면, 아방강역고나 세종의 한글창제등이 과연 출현할 수 있었을 까요?? 전 아니라고 봅니다. 중국것이 최고기 때문에 우리만의 한글 따위야 무슨 상관이었겠습니까???
저는 적어도 우리민족이 사대를 했을지 언정 중국의 수많은 민족이 사라졌듯... 모화는 절대로 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런 근거나 증거도 없지 않습니까?? 모화까지 했다면 이미 중국의 한개 주로 편입되었을지도 모르는 겁니다. 광해군의 쌍방외교도 없었을 테구요....
밀리님 조선 전기의 사대와 후기의 사대는 의미가 다릅니다. 성리학 전통에 대한 이해 차이로 인해서 양 시대의 사대는 그 의미가 다르다는 걸 인식하셨으면 합니다. 조선 전기에는 성리학 개념이 확실히 잡히지 않고 경학이 아닌 사장학 전통이 강해 일반이 생각하는 무의식적 사대의식은 그다지 강하지 않은 편이었습니다. 위의 분처럼 전략적 사대에 가깝죠. 하지만 사림에 의해 성리학 연구가 활발히 이뤄지고 사장학에서 경학중심으로 학문 접근 방식이 바뀌면서 결정적으로 임진왜란 후 중화에 의해 재조지은을 입으면서 후기의 사대주의는 무의식적인 사대로 전환되었습니다.
인조의 삼전도 굴욕...참으로 당시 대신이었던 김상현과 최명길 두분이 생각납니다. 특히 최명길은 병자호란시 굴욕적인 청의 강화조약문서를 찢고 통곡하는 반대파이면서 주전론자였던 김상현에 대해 조정에는 저와 같이 강화문서를 찢는분도 있어야 한다면서 선비가 절개를 지키며 목숨을 내어 놓는것은 쉬우나 종묘사직을 위해 굴욕을 견디는것이 더욱 어렵다고 말했다는 것이 기억납니다
자료 감사합니다. 가져가요.
근세 조선은 국가 규모로 보아 백제나 신라보다 큰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백제나 신라는 겉으로는 사대하는 척하면서도 대내적으로는 스스로를 천하의 중심으로 생각하며 실리를 챙긴 것에 비하면 조선은 소중화 의식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명의 속국처럼 여겼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윗 글에서 보듯 저런 개념들을 가지고 있었으니 용비어천가에서 이세민을 칭송하는 내용도 나오는 것이겠죠.
소중화사상은.... 명의 속국임을 자처하는게 아니라... 명나라란 하늘이 무너져 이젠 조선이야 말로 세계의 중심이다..라는 사상입니다. 그리고 이세민은 수백년간 성군으로 추앙받았었습니다. 용비어천가에서 이세민을 칭송하는거나, 신문에서 클린턴 대통령의 임기 8년을 황금시대로 표현하는거나... 잘한거에 대해서 잘했다고 하는건데 굳이 그걸 가지고 사대와 연관지을 필요가 있을까요?? 남이 잘한걸 인정한것 뿐인데???
이세민이 성군으로 추앙을 받아요? 형과 아우를 죽이고 아버지를 협박해서 왕위에 오른 그를 누가 추앙하는데요? 우리 민족에게 이세민은 고구려를 쳐들어 온 침략자일 뿐입니다. 중국인들이 그를 추앙하든 말든 고구려의 후예인 조선이 왜 그를 추앙해야 하나요?
게다가 그 시대의 당사자인 이세민 치하 당나라 사람들도 이세민의 잦은 침략 전쟁과 사치로 고통을 겪었지요. 이세민은 그 스스로가 만들어낸 '조작된 성군'에 불과합니다.
ㅎㅎㅎ... 그렇죠. 혈육을 죽인것도 모자라 자살쑈~까지 하던 한심한 인간이 결국 "성군"으로 칭송받았습니다. 엄연한 사실입니다. 역사속 아이러니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작년이었나요? 한 국내 여성 역사학자 분께서 이세민이 왜 성군인지에 대한 인터뷰를 하셨었습니다. 아직도 그가 성군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존재한답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많이 모자란 이세민이란 사람이 성군으로 칭송받은건 엄연한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