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사도행전7장54~8장3절
제목 : 스데반의 순교, 사울의 박해
스데반의 설교에 분개한 종교당국자들은 결국 그를 신성모독 죄로 몰아 처형합니다.
그의 죽음을 마땅히 여기며 승인했던 사울은 교회를 진멸하는 데 앞장섭니다.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유대교 지도자들은 스데반을 성 밖에 내치고 돌로 때려 죽였습니다.
이는 기독교 최초의 순교였으며,
기독교 박해의 시작을 알려주는 사건이었습니다.
1. 스데반의 마지막 증언과 죽음(54~8:1절))
1)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유대교 지도자들의 반응
(1) 마음에 찔림을 받았다.(54a절)
“[54a]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이러한 현상은 다른 유대인들이 복음을 들을 때 똑같이 발생하였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할까?
고민하고 그 해결방법을 사도들에게 물어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지만,
이들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2) 이를 갈았습니다.(54b절)
“[54b]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이를 간다는 말은 원한과 원망의 표현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반성하기보다는 오히려 원한을 가졌습니다.
이 표현은 유대인들이 극심한 분노를 나타낼 때 머리에 재를 뿌리거나 옷을 찢는 행위와 유사한 의미에서 사용되었습니다(욥16:9;시35:16;112:10).
*욥16:9 “그는 진노하사 나를 찢고 적대시 하시며 나를 향하여 이를 갈고 원수가 되어 날카로운 눈초리로 나를 보시고”
이는 그들이 스데반의 질타를 듣고 얼마나 격분했는지를 잘 설명해 줍니다.
*시35:16 “그들은 연회에서 망령되이 조롱하는 자 같이 나를 향하여 그들의 이를 갈도다”
*시112:10 “악인은 이를 보고 한탄하여 이를 갈면서 소멸되리니 악인들의 욕망은 사라지리로다”
(3) 귀를 막았습니다(57a절).
“[57a]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아무리 좋은 충고도 듣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들은 아예 들으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공회의 스데반에 대한 사형 집행은 불법이었습니다.
이들은 당시 로마법에 따른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감정적으로 해결하려 했습니다.
(4) 큰소리를 지르고 일심으로 달려들었습니다(57b절)
“[57b]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여기서 그들이 큰소리를 지른 것은 스데반의 말을 더 이상 듣지 않겠다는 의미와 함께 그들의 감정이 얼마나 고조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화가 나서 욕설을 퍼부으며 스데반에게 달려들었습니다.
(5) 성밖에 내치고 돌로쳤습다.(율법의 적용)(58절).
“[58]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고 저주한 자들에게 진밖에 내치고 돌로 치는 율법(레24:10-14)을 적용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고 저주한 자도 돌로 치지만 그 말을 들은 자도 함께 똑같은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말을 들은 자는 그 말을 한자에게 안수하여 그 죄를 전가시키고 죽였습니다. 여기에 사용되는 돌은 사람 머리만한 돌이 사용되었습니다.
유대인의 죄인 처형 방법은 먼저 죄인을 3.5m 정도 사형 집행 장소에서
아래로 떨어뜨린 후 그가 죽지 않았을 경우에는 크고 무거운 돌들을 그 죄인에게 던져 죽게 하였다고 전합니다(Mishna).
그리고 죄인에게 돌을 던질 때 증인들이 먼저 던진 후 주위의 사람들이 던졌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의 청중들은 자신들이 모두 스데반의 설교를 들었다는 의미에서는 증인들이었으나 공식적인 재판 절차를 거치지 않은 것은 불법이었습니다.
특히 그들은 로마법에 의해 사형을 집행할 권한이 제한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돌발적으로 행동했던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사형 집행 과정에서와 유사하게 그들의 종교적 편견과 독선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한편 증인들이 옷을 벗었다는 사실은 어떤 이유로 증인들이 사울 앞에 옷을 벗어 놓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누가는 스데반의 순교 현장에 사울이 주도적으로 동참했음을 보여주고자 그 표현을 사용한 것 같습니다.
이는 22:20에서 기록된 바울 자신의 회고(回顧)에 의해 입증될 수 있습니다.
행22:20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
2) 이들에 대한 스데반의 반응
신자의 처한 환경이 악할수록
하나님은 그의 충성된 종을 더욱 가까이하여주십니다.
노아 때에 세상은 극히 부패하여서 노아가 120년 동안 전도하였으나,
회개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노아와 더욱 함께 해 주셨습니다.
창6:8에보면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고 하였습니다.
스데반의 긴 설교를 들은 자들이 회개는 커녕 도리어 이를 갈며 발악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악한 상황에서 처한 스데반을 특별히 돌아보았습니다.
(1) 스데반은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시는 은혜를 받았습니다(55~56절)
“[55]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56]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신자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는 중에 핍박을 받으면,
그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더욱 은혜를 주시는 법입니다.
①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였습니다.
그가 일찍이 성령 충만의 은혜를 받았는데(6:5,8)
이 장면에 와서는 더욱 충만하였다는 뜻입니다.
성도가 땅에서 주님의 말씀을 지키다가 억울함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은 그 성도의 심령에 더 큰 위로와 힘을 주시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벵겔은 말하기를 “원수들의 분노가 증가됨에 따라 스데반의 속에 있는 영력이 더하여졌다”고 하였습니다.
② 스데반이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였습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56절)고 하였습니다.
이 계시는 스데반에게 큰 힘을 주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으니 그것은 천국을 본 것이며,
“인자(예수님)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으니
그것은 주님께서 인간성 그대로 영광스러운 천국에 계신 증거요,
따라서 인간인 스데반도 그곳에 들어갈 수 있음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 계시는 주님께서 박해를 받는 스데반을,
붙들어 주시며 힘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면서도,
땅에 있는 그의 교회를 도와주시거든,
하물며 그가 서 계심이야 말할 것이 무엇이랴!
벧전4:14에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인도에서 개척 선교사로 봉사한 알렉산더 더프는,
그의 어린 시절에 꿈 가운데서 자기가 어떤 언덕에 앉아 묵상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영광의 수레가 자기에게로 가까이 이르렀고,
“이리 오너라, 내가 네게 맡길 일이 있노라”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는 그 꿈에서 깨어난 후 하나님의 일을 사모하던 중에 부르심을 받아 인도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한평생 그 음성을 잊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나의 꿈도 사람에게 힘이 되어 평생토록 중대한 선교사역을 감당하게 하였거든, 하물며 성경에 기록된 권위 있는 말씀들을 가지고 있는 우리로서는,
더욱 큰 힘과 소망을 얻고도 남습니다.
(2) 스데반은 자기 영혼을 주님께 부탁하였습니다(59절)
“[59]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스데반은 이제 원수들의 돌에 맞아 운명할 시간을 맞게 되었습니다.
이때야 말로 위기의 절정인 것입니다.
이때에 그는 은혜를 다시 받아 자기의 영혼과 육신의 구분선을 밝히 보게 되어 부르짖어 기도하기를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바드시옵소서”(59절)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몸과 영혼은 오묘하게 결합해 있으므로,
몸과 영혼의 경계선을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자는 죄를 회개하며,
그리스도와 함께하기 때문에 영혼이 몸과 구분되어 있음을 암니다.
그러나 허물과 죄로 인하여 영적으로 죽은 자(엡2:1)는
자기 영혼의 존재조차도 모릅니다.
여기서 영혼을 부탁하는 스데반의 기도는 눅 23:34, 46의 십자가상에서의 예수님의 기도를 생각나게 합니다.
그래서 혹자는, 저자 누가가 스데반의 처형 사건을 두고 예수님의 위대한 최초의 순교 행위의 재현인 것처럼 나타내려고 의도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타당성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누가가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과 스데반의 순교를 동일시했을 가능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누가는 여기서 예수님의 생애와 죽음을 특징 지웠던 용서와 책임의 정신이 예수님의 초기 제자들에게도 그대로 나타났었음을 보여주고자 했으리라고는 짐작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마지막까지 의탁하는 신앙은 본 받아야 할 것입니다.
(3) 스데반은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60절)
“[60]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는 최후 순간에 원수들을 위해 기도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증거입니다.
그는 큰 소리로 기도하기를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그 최후의 한 마디는 참으로 중요 합니다.
그가 이 기도를 하되 특별히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말하였다고 하니,
그것은 그가 전력을 기울여 기도하였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자기 원수를 사랑하여 최후까지 그들을 아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대하여 굳센 신앙을 가진 동시에,
사람에게 대해서는 뜨거운 사랑을 가진 것입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믿음의 소유자는 다 이와 같습니다.
이와 같이 위대한 기도은 응답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울의 회개는 스데반의 기도의 열매입니다.
자신들의 죄를 뒤집어씌우고 돌로 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는 모습은
사울이라는 청년을 변화 시키는 충격의 말이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스데반의 기도가 아니었더라면 기독교회가 바울을 소유하지 못하였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스테반이 순교한 장소에 세워진 기념교회>
렌스키(Lenski)는 스데반이 겸손과 순종의 자세로 무릎을 꿇은 것이 아니라 공회원들에게 너무 심하게 돌을 맞았기 때문에 불가항력적으로 무릎을 끓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59절에서 스데반의 기도가 1차적으로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본절에서 그가 기도하기 위해서 무릎을 끓었다고 보기 힘드나 돌에 맞는 과정에서 그가 쓰러져 있던 중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간구하기 위해 그리고 곧 대면하게 될 하나님께 겸손한 자세를 취하기 위해 무릎을 끓었다고 보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한편 이 스데반의 순교는 예루살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대박해의 시발점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예루살렘교회는 팔레스틴 각지와 아시아 지역까지 흩어지게 되었습니다(8: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박해는 결과적으로 교회를 각 지역으로 흩어지게 하여 선교의 촉진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스데반의 순교의 피는 초기 기독교 확산의 밑거름이 되었던 것입니다.
2. 사울의 교회박해
사울은 스데반의 죽음을 율법에 비추어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이제 본격적으로 예수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는 자로 여기고 핍박에 앞장서서 일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모든 기독교인들이 흩어지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복음은 더욱 멀리 퍼져 나가게 되었습니다.
1) 사울은 스데반의 죽음에 대하여 마땅히 여겼습니다.(1a절)
“[1]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스데반의 죽음에 대한 사울의 책임성을 간접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스데반의 처형을 직접 지휘하지는 않았지만 그 순교의 현장에서 그것을 목격하고 마땅히 여김으로써 죄악에 동참했습니다.
'마땅히 여기더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쉰유도콘'은 ‘동의하다', '합의하다', '승인하다'의 뜻을 나타내므로 사울이 스데반의 죽음에 찬동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22:20).
그 날에 -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하던 날을 가리킵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기독교에 대한 핍박의 서곡임과 아울러 기독교 확장의 제1보(步)이기도 했습니다.
큰 핍박이 나서 - 3절의 언급으로 보아 로마의 박해라기보다는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로부터의 박해를 의미하는 듯합니다.
로마 당국이 직접 기독교 탄압을 시작한 것은,
사울의 회심 이후 기독교가 확장되어 로마에 전파되고,
황제 숭배에 대해 배타적일 수밖에 없는 기독교의 특성이,
로마 당국자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게 된 때문입니다.
2) 박해로 인하여 복음이 모든 땅으로 흩어지게 되었다.(1b절)
“[1b]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사도 외에는 다...흩어지니라. – 박해의 결과 사도를 제외한 모든 기독교인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도처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성도들이 각처로 흩어진 것은 핍박을 피해 도망하기 위함이었지만,
그 배후에는 복음의 세계적 확산을 도모하고자 한 하나님의 뜻이 작용하였습니다.
당시 초대 교회 사도들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1:8) 주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만 머물러 있자, 하나님은 외부로부터의 핍박이라는 방법을 동원하면서까지
세계 선교에의 전기(轉機)를 마련코자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는데 이는 예루살렘 교회가 박해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중심 공동체임을 확인하고 이방 지역에의 선교가 예루살렘 교회의 지속적이고 확장된 선교 활동임을 암시합니다.
3) 스데반을 장사하고 울더라 (2절)
“[2]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경건한'(율라베이스)이라는 형용사는
오순절 예루살렘에 모였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도 붙여졌으며(2:5),
다메섹의 아나니아에게도 붙여졌습니다(22:12).
여기서는 아마도 복음의 진리에 대해 깊은 호의를 보였던 신실한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듯하며, 예수를 장사지낸 아리마대 요셉과 같은 인물을 연상케 합니다(눅23:50).
위하여 크게 울더라 - 유대의 장례식에서는 큰소리로 애곡하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막5:38 주석 참조).
그러나 산헤드린의 재판을 받고 돌에 맞아 죽거나 불에 타 죽거나 참수형을 당하거나 혹은 교살당한 사람을 위해 공개적으로 통곡하는 것은 온당치 못한 행위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중하게 스데반의 장례를 치를 수 있었던 것은
'경건한 사람들'이 당시 영향력있는 유대 지도자 계층에 속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한 이러한 사실은 사실 스데반의 거룩한 죽음이 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움직일 만큼 감격적이었음을 암시합니다.
4) 사울이 교회를 잔멸하였습니다.(3절)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스데반의 처형 장면을 관망하던 사울이 이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데에 주동적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잔멸할'은 '모욕을 주다', '더럽히다', '파괴하다'의 뜻으로 신약성경에서는 여기서만 사용된 단어입니다.
시 80:13에서 멧돼지가 포도원을 짓밟아 황폐화시킨 것을 나타낸 70인역의 표현 중에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사울의 이러한 잔인한 행위는 자신의 입을 통해서 여러 차례 확인한 바입니다(22:4;26:10;고전 15:9;갈 1:13;빌 3:6;딤전 1:13).
*행22:4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행26:10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찬성 투표를 하였고”
*고전15:9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빌3: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딤전1:13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한편 여기서 '교회'(여클레시아)는 건물 개념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뜻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종교 당국자들은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마음이 찔렸습니다.
그러면 메시아를 죽인 죄를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할텐데, 이를 갈면서 더욱 증오와 적의를 키웠습니다.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예수를 보았다는 말을 신성모독으로 간주하여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사울은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히 여기고 승인하였으며, 교회를 진멸하는데 앞장셨습니다.
죽음의 증인요 참여자였던 그가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는 스데반의 기도로 복음의 증인이요 참여자로 변할 것입니다.
스데반이 죽었기에 사울이 산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승리의 부활로 바꾸셨던 하나님이 스데반의 죽음을 통해서 당신의 계획을 이루실 것을 보여줍니다.
박해 중에도 신앙을 지킬 수 있고, 순교 중에도 복음이 전진하고, 우리가 넘어져도 하나님 나라가 굳건하게 세워저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은 하늘이 열리고 인자 예수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는 특별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성령이 스데반을 위기에서 극적으로 건져주지는 않으셨지만, 그 성령 때문에 스데반은 말해야 할 것을 담대히 말할 수 있었고, 자시 생명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었고, 예수님처럼(눅24:34,36) 자신을 죽이는 자들의 용서를 위해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을 무릎 꿇리는 위세가 아닙니다.
내가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사랑으로 잔인한 세상을 향해 “복된 공격”을 가하면서 임하는 나라입니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
1. 말씀에 찔림을 받으면,
돌아서 회개하는 것이 두 번 죄를 범하지 않는 것입니다.
2. 죄는 더 큰 잘못과 죄악을 낳습니다.(약1:15)
*약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3. 율법은 사랑이 없으면 죽이는 것이다.(고후3:6)
*고후3:6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4. 순교는 성령의 사역입니다.
5. 신앙인의 앞에는 오직 하나님 뿐이어야 합니다.
6. 말과 기도는 씨가 되어 열매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7. 스테파노스 (면류관)는 값진 희생의 열매입니다.(빛,소금,향기,밀알)
8. 신앙의 사람이 항상 바라보아야 할 곳은 하나님 그 한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종교당국자들이 분노하는 상황에서, 스데반은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우편에 서신 예수‘를 봅니다(55~58절).
예수께서 하늘 법정 증인으로서 최초의 의로운 순교자 스데반을 변호해주시는 것 같습니다.
스데반은 땅의 법정에서는 정죄를 받아 순교하지만 하늘의 법정에서는 의의 변호를 받아 영화롭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승리의 부활로 바꾸셨던 하나님께서 스데반의 죽음도 헛되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의 죽음은 ’바울의 회심‘은 물론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이방으로 전파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나(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베드로의 설교에 분노하여 사도들을 없애려 했던(5:33) 당국자들이, 이번에는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이를 갈며‘극도의 적개심을 보입니다(54절).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쫓겨난 자들이 보이는 분노의 표시이기도 합니다(눅13:28).
진실을 직면한다는 것은 때로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거나 분노케 합니다.
내 과오를 드러내는 조언이나 말씀 앞에 나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2) 스데반의 마지막 기도는 예수님이 십자가 위해서 드린 기도(눅23:34,46)를 생각나게 합니다(59,60절).
억울하고 부당한 죽음이지만, 그는 자기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용서‘할 뿐만 아니라 ’변호‘ 까지 합니다.
그가 전한 복음은 바로 그들을 위한 것이기에 그들이 회개하고 주께 돌아오기를 끝까지 소망한 것입니다.
이 기도는 훗날 박해자 사울의 회심에 깊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입니다(22:20절).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을 만큼 밉고 억울합니까?
내가 이렇게 부활의 소망을 품고 살 수 있게 하신 용서의 은혜를 기억합시다.
3) 예루살렘에 대대적인 박해가 일어나고, 많은 성도들이 온 땅으로 흩어집니다(8:1b~3절).
본격적인 선교가 극심한 박해와 더불어 시작된 것은 놀라운 역설입니다.
하나님이 이방 교회를 위해 예루살렘 교회를 흩으신 것입니다(9:31).
하지만 그 흩어짐은 패배가 아니라 또 하나의 열매를 위한 ’밀알‘(요12:24)입니다.
내가 있는 곳이 불평이 아닌 소명의 자리가 되게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