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 비가시적인 삶의 파토스
김재희
1.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게 하는 것
철학과 회화가 마주칠 수 있는 근본적인 문제 중 하나는 '어떻게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 봐야 하는데 보지 못하는 것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그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가? 도대체 그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철학사를 이 문제들에 대한 해답의 역사로 재구성해 본다 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어쩌면 너무나 자명하게 철학이 받아들이고 있는 이 전제는, 회화에게는 그 자신의 생존을 걸고 자신의 존재 방식을 정당화하며 증명해야 하는 본질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회화는 색과 형태의 가시적인 요소들을 가지고 작업하는 대표적인 시각 예술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회화는 보이는 것이 전부인 예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회화 속에서 보이는 것 이상을 본다고 생각한다. 그림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보는 것일까? 그 울긋불긋한 색과 다양한 형태들에서 정작 우리가 보는 것은 무엇인가? 화가는 단지 우리 눈에 보이는,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그 색과 그 형태를 보여주고자 한 것일까? 일상적인 사물들에서도 볼 수 있는 색과 형태를, 굳이 ‘그림’의 방식으로 보여주는 것, 또는 그림이라는 형식으로 본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림을 보면서, 보여지는 그것을, 우리가 뭔가 다른 것으로 보거나 또는 다른 방식으로 보고 있다면, 그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미셸 앙리는 회화가 제기하는 이러한 미학적이고 존재론적인 문제에 주목한 철학자다. 그는 가시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그 가시성을 통해 비가시적인 것에 도달하는 회화의 기묘한 독특성을 알아보았다. 그는 특히 칸딘스키의 추상회화에서 자신의 현상학적 통찰을 발견한다. 아니 칸딘스키가 아니었다면 회화와 예술의 본질에 관한 앙리의 이해는 완성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앙리와 칸딘스키는 기본적으로 이원적인 존재 이해에서 만난다. 앙리는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의 이원성을, 칸딘스키는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의 이원성을 존재의 양상으로 여긴다. 그리고 둘 다 존재의 근원적인 실재성은 각각 후자에서 찾는다. 앙리는 칸딘스키가 회화와 예술에서 본질적인 것으로 제시한 ‘정신적인 것’을, 자신의 ‘비가시적인 것’으로 해석한다. 칸딘스키의 ‘정신적인 것’과 앙리의 ‘비가시적인 것’은 궁극적으로 ‘파토스pathos적인 삶의 실재’에서 만난다. 앙리와 칸딘스키는 회화 및 예술을 가시적인 것의 비가시화 작업으로, 따라서 비가시적인 것의 가시화 역량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공명한다.
철학에서든 회화에서든 ‘추상(抽象)’은 기본적으로 뺄셈이다. 추상이라는 것은 구체적이고 복잡한 실체의 부분들을 하나 둘 빼면서 그 실체가 투명해지도록, 그래서 하늘 높이 올라갈 수 있도록 단순한 관념만을 남기는 것이다. 그러나 앙리가 주목하는 칸딘스키의 추상은 바닥에 깔려 있어 은폐되어 있던 것이 드러날 수 있도록 두껍게 덮여 있던 것들을 걷어내면서 오히려 아래로 깊숙이 내려가게 하며 그 바닥에 놓여있던 풍요로운 삶을 느끼게 한다. 칸딘스키의 추상회화는 일반적인 근대 회화의 계열에도 속하지 않고, 넓은 의미에서 같은 추상 계열이라고 볼 수 있는 비구상회화의 계열에도 속하지 않는다. 앙리는 칸딘스키의 작품과 특히 그의 이론적인 텍스트들에서 회화와 예술의 본질, 나아가 삶과 존재의 근원적인 차원이 탁월하게 표현되고 있음을 본다. 칸딘스키가 제시한 추상의 원리가 모든 회화와 예술 활동의 가능 조건뿐만 아니라 삶과 우주의 존재론적 구조를 해명하는 열쇠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비가시적인 것으로서의 삶이 본질적인 실재임을 주장하는 앙리의 현상학은 칸딘스키의 작품과 이론에서 훌륭한 범례를 발견한다. 앙리는 칸딘스키를 통해 자신의 철학을 구체적으로 예화하고, 칸딘스키는 앙리를 통해서 새롭게 부활한다.
ㅡ 하이데거에서 랑시에르까지, 현대철학자들의 미술론
'미술은 철학의 눈이다' 중에서...
📚
박항률 화백님께서 권해주신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