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안녕하시죠? 오랜만에 감상문을 들고 왔습니다.
이번에 소개할 책은 모두 3권입니다. 하지만 주제는 컬러, 죄다 색깔에 관한 이야기랍니다.
그럼 컬러 3종 책 세트 시작합니다.
도서명: 컬러 인문학, 컬러의 말, 컬러의 힘 - 총 3권
저자: 개빈 에번스, 카시아 세인트 클레어, 캐런 할러 - 총 3명
* 이 책들은 모두 아이프리 도서관에 있습니다. 0번 전체자료 코너에서 한꺼번에 검색해 다운받는 것을 추천합니다.
* 소개글 서평
나는 예전부터 ‘색(color)’에 대해 천착해 왔다. 내가 시각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눈이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에게 색이란 개념은 꽤나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 병아리의 노랑, 딸기의 빨강, 하늘의 파랑 등 다른 사물에 빗대어 이해를 하더라도 그것이 완벽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시각장애인 중에는 덮어놓고 색깔을 받아들이는 것에 손을 놓는 사례도 있다. 확실히 나 같은 경우는, 시각장애인한테는 조금 드문, 유별난 사례라고 생각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습관이라고 해도 좋고, 취미라고 해도 좋다. 좌우간 색깔에 대한 관심은 꾸준히 이어왔고, 다른 무언가를 통해 색을 느끼려는 시도 또한 현재 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옷이나 장신구 등을 통해 남들처럼 색을 활용하는 것도 멈추지 않고 있다. 이번에 소개할 3권의 책, 개빈 에번스의 ‘컬러 인문학’과 카시아 세인트 클레어의 ‘컬러의 말’, 캐런 할러의 ‘컬러의 힘’ 또한 색깔을 느끼려는 내 노력의 일환이었다.
컬러 인문학 and 컬러의 말, 색으로 보는 인류 역사와 색의 이름으로 듣는 언어
“‘British Ladies\' Home Journal’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실었다. ‘일반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지는 통념에 따르면 남자아이에게는 분홍이, 여자아이에게는 파랑이 좋다. 분홍은 좀 더 분명하고 강해 보이는 색으로 남자아이에게 더 잘 어울리지만 파랑은 좀 더 섬세하고 얌전해 보여 여자아이에게 더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개빈 에번스의 ‘컬러 인문학’과 세인트 클레어의 ‘컬러의 말’은 둘 다 색깔을 테마로 문화, 역사, 사회적 이미지나 신분, 종교적, 정치적 의미, 그 색상의 어원까지 다채로운 인류사를 풀어놓는다. 2권의 책 중 ‘컬러 인문학’은 흔히 무지개색으로 통하는 빨강과 주황, 노란색, 초록과 파란색, 남색과 보라색의 기본 컬러에 더해 분홍, 갈색, 흰색과 검정, 금색의 총 11가지 컬러를 다루고 있다.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위에 따로 발췌한 분홍색에 관한 대목이었다. 어릴 적 색을 두 가지로 분류하는 경험은 다들 해봤을 것이다. 이를테면 분홍색을 비롯한 빨간색, 주황색, 노랑과 보라는 여자 색깔, 파란색, 초록색, 하늘색, 연두색과 갈색은 남자 색깔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이런 일화는 시각장애인인 내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물론 색에는 성별이 없다. 덧붙이자면 나는 어릴 때 미술학원 계열의 유치원을 다닌 전적도 있었다. 아마 그런 환경 아래서 내 컬러 천착이 싹을 틔웠는지도 모르겠다. 추가로 적자면, 내가 처음 가진 꿈은 화가였고, 크레파스로 서툴기가 짝이 없게 그린 그림 하나가 상을 받은 기록도 있다. 아마 유치원 자체 대회였나 그랬던 것 같다. 글쎄, 시각장애인이 시각적 영역인 그림을 용케 그려내서 수상을 한 건지, 아니면 노력하는 애를 격려하는 차원에서 준 건지는 모르겠다. 머리가 굵어진 후에야 이런 생각도 하게 됐지, 꼬꼬마 시절에는 마냥 기뻤고 상을 받은 게 그저 좋았다.
“그림 설명: 노란색 머리칼을 가진 사람이 주황 단추가 달린 하늘색 셔츠를 입고 있다. 상체 부분까지만 그려져 있어서 바지는 보이지 않는다. 머리가 긴 편이고 크레파스로 워낙 꾹꾹 눌러 그린 탓에 여자인지 남자인지 성별도 분간이 가지 않는다. 그런 사람의 양쪽에는 분홍과 자주색, 빨간색 꽃이 피어 있다.”
당시 입상한 그림은 집이 이사를 하면서 어디론가 실종되었다. 하지만 내 기억 속에는 이렇게 선연하게 남아 있다. 그때 나는 아무래도 꽃집 주인을 동경했던 모양이다. 좌우간 당시 물감이나 크레파스를 고르고 있을 때면 옆에서 아이들이 질문하는 소리가 들렸었다. 이건 여자 색이에요, 남자 색이에요? 혹은 불만스러워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이건 여자 색깔이잖아요! 이거 남자 색 아니에요? 그럴 때마다 ‘다사랑미술학원’의 선생님은 단호하게 ‘여자 색, 남자 색이란 건 없으며, 자기가 좋아하는 색깔이면 된 거’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계속 컬러에 성별을 부여해서 나누기를 멈추지 않았다. 흔히 남자아이들은 파랑, 여자아이들은 분홍으로 대변되는 컬러 구도가 대표적이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색깔 성별 부여 현상은 사회적인 영향도 어느 정도 받은 것 같다. 귀 한쪽에 리본을 단 곰인형의 리본은 핑크, 공주 바비 인형의 드레스 또한 분홍. 로봇 장난감은 파랑, 자동차 장난감 역시 블루 계열. 이런 걸 꾸준히 접하다 보니 아이들의 뇌리에서 컬러가 성별을 지니게 되는 것도 당연하지 않을까? 그런데 불과 80여 년 전만 해도 분홍은 남자아이들의 컬러였다고 하니, 꽤나 충격적인 진실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인도를 비롯한 다른 여러 국가들에서는 좀 더 대담한 분홍이 소년들뿐만 아니라 성인 남성에게도 강한 남성적 함의를 담은 컬러였단다. 물론 색의 성별(?)이나 문화 및 사회적 풍토를 떠나서, 나는 분홍 계열의 컬러를 좋아한다. 순전히 내 취향으로 인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 컬러에 얽힌 인문핚적 배경을 알게 되니 무척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덧붙여, 예의 그 ‘쇼킹 핑크 향수 및 잡지 이야기’는 내게 ‘광고의 힘’을 실감하게 해준 일화였다. 이처럼 ‘컬러 인문학’은 평소 무심하게 듣고 지나쳤던 ‘블랙 프라이데이’의 어원 등과 같은 색상 인문학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높은 메리트가 있다. 단지 아쉬운 건 금색이 있으면서, 왜 은색은 다루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이쯤에서 이제 다른 작품, 카시아 세인트 클레어의 ‘컬러의 말’로 넘어가도록 하겠다.
“누드는 백인의 피부색을 일컬었으나, 이제는 피부색의 다양함을 인지하며 그 의미가 변했다. 누드는 색상이 아닌 색의 범위가 되었다.”
색상은 그림에만 있지 않다. 옷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디자인 관련 종사자만 몰두하는 개념도 아니다. 당근을 닮은 주황색 가습기, 하얀색에 가까운 회색 노트북, 책상에 깔아둔 진녹색의 고무판, 하얀색 달력까지 눈길 닿는 곳곳마다 컬러가 가득하다. 물론 나는 그 색깔들을 직접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듣고 느끼며 시각화할 수는 있다. 내가 묘사한 출판사에 나의 업무 데스크 풍경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 모든 컬러에는 이름이 있다. 내가 추상적으로 묘사할 수밖에 없었던 짙은 녹색도 이름이 있을 것이요, 주황색이라고 대강 얼버무린 당근 가습기의 컬러도 따로 명칭이 있을 것이다. 심지어 하얗다고 인식하는 달력조차 그저 화이트가 아닌 ‘무슨무슨 화이트’라는 이름이 있을 것이다. 또한 그 컬러의 이름에는 함의가 있고, 역사가 있고, 인류의 발자취가 녹아 있다. 이 책 ‘컬러의 말’에서는 75가지 색상의 숨은 비밀을 파헤쳐 간랶하게 기술한다. 저자 카시아 세인트 클레어의 말마따나 매력적이거나 중요하거나 불쾌한 색의 역사가 펼쳐지는 것이다. 하지만 전혀 낯선 색깔은 아니다. 익히 아는 하양, 노랑, 빨강, 파랑, 초록, 검정 등의 계열이다. 이 책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빨강 계열에 속하는 ‘코치닐’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 컬러는 ‘연지벌레’라는 아주 작은 생물에게서 비롯되는데, 고작 1파운드의 코치닐(빨간색)을 만드는 데는 말린 연지벌레 7만 마리가 필요하다고 한다. 가성비가 한참 떨어지는 것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그 ‘빨강’이 벌레로 만들어진다는 대목이 충격이었다. 더구나 연지벌레 코치닐은 오늘날에도 유통이 된다는 모양이다. 화장품이라든가 식음료 등에 말이다! 헉, 예전에 아빠가 사 준 립밤, 그것도 빨강인데. 설마, 그거 코치닐인가? 연지벌레 추출물 빨강이냐고! 조금 알고 싶지 않은 진실을 마주한 기분이다. 또 흥미로웠던 일화는 위에 따로 발췌한 ‘누드’에 관한 변천이다. 한때 소위 ‘살색’으로 불렸던 그 컬러는 우리나라에서는 ‘살구색이라고 개명되었다. 그리고 외국에서는 특정 톤을 띠는 컬러의 범위가 되었다. 사람들의 인식이 변하면서 컬러의 명칭, 개념도 변한다. 색은 인류와 함께 발전하는 그 무언가일지도 모르겠다.
“사진 설명: 랏데 베이지 털조끼. 이름처럼 바탕색은 베이지인데, 랏데 커피를 섞은 듯한 컬러. 그냥 머릿속으로 바닐라 랏데를 떠올리면 그게 딱 랏데 베이지.”
이 ‘컬러의 말’은 기본적으로 색상의 명칭과 더불어 각종 잡학을 다루기 때문에 내용의 일부가 앞서 소개한 ‘컬러 인문학’과 겹치는 게 있는 편이다. 그러니 만약 나처럼 둘 다 독서할 경우, 겹치는 대목은 그냥 넘어가도 좋다. 하지만 두 책을 비교하며 독서하는 것도 재미일 것 같다. 더구나 세이블, 오피먼트, 베이컨밀러 핑크, 셸레 그린 등 컬러의 다양한 이름을 알 수 있어 좋았다. 갈색도 다 같은 갈색이 아니란 말씀이다. 어쩌면 먼 미래에, 과학기술이 발전하며 사람들의 시력이 더 좋아지고 세분화가 되면, 색채 스펙트럼 또한 그 지평이 확장될 수도 있겠다. 가령 X광선의 빛깔을 띤 녹색을 발견하고 ‘X그린’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도 있지 않을까? 만약 랏데가 개발되지 못했다면, 위에서 소개한 컬러는 어떤 이름을 받게 되었을까?
컬러의 힘, 색이 가진 무궁무진한 잠재력과 일상의 풍요로움.
“우리는 색을 사랑하지만 때로는 색을 부담스럽게 느낀다. 색을 잘못 고를까봐 걱정한다. 크고 작은 유행의 끝없는 물결 속에서 우리의 직관은 흐려진다. 색은 중립적일 수가 없다. 색은 언제나 감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고 행동을 유발한다.”
위에서 소개한 ‘컬러 인문학’과 ‘컬러의 말’이 색깔의 인문학적인 면모를 담고 있다면, 캐런 할러의 ‘컬러의 힘’은 심리학 부분에 좀 더 비중을 둔 책이다. 색의 역사나 색상의 이해에 관한 내용이 없는 건 아니지만, 색채 심리학 쪽에 더 무게를 싣고 있다는 뜻이다. 요컨대 이론보다 실전이랄까? 한마디로 말해 컬러를 사용하는 응용편인 셈이다. 내가 위에서 따로 발췌한 문장이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를 시사한다. 예전 대학 시절의 일이다. 한창 정독도서관에서 실습을 뛰고 있던 때, 거기서 어린이 이용자들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독서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다. 아이들의 공작 활동을 돕는 일반인 실습생들 사이에서 나도 한자리 차지하고 앉아서 아이들에게 이런저런 말을 붙이며 어디서 꿔다놓은 인간형 짐짝이 되지 않으려고 꿀꿀하게 노력했더랬다. 그리고 한때의 아이들이 빠져나가고 쉬는 시간에, 어쩌다 보니 우연하게 컬러에 관한 주제가 나왔었다. 독후 활동이 미술 활동 위주여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때 다 같이 사탕을 까먹고 있었는데, 친구 하나가 자두맛 사탕을 먹을 거냐고 물으며 이 사탕 색이 참 예쁘다고 말했었다. 무슨 색인지 물으니 빨간색이란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물었더랬다. 자두가 빨간색이냐고. 답은 아니라고 했다. 붉은 계열은 맞는데, 완전한 빨강은 아니란다. 그래서 나는 다시 질문했다. 그럼 이 사탕의 빨강은 뭐냐고 말이다. 장미의 빨강인지, 도장 찍을 때 쓰는 인주의 빨강인지, 아니면 사과의 빨강인지..... 그러나 대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그냥 빨강일 뿐이라는 답만 들었다. 그때 색을 인식할 수 있는 정안인이라고 해서 컬러에 신경을 쓰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체감했다. 조금 놀라웠고, 약간 의외였으며, 미안한 얘기지만, 툭 까놓고 말하자면, 배가 불렀다고 삐딱하게 생각했었다. 나는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개념인데, 뭘 어떻게 해도 추상적으로밖에 볼 수 없는 건데, 왜 너희는 그걸 눈에 담으면서 무심하게 지나치는지..... 뭐랄까, 조금 속상했더랬다. 시각적인 정보가 때때로 부담이 된다는 것을 그 당시에 나는 잘 인식하지 못했다. 물론 지금은 어느 정도 이해는 한다. TV 켜놓고서, 라디오도 틀고, 스마트폰으로 유튜브 플레이시킨 것과 비슷한 느낌이 아닐까? 소리들이 잡탕이 돼서 귀가 피곤하니까 그냥 무감하게 넘기게 되는 것처럼 일반인들도 컬러를 그렇게 여기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러나 색깔은 우리 주변에 널려 있고, 자신을 드러내는 데 효과적이며, 때로 심리까지 자극한다. 옷장만 열어도 컬러는 넘치고, 당장 침대만 봐도 컬러가 깔려 있다. 덮고 자는 이불을 보라. 참고로 내 이불은 폭신한 연분홍이다. 하지만 컬러가 넘치는 이 시대에 색을 취사선택하는 건 어려운 일일 수도 있겠다. 한 가지 색채 계열을 과하게 쓰면 그 색상이 지닌 부정적인 속성이 나타나고, 결국에는 바람직하지 못한 영향을 준다. 눈이 보이는 정안인들이 색깔을 어려워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물론 컬러의 개념이 애매모호한 시각장애인은 더욱 난해하다. 그렇다고 검정색만 주구장천 입거나 색깔에서 손을 때는 건 손해가 나는 장사가 아닐까? 무엇보다 컬러는 나를 나타내는 지표고, 타인에게 나를 내보이는 소재니까. 혼자 살 게 아니면 시각장애인도 컬러의 세계에 과감하게 손을 담글 필요가 있다. 그런 이들에게 도움이 될 이 책, ‘컬러의 힘’은 색상을 일상에 활용하는 가이드를 제시한다. 주방을 꾸미는 데 좋을 색깔, 욕실을 장식할 때 피하면 좋을 색상 등등. 더불어 자신만의 컬러가 무엇인지도 짐작할 수 있게 도와준다. 이름하여 ‘토널 배색 팔레트’ 되시겠다. 자신의 취향과 성격, 외모나 그날의 모임 취지, 사람들에게서 이끌어내고 싶은 감정 상태를 고려해 컬러를 고르는 요령을 조언하는 거다. 4장부터 그 내용이 나오는데, 11개 문항의 테스트로 ‘봄-장난스러움’, ‘여름-고요’, ‘가을-대지’, ‘겨울-미니멀리즘’의 4가지 중 자신에게 해당하는 컬러 유형을 찾아낼 수 있다. 덧붙이자면 가장 많이 나온 점수에 해당하는 유형이 자기 본모습, 그 다음으로 많이 나온 점수 유형이 자신이 이상형이라고 여기면서 바라는 사회적인 성격이라고 한다. 역시 사람은 단색이 아닌, 여러 색깔의 스펙트럼을 가진 생명체라는 거. 어쨌든 각각의 유형마다 지닌 ‘토널 배색 팔레트’를 활용하면 자신에게 어울리는 컬러를 얼추 선별할 수 있다. 하지만 저자 캐런 할러가 책에서도 언급했듯 이 팔레트는 그저 새로운 기준점일 뿐이다. 너무 단정짓고 신봉하는 건 삼가야 할 것이다. 그저 혈액형이나 별자리 테스트처럼 하나의 큰 기준점을 세우는 지표로 활용하면 좋겠다. 어쨌든 최소한 자기에게 안 맞는 컬러가 어떤 계열인지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단지 전자도서 제작 과정에서 ‘토널 배색 팔레트’의 그림 설명을 얼버무리고 간 점이 아쉬움이다. 이건 시각장애인 기준에서 좀 더 자세하고 디테일하게 설명을 해줘야 하는 부분인데 말이다. 그냥 ‘여름-고요 유형 토널 배색 팔레트’라고 퉁치면 곤란한 대목이란 말이다. 최소한 그 팔레트에 속하는 대표적인 색상군 10가지 정도는 나열해줘야 이해가 될 텐데 그런 게 없어서 상당히 애석했다. 나중에 여름 장미와 라일락, 가을 낙엽의 색상 등 저자 캐런 할러가 설명문으로 예시 컬러 몇 가지를 덧붙여 놓긴 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런 컬러 관련 도서를 제작할 때 조금 더 시각장애인 입장에서 그림 설명을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여하튼 컬러가 너무 어렵거나 옷을 살 때 검정이나 흰색이 무난하다는 인식 하에 무채색 계열을 주로 고르는 사람들에게 이 책 ‘컬러의 힘’이 요긴할 것이다.
“터키 화가 에스레프 아르마간은 시각장애인이다. 아르마간은 6세 때부터 그림을 그렸다. 그는 주름이 잡혀 있는 종이에 작품을 그리는데 한 손에는 붓을 들고 다른 손은 캔버스의 주름을 따라가면서 전체적인 구도를 잡는다. 그는 한 번도 경치를 보지 못했지만 산천, 호수, 집, 사람과 나비 등을 정확히 묘사했으며 색상, 음영과 투시비례가 전문가 수준에 달했다.”
최근에 읽은 ‘BF매거진 1호’란 간행물에서 읽은 지문을 발췌한 내용이다. 시각장애인이 그림을 그리다니, 그것도 보이지 않음에도 사물을 묘사하는 실력이 뛰어나다니, 참으로 신기하지 않은가? 하버드대학 신경학자 파스카울 레오네 교수는 그 주인공인 아르마간을 보스톤으로 초청해 그가 어떻게 보이지도 않는 사물을 그대로 그리는지 대뇌 스캔을 통해 알아봤단다. 그 결과 사람은 실명을 할지라도 대뇌의 시각기능을 맡는 구역은 기능을 중단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혀냈다. 아르마간이 그림을 그리고 있을 당시 그의 대뇌 시각구역은 일반인이 눈을 사용할 때와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다. 레오네 교수는 아르마간이 빛을 감수할 수는 없지만 관찰 능력은 정안인들과 다를 바 없으며, 그는 대뇌 속에 반영된 물체를 완전히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공헌했다. 이걸 간단히 말하면 ‘시각화 기능’이라고 하겠다. 이 사례를 교정을 보는 와중에 접하고서, 나는 컬러 천착의 희망을 본 듯한 기분이었다. 실제 사례가 있다는 건 나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시각장애인이 사물 묘사를 하고 풍경을 그리는데, 컬러라고 인지하지 못할 리 없고, 이용하지 못할 리 없다. 무엇보다 색은 소통의 한 방법이다. 내가 비록 컬러를 보지 못하지만, 나를 보는 사람들은 나를 통해 컬러를 볼 테고, 그로써 나라는 사람의 일면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을 거다. 나를 보는 건 내가 아니라 그들이니까. 내가 나를 볼 때는 거울을 통해서일 뿐인데, 시각장애인은, 그중 전맹인 경우라면 거울이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타인의 시선은 존재하니까 우리도 컬러로 우리 자신을 표현하고 연출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취지에서 이따금 머리가 아프고 이해가 어려워도, 나는 컬러에 대한 탐구를 지속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이어갈 것이다. 내 삶을 더 풍요롭고 다채롭게 만들기 위한 방편으로 나는 앞으로도 ‘컬러’를 쓸 생각이다. 참고로 소설 쓸 때도 엄청 도움이 된다. 부디 이 글을 읽은 시각장애인 중에도 컬러를 놓지 않고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는 누군가가 생기기를 바라본다. ‘삶’이라는 팔레트에 어떤 컬러를 넣고 섞으며 칠할지 즐겁게 고민할 수 있기를.